국가의 철폐 : 아나키즘적 · 마르크스주의적 관점 (9장. 러시아 혁명) - 웨인 프라이스

2부. 국가와 혁명, 그리고 반혁명


9장. 러시아 혁명

국가의 본성과 국가를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하여 논의하는 것은 추상적인 이론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국가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대중혁명의 경험들을 통하여 혁명적 인민들이 정치 이론가들에게 가르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 초기 아나키스트들은 1848년의 혁명과 파리 코뮌의 시기를 경험했다. 이후의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아나키스트들은 1905년과 1917년의 러시아 혁명에 참여했고, 1차 세계대전 이후의 유럽 혁명에 참여했다. 이 혁명들은 혁명운동가들이 국가를 어떻게 이해했는지에 따라 성공하기도, 실패하기도 했다.(그리고 대부분 실패했다.) 혁명가들은 혁명에 대하여 학습한다. 우리는 혁명이 어떻게 일어났고, 어떻게 성공했고, 어떻게 실패했고, 어떻게 배반당했는지 알아야 한다.

우리의 비혁명적 일상 속에서, 혁명이 어떻게 발발했고, 혁명의 시기에 어떻게 평범한 인민들이 봉기하여 압제자를 몰아냈고, 어떻게 수백만 인민들이 국가 없는 사회를 만들어 삶을 자유롭게 변혁하고자 하였는가를 보는 것은 영감을 주는 일이다. 특히, 아나키스트들이 참여한 두 혁명들에 대하여 학습하는 것은 매우 가치있는 일이 될 것이다. 이 혁명들은 패배하였을 지라도, 대중의 투쟁을 통해 자유의 창조적 형태들을 만들어내었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혁명을 한 국가를 새로운 국가로 대체하는 과정으로 표현한다. 아나키스트들은 혁명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노동자들이 옛 지배자들을 몰아내고 스스로 사회를 조직하는 “해방의 축제”라고 바라본다.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은 반혁명일 뿐이다.

2부에서 나는 세계를 뒤흔든 두 개의 혁명을 검토하여 다른 봉기들에 예시를 제공하고자 한다. 하나는 1917년부터 1921년까지의 러시아 혁명이고, 다른 하나는 1936년부터 1939년까지의 스페인 혁명이다. 나는 또한 마찬가지로 세계를 뒤흔든 비혁명적 투쟁이었던 30년대 초반 독일에서의 반나치 투쟁에 대해서도 다루려 한다.

러시아 혁명은 1917년 2월(정확하게는 3월이었지만, 당시 러시아는 유럽 일반에 비하여 2주 가량 늦은 구식 달력을 이용하고 있었다.)에 발발했다.(1905년에도 러시아에서는 혁명이 발발했었다는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이 혁명은 패배하였지만, 1917년 혁명의 기반을 닦았다.) 러시아 혁명은 국제 여성의 날에 페트로그라드 시에서 시위에 나선 여성 노동계급으로부터 시작하였다. 사회주의 정당들은 여성들이 더 나은 시기를 기다릴 것을 촉구했다. 하지만 여성노동자들은 굶주렸고, 그들의 가족도 굶주렸으며, 그들은 분노하고 있었다. 이들의 시위는 반란이 되어 페트로그라드의 남성 노동자들과 군인, 인근 지역의 농민들에게 확산되었다.

당시 러시아 제국은 전제군주(차르)가 통치하는 후진적이고 봉건적인 농업국가에 국제 자본주의가 침투하여 가장 근대적인 산업 형태와 대공장을 이식한 상태였다. 이 이상하고 비효율적인 혼합 체제는 3년간의 세계 1차 대전에 의하여 혹사 상태에 빠졌다. 오만하고 봉건적 정신상태를 가진 장교들이 교육받지 못한 농민 출신의 병사들을 지휘하던 러시아군은 고도로 산업화된 경제로 뒷받침되는 잘 조직된 독일군을 마주해야 했다. 1914년 이래, 러시아군과 러시아 경제는 어마어마한 압력 아래에 있었고, 사실상 붕괴되어가고 있었다. 러시아 제국은 군대에게 식량도, 의복도, 의약도, 수송도 제공할 수 없었지만, 영불 자본가들에게 복무하기 위한 전쟁에 지친 군대를 계속 투입하고 있었다. 결국 러시아군은 반란을 일으켰다. 수천의 병사들이 탈영했고, 공세에 투입되는 것을 거부했고, 폭동을 일으켰으며, 독일 병사들과 친밀함을 유지했으며, 프래깅을 일으켰다. 군대의 폭동과 노동자의 반란이 차르를 몰아냈다.

도시에서의 반란은 파업과 공장점거의 끝없는 물결로 드러났다. 노동자들은 공장이나 사무실의 모두를 포함한 총회를 열었고, 생산의 지속을 보장할 수 있는 선출직 위원회를 두었다. 그와 동시에 노동자들은 지역 평의회에 파견하기 위한 대의원들을 선출하기도 했다.

소비에트는 “평의회”를 러시아어로 쓴 것이다. 노동자들은 1905년의 혁명을 시도할 당시 소비에트를 건설하였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최초에 소비에트/평의회는 단지 파업위원회인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소비에트는 정부의 기능들을 접수하기 시작했다. 경찰들은 거리와 경찰서에서 쫓겨났다. 치안 유지 기능은 무장한 노동자들의 분대의 손에 들어왔다. 전화 교환소나 철도 운수나 인쇄 공장의 노동자들은 소비에트의 집행위원회의 허가가 없이는 “공식적인”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소비에트는 대의기구였지만, 그 어떠한 의회보다 훨씬 더 민주적이었다. 소비에트는 노동현장에 뿌리내리고 있었다. 소비에트의 대의원들은 선거로 소환될 수 있었다. 대의원들은 원칙적으로 노동계급이었고, 부패할 여지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 민주적 느슨함이 소비에트의 약점을 구성했다. 소비에트는 목소리를 낼 기회가 없던 인민들의 회의였고, 토론과 연설의 장소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인민들은 집행위원회를 구성하고 있던 소규모 지식인 그룹(당 관료)들의 의견에 따르게 될 위험을 가지고 있었다. 집행위원회는 특정 집단에 유리하게 구성될 위험을 크게 가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소비에트가 자본주의 사회의 의회보다 더 노동계급의 의견을 반영하였다 하더라도, 여전히 대의기구였기에 노동자들의 의견이 대의원단 구성에, 그리고 대의원단이 선출하는 집행위원회의 구성에 반영되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소비에트의 한계는 사업장, 혹은 지역인민의 총회가 대의원단을 선출하고 감시하는 구조를 만드는 것으로 상당부분 극복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어떤 정당도 이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혁명은 확산되었다. 군인들과 수병들은 총회를 열고, 위원회를 선출하고, 노동자들의 소비에트에 가맹한 자신들의 소비에트에 대의원들을 파견하였다.(노동자들은 군인들을 자기 편에 두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가을이 되기 전까지, 러시아 전역에는 900여 개의 소비에트가 세워졌다. 이들은 서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첫 번째 ‘범러시아 노동자 · 군인 · 농민 소비에트’는 1917년 6월 페트로그라드에서 열렸고, 다음으로는 10월에 열렸다.

노동자들의 공장위원회는 최초에 자본가들과 경영진이 생산을 사보타주 하고 있지 않은지 감시하는 역할로부터 출발했다.(실제로, “노동자 자주 통제”의 러시아어는 단지 “감시”라는 의미만을 가진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노동자들은 공장을 장악하고 스스로 운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는 러시아어로 “노동자 자주경영”이라 불렸다. 노동자들은 공장위원회를 통하여 농민들이나 다른 산업부문에 접촉하여 원자재를 확보했다. 이들은 생산이 지속될 수 있도록 했다. 이들은 공장에 충분한 규율이 유지되도록 담보할 기구를 두었다. 이들은 임금 계획을 수립했다. 이들은 소비에트 중앙이나 다른 공장과 공조하여 생산물이 분배되도록 하였다. 이들은 그들의 공장이 “국유화”되었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국유화”는, 국가가 공장을 운영한다는 것이 아니라, 공장이 자본가들로부터 수용되어 사회적으로 소유되고, 노동자들 스스로가 경영하는 것으로 변하였음을 의미한다.

노동자들이 생산을 운영하는 것이 효율적이었는지에 관해서는 1917년 이래로 지속적으로 논의되어 왔다. 혁명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러시아 경제는 붕괴하기 시작했고, 오히려 이것이 혁명의 원인이었다. 물론, 노동자들에게는 경험이 부족했고, 실수를 하곤 했다. 생산의 유지는 생산노동자들이 화이트 칼라 노동자가, 전문가가 계속 노동하게 할 수 있었는지에 따라 다른 결과를 내었다. 하지만 자본가들과 친자본가적 중간관리자들은 노동자 조직의 최소한의 단초만 보인다해도 생산을 사보타주하곤 했다. 바로 이것이 노동자 자주경영을 필요하게 한 이유였지만, 마찬가지로 노동자 자주경영을 어렵게 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장애들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이 경영하는 공장들은 생산을 분명히 증대시킨 것으로 보인다.

더 중요한 것은,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러시아가 농업기반적이고 미개발된 국가였던 이상, 대다수의 군인들은 농민이었다. 농민들은 농민위원회를 조직하고, 마을 회의에서 회합을 가지고, 토지를 분할했다. 이들은 지주의 집에 쳐들어가 그들의 가구와 가축을 나누었다. 그리고 그들의 집을 불태웠던 젠트리의 집을 불태우기도 했다. 농촌에서의 혁명은 느리게 확산되었지만, 한번 불붙는 순간 매우 섬세하게 진행되어 봉건적 지주제를 끝장냈다.

러시아 전역에 협동조합들이 건설되었다. 도시에서는 소비자 협동조합이 등장했고, 교외에서는 소비자/판매자 협동조합이 건설되어 농민들이 중개상 없이 물건을 사고팔 수 있도록 하였다. 당시 볼셰비키들은 협동조합이 중간계급과 부농에 복무한다고 비판하였다. 하지만 레닌은, 그의 말년이 되어서야 협동조합이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데에 있어 중요한 요소였지만 볼셰비키들이 이를 간과하였다고 말한다.

거대한 러시아 제국의 이음매가 무너지고 있었다. “민족의 감옥”이라 불릴 정도로 민족국가들과 소수민족들(폴란드, 우크라이나, 조지아, 유대인, 카자크족 등이 러시아 인구의 과반을 차지했다.)을 포괄하고 있던 러시아 제국에서, 이들이 독립이나 자치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들 민족들은 지역 정부를 수립하고, 러시아어가 아닌 자기들의 민족언어로 행정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2월 혁명을 조직하고, 소비에트나 대중 총회, 공장위원회, 평의회를 만든 것은 정당들이 아니다. 가장 혁명적인 정당조차도 인민들을 따라가지 못했고, 즉각적인 파업투쟁이나 대중투쟁을 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정당들이 대중에 뒤처진 것은 그들의 잘못만은 아니다. 1905년 이래 12년간 제정당들은 특정한 형태의 혁명을 부르짖었지만, 인민 대다수는 이에 응답하지 않고 비혁명적으로 남았다. 당시에 사회주의 정당들은 노동대중보다 앞서 있었고, 소규모 그룹들을 조직하면서 그들의 사상을 (레닌의 말을 빌리자면) “끈질기게 설명”했다. 그리고 마침내 인민들이 혁명으로 터져나왔을 때, 정당들은 여전히 수년간 계속되어 온 “끈질기게 설명”하는 단계에 남아있었다. 정당들이 당시의 급격하고 급진적으로 변화한 상황에 맞추어 자기 방향성을 재정비하는 데에 시간이 걸렸던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하지만 정당들이 인민들에 뒤처지게 된 원인 중, 그들의 중앙집중성과 보수주의가 있었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이를테면, 1905년 소비에트가 처음으로 건설되었을 때, 볼셰비키 당은 소비에트의 해산을 촉구했다. 그들이 소비에트를 통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레닌주의적인 볼셰비키나, 더 온건한 멘셰비키나 이론과 강령상 사회주의 혁명을 반대했다. 이들은 사회가 “단계적”으로 발전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러시아는 여전히 봉건적이었기에,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 러시아는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의 단계를 거쳐야 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이들은 노동자의 공장 점유나 생산의 사회화 같은 자본주의의 제약을 넘어선 대중행동을 다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2월 혁명은 “자발적” 혁명이라 불리곤 한다. 이러한 명명은 혁명이 정당에 의하여 계획되지 않는 한, 그 혁명은 의식적이지 않고 비합리적이며 자연스러운 과정일 뿐이라는 엘리트주의적 의식에서 비롯한다. 하지만 현실은, 인민들은 스스로가 하는 일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으며, 그 과업을 잘 이행했다는 것이다. 사회주의 정당의 평당원이거나 그 정당들의 선전을 수년간 들어온 평범한 사람들이 지도력을 보여주었다. 이들은 서로로부터 용기를 얻어가며, 위로부터의 변화를 믿지 않고, 수년간 들어온 사상에 기대어 희망하고 행동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이들은 수세기간 이어져온 전제군주제를 전복하고, 인민민주주의적 조직을 전국적으로 건설하였으며, 공장을 확보하기 시작했고, 토지를 위한 농민 전쟁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이 새로운 사회로 귀결지어지지는 못했다. 2월 혁명 이후, 차르는 사라졌지만 자본가와 지주들은 남아있었다. 군대와 전쟁도 남아있었다. 차르의 위치에는 임시정부라는 이름의 새로운 국가가 들어섰다. 이 정부는 친자본주의적이고 근왕주의적인 정치인들로 구성되어, 오래된 관료주의와 장교집단, 금융과 대기업에 의존하고 있었다. 임시정부는 서유럽의 제국주의 정부와 동맹하여 전쟁을 지속했다. 그리고 이러한 자본주의적-관료적-제국주의적 국가 기제야말로 공산주의 국가의 기반을 놓았다.

결과적으로, 러시아는 두 개의 정부, 혹은 준정부를 가지게 되었다. 이는 양두정치, 혹은 이중권력이라 불렸다. 공식적인 임시정부는 대중의 지지를 거의 받지 못하였다. 임시정부가 존재할 수 있던 이유는 소비에트의 개량적 사회주의 지도부들이 지지했다는 이유뿐이었다. 다른 한 편에는 군대와 무장한 노동자들을 포함한 대중들의 지지를 확보하고 있던 소비에트가 있었다. 하지만 소비에트 내에서 다수는 개량적 사회주의를 지지하였고, 개량적 사회주의자들은 그들이 받는 지지를 임시정부를 향한 지지로 전용했다.

인민들과 정당들이라는 두 세력 사이에는 문제가 있었다. 노동대중(이 중 오직 2~5%만이 도시노동자들이었고, 나머지는 농민들이었다.)들은 가장 선진적인 사상과 가장 후진적인 편견들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자유를 원하면서도 지도자들이 대신 생각해줄 것을 원했다. 이들은 사회주의를 원하면서도 사적 소유를 원했다.(농민들의 경우, 토지의 사회적 소유를 원한 것이 맞지만, 그 토지를 가구들에 분배할 것을 원했다.) 이들은 종전을 원하면서도 애국자이기도 했다.(애국주의는 인민대중과 소수 지배계급 사이에 공통 이해관계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사회를 합리적으로 재조직하기를 원하면서도 종교적 미신이나 반유대주의에 빠져있었다. 이들은 사회주의 정당의 대표자 후보들에 투표하면서도 정당들간의 차이를 거의 인지하지 못했다. 최소한 초기에는 그러했다.

정당들은 다양한 계급들의 결정체였다. 이들은 대중 의식의 정수(민주주의, 자유, 사회주의를 향한 열망)와 그 저점(누군가가 우두머리가 되어주기를 원하는 열망)의 혼합체였다. 정당들이 인민들에게 새로운 사상을 교육한 것은 분명하지만, 궁극적으로 그들은 인민들의 후진성에 의존했다. 정당들에 대하여 말하자면, 그들 중 일부는 온전히 친자본주의적이었다. 개량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이었던 멘셰비키를 포함한 이 정당들은 준봉건적 차르 체제에 맞선 혁명을 이끌었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자본가들은 대출금이나 사업계약이라는 이름으로 봉건 세력과 너무 많이 엮여있었다. 자본가들은 농민들의 봉기를 두려워했다. 이 봉기는 자산의 재분배로 귀결할 것이고, 그것은 노동자들에게 영감을 주어 자본가들의 자산을 앗아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아가 러시아 자본가들은 금융 · 투자 · 문화적 측면에서 유럽 자본주의에 묶여있었다. 그리고 러시아가 총체적으로 후진적인 상태였던 것과 달리 유럽은 사회주의 혁명이 무르익고 있었다.

그렇기에 차르 시절에는 그토록 반란적으로 보였던 자본가들의 자유주의 정당들은 2월 혁명 이후 빠르게 보수적으로 태세를 전환했다. 우파세력이었던 지주, 전제주의자, 반유대주의자들은 친자본주의적 자유주의자들과 영합하여 입헌민주당으로 대변되는 반동 세력을 구성했다. 초기 임시정부는 이들이 주도적으로 구성하였다. 하지만 이들의 대중기반은 상류계급이었고, 노동자와 농민을 대표하는 소비에트에서는 거의 지지받지 못했다.

대중 세력은 주로 3개의 사회주의 정당을 지지했다. 그 중 가장 규모가 큰 당은 사회혁명당이었다. 사회혁명당은 마르크스주의자라기보다는 “대중주의자”(“나로드니키”)였다. 대중주의는 도시 노동계급이 아닌 대중의 힘이 사회를 바꿀 것이라 믿는 정형적이지 않은 이데올로기였다. 이들은 농민 조직이 바로 사회주의로 진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사회혁명당의 활동가들은 협동조합 건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역사적으로, 대중주의 활동가들은 폭탄을 던지고, 귀족들을 암살하고는 했다. 물론 큰 효과는 없었다. 이들의 전력은 모호했고, 사회혁명당의 당원들은 자유주의자와 하등 다를 바 없는 우파(이를테면 알렉산드르 케렌스키)부터 아나키즘적 사회주의자들에 가까울 정도의 좌파(최대주의자)까지 광범위했다. 바로 이 모호함에 힘입어 사회혁명당에는 모든 종류의 온건 자유주의적 기회주의자들이 유명해질 기회를 꿈꾸며 모여들었다. 이들의 농민친화적 태도 역시, 대부분의 노동대중들이 사회주의자들 사이의 차이를 거의 인지하지 못하던 당대에 사회혁명당을 최대 정당으로 만드는 데에 기여하였다.

그 다음으로 규모가 큰 좌파 정당은 사회민주당의 개량주의 분파인 멘셰비키였다. 멘셰비키는 사회혁명당과 사회민주당이라는 마르크스주의 정당 두 개 중 가장 우익적인, 혹은 가장 온건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전술하였듯이 멘셰비키는 러시아가 자본주의 혁명을 치루고 있는 중이고, 자본주의적 진보를 이행하는 중이며, 그렇기에 자본주의 정치인들이 주도권을 쥐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멘셰비키는 자본주의 혁명을 먼저 진행하고, 다가올 언젠가 사회주의 혁명을 진행해야 한다는 “2단계 혁명”을 믿었다. 이들은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이를 바탕으로 민주적 의회에서의 야당이 된다는 완전히 비현실적인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부르주아 국가를 청산하고자 시도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 건설을 목표로 했다. 그럼에도 이들의 강령은 사회혁명당의 그것보다 더 공고하였기에, 이들은 더 규모가 큰 사회혁명당을 압도할 수 있었다.

나는 멘셰비키들과 사회혁명당 우파들을 “개량주의자”라 이른 바 있다. 이는 그들이 자본주의에 맞선 혁명에 반대하기 때무닝었다. 하지만, 이들은 차르에 맞선 혁명은 지지했고, 이를 이루기 위하여 오랜 시간 투쟁하기도 했다. 이들은 국제적 기준으로 보았을 때 사회민주주의 운동의 중도좌파 세력으로 스스로 정체했다. 즉, 이들은 혁명을 말하면서도 모호하고, 거의 개량주의적인 방식으로 행동해왔다. 이들은 중도에 위치한 사회주의자였고, “중도주의자”라 부르는 것이 가장 정확한 명칭일 것이다.

다른 마르크스주의 정당으로는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가 있었다.(레닌은 “볼셰비키”나 “사회민주당”의 이름을 버리고 “공산주의자”라 자칭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들은 그렇게 하였다.) 이들은 오랫동안 다가올 혁명이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혁명일 것이고, 이를 통하여 자본주의적 진보의 시기가 열릴 것이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들은 멘셰비키들과 달리 자본가들이나 자본가들의 정당이 이를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 바라보지 않았다. 혁명은 노동자 계급정당이 농민 정당과의 협력으로 이끄는 것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멘셰비키들이 그러한 것처럼, 혁명은 자본주의의 경계 안에 머물 것이라 바라보았다. 이들 역시 부르주아 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다. 이는 “2단계 혁명”의 수정안이라 할 수 있었다.

러시아에서 혁명이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경계를 넘어 노동자들이 공장을 확보하고, 국가가 산업을 국유화할 수 있을 것이라 바라보았던 유일한 마르크스주의자는 트로츠키였다. 그리고 이러한 러시아 혁명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혁명을 유럽 전역으로 퍼트려야 할 것이었다.(“영구 혁명론”) 1917년, 레닌은 혁명이 사회주의 정책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는 여전히 러시아가 자본주의 단계를 건너뛰기에는 너무 후진적이라고 바라보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혁명이 국제 혁명의 일부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여기기 시작했다. 레닌은 그의 관점으로 볼셰비키를 설득했다.(그리고 이에 호응하여 트로츠키가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그 어떤 러시아 마르크스주의 정당도 사회주의 혁명을 계획한 바가 없었음을 기억하자. 이들은 사회주의를 어떻게 조직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노동자들이 산업을 어떻게 운영할 수 있을 지에 대해서도, 농민들이 평화롭게 집단농업을 조직할 방법에 대해서도 논의한 바 없다. 물론,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사회주의에 대해 가지고 있던 중앙집중적 상을 고려할 때, 논의가 그 자체로 차이를 만들지는 않았을 수 있지만 말이다. 

러시아의 주류 정치 경향 중 가장 세가 작았던 것은 아나키스트들이었다. 러시아 아니키즘의 위대한 이론가 표트르 크로포트킨은 러시아로 돌아왔지만, 당시 크로포트킨은 1차 대전에 대한 찬전으로 인하여 급진주의자들의 신뢰를 잃은 상태였다. 2월 혁명 전까지 아나키스트들은 조직도, 언론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혁명 이후 그들은 가능한 빠르게 두 도시에서 연맹들을 건설했다. 그리고 이 연맹들은, 마르크스주의 정당들만큼이나 분열에 시달려야 했다. 반조직적 개인주의자들과, 크로포트킨적인 아나키즘적 공산주의자들(코뮌 건설을 강조했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산업 내에서의 활동과 노동자 자주경영을 주장했다)의 차이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이들 중 가장 조직지향적이었던 것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상당수의 노동자들 사이에서 세력을 건설해내었다. 이들은 소비에트의 한계를 인지하면서도 소비에트에 참여했다. 아나키스트들이 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맞지만, 이들은 단 한 순간도, 우크라이나의 경우를 제외하면 볼셰비키들과 규모와 영향력 양면에서 비슷해져 본 적도 없었다.

중도주의/개량주의적 사회주의자들은 자유주의적 입헌민주당의 취약함을 인지하면서도, 그들의 정권 붕괴하도록 내버려두지 못횄다. 만약 입헌민주당이 붕괴한다면, 다음으로 책임을 져야할 것은 자신들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은 스스로의 판단마저 거스르면서 자본주의 정부에 참여하여 그 정부를 유지하려 하였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소위 “인민전선” 정부라 불리게 될 것의 초기적 예시라 할 수 있겠다. 자본주의 정당들과의 동맹을 유지하여야 한다는 명분으로 사회주의자들은 사회주의 정책을 집행하지 않는 것을 정당화하였다. 그와 동시에 자본가들은 사회주의자들을 자본주의적 정책에 대한 욕받이로 이용했다. 

자유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의 연립정부 역시 최소한의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정책을 수행하지 못했다. 이들은 제헌의회 선출을 위한 선거를 구성하지도, 지주들의 토지를 농민들에게 지급하지도, 피압제 민족에게 자주를 제공하지도, 노동시간을 일 8시간으로 단축하지도 못했다. 이들은 전쟁을 끝내는 것마저도 실패했다.(대신, 이들은 새로운 “공세”를 조직하여, 수많은 러시아 군인들의 생명을 무의미하게 앗아갔다.) 이 정부가 성공한 것은, 썩어빠진 구조가 그저 부평초처럼 흘러다니면서, 어떠한 것도 해결하지 못하고, 어떠한 것도 안정시키지 못하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 뿐이었다.

2월부터 10월까지의 수개월동안, 러시아 인민들은 점점 혁명적 좌파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볼셰비키당의 규모와 영향력은 증대해갔다. 아나키스트들의 규모와 영향력 역시 마찬가지였고, 볼셰비키들은 이를 우려했다. 사회혁명당 좌파의 세력 역시 커졌고, 결국 사회혁명당은 분열했다.

사회주의 정당 3개 중 자본주의적 임시적부를 완전히 거부한 것은 볼셰비키 뿐이었다. 이들은 소비에트를 대안적 국가권력이라고 바라보았다. 레닌은 소비에트가 볼셰비키 당에게 권력을 가져다줄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이에 대하여 멘셰비키들은 레닌이 “아나키스트”라는 비난을 반복했다.) 레닌의 계획은 『임박한 파국, 그것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등의 문건에서도 볼 수 있듯, 자기모순적이었다. 레닌은 독일 전시경제 모델에 따라 경제를 중앙화하고, 주요 산업을 군사국가의 조정 아래에서 통합할 것을 주장하면서 동시에 중앙화된 경제가 소비에트 · 공장위원회 · 노동조합 등 노동자 조직에 의하여 운영되고 감시되는 것을 원했다. 레닌은 탈중앙적이고 연방적인 소비에트의 본성과 중앙집중적이고 국가독점적인 경제 사이의 모순을 인지하지 못했다.

공산주의자들이 대중의 지지를 충분하게 확보한 이후, 이들은 군사 반란을 조직했다. 공산당는 임시정부를 해산하고 그 권력을 공산당과 그 동맹세력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전러시아소비에트대회로 이관했다. 이렇게 10월 혁명이 이행되었다. 대중 투쟁이 이어져온 수개월간, 10월 혁명은 다수의 지지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 지지는 공산당의 지배를 향한 지배가 아니라, 소비에트가 임시정부를 대체하는 것에 대한 것이었다.

전술하였던 것처럼, 10월 혁명과 초기 소비에트 정부가 통일전선이 수행한 집체적 노력의 결과였다는 것은 잘 알려져있지 않다. 서로 다른 역사를 가지고 있던 좌익 사회주의자들을 통일전선의 대오로 끌어들인 것은 볼셰비키들 자신이었다. 군사반란은 사회혁명당 좌파의 지지를 등에 업고 조직된 것이었다. 새로운 체제에서 레닌이 선포한 농업 정책은 사회혁명당의 그것을 훔친 것이었다. 사회혁명당 좌파는 연합 소비에트 정부의 소수세력으로서 공산당 정부에 합류했다. 이들은 모든 소비에트 기구에, 심지어 체카에마저 인사를 파견했다.

아나키스트들은 임시정부를 반대하는 투쟁에 있어 공산주의자들과 입장을 같이했다.(하지만 아나키스트들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에!”라는 구호에 대해서는 미묘한 입장을 보였다. 이 구호가 권위주의적 방향으로 해석될 여지가 충분하기 때문이었다.) 아나키스트들은 10월 혁명에 참여했다. 군사반란을 조직한 군사 위원회 안에는 최소한 4명의 아나키스트들이 있었다. 소비에트의 권위를 인정할 것을 거부하는 제헌의회를 해산시킨 군사력을 이끈 것은 아나키스트 수병이었다. 소비에트에 참여한 아나키스트 대의원들은 대부분 공산주의자들과 같은 입장을 표했다. 아나키스트들은 스스로가 공산당-사회혁명당 좌파의 연합을 비판적으로 지지한다고 여겼다. 아나키스트들은 실질적으로 체제와 연합을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볼셰비키들은 이 연합을 유지하는 데에 흥미가 없었다. 사회혁명당 좌파가 없었다면 공산당의 농촌 기반은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음에도, 레닌은 처음부터 이러한 연정에 반대했다. 그리고 도시와 군대에 식량이 모자라게 되었을 때, 공산당이 농민들에 대하여 사실상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사회혁명당 좌파와의 분열이 발생했다. 볼셰비키들은 농촌에서의 계급 투쟁에 관한 비현실적이고 교조적인 이론과 일반적으로 권위주의적인 전망에 입각하여 농민들의 식량을 몰수했다. 만약 볼셰비키가 농민 소비에트가 세금을 거두도록 하고, 식량 공급에 대하여 시장을 허용하는 보다 합리적인 정책을 사용하였다면, 더 많은 이들이 배불릴 수도 있었고, 연정을 유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사회혁명당 좌파와의 분열을 야기한 또 다른 이유는 공산당이 독일과 체결한 브레스트 리토프스크 조약이었다. 이 조약은 러시아 인민 다수를, 특히 우크라이나 인민 전체를 독일에 넘겼다. 레닌은 당시 니콜라이 부하린이 이끌고 있던 좌파 공산주의자 분파의 반대를 무릅쓰고 조약의 체결을 밀어붙였다.(트로츠키는 조약에 찬성했지만, 이는 그가 이것이 옳았다고 여겨서가 아니라, 레닌과의 분열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회혁명당 좌파와 좌파 공산주의자들은 혁명 전쟁을, 최소한 게릴라전의 형태로라도 지속하기를 원했다. 이들은 러시아 인민들의 전쟁피로도가 의미하는 것은 새로운 혁명군은 외침세력과 반혁명 군대에 맞선 혁명전쟁의 열기를 불러일으키는 것으로만 건설될 수 있다는 것이라 주장했다.(그리고 이것은 적군의 건설과정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독일군이 실제로 취약했다는 것을 볼 때, 조약 반대파의 말은 옳았을 수도 있다. 트로츠키의 전기작가인 아이작 도이처나 보수 역사학자 파이프스 역시 이와 같이 주장한다.

하지만 레닌은 조약 체결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레닌은 사퇴 협박으로 당지도부가 그를 지지하게 만들었고, 당내 다수의 의견을 묵살했다. 볼셰비키 내에서 이루어진 논의들의 기록을 살펴보면, 이들은 이 결정이 사회혁명당 좌파와의 분열을 야기할 것이라는 고려는 거의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소비에트 안에 오직 하나의 당만이 남게 되었을 때, 소비에트는 필연적으로 생명력을 잃고 정당-국가의 확장판으로 전락하는 것임에도 말이다.

아나키스트 역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거부했다. 1918년 3월, 4차 전러시아소비에트대회에 조약 체결에 대한 안건이 상정되었을 때, 대회에 참석하고 있던 14명의 아나키스트 대의원들은 반대투표했다. 그리고 아나키스트들은 탄압당하기 시작했다. 4월 11일, 체카는 모스크바에 위치해있던 26개의 아나키스트 사무소를 공격했다. 500명 이상의 아나키스트들이 체포되었고, 40명 이상이 살해당하거나 부상당했다. 연정은 끝났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아나키스트들은 러시아 내전에서 우익 백군에 맞서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싸웠다.

아나키스트들은 백군에 맞선 우크라이나의 저항에서 주요한 역할을 맡았다. 네스토르 마흐노는 우크라이나 게릴라군을 조직해내었다. 전술한 것처럼, 마흐노우슈치나는 백군 부대 2개를 패퇴시켰고, 러시아 적군을 막아냈다. 아나키스트 활동가들은 게릴라군 내부에서 교육과 선전기구를 조직했다. 이들은 공산주의자들이 통제하지 않는 자유 소비에트의 체계를 건설했다. 마흐노군은 공산주의자들과 2번의 동맹을 체결하여 외침과 백군 반동들에게 맞섰다. 그리고 마침내 인민의 군대가 적군의 배신에 의하여 무너지고, 대규모 체포와 학살의 대상이 되고, 거짓선전에 당하게 되었을 때, 마흐노 등 일부 지도부만이 서유럽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1918년 6월, 사회혁명당 좌파는 공산당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공산당 정권을 전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정책을 바꾸기 위한 반란이었다. 공산당 정권에 대한 불만이 이미 널리 퍼져있었고, 사회혁명당 좌파의 세력은 산업 전반과 지역 방위군 사이에 존재했기에, 이들이 원했다면 권력을 손에 쥐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파이프스, 1990) 하지만 이들은 권력을 원하지 않았고, 공산당이 권력을 가지도록 내버려두었다. 공산주의자들은 권력을 이용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회혁명당 좌파의 지도부는 투옥되었다. 만약 사회혁명당 좌파가 권력을 쥐고, 즉각적으로 소비에트의 재선출을 요구하고, 좌파 정당들 간의 자유로운 논의를 촉발했다면, 러시아의 역사는 달라졌을 수도 있다.

1921년, 내전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이 때, 페트로그라드를 방위하는 “크론슈타트” 요새의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소비에트 내에서의 다원적 민주주의의 재건과 농민정책의 완화를 요구했다. 아나키스트들과 크론슈타트 지역 공산주의자들은 반란에 참여했다. 볼셰비키 정부는 군대를 동원하여 수병들을 진압하고, 포로로 잡힌 수병들을 학살하였으며, 이들이 백군 반동세력의 첩자라는 거짓선전을 자행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산당은 농민정책을 완화하여 이들이 자유롭게 거래할 수 있도록 하였다. 경제는 전반적으로 자본주의적 수단들을 허용하기 시작했다.(레닌이 이른 바 신경제정책, 혹은 “국가 자본주의”) 하지만 노동자들이 운영하는 협동조합을 허용하거나 장려하려는 노력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경제적 허용과 균형을 맞추기 위하여 공산당은 다른 모든 정당에 대한 불법화를 강화하였고, 당내 반대세력 역시 불법화하였다. 전체주의적 국가 자본주의를 떠받히기 위한 법적 토대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2년 뒤, 레닌은 병으로 죽었고, 트로츠키는 “좌익반대파”라 규정되어 당에서 축출되었다. 스탈린과 (이제는 우파가 된)부하린은 농업 진흥 정책을 바탕으로 지배세력이 되었다. 그리고 1929년, 스탈린은 부하린을 정치적으로 박살냈고, 제약이 없는 독재자가 되었다. 그는 농업의 강제적 집산화 정책을 펼처 수천의 죽음을 야기했다. 그는 노동자에 대한 국가적 압제(사실상의 노예화)를 통하여 산업경제를 억지로 건설하면서 수천의 죽음을 야기했다. 30년대 후반 스탈린은 대숙청을 시작했고, 수백만을 투옥하고 살해하면서 관료를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만들어내었다. 결국 스탈린은 트로츠키와 부하린을 포함하여 레닌이 만든 중앙위원회의 잔존 구성원들을 모두 죽였고, 고참 볼셰비키의 생존 구성원들을 거의 다 죽였으며, 수백만의 노동자 농민을 죽였다. 2천만 이상의 사람들이 죽었다는 추정이 있을 정도로 말이다. 그리고 스탈린은 이를 통하여 공산주의의 이상을 죽였다. 

러시아 혁명의 중요한 부분들은 여러 혁명들을 거치면서 계속 반복되었다.

이중권력의 시기에는 인민위원회, 작업장 평의회, 농민 조합, 협동조합, 지역 총회와 대중의 민주적 기구들이 등장하여 옛 국가와 새로운 중앙집중화된 국가 모두의 대안으로 존재하면서 위기에 대한 비국가적 해결책이 될 수 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자유주의자들의 우유부단함이 시작된다. 자유주의자들은 친자본주의적이기에, 근본적으로 반동적인 자본주의 체계에 묶여 보수 세력으로부터 단절하지 못한다. 이들은 설혹 부르주아 국가를 비판하더라도, 그 대리인으로 남는다.

그리고 온건 사회주의자들의 아무 말 대잔치가 시작된다.(개량주의자들도, 유사혁명가 중앙주의자들도 마찬가지다.) 이자들은 자유주의자들과 단절할 수도 없고, 단절하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어쩌면 “아무 말 대잔치”라는 표현은 이들을 묘사하기에는 너무도 착한 단어일 수도 있다. 자유주의자들과 온건 사회주의자들은 언제나 우익에 항복했고, 그 지지자들을 배신해왔다. 이들은 국가를 철폐한다는 사상을 거부한다.

그리고 공산주의자들이나 민족주의자들이 등장하여 새로운 중앙집중적 국가를 건설해낸다. 물론, 이 건설 과정이 단순히 러시아 혁명의 복제판인 것은 아니다. 1917년 이후 공산주의자들은 소비에트 유형의 민주적 평의회들의 지지를 등에 업어본 적이 없다. 그 당시부터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잡은 것은 비프롤레타리아 군대를 등에 업고서였다.(동유럽 대부분에서, 이 군대는 러시아 군대였고, 베트남에서는 농민에 기반한 중국 인민군이었다.) 군대가 없을 때, 공산주의자들은 개량주의자들마냥 아무말 대잔치를 벌인다. 노동자 평의회 체제보다는 전통적인 자본주의 국가가 낫다거나 말이다. 이러한 것이야말로, 레닌주의가 무언가 새로운 것으로 변화하였음을 보여주는 증거라 하겠다. 마오주의자들은 “2단계 전략”의 새로운 버전을 개발했다. 먼저 부르주아 국가를 건설하고, 이들은 다가올 언젠가 사회주의를 건설한다는 최초의 형태에 그 부르주아 국가를 통제하는 것은 공산당이어야 한다는 새로운 개념을 더하였다.(그리고 이들은 이것을 “신민주주의”라 부른다.) 이 버전에서 “사회주의”가 의미하는 것은 공산당이 통제하는 부르주아 국가가 언젠가 산업을 국유화하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국가 자본주의의 정확한 정의이고, 때로는 중국 공산당 스스로도 이것을 인정한다. 이 체계에서는 국가가 당의 독재를 유지하면서 산업의 탈국유화(사유화)를 결정하는 것도 가능하게 되었다. 여기 오늘의 중국이 있다.

아나키스트들은 조직도, 준비도 부족했다. 네스토르 마흐노를 포함한 다수의 러시아 아나키스트들은 아나키스트들이 공산주의자들이나 다른 정치세력과 진지하게 경쟁하려 한다면, 더욱 협력을 강화하고 자주적 규율을 갖출 필요가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1918년 10월 그레고리 막시모프는 “우리 아나키스트들과 조합주의자들은 너무도 조직되지 못했고, 너무 허약했다. 우리가 이것이 일어나도록 허용했다”는 결론을 내린다. 나는 이 정세분석에 아나키스트들에게는 이론과 전략, 그리고 전술을 유연하게 가져갈 의지가 필요했다는 것을 추가하고자 한다. 러시아 혁명에서 아나키스트들은 전술의 천재였던 레닌에게 완전히 휘둘렸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마흐노 등은 그들이 망명하여있던 파리에서 “강령”을 작성하여 아나키스트들이 민주적으로 단일한 행동과 강령을 가진 하나의 조직을 구성할 것을 촉구했다.

최초에 레닌과 트로츠키, 그리고 볼셰비키들은 혁명이 성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혁명을 서유럽으로 확산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실제로 유럽에서 혁명은 발발했다. 독일에서는 노동자 평의회가 전제정을 전복했다. 프랑스 군의 절반은 반란을 일으켰다. 북이탈리아에서는 노동자 평의회들이 건설되었다. 헝가리와 보헤미아에는 “소비에트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하지만 이 모든 시도들은 패배했다. 그리고 이 패배는 많은 부분 개량주의자들과 중앙주의적 사회주의자들의 배신에, 혁명적 좌파의 경험 부족에 기인했다. 하지만 제국주의 국가들은 너무 약하고 분열되어 있어 새로운 러시아 국가를 무너트리지는 못했다.(물론, 그 침략이나 반혁명군 지원을 통해 이를 이루려는 시도는 있었다.)

결국 소비에트 연방은 위태로워졌다. 공산주의자들은 여전히 집권하고 있었지만, 러시아는 황폐화되었다. 러시아는 세계대전을 치루었고, 혁명을 치룬 다음, 내전까지 겪어야 했다. 산업 인프라는 못쓰게 되었다. 노동계급의 수는 이전의 4분의 1까지 떨어졌다. 러시아 각지에서는 기근이 횡행했다. 인민들은 기세를 잃고 탈정치화되었다.

아나키스트들은 당시 러시아의 이러한 상황이 레닌주의자의 오류가 낳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농민들에 대한 탄압은 농민들이 생산을 줄이게 하였고, 정치에 대한 흥미를 잃게 만들었다. 노동자들의 창의성을 촉발하지 못하였기에 산업의 생산성은 줄어들었다. 다른 정당들(과 당 내 다른 세력들)을 금지한 것은 인민의 탈정치화를 가속시켰다. 하지만 혁명 이후 러시아가 겪어야 했던 후진성, 빈곤, 고립은 물리적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 조건들이 볼셰비즘의 권위주의적 경향을 촉발했다. 이러한 문제를 안고 있던 노동자 · 농민들이 그 권력을 잃은 것은, 반혁명군에게건 “내부의 적”에게건 그 권력을 넘겨준 것은, 새로운 계급사회의 발흥은 필연적인 것이었을 수 있다.

나는 오랫동안 레닌을 연구해왔고, 두 가지의 결론을 내렸다. 하나는 레닌에게는 전체주의 국가를 건설하려는 의도가 없었다는 것이다. 레닌은 이후의 스탈린과는 달랐고, 그가 노동자의 지배라 부른 것을 진정으로 원했다. 그리고 레닌은 진정으로 그 노동자의 지배를 국제 노동계급의 혁명을 통해 확장하고자 하였다. 레닌이 말년이 되었을 때, 그는 국가와 당 안에서 관료주의의 비대화에 불편함을 느꼈지만, 체계를 원천적으로 재구성하는 것 외에는 해결책을 떠올릴 수 없었다. 결국 레닌이 행한 최후의 정치행동은 트로츠키와 연대하여 스탈린을 제거하고자 시도하는 것이었다. 볼셰비키 당 내에서 권위주의적 정책에 반대하는 반대파들이 항상 존재하였다는 것 역시 중요하게 바라보아야 한다. 좌익 공산주의자, 노동자반대파, 민주집중주의자 등이 레닌의 정책에 대하여 그러했고, 좌익(혹은 트로츠키주의)(더하여 우익)(부하린주의)반대파가 스탈린의 정책에 대하여 그러했다.

내가 레닌에 대하여 내린 또 다른 결론은, 레닌과 볼셰비키당은 권위주의적이었고, 스탈린주의적 전체주의의 토양을 놓았다는 것이다.(앞서 말한 당내 반대파들은 패배했고, 트로츠키를 제외한 모든 반대파 지도부들은 스탈린에게 굴복했다.) 앞서 주장한 것처럼, 레닌은 볼셰비키당을 중앙집중에 기반하여 건설했다. 당을 중앙집중적으로 운영하고, 국가를 중앙집중적으로 운영하며, 경제를 중앙집중적으로 운영하는 것 말이다. 레닌에게 노동자 평의회가 운영하는 산업이라는 개념은 전문가들이 계획하는 하향식 경제로 나아가기 위한 발판에 불과했다. 레닌은 다른 마르크스주의자들처럼 지역적 직접 민주주의에 뿌리내린 사회주의라는 개념을 가져본 적이 없다. 레닌은 농민들에게 토지가 가야 한다는 것을 지지하였지만, 이를 단지 중앙집중적 집산화로 이행하는 수단으로만 보았다. 레닌은 소수민족의 자주성을 주장하였지만, 이를 단지 중앙집중적 다민족국가로 향하는 단계라 보았다.

나아가, 비록 집권 전의 레닌이 하나의 당만이 존재하는 정당-국가를 옹호해본 적이 없다고는 하지만 마찬가지로 레닌은 다당제에 기반한 노동자 민주주의를 옹호해본 적도 없다. 레닌이 가지고 있던 혁명국가의 모델은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독재”였다. 프랑스 혁명 이후 자코뱅이 건설하였던, 급진적 정당이 운영하는 자본주의 국가와 비견할 만한 것이라 하겠다.

레닌은 마르크스주의가 절대적 진실이라 믿었고, 그가 이 진실을 알고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계시를 받은 레닌은 자신이 걸어가는 길이 올바르다는 것을, 그 길에 반대하는 자들을 쳐내는 것이 올바르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본인이 옳았기에, 레닌은 다른 정당들로부터 무언가를 배우거나, 그들의 주장을 자기 국가에 적용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무엇보다, 레닌의 정치에는 무자비함이 가득했다. 레닌은 이전 혁명들의 “온건함”을 반복하지 않으려 했고, 그에 따라 모든 정치적 반대파들을 무제한적으로 쳐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레닌은 체카를 만들었고, 그들에게 조사 · 판단 · 징벌의 권한을 부여했다. 레닌은 다른 정당들이나 공산당 내 반대파를 금지했고, 이러한 단일 정당 · 단일 세력 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체카를 사용했다. 레닌은 농민들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다. 물론 이 무엇도 수천만을 학살한 스탈린과 비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최소한 스탈린주의 국가의 밑그림은 그렸다고 할 수 있겠다.

러시아 혁명기에 진지하고 잘 조직된 아나키즘적 사회주의 조직이 있었다고 상상해보자. 1918년 말, 볼셰비키 당은 불공정한 평화 조약을 두고 거의 분열할 뻔 했다.(그리고 좌익 공산주의자들은 레닌의 중앙주의 세력에 비하여 공장위원회에 더 우호적이기도 했다.) 사회혁명당 좌파는 거의 집권 직전까지 갔었다. 강력한 아나키스트 조직은 소비에트 내에서 좌익 공산주의자들이나 사회혁명당 좌파와 동맹을 구성할 수 있었을 것이고, 세계사를 바꿀 수 있었을 것이다. 혹은, 내전이 끝난 후인 1921년, 농촌지역 상당수는 반란을 일으켰고, 페트로그라드에서는 총파업이 일어났으며, 크론슈타트에서는 아나키스트의 영향을 받은 군사반란이 일어났다. 만약 러시아에 아나키스트 전국조직이 있었다면, 세 번째 혁명을 성사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이는 가능성에 불과하다. 하지만 아나키스트들과 대중주의자들이 레닌주의자들보다 더 못하였을 것이라 보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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