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철폐 : 아나키즘적 · 마르크스주의적 관점 (11장. 독일에서의 나치즘과의 투쟁) - 웨인 프라이스



11장. 독일에서의 나치즘과의 투쟁

스페인 혁명 역사로 되돌아오기 전, 나는 1933년 독일에서의 파쇼 반혁명 (특히 나치즘의) 의 승리에 대해 논해보겠다 (글루크스타인, 1999; 게렝, 1973; 트로츠키, 1971). 스페인 반혁명은 노동계급의 조직들을 파괴했기 때문에 파시스트적이라 할 수 있겠지만, 내전으로 몰고 가도록 한 것은 군사 쿠데타였다. 나치즘은 대중운동을 통해 권력을 잡았고, 독일군이 방관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더 "순수한" 형태에서의 파시즘이었다. 또 다시 파시즘에 맞선 투쟁은 급진주의자들의 국가에 대한 관점의 충돌을 만들어냈다.

1930년대의 독일에서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바로 부르주아 민주주의 국가 (바이마르 공화국) 와 파시스트 국가 간의 관계에 대한 것이었다. 공산당은 극좌적 의미에서 그들은 (두 파시즘 종류들 모두) 동일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나치즘에 맞서 특별히 싸울 필요는 없다고 여겼다. 사민당의 경우 그들이 파시즘과 완전히 다르다고 생각했고, 따라서 파시즘이 집권하는 것을 막기 위해 부르주아 민주주의 제도를 활용할 수 있다고 믿었다. 사실 이것들은 부르주아 국가의 두 가지 형태인데, 하나는 (제한된) 민주주의 체제이고 또 한 가지는 독재 체제라는 점에서 다르긴 하나 모두 자본주의의 지지자들이란 것에서 비슷하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뒤엎어버리는 "정치혁명" 은 "사회혁명" 이 아니었다. 정부의 형태 자체는 완전히 뒤엎어진 것이나, 국가의 기본적인 형태와 자본주의 체제 자체는 변하지 않는 것이었다. 자본가 계급은 상류층으로 남았다. 이는 노동자들이 나치즘에 맞서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권리를 지키는 것이 필요는 했지만, 부르주아 민주주의 국가체제에 의존해 나치즘에 저항하는 것은 실수라는 것을 의미했다. 오늘날에는 정치적 보수주의의 부상과 미국 지배계급 내부에서 극우의 지배, 그리고 온건한 부르주아 정치인들의 패배라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세계적으로 봤을 때, 그들의 정책은 "신자유주의" 라고 불려왔다. 이것이 1930년대 파시즘이 좌파를 찍어 누르고 일어난 조건들과 비슷하다고 보는 것은 과장일 것이다. 그리고 북아메리카에서의 진짜 파시스트들의 위협은 과거 유럽에서의 그것과 똑같지는 않다. 그러나 지금, 나치즘과 여러 다른 형태의 파시즘과 맞서는 투쟁에서 제기된 것과 비슷한 문제들은 분명 대두되고 있다. 많은 자유주의자들은 우익 공화당의 억압적이고 군국주의적 정책들 때문에 이미 파시즘 아래에 있거나 파시즘이 되어 갈 것이라는 두려움 아래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는 실수다. 우리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아래에서 살고 있고, 그리고 억압적이고 군국주의적인 것이 부르주아 민주주의다. 미국에는 아직 선거가 열리고 (물론 엄청난 사기에 가깝지만), 노동조합이 있고, 자유로운 의사표현과 좌익 조직들 (많은 제한들이 있지만) 이 있다. 파시즘 아래에 이런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아직 거대한 파시즘적 위협에 직면한 상황은 아니기 때문에, 지금이야말로 아나키스트들과 자유의지주의적 사회주의자들이 과거에서 교훈을 배울 최적의 시기이다.

하지만 우선 이탈리아에서의 파시즘 부흥에 맞선 투쟁에 대해 간략히 설명이 필요하다. 1920년대 초, 1차 세계대전 참전병사들로 구성된 깡패들이 우익 조직으로서 결성되기 시작했다. 과거 사회주의자였던 베니토 무솔리니는 이들을 파시스트당으로 들여왔고, 부자들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그는 이 깡패들을 활용해 노동조합 본부와 좌익 정당들의 집회를 공격했다.

여러 아나키스트들은 파시스트 깡패들에 맞서 통일전선을 요구했다 (Rivista Anarchia, 1989). 아나키스트들은 그들이 확보한 생디칼리즘 노동조합을 갖추고 있는 정도의 분명한 소수였다. 그들은 파시스트들과 물리적으로 싸우고, 노동자들의 조직을 방어하며, 파시스트들을 거리에서 쫓아내기 위한 노동조합들과 좌익 정당들에 대한 단결과 행동을 요구했다. 아나키스트들과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그들이 맺을 수 있는 동맹들과 함께 파시스트들과 싸우면서 그 요구를 직접 수행했다. 그들이 몇몇 도시들에서는 우익 깡패들을 패퇴시키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좌익 정당들에 의해 방해받았다. 사회당 (이탈리아의 사민주의자들) 은 겁을 잔뜩 먹었고, 이른바 '평화 조약' 이라고 불리는 협정을 파시스트들과 1921년 8월에 체결하며 사실상의 무장해제를 감행했다. 이탈리아 공산당은 그 당원들에게 아나키스트들과 함께 싸우지 말 것을 명령했고, 통일전선의 개념을 비난했다. 그 당시 공산당을 이끌던 사람은 아마데오 보르디가 (이후 코민테른에서 추방된다) 였다. 그의 권위주의적 종파주의는 아래에서 논의된 제 3기 이론, 스탈린주의의 선구자였다. 효과적인 반대파가 없는 상황 속에서 부르주아와 국왕의 지지를 받고 파시스트들은 권력을 잡았다. 표면적으로나마 민주적 제도를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던 시절을 지나가며, 그들은 노동자들을 대량학살하며 전체주의 국가를 수립했다. 이탈리아 파시즘은 히틀러의 모델이 됐다.

이제 독일에서의 배경이다. 1차 세계대전은 독일이 러시아를 이기고 서방의 동맹국가들이 독일을 이기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혁명의 물길이 전 유럽을 휩쓸기 시작했지만, 대부분의 역사책에서는 빠져 있다. 오직 러시아 제국에서만 혁명가들이 권력을 잡고 유지했다. 동유럽의 일부 지역에서는 그들이 잠시 권력을 잡기도 했다. 이탈리아에서는 노동자들이 북부의 대부분을 장악했으나, 두려움이 넘쳐흐르는 사회민주당에 의해 배반당했다.

핵심 국가는 독일이었다. 1918년, 노동자들과 병사들은 성공적으로 구 왕정을 뒤엎었다. 독일의 도시들, 산업들, 군 기지들은 노동자들과 사병들로 구성된 평의회들이 장악했다 (하르만, 2003) 다시 한 번 노동계급은 국가를 급진적 민주적 평의회들 (독일어로 Raete) 로 대체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그러나 사민당 지도부들은 군대, 국가, 자본주의를 유지하기 위해 군 지도부와 거래를 했다. 사민당의 명령 아래에 혁명은 피에 물들었고, 이에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죽음 또한 포함됐다. 불안정한 바이마르 공화국이 수립됐다. 1923년, 새로 나타난 공산당이 또 다른 독일 혁명을 시도했지만 경험부족과 모스크바로부터의 잘못된 지시 (스탈린주의화가 되어 있던) 로 인해 실패했다.

1920년대 후반기에는 혁명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란 것이 확실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국가가 안정되어 있던 것도 아니었다. 가장 큰 하나의 정당은 사민당이었는데, 그들은 집권했다 퇴진하기를 반복했다. 오늘날과는 달리 사민당은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라 칭하며 새로운 사회를 위해 싸우는 조직으로 자신들을 정의했다. 그들의 노동자 당원들은 그들을 믿었다. 그들의 관료적 지도부들은 합법수단, 의회주의, 평화로운 노사협약을 믿으며 체제 내에서 일하는 것에 전념했다. 그들의 왼쪽에는 공산당이 있었는데, 크기는 했지만 여전히 사민당보다는 작았다. 가장 혁명적인 노동자들이 그들에게 소속되어 있었다. 로자의 후예였던 독립적인 사상가들은 이 시기, 당에서 쫓겨났다. 그 관료주의는 완전히 스탈린의 지시에 따를 뿐이었다.

중도파에는 여러 자유주의 정당들과 온건 자본주의 정당들이 있었는데, 가톨릭 중앙당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들은 그들의 지지기반을 극우에 넘겨주게 된다. 이는 전직 군인, 흥분을 만끽한 깡패들과 다양한 집단들이 원인이었다.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이 가장 거대한 정당이 됐다. 그 이름은 민족주의적 독일인들과 사회주의적 노동자들 모두에게 매력적인 것이었다. 한 편으로 그들은 국가적 자존심을 끌어올리며, 독일은 사회주의자들이 군에서 배후중상을 부려 전쟁에서 패배했다고 주장했다. 또 한편으로는 그들은 부자들에 대한 증오심을 불러일으켰으나 이는 유대인들에 대한 적개심으로 돌려졌다 (나치가 그들을 진짜 부자들에게 팔아넘길 수 있도록 내버려두고).

1929년의 경제붕괴와 대공황 이후, 국가사회주의자들 (혹은 나치) 은 급격히 성장했다. 그들은 모든 계급에서, 특히 몰락한 중소상공업자, 학자, 자영업자, 화이트 칼라 노동자, 관료, 교사, 기술자, 무직 대학 졸업자, 부자들에 대해 분노하고 있으나 가난한 자들을 혐오하는 자들, 반자본주의적이지만 그들 스스로가 프롤레타리아로 전락하는 거을 두려워하는 중산층에서 성장했다. 혁명적인 상승기간 동안 많은 사람들이 노동계급 정당으로 눈을 돌렸다. 화이트 칼라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결성이 있기도 했다. 그러나 좌익진영은 자신들이 사회적 상황을 해결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증명했고, 사람들은 고통을 끝낼 수 있는 권력을 가진 그 어떤 것이던 찾기 시작했다. 아돌프 히틀러의 공약은 모순적인 약속들과 헛소리들로 가득 차 있었지만, 적어도 그는 듣기 좋은 말과 함께 직접적인 행동을 약속했다.

히틀러에게 승리하는 데에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는 실질적 권력의 중심, 특히 주요 자본가들과 장군들의 지지를 얻는 것이었다. 파시스트들은 그들 스스로 그 일에 착수했다. 처음에 대기업들은 파시스트들을 원하지 않았다. 같은 조건이라면 자본가 계급은 제한적인 민주주의를 선호했다. 이것이 그들 내부 세력들 간의 갈등을 피 흘리지 않고 해결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이는 사민주의자들이나 자유주의자들과 같은 반대파들이 자신들에게 협력하도록 만든다. 이는 대중이 대중 스스로가 국가를 이끈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대공황 시기 독일에서는 모든 것이 통제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대기업들은 노동자들의 평균적인 삶의 질을 낮추고 이윤을 올리기 위해 노동조합과 노동자 정당들을 타격해야 했다. 그리고 동유럽과 천연자원들이 있는 곳, 다른 이윤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곳으로 확대하는 것을 원했다. 그리고 이는 장군들의 욕구와도 맞아떨어졌다. 그들은 사회적 질서를 원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나치를 고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나치는 권력을 잡을 준비가 됐다.

나치는 자본가들에게 왕정과 관료적 경찰국가와 같은 그저 또 다른 권위주의적 국가 그 이상의 것을 제시했다. 그들에게는 절박한 중산층 인구의 대중운동이 있었고, 노동자 정당과 노동조합을 확실히 타격하는 데에 사용할 수 있었다. 그들은 수천 명의 제복 입은 깡패들을 조직해 노동자들과 싸울 준비를 하고, 노동자들의 조직을 박살내고, 노동자들의 삶의 질을 끌어내렸다. 나치는 그저 선거에서만 활동하지 않았다. 그들은 노동자들의 집단행동을 직접 공격했고, 거리에서 사민주의자들을 두드려 팼고, 그들의 신문이 판매되는 것을 막고, 정적을 암살하고, 공포정치를 형성했다. 경찰은 그들을 통제하지 않았다. 판사들은 그들을 솜방망이 처벌로 봐줬다. (근본적인 문제는 나치들에게의 제공된 "언론의 자유" 가 아니라 그 누구도 그들의 살인적 법외적 행위를 막지 못한 것에 있다.)

자라나는 파시스트들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사민당의 관료들은 오래되고 검증된 방법을 사용하고자 했다. 그들은 국가사회주의자들을 또 다른 선거에 나서는 정당 이상이하로 보지 않았다. 사민당은 선거에 나섰고, 의회에서 활동했다. 그들은 그들의 조직을 지켰고, 그들의 노동조합, 그들의 신문, 그들의 노동자 지역조직을 지켰다. 그들은 국기단이라 불리는, 실제로는 거의 단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았던 무장노동자들의 자위조직인 국기단을 조직했다. 그들은 나치즘을 합법적 선거로 물리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보았다.

조금 더 미래로 가서, 1932년에는 또 한 번의 중요한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히틀러가 참여했다. 공산당도 그들의 당수를 출마시켰다. 보수주의자들은 나이 많은 왕정주의자 장군인 폰 힌덴부르크를 출마시켰다. 사민당은 히틀러를 막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겼고, 이는 선거주의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그들은 폰 힌덴부르크를 지지했고, 파시스트가 아닌 차악으로서 보았다. 그들의 슬로건은 "히틀러를 타격하고 힌덴부르크를 뽑자!" 였다. 폰 힌덴부르크는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여러 사건들이 있던 이후, 그는 히틀러를 수상으로 임명했고, 그것으로 기나긴 어둠이 시작됐다 (드래퍼, 1972). 폰 힌덴부르크는 나치가 아니었다. 그는 이 무지렁이들이 존경받는 인물들을 통해 통제될 수 있다고 바라보았다. 히틀러가 그의 차악이었다. 독일인들은 단 한 번도 다수표를 줬던 적이 었지만, 그들은 그럼에도 권력을 가져갔다. 우리는 조직된 노동계급의 사활이 걸린 극단적 상황 속에서조차도 선거주의는 작동하지 않음을 볼 수 있다.파시즘에 맞선 투쟁은 선거전술의 틀 바깥에서 이뤄졌어야만 했다.

또 다른 핵심은 나치들이 부상 할 때, 수백만 명의 혁명적 노동자들이 스탈린주의 관료주의에 의해 묶여있던 공산당의 행동이었다. 안타깝게도 공산당은 20년대와 30년대 초, 모스크바에서 채택된 미친 방침으로 인해 완전히 방향성을 상실했다. 이 방침들은 제 3기라고 불리는 혁명적 시간대로 세계가 접어들었다고 이야기했다. 제 1기는 1차 세계대전 이후의 혁명적 기간이며, 제 2기는 그 이후의 개량주의적 정치가 적합했던 안정기이며, 바로 지금이 제 3기라는 것이었다. 개혁을 위한 투쟁은 내팽개쳐졌다. 공산당은 사민당 주도 노동조합에서 탈퇴하고 그들만의 극도로 혁명적인 노동조합 (하지만 작은)을 만들었고, 지금이 바로 최후의 혁명적 전투의 시기라고 바라봤다. 이 정책은 절대다수의 노동자들이 여전히 사민당과 그들이 주도하는 노동조합에 소속되어 있었고, 그들은 1918년과 1923년 혁명의 실패 이후 혁명에서 한 발자국 물러서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이는 당면한 파시즘에 맞서 노동자들의 당면한 민주적 권리를 지키는 과제를 무시한 것이지, 혁명적 시도를 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접근을 뒷받침하는 이론은 "사회파시즘" 이론이었다. 여기서는 파시스트들만이 파시스트인 것이 아니라, 공산당 이외의 모든 정당들과 조직들 또한 파시스트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는 "사회파쇼" 인 사민당 또한 또 다른 종류의 파시즘으로 포함했다 (아나키스트들은 "아나키즘적 파쇼" 였다). 스탈린은 "파시즘은 사민주의의 적극적인 지원에 기반을 둔 부르주아 계급의 전투 조직이다. 객관적으로 사민주의는 파시즘의 온건파이다. 이 조직들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그들은 대척점이 아니라 쌍둥이이다." 라고 세계에 선언했다.

개량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 사민주의자들까지도 자본주의를 지지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들의 약점으로 인해 그들은 파시즘이 자라나고 권력을 잡는 것을 용인했다. 하지만 그들이 파시스트들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이것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다! 사민주의자들은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유지하는 데에 있어 이해관계가 있었다. 그들의 정당, 그들의 노동조합, 그들의 다른 모든 조직들은 오로지 선출된 정부, 언론의 자유, 조직의 자유의 존재 아래에서만 존재할 수 있었다. 파시스트들은 반면 선거와 마찬가지로 노동자들의 조직을 파괴하고자 했다. (비록 히틀러가 집권하기 이전의 일이지만, 파시스트 이탈리아가 그 명확한 선례다.)

스탈린주의자들에 의해 사민주의자들이 파시스트로 결정된 이상, 나치에 맞선 그 어떤 연합도 형성될 수 없었다. 그리고 실제로 공산주의자들은 사민당에 맞서 나치와 연합하여 어느 한 지역의 사민당 정부에 반대하는 주민투표를 지지하기도 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또한 파시즘적이고 파시즘의 통치와 다를 바 없다는 이유 덕분에, 나치에 맞서 민주적 권리를 수호하고자 하는 그 어떤 노력도 있을 수는 없었다. 그들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아래에서는 노동자들이 그들의 노동조합과 정당을 가질 수 있었고, 진짜 파시즘 아래에서는 그 모든 것들이 파괴되고 불법화되며 지도자들이 살해됐을 것이란 것을 무시했다. 이는 분명 큰 차이다! 즉, 핵심은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존재할 수 있도록 하는 노동자 민주주의적 요소를 수호하는 것이었어야 했다.

사민당과의 그 어떤 동맹도 거부하는 것이 괴상한 일인 것처럼 보이자, 공산당은 "아래로부터 통일전선"을 요구했다. 이는 사민당 지도부들이 아니라 사민당 평당원들과 일반 지지자들과 동맹을 맺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민주의자 노동자들이 사민당 지도부를 지지하도록 만든 것은, 그들이 공산당이나 다른 정당의 지도부나 정당을 지지하지 않고 그들의 지도부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의 지도부와 조직을 공산당을 지지하기 위해 버리고자 하지 않았다 (통일전선과는 별개로 사민당을 탈당하고 공산당에 입당할 준비를 했던 소수를 제외하고).

이러한 상황들은 (제 3기와 사회 파시즘 이론) 시대의 객관적 분석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러시아 관료들의 필요에 의해 나타난 것이다. 소련은 급격한 산업화와 농업의 집산화를 실행하고 있었다. 이 광란에 가까운 추진은 구 혁명가들에 대한 거대한 내부적 숙청과 더불어 수백만 명의 과로와 기아로 인한 사망자들을 낳았다. 공산주의 정당들에 대한 국제적인, 초좌파적인 방침은 러시아 내부 정치적 상황을 반영한 것이었다.

사민당은 합법적이고, 선거주의적인 전술에 모든 것을 쏟아부었고 공산당은 미친 전술에 의해 막혀있었다. 모든 다른 조직들과 경향들은 작고 미약했으며, 여기에는 아나키스트들 또한 포함됐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을 예시로 들면, 그들은 고작 수백 명의 지지자들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다만 지적이고 현실적인 대안적 지향을 제안한 당대 트로츠키의 저술을 보면 흥미로운 점이 있다.

(아나키스트들이 트로츠키로부터 배울 점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논쟁의 여지가 있다. 아나키스트들이 자유의지주의적인, 인본주의적인 마르크스주의자들과 공통점이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적잖게 나오는 이야기지만, 이건 또 다른 의미이다. 트로츠키 [와 레닌] 는 아나키스트들과는 다른 [중앙집권적 경제를 통해 운영되는 중앙집권적 국가를 통제하는 중앙집권적 정당의 통치] 목표를 가지고 있었으나, 그들의 수단은 아나키스트들과 겹치는 면이 있다. 왜냐하면 (고립되고 빈사 상태에 빠진 레닌주의자들인 스탈린주의자들과는 달리) 트로츠키와 레닌은 정말, 정말로 국제 노동계급의 혁명을 바랬기 때문이다. 그들은 노동계급이 스스로 자본주의에 맞서 조직하고, 그것을 전복시키기 위한 전술과 전략을 매우 진지하게 고민하고 고안했다. 그러한 전술과 전략들은 많은 경우 여러 방면에서 아나키스트들의 약점이 되기도 했다. 레닌주의자들의 목표가 그들의 정당이 권력을 잡도록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노동계급 혁명을 원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며, 이는 단 한 순간도 노동계급의 조직적 혁명을 조직한 적이 없던 스탈린주의자들과는 다르다. 간단히 말해서 트로츠키의 수단은 자유의지주의적 사회주의자들의 그것과 겹치기는 하나, 그의 최종적 목적은 분명 달랐다. 이러한 수단들에 대해 주의 깊게 분석한다면 나치즘에 맞선 투쟁과 같은 상황에서 아나키스트들에게 유용한 수단이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트로츠키주의, 혹은 마르크스주의 전체에 동의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트로츠키는 좋은 이유와 나쁜 이유로 공산주의자들에게 글을 썼다. 좋은 이유로는 공산주의자들 중에는 다수의 혁명적 노동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나쁜 (혹은 어리석은) 점은 그가 여전히 그의 지지자들과 함께 독일과 러시아의 공산당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가 그의 평생을 스탈린주의에 맞서 싸우기는 했지만, 그는 스탈린주의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가 그것에 어떤 것을 기여했는지 결코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공산주의자 노동자들에게 나치즘은 그저 또 다른 권위주의적 운동이 아니라는 것임을 경고했다. 기존의 부르주아 정당들 또한 파시스트들이라는 단정은 나치 (진짜 파시스트들인) 들 또한 그들과 다를 바 없게 보이도록 했다. 나치즘이 자본주의를 대체하려 하지는 않았고, 거대 자본가들은 나치 아래에서 꽤 잘 살아갔다. 하지만 이는 대중운동이었다. 국가권력과 이것이 결합한다면, 이는 독특한 형태의 억압이 될 것이었다. 이는 노동자들의 조직을 완전히 파괴할 것이었다. 이는 노동자들의 지도자들뿐만이 아니라 평조합원들까지 살해하려 들 것이었다. 모든 마을과 이웃에 공작원들이 있을 것이었고, 모든 스포츠와 체스클럽, 모든 상점에 또한 마찬가지일 터였다. 그는 그렇게 경고했다.

"노동자, 공산주의자들이여, 그대들은 수십만, 수백만이지만 그 어디로도 떠날 수 없다. 그대들을 위한 여권은 충분하지 않다. 파시즘이 권력을 잡으면 그대들의 두개골과 척추를 전차마냥 짓밟을 것이다. 그대들의 구원은 무자비한 투쟁에 있다. 오직 사민주의 노동자들과의 전투적 단결만이 승리를 가져올 수 있다. 서두르자, 노동자, 공산주의자들이여, 그대들에게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트로츠키, 1971, p. 163)

그는 공산주의자들에게 사민주의자들과의 동맹을 제안할 것을 제안했고, 거부한다면 사민주의자 지도자들을 공개하라고 제안했다. 이 노동계급 동맹 (통일전선) 은 현실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 정당들과 그들의 노동조합들과 여러 조직들은 서로를 나치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할 것에 동의할 것이다. 모든 도시와 모든 마을에서 그들은 통합방어위원회를 구성할 것이다. 그들은 상호 순찰을 통해 나치를 거리에서 몰아낼 것이다. 파시스트 본부를 찾아내고, 그들에 맞서 싸움을 이어나갈 것이다. 그들은 상점들과 일터에 위원회를 형성하고 그들이 파시스트들 지원하는지 확인하며, 지원한다면 그것을 멈추기 위해 조치를 취할 것이다. 그들은 파시스트들이 지역적으로나 국가적으로 권력을 장악했을 때 총파업을 위한 공동계획을 세울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실용적이고 탄탄했다. 트로츠키는 나치에 맞서는 상황 속에서 방어위원회와 공장위원회가 러시아 혁명기의 소비에트들처럼 (원래 파업 위원회였던), 처음에는 소수였지만 최고의 계획과 투쟁성을 갖췄기에 우위에 섰던 혁명가들처럼 될 것을 소망했다. 그러한 위원회들은 사회주의로의 전환을 향한 계획들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상황들이 진행될수록 그들은 혁명의 본령을 따라갈 것이다. 그들 부르주아 국가의 틀 자체를 평의회 제도로 전환할 지도 모를 것이다.

트로츠키는 공산주의자들과 사민주의자들의 통합을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는 두 세력이 공동 후보를 내거나 공동 선전물을 내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다. 이는 동맹이었지, 통합이 아니었다. "따로 행진하며, 함께 타격하자!" 라고 그는 말했다. 노동자들은 혁명주의자들과 개량주의자들이 함께 움직이는 것을 보고 그들을 서로 비교한 뒤, 혁명주의자들을 고를 것이라 그는 여겼다 (공산주의자로 보이는 사람들을). (1) 혁명주의자들이 개량주의자들과 분리되어 명확한 계획을 세우고 스스로 혁명의 깃발을 올리기 위해서, 그리고 (2) 대중행동과 노동조합, 대중운동에 개량주의자들과 함께 동참하면서 혁명적 움직임이 가장 좋은 것이라 설득하기 위해서 이는 중요했다.

이러한 생각들이 우리에게는 상식적으로 보일 수 있다. 이탈리아의 아나키스트들이 근본적으로 주장했던 것, 파시스트에 맞선 상호방어를 위한 노동자 조직들의 연합과 비슷한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계급의 위에 공산당을 집권시키겠다는 트로츠키의 궁극적 목표를 무너뜨리는 것이긴 하지만). 계급에 맞서는 계급. 주목할 만한 것은 공산당이 재기했던 사회파시즘 이론 (그렇게 불릴 수 있는 정도라면) 에 대한 저항이었다. 공산당 지도부는 사민당이 1918년 혁명을 배반했으며, 룩셈부르크를 포함한 많은 공산주의자들을 살해했고, 지역 경찰 지도부를 포함해 부르주아 정부에 한 자리를 얻으면서 선거에 나가 당선됐으며, 억압적 법안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고 지금도 그렇다고 짚었다. 모든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러나 그것이 사민주의자들이 파시스트들이라는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사민주의자들은 여전히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기대고 있었으며, 이는 나치가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자본주의가 아닌) 파괴하려 했던 것과는 대조된다. 나치에 맞서, 트로츠키는 "악마와 그 할머니" 와도 동맹을 맺을 것이라 천명했고, 심지어는 혁명주의자들을 억압했던 사민주의자들과도 그럴 것이라 이야기했다. 그는 이솝우화 형식으로 우화를 썼다.

"하루는 소를 파는 상인이 소들을 도축장으로 끌고 왔다. 그리고 도살자가 날카로운 칼을 들고 가까이 다가왔다.

'우리가 대열을 좁혀서 저 처형자를 뿔로 돌격해 몰아내자.' 소들 중 한 마리가 제안했다.

'저 도살자가 우리를 이곳으로 끌고 온 상인보다 더 나쁘다고 말할 게 있다면 이야기해 봐.' 라고 마누일스키 [스탈린의 코민테른 비서] 에게 정치적 교육을 받은 소들이 답했다.

'그 이후에 상인을 상대할 수 있을 거야.‘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야.' 소들이 그들의 강령에 확신에 차 말했다. '넌 우리의 적을 좌익으로부터 보호하려 애 쓰고 있어. 넌 네 스스로 사회도살자임을 인증한 거야.‘

그리고 그들은 대열을 좁히는 것을 거부했다" (트로츠키, 1971, p. 293).

나치들은 어느 정도 합법적으로 권력을 쥐었다. 그들은 그 이후 모든 선거와 정당을 폐지했고, 이는 노동자 정당들과 부르주아 정당들 모두 포함된 것이었다. 그들은 그들을 지원하는 자본가들을 기쁘게 만들기 위해 노동조합을 불법화했고 노동조합의 지도부를 체포했으며, 노동자 정당들의 지도부와 심지어는 그 평당원들까지 체포했다. 자본가들과 장군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그들은 그들의 좌익적 목소리를 믿었던 자신들의 지지자와 당원들 또한 살해했다. 그들은 모든 마을, 스포츠 클럽, 공장에 그들의 지지자들을 꽂아 넣었다. 서서히 (트로츠키가 예상했듯), 그들의 중산층 지지자들은 나치의 거대 자본의 지지를 받기 위한 행동들에 의해 배반당했다. 나치는 대중운동에 대한 필요성을 상실했다. 그렇게 되면 그 정권은 또 다른 관료적 경찰국가로 전락하고, 특수한 투쟁심 또한 잃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미래에 있을 일이었다. 당장 정권은 인류 역사상 그 누구도 견줄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르기에는 충분히 강했다 (홀로코스트와 그 다른 것들). 이는 미국, 영국, 러시아 제국주의가 마침내 그 강대한 힘을 통해 나치를 타격하도록 만들었다.

공산당과 사민당은 나치가 권력을 잡을 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총파업도 없었고, 반란도 없었다. 그들은 거의 신음조차도 내지 않고 무너졌다. 사민주의자들은 그들이 불법화되기 직전, 나치의 외교 정책에 의회에서 찬성표를 던졌다. 이는 노동계급에게 막대한 패배가 되었고, 그 영향은 지금까지 남아있다. 살해되거나 체포되지 않은 사민당 지도부들은 서방으로 망명을 떠났다. 그들은 연합군이 또 다른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수립할 때 다시 돌아왔다. 살아남은 공산당원들은 러시아로 떠났다. 많은 이들은 스탈린에 의해 살해당했다. 다른 몇몇은 러시아군과 함께 돌아와 그들만의 전체주의적인 국가자본주의 국가를 동부 독일에 세웠다.

공산주의 정당들은 그들의 이론과 실천에서의 실수를 분석하고자 하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이 했던 모든 것이 옳았다고 판단하고 행동했다. 그리고 그들은 조금 더 우익적 방향으로 전환했다. 그들은 통일전선을 지나 인민전선으로 움직였다. 이는 계급을 넘나드는 동맹이었고, 노동자 정당들뿐만이 아니라 자유주의적 부르주아 정당들과의 동맹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는 어떠한 사안에 대한 일시적 동맹이 아니었다. 이는 통합된 정치권력을 확보하기 위한 장기적인 동맹인 것처럼 보였다. 이는 그들의 실천이 부르주아 파트너와의 동맹을 유지하기 위해 친자본주의적 수준에서 더 나아가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자본주의 정당은 항상 다른 자본주의자들이나 파시즘의 공격에 취약했다. 파시즘은 자본가 계급 (혹은 그 기반)을 위협하지 않았고, 그 대신 노동계급과 그 조직들을 위협했다. 인민전선 정부는 프랑스에서 권력을 잡았다. 우리는 스페인에서의 인민전선이 만들었던 효과를 볼 수 있었고, 이번에는 심지어 아나키스트들 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트로츠키는 마침내 공산주의 정당들이 희망이 없다는 것을 인지했고, 그들에게 다시 합류하고자 하는 시도를 포기했다. 그는 소련 관료주의에 맞선 노동자들의 혁명을 촉구했다. 그는 다당제, 민주적 소비에트를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스탈린주의 러시아가 자본주의로부터 수호되어야 할 노동자 국가라고 믿었고, 국유화 된 생산수단들을 노동자 국가의 조건으로 인정했다. 그는 새로운, 네 번째 인터내셔널을 만들었고, 그 시도는 완전히 실패했다. 후기트로츠키주의자들은 각각 사민주의나 스탈린주의의 한 종류가 되거나, 둘 모두의 종류가 되었다.흥미롭게도 스페인 트로츠키주의를 이끌었던 그란디소 무니스는 아마도 아나키즘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두루티의 친구들의 이론적 지도자였던 하이메 발리우스의 친한 친구였고, 심지어 그는 멕시코에서 망명해있는 동안 같이 살기까지 했다 (기야몬, 1996). 이것이 아마 무니스가 트로츠키주의적 "퇴보한 노동자 국가" 이론을 거부하고 러시아에 대해 국가자본주의적 분석을 한 것과, 그가 전위당을 부정하고 나섰던 요인이었을 것이다 (홉슨&타보르, 1988). 무니스는 동시에 적어도 스탈린주의 러시아가 국가자본주의 체제였다는 것에 동의했던 트로츠키의 미망인인 나탈리아 세도바와 친구이기도 했다.

보르디가주의자 (권위주의적 극좌 경향) 로 일컬어지는 기야몬 (1996) 은 두루티와 친구들이 혁명적 프로그램과 이를 위한 조직의 필요성 (전위)을 "아나키즘적 관용어" 와 "정통 마르크스주의적 가정" 에 의거해 재창조하고 있다고 보았다. 이것이 사실일지라도, 그들이 아나키즘적 전통에 의거해 그렇게 했다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평의회들의 연방이 혁명을 조직하는 개념이 오랫동안 아나키즘의 한 부분이었기 때문에 사실이 아니다. 주요 아나키스트 조직들이 그들의 활동을 이어나가지 못하고 실패한 것은 다른 문제다.

아나키즘이 운동적으로서 스페인에서 실패했다고 말할 수 있지만, 마르크스주의 또한 그렇게 잘 됐다고 볼 수는 없다. 전체적으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유주의적 부르주아 국가에 아나키스트만큼이나 (혹은 더) 적극적으로 투항했다. 사회주의자들은 국가주의적 개량주의에 찌들어갔고, 중도주의 POUM 이 새로운 국가의 필요성을 외치며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위치를 차지했으나, 실질적으로는 구체제에 합류했다. 스탈린주의 스페인 공산당은 그냥 반동이었다 (정작 스탈린주의자라 할지라도, 여러 정당들의 평당원들의 순진한 이상주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POUM 내 중도주의자들에게 자리를 잃었고, 작은 두 정파로 나뉘어 다시는 대중적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오직 작은 마르크스주의자 조직 (트로츠키주의자들) 과 아나키스트 조직 (두루티와 친구들 그리고 몇몇 조직) 들만이 부르주아 국가와의 협조를 거부하고 평의회들의 연방을 조직하는 데에 찬성했다. 노동계급은 국가를 새로운 대중권력의 조직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그들의 조직들 때문에 큰 대가를 치렀다.

그러나 스페인 혁명 패배의 실질적은 효과는 수 세대에 걸쳐 거대한 국제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아나키즘의 마지막 기회를 쓸어버리는 것이었다. 스페인 아나키스트들은 그들 스스로의 약점뿐만이 아니라 객관적 요인들로 인해 국제운동과 해방에 대한 희망을 후퇴시킨 패배를 겪었다. 아나키스트들은 다른 국가들에도 조직을 갖추고 있었지만, 스페인이 산업중심지에서 파시즘에 맞서 싸우는 마지막 희망이었다. 많은 세계의 투쟁하는 사람들에게 나치즘과 파시즘을 이겨내는 유일한 희망은 서방, 혹은 러시아 제국주의를 지원하거나 그 둘 모두를 지원하는 것으로 결정지어졌다. 자유의지주의적 사회주의가 다시 유의미한 세력으로 재부상하기 까지는, 서구 민주주의와 스탈린주의가 동시에 충분히 무너지는 긴 시간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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