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철폐 : 아나키즘적 · 마르크스주의적 관점 (10장. 스페인 혁명) - 웨인 프라이스



10장. 스페인 혁명

마오주의자들은 중국 혁명을 학습한다. 피델리스타들은 쿠바 혁명을 학습한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러시아 혁명을 학습한다. 그렇다면 아나키스트들은 스페인 혁명을 학습하여야만 할 것이다. 스페인 혁명은 1차 세계대전 이후 벌어진 최후의 노동계급 봉기였고, 2차 세계대전의 전초전이었다. 그리고 스페인 혁명은 오늘날의 투쟁과 닮은 점이 많기도 하다. 아나키스트들은 스페인 혁명에서 큰 역할을 수행했다. 노동계급의 절반, 그리고 스페인의 산업 중심부 카탈루냐의 거의 모든 노동계급은 아나키스트들의 노동조합(CNT)로 조직되었다. 농민들의 다수는 아나키스트에게 영향을 받았다. 혁명 과정에서 아나키스트들은 본인들의 장점을 보여주었다. 아나키스트들은 의용군을 이끌었고, 집단농장을 조직하였으며, 노동자에 의한 산업의 직접관리를 건설했다. 스페인의 아나키스트 문학은 이러한 실질적 성취들에 고취되었다.

하지만 스페인의 아나키스트들은 혁명 과정에서 심각한 취약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아나키스트 지도부들은 원칙과 강령을 포기할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이들은 부르주아지들과 스탈린주의자들과 영합하여 자본주의 정부에 장관으로 취임했고, 노동자와 농민의 혁명이 완결되는 것을 막아섰다. 이들은 국가를 분쇄하기는커녕, 국가에 합류했다. 그리고 이들은 프랑코의 파시스트 군대에 패배했다. 이 아나키스트들을 보다보면, “또 다른 혁명에서 아나키스트들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리라는 법이 어디 있는가”라는 질문이 떠오른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해 답하기 위해 우리는 이들이 왜 그러한 오류를 범하였는지, 그리고 다가올 혁명에서 오류의 반복을 피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점검할 필요가 있다.

스페인 혁명은 “스페인 내전”이라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를 내전(국가 내에서의 갈등)이라 부르는 것은, 그것이 품고 있는 계급간의 갈등이라는 혁명적 성격을 은폐한다.(이는 미국 혁명을 “독립전쟁”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스페인 혁명의 시작을 1931년으로 바라보는 견해가 있다. 알폰소 13세(현 스페인 국왕의 펠리페 6세의 증조부)가 퇴위하고, 스페인 2공화국이 성립되었다. 그 이후 5년간 봉기와 반란, 대규모 파업이 이어졌고, 공화국 정부는 이를 극심하게 탄압했다. 1936년 1월에는 3만명 이상의 노동자와 좌파들이 수감된 상태였다.

2월에 열린 선거에서는 보수정당이 권력을 내려놓고, 자본주의-자유주의(“공화파”) 정당과 사회당의 연정이었던 인민전선이 다수당이 되었다. 조직된 아나키스트들은 인민전선에의 참여를 거부했고, 공식적으로 선거를 거부했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선전하지 못했고, 아나키스트 노동조합에 가입한 노동자 다수조차 인민전선에 투표했다. 인민전선에 대한 환상에 빠지지 않은 노동자 · 농민들이라 할지라도, 최소한 인민전선이 계급전쟁이 낳은 수만의 수감자들을 사면하겠다는 공약은 지키리라 희망했다.(이러한 비판적 지지가 최선의 정치적 입장이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아나키스트들은 스스로에게 솔직할 필요는 있었다.) 선거와 취임 사이에 놓은 4일간, 노동자들은 스스로 감옥을 부수고 사면을 집행했다.

하지만 자유주의적/사회주의적 민주주의자들의 연정은 흔해빠진 우유부단한 개량주의 체제였고, 토지를 분배하지도, 노동조건을 개선하지도, (정부차원의 지원을 받고, 정치적으로 매우 반동적이었던)가톨릭 교회의 힘을 제약하지도, 장교단으로부터 파시스트들을 청산해내지도 못했다. 이들이 할 수 있던 것은 노동자들의 파업과 시위에 경찰이나 군대를 투입하는 것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가들은 인민전선이 너무 허약하다고 보았다. 노동계급을 분쇄하기 위해서는 더욱 강한 힘이 필요했다.

1936년 7월, 군대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에는 전통적 근왕주의자들의 세력과 새로운 세력인 파시스트(팔랑헤)들이 참여했다. 거의 모든 스페인 부르주아지는 반란을 지지했다. 모로코 식민지에서 대군을 데려온 프란시스코 프랑코와 그 동맹자들은 빠르게 쿠데타의 승리를 쟁취하고, 독재 체제를 구축할 것을 기대했다. 당장 1933년 독일에서 히틀러가 정권을 잡을 때에는, 독일의 노동자 정당(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은 저항하지 않았고,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자들도 이를 내버려 두었기 때문이었다.(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상술하도록 하겠다.) 인민전선 정부는 어쩔 줄 몰라했다. 이들은 군사 반란 자체의 존재를 부인했고, 프랑코와 협상을 시도했다. 군대와 경찰은 파시스트들의 손에 떨어졌고, 정부는 붕뜬 상태가 되었다. 자본가들과 대지주들은 사업체와 토지를 버리고 프랑코를 지지하러 나섰다. 자본주의 정당의 정치인들은 단지 (트로츠키가 일컫는 바)“부르주아지의 그림자”로 전락했다.

하지만, 스페인의 노동자들은 독일과는 다르게 저항했다. 이들은 거의 무장하지 못한 채로 군사반란을 저지했다. 대중들은 병영을 포위하고 군인들이 반란에 가담하는 것을 막았다. 정부는 노동자들이 무장하는 것에 반대했다.(심지어 강제로 무장을 해제하려 시도했다.) 인민들은 본인들이 가지고 있던 무기를 모으고, 총기상점에서 무기를 징발하고, 경찰과 군인들로부터 무기를 탈취했다. 광부들은 다이너마이트를 가져왔다. 병영 주변의 거주민들은 스스로 자기 집을 불태웠다. 파시스트들이 거리에 배치해둔 기관총들은 탈취되어 그들을 막는 데에 사용되었다. 노동조합은 민병대를 조직하여 전투를 준비했다. 파시스트들이 쉽고 빠르게 승리하는 것을 막은 것은 정부의 신묘한 계책이 아니라 노동자와 농민들의 자발적 저항이었다. 결국 파시스트들은 3년에 걸친 장기간의 내전을 치루어야 했다.

파시스트-군사 정권과 공화국(“충성파”) 정부 사이의 이중 권력과 더불어 공화주의 세력 내에도 이중 권력이 존재했다. 공식적인 국가기구는 일시적으로 무력해졌고, 파시스트들과 싸우면서 경제를 운영한 것은 대중의 조직이었다. 혁명의 핵심 의제는 대중조직과 공화국 국가 사이의 관계였다.

공화국 측에서 주요했던 자본주의 정권은 두 개가 있었다. 마드리드에 위치한 스페인 공화국 정부와 바르셀로나에 도읍한 카탈루냐 지역정부가 그것이었다. 카탈루냐 지역은 스페인에서 가장 산업화된 지역이었고, 지역의 노동계급과 농민들은 아나키즘에 깊게 경도되어 있었다. 카탈루냐인들은 바스크인들과 마찬가지로 문화적 자치와 (아마도)민족해방을 향한 투쟁의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공화국은 카탈루냐 지역에 일정부분의 자치를 허용한 지역 정부, 제네랄리다트를 선사해주었다. 제네랄리다트와 지역인민전선 체제 역시 일시적으로 흔들렸고, 경찰-군대를 거의 다 확보하고 있던 파시스트 군사 반란세력과 노동자 · 농민 세력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공화국은 군사력을 잃었고, 권위주의 노선을 따르는 군대를 재건할 수 있을 때까지는 노동자 민병대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노동자 계급 정당과 노동조합들은 민병대를 구성하여 파시스트들과의 전선을 형성하고 유지했다. 민병대들은 어느 정도의 내적 민주성을 가지고 있었고, 장교와 사병 사이에 임금이나 근무 조건의 격차를 두지 않았으며, 장교를 선출했고, 정치 토론을 깊게 가져갔다. 이 즉발적 혁명군이 비효율적이고 헐렁하게 작동한 것은 분명히 맞다. 하지만 (조지 오웰이 주장하는 것처럼) 이것은 민병대가 경험이 부족하고 질보다는 평등주의를 우선하는 원칙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민병대는 점점 더 효율적이고 자주적 규율을 지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만약 정부와 노동조합 지도부가 그 뒤통수를 후려치지 않았다면, 더 효율적이고 규율잡힌 군사력이 되었을 것이다. 공화국이 통제하고 있던 도시에서 경찰의 역할을 수행한 것이 거리를 순찰하던 무장한 노동자들의 위원회였다는 것도 특기할만 하다.

스페인 자본가들의 경제적 파업과 사보타주에 대하여, 스페인의 노동자들은 산업을 탈취하고 스스로 운영하기 시작했다. 스페인 전역의 공장과 작업장 대다수에서는 직원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노동자들이 스스로 임금을 결정하였다. 노동조합들을 통하여 협업이 조직되었다. 전화, 철도, 석유, 전기, 미용, 섬유 산업의 재조직은 단지 작은 예시일 뿐이다. 노동자들은 산업을 집단적이고 효과적으로 운영했다. 노동자들은 군수산업을 시작하였다. 혁명이 패배한 후, 노동자들로부터 자산을 다시 몰수한 자본가들은 그들의 자본이 잘 관리되었고, 심지어 더 개선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아는 한, 스페인 혁명은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토지의 집산화를 선택한 유일한 혁명이었다. 농민들은 단순히 토지를 몰수하고 그것을 각자에게 분배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토지를 협동조합을 통해 모아내어 민주적이고 자주적으로 운영되는 집단농장으로 만들어내었다. 소농들은 각자의 토지를 합병하여 운영했다. 화폐의 사용을 제한하거나 철폐하는 실험이 이루어졌다. 이는 공화국 지역의 절반 이상의 토지에 대하여 이루어졌고, 1,700개 이상의 지역 집단농장이 건설되었다.

하지만 러시아 혁명에서와는 다르게, 이 민병대와 노동자 자경단, 집산화된 공장과 집단농장은 소비에트와 같은 총체적 구조물로 모아지지 못했다. 스페인식 이중권력의 특이점은 취약한 부르주아 정부에 대하여, 흩어진 대중 조직의 집단이 역으로 균형을 맞추고 있다는 데에 있었다.

스페인 혁명은 두 가지(혹은 2.5가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개량주의냐, 꾸준한 혁명이냐(아니면 중앙집중주의냐)의 방향이 그것이었다. 해외의 자유주의자들은 개량주의적 주장이 상식적이라고 여겼다. 이 관점에 따르면 중요한 것은 “반파시스트” 세력의 단결이었다. 그렇기에 스페인은 프랑코에 대한 투쟁을 승리할 때까지 공화국 정부를 지지하고 혁명을 보류해야 했다. 무엇보다, 이렇게 해야만 미국, 영국, 프랑스 정부로부터의 지지를 확보하고, 그들과의 무역을 통해 군수물자를 구매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공식적인 스페인 정부와 거래하고자 하였지, 혁명적 총체 같은 것과 거래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이것이 파시스트들이 반란을 일으키기 한참 전부터 스페인 좌파들이 구성해낸 “인민전선” 정책이었다. 이 정책은 내전이라는 극단적 상황에 대한 임시방편이 아니라, 장기적인 전략이었다. 이는 사민주의자, 스탈린주의자, 아나키스트, 그 외의 모든 노동계급 조직들이 자본주의에 맞서 동맹하자는 “통일전선” 전략과는 다른 것이었다. 인민전선은 노동자 조직이 자본주의 정당의 자유주의 세력과 단결할 것을 제안했다 .통일전선과 인민전선 모두가 동맹과 단결을 주장한 것은 맞지만, 통일전선이 계급간의 분열을 강조한 것과는 다르게 인민전선은 이것을 부정했다. “인민”이라는 단어는 노동자와 모든 피착취대중(농민, 여성, 소수민족 등)을 일컫는 말로 사용될 수 있다. 하지만 자유주의자들과 개량주의자들은 이 단어를 애매하게 사용하여 피착취대중과 착취자들을 함께 쿢어 모든 인간을 이르는 말로 전용하였다.

UGT를 통하여 조직노동자의 절반을 이끌고 있던 사회당은 인민전선을 지지했다. 공화국의 자유주의자들 역시 이 관점을 지지했다. 물론, 이들은 전쟁 “이후에” 자신들이 혁명을 지지할 것이라 말하지는 않았다. 스페인 공산당 역시 이 관점을 분명하게 지지했다. 세계 전역에서, 그리고 당연히도 스페인에서 공산당은 스탈린주의적 관료주의의 영도 아래, 운동의 극좌에서 극우로 이행했다. 이들은 사민주의자들이나 다른 좌익 경향성들이 “사회적 파시스트”이며, 이들이 독일에서 나치에 대항하여 사민주의자들과 통일전선 구성을 거부한 것은 파시스트만큼이나 나쁘다고 비난했다. 이렇게 공산당은 인민전선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가 되었다(러시아 국가가 독일에 맞서 프랑스 · 영국 제국주의와 동맹하려 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내전 초기, 공산당의 세력은 매우 작았다. 하지만 러시아가 스페인 정부에 무기를 팔고자 하던 유일한 외국이 되면서 공산당의 영향력은 증대했다. 러시아는 무기 가격 중 일부를 인민전선 정부에 공산당을 포함시키고, 공산당원들을 요직에 앉히는 것으로 받고자 하였다. 그러는 동안 공산당은 보수적 중산계급 내에서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다.

무기 판매의 대가로 스페인 정부에는 러시아 “고문단”이 배치되었고, 공산당원들이 경찰과 군대의 요직에 임명되었다. 공산당은 비밀경찰이나 사설감옥 등의 자체적 기구를 건설하기 시작했고, 심지어 스페인 공화국 경찰마저 이들을 통제할 수 없었다. 공산당은 좌파 세력 중 그들에게 정치적으로 반대하던 이들을 납치하고, 고문하고, 살해했다. 이를테면 POUM의 안드레스 닌이 있겠다. 공산당은 스페인에서 트로츠키주의자들과 아나키스트들의 대우는 러시아에서와 같을 것이라 선언했다.

개량주의적 방법론이 해외 자유주의자들에게 아무리 합리적으로 들렸을지라도, 이 방법론에는 주요한 취약성 몇 개가 내포되어 있었다. 인민전선 전략의 문제 중 하나는, 인민전선을 통해 혁명전쟁을 배제한 이상, 공화국은 정규군을 상대로 승리할 방법을 결코 제시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파시스트들은 경험이 많은 전업 장교들과 훈련이 잘 된 사병들과, 압도적인 공군과, 제식병기와, 독일과 이탈리아로부터의 안정적인 보급을 가지고 있었다. 공화주의자들은 정규군을 아예 새로 만들어야 했고, 무기도 충분하지 않았다. 두 군대가 정면으로 충돌하면, 파시스트들이 승리할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

혁명전쟁 전략 아래에서, 전쟁의 승리 여부는 최소한 단지 총탄의 개수에서 벗어나, 사기와 정치의 문제로 확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혁명군과 혁명을 지지하는 노동대중의 사기를 증진시키고, 파시스트 군대의 사기를 저하시키며, 적진 내에서의 항명을 유도해내어야 했다. 그리고 이것은, 이를테면, 농민들에게 토지를 보장해주는 것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었다. 당시 스페인은 농업국가였다. 파시스트 군대의 사병들은 대부분 농민이었다. 이들에게 토지를 약속하는 것은 파시스트 군대의 내분을 불러왔을 수 있었다. 하지만 공화국 정부는 정확히 그 반대를 행했다. 이들은 집단농장을 법과 군대로 공격하고, 집단농장을 부수어 지주와 부자들의 권리를 보장했다.

개량주의 전략의 또 다른 취약점은, 영국 · 프랑스 · 미국 정부는 결코 공화주의자들을 원조하지 않을 것이라는 데에 있었다.(프랑스 정부가 사회주의자 레옹 블룸이 이끄는 인민전선 체제였음에도 말이다.) 이들은 “비개입합의”에 동의했고, 스페인 내전의 양측 어디에도, 심지어 스페인의 “합법” 정부에도 무기를 판매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이들은 충성파의 승리가 노동자 혁명을 불러올 것이라 우려했다. 이들은 영국과 프랑스 사업가들이 스페인과 역사적으로 관계를 가지고 있었기에, 파시스트들의 승리가 자국에 영향을 줄 것이라 우려했다. 그리고 그들은 옳았다. 프랑코 정권은 2차 세계대전 중 중립을 유지했다. 나치 독일과 파쇼 이탈리아 역시 비개입을 선언했다. 하지만 이들은 프랑코군에 군사적 원조를 쏟아부었다. 스페인의 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은 프랑스 노동자들이 (사회당과 공산당이 함께 하고 있던)자국 정부에 압력을 넣어줄 것을 호소했다. 하지만 이들은 프랑스 인민전선이 자본주의에 굴복한 것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비판하지 못했다.

스페인이 혁명적 방법론을 택하였다면, 이는 아랍과 스페인령 모로코에서의 민족자결주의를 촉발하였을 것이다. 파시스트 군대의 기지는 대부분 북아프리카의 스페인 식민지에 위치해있었다. 그들 군대 사병들의 대다수는 아랍인이었다. 아랍민족에게 자주(자치와 독립에 대한 선택권)를 제안하고, 모로코에 민족주의 선동가들을 파견하는 것이야말로 파시스트 군대에 대한 가장 강력한 타격이 되었을 것이다. 모로코 민족주의자들은 실제로 이것을 제안했고, 이에 호응하여 일부 아나키스트들이 이러한 전술을 제안했다. 하지만 이것은 프랑스와 영국의 제국주의자들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프랑스와 영국의 자본가들은 아랍 식민지에 민족자주의 예시가 등장하는 것을 두고 볼 생각이 없었다. 스페인 인민전선 정부는 서구 제국주의자들에게 아양을 떨어야 했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무기를 내려놓았다.

그렇다고 해서 개량주의 전략이 공화국 지역에서의 내전 위협을 회피하는 데에 도움이 된 것도 아니다. 자본주의 국가의 재건과 그 권력의 재확보가 필연적으로 다가왔다. 노동자와 농민의 조직들이 국가에 도전하지 않을 수는 있겠지만, 국가는 그들에게 도전해야 했다. 이중권력 상황은 어느 방향으로건 해소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조금씩 체제는 인민위원회의 권력을 앗아가기 시작했다. 정규군이 건설되고, 경찰이 재건되고, 이들이 무장하기 시작했다. 민병대에는 무기와 탄약이 주어지지 않았고, 이들은 조금씩 정규군에 흡수되기 시작했다. 산업의 자주경영과 사회화는 무시되었고, 산업은 다시 자본가들의 손에 쥐어지거나 국영화되었다. 집단농장은 물리력을 통하여 분쇄되었다. 좌파 언론에 대한 정부의 감시가 강화되었고, 수감과 처형을 포함한 정치적 탄압이 확산하였다. 좌파들이 파시스트들의 첩자라고 비난하는 공산당의 선전이 몰아쳤다.

파시스트 반란이 개시된지 11개월이 지난 1937년 5월, 사태는 정점에 도달했다. 정부는 아나키스트 노동자들이 관리하고 있던 바르셀로나 전화교환소를 빼앗으려 하였다. 노동자들은 이에 맞서 총파업과 봉기를 선포했고, 바리케이드를 건설하였으며, 바르셀로나의 통제력을 확보했다. 이대로 간다면 노동자와 농민들이 카탈루냐의 권력을 탈취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나키스트와 좌파들의 지도부는 노동자들에게 정부의 모호한 약속을 믿고 업무로 돌아가라고 설득했다. 정부는 좌파에 대한 탄압을 시작했고, POUM을 법외정당화하였고, 그 지도부를 수감했다. 노동자들은 패배했다.

개량주의적 방법론은 공산당과 사회당 우익이라는 명확한 지지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혁명적 방법론에 대한 주요 지지세력은 없었다. 몇몇 세력들은 중앙집중적 방법론을 발전시켰다. 이들은 공식적으로는 혁명을 지지했지만, 실천적으로는 개량주의자들에 도전하지 않았다. 사회당 좌파와 POUM(통합마르크스주의노동자당)의 입장이 바로 이러했다. POUM은 트로츠키주의자부터 부하린주의자까지 공산당에서 숙청된 소수파 그룹들의 연합에서 출발했다. POUM은 카탈루냐에서 상당히 큰 규모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아나키스트들보다는 그 세력이 작았지만, 공산당이나 사회당보다는 더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POUM은 자체적인 민병대를 운용했다.(조지 오웰이 복무한 민병대가 이것이었다.) POUM은 정당들 중 가장 혁명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지만, 마찬가지로 인민전선을 지지했고, 카탈루냐의 자본주의 정부에 참여했다.

안타깝게도 스페인 아나키스트들 역시 중앙집중화를 전략으로 채택하고 있었다. 스페인 아나키스트들은 러시아 등지의 경우와는 다르게 전국적으로 조직되어 있었다. 이러한 조직은 1차 세계대전 후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에 입각한 노동조합을 장악하려는 개량주의적 조합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의 위협을 막아내기 위해 건설되었다. 이들은 소규모 자발적 그룹들의 연방이었던 FAI(이베리아 아나키스트 연방)을 건설했다. FAI의 구성원들은 CNT의 조합원이어야 했다. FAI는 정기 총회를 통해 결정을 내렸다. FAI주의자들은 “민주집중주의자”가 아니었고, 자신이 속해있는 조직에, 그리고 각자들의 조직에 충실했다. 그렇기에 이들은 공통의 입장을 가지고 조직의 결정을 스스로 준수하는 경우가 많았다. 스페인 아나키스트들은 스스로가 “전위”라고 여겼다. 여기에서 “전위”는 이들이 스스로를 엘리트라 여겼다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스스로가 “선진적” 사상을 가진 “선봉”이라 여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은 지도자가 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영향력 있는 투사”가 되고자 했다. 그리고 아마도 그러했기에, 이들이 실제 지도부를 민주적으로 통제하지 못하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들이 만들어내었던 세계에서 가장 민주적인 구조가 불명확한 계획을 메울 수는 없었다. 수년간의 논의는 잡단농장과 노동자들의 자기 경영을 위한 토대를 쌓았다. 그러나 1936년 그들이 처한 상황을 헤쳐나가기 위한 전략적 고려는 거의 없었다.

1936년 7월, 카탈루냐 노동자들은 지역의 파시스트 반란을 진압했다. FAI가 이끌고 있던 CNT는 바르셀로나와 카탈루냐 지역의 통제권을 확보했다. 카탈루냐 제네랄리타트의 수장이었던 루이스 콤파니스는 CNT-FAI의 지도부를 사무실로 초대했다. 오랜 시간 아나키스트 투사로 활동했고, 그 모임에 참여했던 가르시아 올리베르에 따르면, 콤파니스는 CNT-FAI가 “도시의 주인”임을 인정했다. 그 자리에서 그는 CNT-FAI가 원한다면 사임하겠지만, 그들이 함께 일할 수도 있다고 제안했다. 교활한 부르주아 정치인에게 이러한 제안은 단지 국가와 자본주의를 재건하기 위한 첫 단계에 불과했다. 이는 콤파니스의 이후 행보를 보면 더욱 확실해진다. 하지만 아나키스트 노동자들의 지도부는 너무 순진했고, 그 제안을 받아들여 제네랄리타트의 장관으로 입각하고, 중앙정부에 합류했다.(가르시아 올리베르는 법무부 장관이 되었다. ‘아나키스트’ 주제에 말이다.)

이후 가르시아 올리베르는 이 결정이 “아나키스트 독재를 의미하는 자유의지주의적 공산주의와 협력을 의미하는 민주주의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한 것이라 주장한다.(『Lessons of The Spanish Revolution』, 버논 리차즈, 1972) 맞다. 만약 CNT-FAI가 권력을 잡았다면, 그 체제는 일당 독재, 혹은 “혁명적 전체주의”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주장에는 일말의 진실이 담겨있다. CNT에 가입하였던 노동자들은 FAI주의자들이나 노동조합 지도부를 따랐을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모두 아나키스트였던 것은 아니다. 노동계급과 농민 사이에 아나키즘이 아닌 다른 정치적 경향성이 존재하기도 했다. 중간계급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카탈루냐 바깥에서, CNT는 사회당이 이끄는 UGT에 비하여 규모적으로 더 작았다. 그렇다면 아나키스트들이 그들의 정치를 스페인의 노동자 · 농민 · 빈민들에게 강요할 권리는 없는 것이 아닌가? 그렇기에 아나키스트 지도부는 개량주의자들이나 자유주의자들과 함께할 수밖에 없다고 바라보았다. 이들은 “협업을 의미하는 민주주의”를 선택했다. 이들은 이론적으로는 옳았을 수 있다. 그리고 현실에서는, 이 주장들은 그저 상황적 압력에 굴복한 것을 합리화하는 주장일 뿐이다.

이들의 결정은 아나키스트들이 국가와 자본주의의 권위주의적이고 비민주적인 본성에 대해 설파하던 것을 스스로 명확하게 부정하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아나키스트들은 이 방침에 대해 불만을 가졌지만,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이들은 CNT와 FAI에 충실했기에, 내부투쟁을 원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아나키스트들은 그저 본업으로 돌아가 민병대에서 파시스트들과 싸우거나, 공장위원회를 조직하거나, 집단농장에서 농사짓거나 했을 뿐이었다.(위대한 혁명적 아나키스트 부에나벤투라 두루티 역시 마찬가지의 행동을 취했다.) 몇몇은 아나키스트들이 정부에 참여하는 것에 반대하였지만, 혁명을 향한 다른 방침을 제시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아나키스트들이 정치적 · 도덕적으로 결벽하게 남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군사행동과 경제는 협력적으로 운영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만약 현존 국가와 협력하지 않을 것이라면, 누구와 협력해야 하는가?

하지만 당시를 고려하자면, 민주적이고 동시에 혁명적인 분명한 대안이 있었다. 공장위원회, 집단농장, 자경단, 민병대, 인민위원회들이 연방적으로 결합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카탈루냐 CNT-FAI는 이러한 조직들에게 즉시 총회를 개최하고, 대의원단을 선출하게끔 호소하여 대의원대회를 개최하였어야 했다. 아나키스트건, 사민주의자건, 스탈린주의자건, 부르주아 정당의 지지자건, 그 어떤 정치적 경향성을 가지고 있건 간에, 그들이 노동대중 속에서 확보한 지분만큼 대변될 수 있도록 하였어야 했다. 당시였다면 아마도 가장 혁명적인 조직이 대중의 지지를 얻었을 것이다.

아나키스트들은 바르셀로나에서, 카탈루냐 전역에서 이러한 인민평의회의 연방을 조직할 수 있었다. 그리고 스페인 전역에서 카탈루냐의 혁명적 예시를 따라 유사한 평의회를 개최하라 요청할 수 있었다. 이들은 사람들에게 노동자 조직의 통일전선이 민주적 형태로 구성될 수 있음을 보여줄 수 있었다. 이들은 “공화국”이라는 무기력하고 버려진 자본주의 국가에 대한 대안을 제시할 수도 있었다.

스페인에서, 트로츠키와 그의 추종자들은 노동자 평의회의 상을 주장한 적이 있었다. 트르츠키주의자들이 이 평의회를 그들의 당이 집권하기 위한 수단적이고 도구적인 것으로 바라보았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들이 스페인에서 평의회의 개념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트로츠키는 러시아 혁명에서 소비에트가 투쟁의 결집을 위한 평의회로 작동하기 시작하고, 마침내 권력을 확보하는 것을 바라본 경험에 기반하여 이 개념을 도출했다.

혁명기가 끝나갈 무렵, 스페인 아나키스트의 조직이었던 “두루티의 친구들”은 유사한 관점을 도출해내었다. 이 조직은 두루티 민병대의 전 구성원 중 국가 상비군화 정책에 반대하던 이들이 아나키스트 언론인이었던 자이메 발리우스와 함께 건설하였다. 이들은 CNT-FAI 지도부의 협조주의 정책을 비난하고, 혁명을 부르짖었다. 1938년, 이들은 『신선한 혁명을 향해』라는 성명서를 통해 “다소 다른 형태의 아나키즘”을 제안했다. 이들은 “혁명 훈타나 방어위원회의 건설”을 제안했다. 이러한 기구는 민병대와 노동자 자경단의 협력을 조직하고, 전선 배후의 파시스트들을 축출하고, 국제 관계를 조정할 것이었다. 그 과업을 이룰 수 있을 때까지 위의 기구는 현존 체제 내에서 실천하면서 반파시스트 군사투쟁을 돕거나 군수품 생산에 복무할 수 있을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두루티의 친구들에 관하여 가장 잘 저술한 책(『The Friends of Durruti group: 1937—1939』, 아구스틴 기야몬)은 이 입장이 권위주의적 사회주의와 유사한 것이자, 소수 전위정당의 독재를 옹호하는 것이며, 그러한 정당들과의 연정을 옹호하는 것이라고 잘못 서술하고 있다. 기야몬은 “혁명 훈타를 ‘다른 이들’이 부르는 말로 표현하자면, 전위라거나 혁명정당”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두루티의 친구들은 당-국가를 주장하지 않았다. 이들이 말하는 바 방어위원회는 민주적으로 운영되어야 했다. “혁명 훈타의 구성원들은 조합 조직 내의 민주적 투표로 선출되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조합들은 자유 자치구의 연방 속에서 협업하게 될 것이었다.

이들의 관점은 작업장 총회나 인민총회보다 조합의 우위를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전통적인 조합주의적 관점에 얽매여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 관점은 실질적으로 평의회적 방법론에 매우 가까운 방법론이었다. 만약 두루티의 친구들이 더 일찍 조직되었다면, 이들은 아마도 POUM 좌파나 소수의 트로츠키주의자들, 그리고 다른 아나키스트들과 동맹하여 혁명적이고 민주적인 훈타를 건설하기 위한 투쟁을 진행했을 것이다. 하지만 1938년은 너무 늦었다. 혁명은 이미 정치적으로 패배했고, 파시스트들이 공화국군을 무너트리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스페인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아나키즘에 대한 비판을 확립했다. 아나키스트들은 평의회 체계를 조직하는 데에 실패했고, 오히려 자본주의 정부에 참여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이것이 아나키스트 이론의 결함에 의거한 것이라고 말한다. 아나키스트들은 모든 국가에, 그러니까 자본주의 국가 뿐 아니라 “노동자 국가”에도 반대하고, 이들이 본질적으로 같으며 모두 나쁘다고 바라보았다. 하지만 스페인에서의 경험은 투쟁을 조직하고, 파시스트들을 타격하고, 서로 다른 정치적 입장들을 대표하고, 외국과 관계를 정립하기 위한 사회적 기구가 필요하다는 분명한 사실을 확인시켜주고 있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이로부터 국가의 필요성을 도출한다. 하지만 아나키스트들은 노동자 국가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했기에, 노동자 국가와 차이가 없는 자본주의 국가에 참여한 것이었다.

나는 이 비판이 어느 정도 논리적이라고 생각한다. 아나키스트들은 권력의 필요성을 반대하거나, 최소한 과소평가해왔다. 억압된 이들은 스스로 조직하여 억압자들을 몰아내고, 반혁명적 파시스트 세력을 타격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혹은, 아나키즘은 권력에 대하여 모호한 태도를 취했다. 아나키스트들은 노동자들이 국가를 건설하지 않으면서도 권력을 확보할 필요성을 이해하지 못했다. 스페인 아나키스트들은 전국조직이나 논의를 위한 충분한 시간 등의 장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것을 혁명의 준비를 위해 사용하지 못했다. 혁명이 도래하였을 때, 이들은 CNT-FAI의 독재적 당-국가를 건설하거나, 자본주의 정부에 합류하는 것 외의 대안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반면, 트로츠키주의자들이나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주장은 노동자와 인민의 평의회를 국가의 일종으로 바라볼 때에만 올바르게 기능할 수 있다. 말장난처럼 보일 수 있지만, 코뮌은 역사상 그 어떠한 “국가”와도 다르다. 코뮌은 인민 다중의 자기 조직이지, 사회 위에 군림하는 소수의 조직이 아니다. 코뮌의 억압적 기능은 오직 이전의 착취계급을 향해서만 사용되며, 모든 억압을 끝내는 도상 위에 존재할 것이다. 코뮌은 “노동자 국가”가 아니고, 그것이 될 수도 없다. “노동자 국가”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시 트로츠키와 그 추종자들은 그들의 역사에서 가장 자유의지주의적인 상태였다. 이들은 스탈린주의적인 전체주의 국가인 러시아가 노동자 국가의 일종이라 바라보면서도, 그 관료국가를 전복하고, 다당제 소비에트/평의회의 체계로 그것을 대체할 것을 촉구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트로츠키주의자들은 평의회-국가 사상을 상당부분 포기했다. 정통파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쿠바 국가(일당제, 일인 독재)의 무비판적 지지자가 되었다. 이들은 러시아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지지하고, 스탈린주의 국가의 붕괴를 “반혁명”이라 비난하는 자들이 되었다. 소련이 “노동자 국가”가 아니라 국가자본주의라고 칭하는 비정통파 트로츠키주의자들도 있지만, 이들 역시 레닌과 트로츠키 당시의 소련은 긍정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스페인 트로츠키주의를 이끌었던 그란디소 무니스는 아마도 아나키즘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두루티의 친구들의 이론적 지도자였던 하이메 발리우스의 친한 친구였고, 심지어 그는 멕시코에서 망명해있는 동안 같이 살기까지 했다 (기야몬, 1996). 이것이 아마 무니스가 트로츠키주의적 "퇴보한 노동자 국가" 이론을 거부하고 러시아에 대해 국가자본주의적 분석을 한 것과, 그가 전위당을 부정하고 나섰던 요인이었을 것이다 (홉슨&타보르, 1988). 무니스는 동시에 적어도 스탈린주의 러시아가 국가자본주의 체제였다는 것에 동의했던 트로츠키의 미망인인 나탈리아 세도바와 친구이기도 했다.

보르디가주의자 (권위주의적 극좌 경향) 로 일컬어지는 기야몬 (1996) 은 두루티와 친구들이 혁명적 프로그램과 이를 위한 조직의 필요성 (전위)을 "아나키즘적 관용어" 와 "정통 마르크스주의적 가정" 에 의거해 재창조하고 있다고 보았다. 이것이 사실일지라도, 그들이 아나키즘적 전통에 의거해 그렇게 했다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평의회들의 연방이 혁명을 조직하는 개념이 오랫동안 아나키즘의 한 부분이었기 때문에 사실이 아니다. 주요 아나키스트 조직들이 그들의 활동을 이어나가지 못하고 실패한 것은 다른 문제다.

아나키즘이 운동적으로서 스페인에서 실패했다고 말할 수 있지만, 마르크스주의 또한 그렇게 잘 됐다고 볼 수는 없다. 전체적으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유주의적 부르주아 국가에 아나키스트만큼이나 (혹은 더) 적극적으로 투항했다. 사회주의자들은 국가주의적 개량주의에 찌들어갔고, 중도주의 POUM 이 새로운 국가의 필요성을 외치며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위치를 차지했으나, 실질적으로는 구체제에 합류했다. 스탈린주의 스페인 공산당은 그냥 반동이었다 (정작 스탈린주의자라 할지라도, 여러 정당들의 평당원들의 순진한 이상주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POUM 내 중도주의자들에게 자리를 잃었고, 작은 두 정파로 나뉘어 다시는 대중적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오직 작은 마르크스주의자 조직 (트로츠키주의자들) 과 아나키스트 조직 (두루티와 친구들 그리고 몇몇 조직) 들만이 부르주아 국가와의 협조를 거부하고 평의회들의 연방을 조직하는 데에 찬성했다. 노동계급은 국가를 새로운 대중권력의 조직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그들의 조직들 때문에 큰 대가를 치렀다.

그러나 스페인 혁명 패배의 실질적은 효과는 수 세대에 걸쳐 거대한 국제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아나키즘의 마지막 기회를 쓸어버리는 것이었다. 스페인 아나키스트들은 그들 스스로의 약점뿐만이 아니라 객관적 요인들로 인해 국제운동과 해방에 대한 희망을 후퇴시킨 패배를 겪었다. 아나키스트들은 다른 국가들에도 조직을 갖추고 있었지만, 스페인이 산업중심지에서 파시즘에 맞서 싸우는 마지막 희망이었다. 많은 세계의 투쟁하는 사람들에게 나치즘과 파시즘을 이겨내는 유일한 희망은 서방, 혹은 러시아 제국주의를 지원하거나 그 둘 모두를 지원하는 것으로 결정지어졌다. 자유의지주의적 사회주의가 다시 유의미한 세력으로 재부상하기 까지는, 서구 민주주의와 스탈린주의가 동시에 충분히 무너지는 긴 시간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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