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결론 : 혁명적 민주주의
12장. 민주주의냐 국가냐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모든 봉기들은, 그것이 혁명적이었건 반혁명적이었건 간에, 관료주의적이고 군사주의적인 자본주의 국가를 국가없는 사회로, 자주경영의 사회로, 참여적인 사회로 대체할 가능성을 제기해 왔다. 이러한 경향성을 무엇이라 묘사하면 좋을까?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국가 사회주의 전반에 대한 신뢰는 지속적으로 하락해왔다. 직접적이고 대면적인 정치적 · 경제적 자주경영을 개념화할 수 있는 대안적 방식이 필요한 시기가 되었다. 많은 좌파들은 민주적 혁명이라는 또 다른 전통으로 고개를 돌렸다. 민주주의는 자본주의 사회의 권위주의에 반대하는 토양이라 볼 수 있다. (Laclau & Mouffe, 1985; Morrison, 1995; Mouffe, 1992, 1996; Trend, 1996; Wood, 1995). 사회주의는 급진적 민주주의를 확보하기 위한 수단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급진적 민주주의가 사회주의를 확보하기 위한 수단이 되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계급적으로 “민주주의”는 두 가지 상호모순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민주주의는 현존 국가를 정당화하는 기제일 수도 있고, 혁명적 대중해방의 전통일 수도 있다. 위에서 주어진 민주주의일 수도 있고, 아래에서 건설한 민주주의일 수도 있다. 민주주의의 이상은 아름답다. 그렇기에 현존하는 “민주주의” 국가들이 민주주의를 주요 이데올로기로 둔다. 주기적 선거와 (상대적) 표현과 결사의 자유는 실질적으로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사회를 정당화하는 기제로 사용된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는 지배자의 각 세력들이 상대적으로 평화롭게 다툼을 종식시키기 위해 사용된다. 민주주의는 반란적 대중의 세력을 체제 내로 끌어들이는 기제로 사용된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지배계급에 대한 압제당한 이들의 울부짖음이기도 하다. 민주주의는 평범한 사람들이 사회 구성에 참여하여 통제권을 가져와야 한는 외침이다. 이러한 이상은 부족 평의회를, 고대 아테네를, 영국과 미국, 프랑스의 부르주아 혁명을, 미국의 민권운동을 거쳐 오늘날 수백만의 인민이 사랑해 마지않는 이상으로 자리잡았다. 민주주의는 인민의 투쟁이 흘린 피로 지배자들로부터 빼앗아온 권리다. 민주주의는 국가를 판단하는 준거다. 민주주의는 국가를 반대할 근거다.
수세기 동안 “민주주의”는 급진적 개념임과 동시에 계급적 개념이었다. 고대 그리스에서 민주주의는 부유한 귀족이 아닌 가난한 대중의 통치를 의미했다. 플라톤은 귀족정을 찬미하면서 민주정을 비난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귀족정에 일부 민주적 요소(대의제)를 가미한 혼합 정부를 원했다. 루소 등의 계몽사상가들은 대면적 공동체에 근거한 직접 민주주의를 주장했다. 미국 독립전쟁 말기, 대부분의 건국의 아버지들은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끔찍하게 여겼다. 이들은 가난한 다수가 부자의 부동산을 약탈할 법을 만들 것이라고, 화폐의 가치를 떨어트려 부채를 탕감해낼 것이라고 여겼다. 이들은 새로운 사회의 민주적 요소들을 통제하기 위하여 헌법을 만들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민주주의”라는 단어는 급진성과 계급성을 내포한 채로 확산되어갔다.
사회주의적 아나키즘을 가장 극단적이고 공고하며 전면적인 민주주의라 바라보는 사람으로서, 이러한 이론적 발전은 흥미로운 것이다.(프라이스, 2000) 폴 굿먼이나 노엄 촘스키 같은 이들은 그들의 아나키즘이 제퍼슨으로부터 존 듀이까지 이어져 온 민주주의 전통의 연장선이라고 주당한다. 19세기 미국의 아나키스트였던 벤자민 터커는 “아나키스트들은 단지 극단적인 제퍼슨주의적 민주주의자일 뿐”이라고 말한 바 있다.(크리머맨&페리, 1966) 엠마 골드만의 전기 작가는, 엠마가 “단지 극단적인 연방주의적 민주주의자”였다고 말한다. 조지 버나드 쇼가 아나키즘을 공격하기 위해 쓴 글에서 그는 “아나키즘은 민주주의를 최대한 밀어붙이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현대의 아나키스트인 머레이 북친은 “자유로운 사회는 민주적이지 않을 수 없다”고 쓰고 있다.
하지만 아나키즘과 민주주의의 역사적 관계는 매우 애매모호한 위치에 놓여있다. 이 둘 모두가 얼마나 모호하고 결론이 미정인 상태로 있어왔는지를 고려해보면, 놀라운 일은 아니다. 아나키스트 역사학자인 조지 우드콕은 아나키즘은 민주적이지 않고 “귀족적”이라고 말한다.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인 할 드레이퍼는 아나키즘이 반민주주의적이라고 공격한다.(아래를 보라)
국가없는 사회를 구상함에 있어 민주주의를 거부한 것은 아나키스트만 있는 것이 아니다. 레닌은 『국가와 혁명』에서 “민주주의는 국가”이기에, “국가의 철폐는 민주주의의 철폐를 의미한다”고 적고 있다. 레닌의 목적이 민주주의가 없는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레닌이 실제로 그러한 사회를 건설해버렸다 해도, 분명한 오류이지 않겠는가. 하지만, 나는 아나키스트들이 민주주의와 어떠한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에 집중하여 논의를 풀어내고자 한다.
“아나키스트”라는 단어를 가장 먼저 사용했다고 알려진 저작 『소유란 무엇인가』에서 프루동은 노골적으로 그가 민주주의자라 불리는 것에 반발했다. “몇몇 독자들이 보내온 편지에서 그들은 ‘당신은 민주주의자다’라고 말한다. ‘아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무엇인가?’ ‘나는 아나키스트다.’”(우드콕, 1962) 하지만 수년 후, 프루동은 국가를 자발적으로 연합한 생산자 조합, 즉 “민주주의적 사회 공화국이라는 공통분모로 묶인 광대한 연방”이라는 민주적 형태로 대체할 것을 옹호한다.
아나키즘은 두 가지 의미로 존재하는 민주주의에 대하여 독특한 관점을 제시한다. 자유주의자들과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민주주의를 신봉하며 스스로 “민주사회주의자”라고 자칭한다. 하지만 이들은 체계에 매우 비판적인 동시에 민주주의 이론의 신비로운 측면에 굴복한다. 이들은 현존국가가 민주주의적이라 바라보면서, 이를 수정하고, “더 민주적”으로 만들고자 한다. 그 반대편에는 권위주의적 혁명세력(스탈린주의자, 급진적 민족주의자 등)이 있다. 이들은 미제국주의가 만들어내는 민주주의라는 환상에 빠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의 목적은 국가를 새로운 국가로 바꾸어 그 지배권을 가져오는 데에 있다. 이들은 대중의 자주경영을 목적으로 두는 것을 거부한다.
아나키스트들은 현존국가가 민주적이기에(혹은 그래야 하기에) 그것을 지재해야 한다는 주장을 거부하면서 해방 기제로서의 민주주의라는 관점을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이를 위해 아나키즘과 민주주의는 함께 받아들여져야 한다. 이 문제를 명확히 하기 위하여, 나는 먼저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아나키즘을 비판하고, 아나키즘의 관점에서 민주주의를 비판해보고자 한다. 로버트 달의 『민주주의와 그 비판자들』은 민주주의 민주주의에 관하여 명확하고 사려 깊은 서술을 하고 있는 저서다. 달은 주장을 전개하기 전에, 민주주의에 “반대되는” 두 가지 경향에 대하여 논한다. 하나는 아나키즘이고, 하나는 “후견주의”다.
달은 아나키즘이 “순수하게 자발적인 연합체만으로 구성된 사회, 국가없는 사회”라고 정의한다. 이는 충분히 옳다. 그는 이 연합체들이 민주주의와 마찬가지로 잘 운영될 것이라고 첨언한다. 그리고 이것은 아나키즘이 민주주의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 국가”에 반대하는 것임을 명확히 한다. 안타깝게도, 달은 “국가”가 무엇인지 설명하지 않는다. 달이 의미하는 바 “국가”는 분명하게도 “조직적 억압의 주된 수단”인 것이다.
달은 어느 정도의 억압은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모든 사회적 억압에 반대하는 아나키스트들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한다. 새로운 사회 건설의 목적은 “억압을 최소화하고, 만족을 극대화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나는 그의 목표에 근본적으로 동의한다. 아나키즘적 자유를 쟁취한 이후 수 세대가 지난 후에야 어쩔지 모르겠지만, 새롭게 건설된 아나키스트 사회는 미치광이 살인마들이나 조직된 반혁명분자들의 폭력을 통제할 수단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달은 이누이트족과 같은 비문명 사회가 국가없이도 천여년간 만족스럽게 존속하였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이러한 사회가 어떻게 국가가 없이 억압에 대한 사회적 필요를 만족시킬 수 있었는지는 고려하지 않는다.(아나키스트의 관점은 바클리(1990)을 보라)
앞서 언급하였듯, 아나키스트들은 국가를 경찰, 감옥, 군대, 정치적 관료제 등의 특별한 억압 기구를 통하여 소수 계급이 사회를 통제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기구라고 정의한다. 아나키스트들이 주장하는 것은, 이 관료적이고 사회적 소외의 원천인 국가라는 기구를 철폐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아나키스트들이 “민주주의 국가”를 비난하는 것은, 그것이 억압적이기 때문인 것이 아니다. “국가”는 “민주주의”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국가라는 억압의 기구는, 본질적으로 사회 위에 군림하며 반사회적인 기구다. 국가는 소수 지배계급이 다수 피지배계급을 억압하는 것에 복무할 수밖에 없다.
달은 이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지만, 그의 책의 요점은 이 문제와 분명한 연관성을 가진다. 그는 현대 사회는 비문명사회의 부족들이나 후기 도시국가들에 비하여 너무 크고 복잡하기에, 대면적이고 직접적인 민주주의에 기반을 두고 운영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민주주의를 대규모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대의제를 “발명”할 필요가 있었다고 말한다. 그는 현대 사회에서는 대의적 정부(국가)만이 민주주의를 가져올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양면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 대의제는 민주주의 같은 무언가가 현대의 대규모 민족국가에서 성립할 수 있도록 한 것이 맞다. 하지만 이 대규모 민족국가라는 것은 그 자체로서 ‘민주주의’라고 불리는 소수에 의한 지배가 성립할 수 있도록 하고 있는 것도 맞다. 우리는 직접적이고 참여적인 민주주의 대신에, 인민들의 실질적 의사결정을 가로막고 있는 선출정치인들과 정부 관료 계층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소극적인 시민들은 “대표자”들이 그들 대신 정치적이 될 수 있도록 하는 선거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우드(1995)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대의제를 필요로 할 만큼의 거대 공화국을 두는 것의 장점은 대의제를 통해 대중의 열정에 거름막을 둘 수 있게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는 것을 지적한다.
물론, 어느 정도의 대의제는 필요할 수 있다. 아나키스트들은 연방주의자이기에 이러한 주장에 일반적으로 동의한다. 사회적 맥락을 다르게 구성한다면 “대의제”와 민주주의의 여러 요소들은 매우 다른 것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아나키스트들은 크게 두 방향에서의 사회적 변혁을 제안한다.
하나는, 압제자와 피압제자가 모두 사라진 평등한 사회를 건설하거나, 불평등한 관계를 평등하게 재정의하는 것이다. 부가 평등하게 분배되고, 모든 억압을 철폐할 때, 사회는 더 이상 서로 적대적인 세력들간의 알력에 끌려다니지 않게 될 것이다. 사회를 묶어내기 위하여 국가는 필요하지 않다. 국가가 없을 때, 만족을 극대화하고 억압을 최소화하는 것은 더 쉽게 달성할 수 있다.
두 번째로, 아나키스트들은 인민총회를 통하여 실현되는 직접민주주의에 사회가 뿌리를 두어야 한다고 바라본다. 이는 사업장에서, 공동체에서, 다른 자율적 연합에서 모두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지역적으로 이루어지는 결정이 많을수록, 중앙에서 내리는 결정은 줄어들게 된다. 인민들이 직접 민주주의를 더 선명하고 일상적인 삶의 방식으로 경험하면 할수록, 인민들은 대의원 총회에 파견한 대의원들을 실질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만약 전체 인민들이 실질적으로 자신의 주인이라면, 통치하는 자도, 통치당하는 자도 존재하지 않게될 것이다... 국가는 사회와 같은 위치로 격하될 것이고, 산업적 조직 뒤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게랭, 1970)
달 역시 이러한 주장을 인지하고 있었고, 이에 일정 부분 동의했다. 그는 사회적 · 정치적 불평등을 경감할 방법을 찾아 헤맸다. 그는 지역 공동체 층위에서의 의사결정과, 이를 위한 참여의 증대를 옹호한다. 그는 사회가 경제를 소유하고 규제하지만, 기업들의 경쟁은 존재하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지지한다. 다른 “시장 사회주의” 지지자들과 달리, 달은 기업은 노동자들에 의하여 민주적으로 운영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노동 대중의 일상생활에서 권위주의적 기구들이 가지는 중요성을 과소평가하고, 경제적 기업구조의 통제에 더 민주주의적인 체제를 도입하는 것의 결과를 과소평가하는 것은 실책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나 아나키스트들과 달리 사회의 혁명적 변혁의 필요성을 부정한다. “시장 사회주의”라는 단어 자체가, “사회주의”이면서도 경제가 민주적 의사결정으로 운영되는 것이 아니라 시장에 의하여 운영되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달은 우리의 사회가 매우 불평등하다는 것에 동의하면서도, 이 사회가 소수의 지배 아래에 있다는 것은 부정한다.(그 소수가 서로 경쟁하기 때문이다.) 그가 “폴리아키”라고 부르는 이 사회는 불완전하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이 사회가 민주적이고, 지지할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결과적으로, 그는 민주주의가 현존 자본주의 국가를 정당화하는 것을 수인한다.
문제는, 달이 현실을 들어 그의 이론을 뒷받침하고자 할 때마다, 언제나 현존 부르주아 민주주의 국가를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이들을 모형으로 삼는 것은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제한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이 지점에서, 오히려 아나키스트들은 역사적 혁명들에 집중한다.
머레이 북친은 18세기 종교 개혁 시기의 농민반란부터 현대 산업노동자들의 반란까지, 여러 혁명들을 검토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이 모든 혁명들이 국가를 공동체적인 자주적 조직으로 대체하였음을 발견한다. 압제당한 인민들은 언제나 대면적이고 직접적인 민주적 총회와, 소환가능하고 제한적인 위임만을 받은 대의원대회를 조직하여 왔다.
앤디 앤더슨은 1956년의 헝가리 혁명의 교훈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이후 수년간, 혁명가들이 고심해온 중요한 문제들은 단순한 의문점들로 압축되었다. 헝가리 혁명의 강령에 동의하는가, 아니면 반대하는가? 노동자의 자주적 생산 관리에 동의하는가, 아니면 반대하는가? 노동자 평의회를 통한 통치에 동의하는가, 아니면 반대하는가?”
이탈리아의 위대한 아나키스트 에리코 말라테스타 역시 반국가주의와 민주주의의 관계를 제시했다. 말라테스타는 아나키즘의 개인주의적이고 반조직적인 경향성에 반대하면서, 아나키스트들이 자신의 조직을 만들고, 노동대중의 자주적 조직을 촉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20년대에, 말라테스타는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주제에 관한 짧은 글 두 개를 저술했다. 그 중 하나의 제목은 이 글의 주제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아나키스트 : 민주주의자도, 독재자도 아닌 이들”
말라테스타는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국가는 독재를 선호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렇다면 아나키스트들은 민주주의의 이론을 바탕으로 민주주의를 공격할 수 있을 것이었다. “민주주의가 가장 끔찍한 것은, 민주주의는 최소한 교육적 관점에서는 최선의 독재를 선호한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거짓이다. 현실에서 민주주의는 소수가 특권계급의 이익을 보장하는 귀족정이다. 우리는 자유와 평등의 이름으로 이에 맞설 것이다.”
이에서 알 수 있듯이, 민주주의에 대한 말라테스타의 반대는 정확하게 자본주의와 국가의 합리화 이데올로기로서의 민주주의를 향하고 있다. 그러면서 말라테스타는 이러한 민주주의가 주장하는 바 다수에 의한 통치의 원칙을 비난한다. “우리는 다수에 의한 통치도, 소수에 의한 통치도 지지하지 않는다. 우리는 민주주의도, 독재도 지지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유로운 합의를 지지한다. 우리는 아나키를 지지한다.”
“소수에 대한 권리를 존중하는 위에서 이루어지는 다수에 의한 통치”는 민주주의의 원칙이다. 자본주의 아래에서, 이러한 원칙은 착취와 압제를 정당화하는 기제로 전용되어 왔다. “다수에 의한 통치”은 언론 통제 등을 통하여 다수 대중의 여론을 규정할 수 있는 지배적 소수에 의한 통치가 된다. “소수에 대한 권리”는 부자들의 소유 일부라도 가져오려는 다수의 노력을 무산시키는 기제가 된다. 하지만 “다수에 의한 통치”와 “소수에 대한 권리”는 소수의 지배와 그를 뒤따르는 선입견에 찬 대중들을 막아내는 울부짖음이기도 하다.
말라테스타는 가장 계몽된 소수에 비하여 다수가 잘못되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지적한다. 그렇기에 말라테스타는 만약 다수가 통치한다면, 다수는 소수를 지도할 것이고, 다수의 의지를 소수에 강요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소수에 의한 통치만큼이나 옳지 않은 것이다. 만약 다수가 소수를 통치한다면, 그 다수가 소수에 대한 권리를 존중할 것이라는 신용은 어디에서 올 수 있는가? 이러한 이유에서, 말라테스타는 다수에 의한 통치를 원칙적으로 거부한다.
시민사회운동진영의 자유의지주의자들은 집단적 의사결정이 불필요한 살므이 영역 역시 많다는 주장을 오랫동안 해왔다. 이러한 영역들, 이를테면 성적 지향과 같은 영역들에서, 다수가 소수를 통치할 권리는 없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서로 합의한 성인”들이 비이성애적 성행위를 할 권리를 지지한다. 토마스 제퍼슨은 종교 자유에 대하여 주장하면서 “내 이웃이 20명의 신들을 모시건, 신을 믿지 않건, 그것은 나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 그들의 신앙은 내가 돈을 잃게하지도, 내 다리를 부러트리지도 않는다.”고 말한다. 아나키스트들은 다수에 의한 통치의 영역 바깥에서 이러한 자주적 의사결정을 행하는 자발적 연합의 범위를 크게 넓히고자 하는 것이다.
하지만, 집단적 의사결정이 필요한 영역은 여전히 남아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공동체는 새로운 도로 건설을 시행할 것인지에 대한 결정을 내릴 필요가 있을 것이다. 만장일치야말로 최선이겠지만,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다. 다수와 소수로 의견이 나뉠 수 있다. 이것은 자발적 연합의 문제인 것은 아니다.(물론, 자발적 연합이기에 그 구성원들은 언제나 공동체를 해소하고 다른 곳으로 갈 자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공동체들이 도로를 건설할지 말지를 결정할 필요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도로 건설이 이루어지냐 마느냐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다수가 도로 건설을 조직하였을 때, 건설에 반대하는 소수는 건설에의 참여를, 노동력이나 사회적 부를 분배할 것을 요청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동의하건 아니건, 이들은 원하지 않는 새 도로가 건설된 공동체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이러한 것을 만드는 것은, 경찰에 의한 억압이 아니라 현실에 의한 억압이다. 이러한 결정은 집단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만약 의사결정이 다수결 투표로 이루어져서는 안 되는 것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러한 결정은 만장일치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공동체가 결의할 수는 있다. 하지만 모두가 동의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는가? 이러한 경우 소수가 사실상의 비토를 행사할 수 있게 되고, 이는 소수에 의한 통치로 귀결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소수가 “합의를 방해하지 않기” 위하여 발언하지 않기로 결의할 수도 있다. 이것은 그들의 공개적으로 반대할 권리를 부정하는 것이다. 나는 공동체나 조직이 합의에 기반하기로 결정할 권리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수결이 원칙적으로 권위주의적이지는 않다고 바라본다.
말라테스타는 다수에 의한 아래에서 소수가 가질 수 있는 권리가 대체 무엇이겠냐는 의문을 제기한다. 소수의 관점을 가진 사람들은 모든 의사결정에 참여할 권리를 가진다. 이들은 다수를 자기 관점으로 끌어올 노력을 집행할 권리를 가진다. 한 번의 투표에서 패배한다 하더라도, 계속 참여하여 새로운 다수파가 될 방법을 강구할 권리를 가진다. 언젠가 이들이 충분한 공동체 구성원들을 설득해낼 때, 새 도로를 건설하는 것은 오류였다고 규정될 것이고, 이 도로를 무너트리거나 최소한 다른 도로의 건설은 막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다른 문제들에 있어서는 이들이 다수일 수도 있는 것이고 말이다.
소수에 대한 권리를 보장하는 것은 다수에 의한 통치에서 핵심적인 부분이다.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소수의 의견을 들을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채 이루어지는 의사결정은 실질적 의사결정이 아니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가 자행하는 소수 관점에 대한 탄압(무력으로의 탄압이건, 돈과 미디어 장악력의 부족에 의해 이루어지는 탄압이건)은 소수 지배계급이 지배당하는 다수에게, 그들이 통치하고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는 주요한 기제다.
동시에, 다수에 의한 지배(민주주의)는 그 어떠한 소수에 의한 독재보다 소수에 대한 권리를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다. 다수에 의한 지배와 소수에 대한 권리는 서로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필요충분한 것이다.
말라테스타는 민주주의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자유로운 합의”를 제시한다. 하지만 이 둘은 서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자유롭게 자발적인 연합을 구성하는 것에 합의할 수 있다. 이는 우표를 교환하는 것부터 신발을 생산하는 것까지, 모든 영역에 걸쳐 가능하다. 하지만 그 이후에 어떻게 이 연합을 운영하는가? 사람들은 모든 것에 완전히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 만장일치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마다 연합을 해산하는 것 말고 다른 방식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 방식이 민주주의다. 아나키스트들은 민주주의 국가를 지지하지 않지만, 민주주의 사회는 지지할 수 있다. 아나키즘은 국가 없는 민주주의다.
비국가적 민주주의 아래에서도 위계질서를 구성하고자 하는 경향은 발현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사회구성체를 재단하기 위하여 그 사회구성체가 자체적으로 위계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거나, 위계질서를 구성할 위험을 가진다는 등의 절대적 준거를 사용하는 것은 분명한 오류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구성체가 제 아무리 매력적인 것이라도, 일부 순수주의자들은 이 구성을 거부할 것이다. 반면 나는 가능한 탈중앙적이고 비위계적이며, 최소한의 필요를 만족할만큼만 중앙집중적이고 위계적이어야 한다는 기준을 제시한다. 나는 어느 정도의 중앙집중은 필요하다고 상정한다. 그리고 이 집중의 정도는, 그것을 해소하기 위한 인민들의 노력과 함께 서서히 사라져갈 것이다. 결국 문제는 최대한 인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다.
국가 없는 사회에도 갈등은 존재할 것이다. 아나키즘이 인간의 모든 불협화음들을 해결하지는 않을 것이다. 몇몇 평의회에서 다수파가 소수파의 이해득실을 무시한 채 자기 의견을 관철시키기도 할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 소수파는 자기 권리를 위하여 조직하고, 다수파를 설득하고, 아마도 파업이나 불복종같은 투쟁의 방법론을 사용하여야 할 것이다. 반면 다른 평의회에서는 뛰어난 웅변가들과 영향력있는 가문과 같은 소수파가 지배력을 행사할 것이다. 이 때 다수파는 더 많은 민주주의를 위하여 조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어딘가에서는 선출직 관료들이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경우 이들에 반대하는 자들을 선출하기 위한 운동을 조직할 수 있을 것이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아나키즘적 코뮌은 결코 비위계공식 같은 것으로 만들어지는 완전히 조화로운 사회가 아니다. 아나키즘적 공산주의 사회는 “자유의 대가는 영원한 불침번”(토마스 제퍼슨)이라는 말에 따라 운영되는 것이다. 아나키즘적 코뮌에서는 민주주의가 삶의 방식이 되어0 활발한 토론과 조직이 이루어질 것이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가 무엇인가? 이를 알기 위해 우리는 급진주의자들이 아나키즘을 내포하지 않은 민주주의 이론을 개발할 때 발생한 것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이론은 대부분 “민주사회주의”를 다른 말로 쓴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결국, 개량주의적 국가사회주의에 그치는 것이다. 이를테면, 데이비드 트렌드의 『급진민주주의』는 사실상 미국의 개량주의적 민주사회주의자들의 기고문이나 다름없다. 이들은 그들의 사회주의가 국가주의라 인지하고 그것을 부끄러워하지만, 결국 대안이 없기에 경제에 개입하기 위한 수단으로 현존국가를 사용하고자 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급진적인 민주주의 이론은 현존 자본주의 국가가 민주적이라는 것을 강력하게 부정하여야 한다. 사회적으로 소외된 관료적이고 군사적인 국가 체계를 반대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 대신에 총회와 연합들의 민주적 연방체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이는 결국 우리 사회와 국가의 반민주주의적 본성을 호도하는 것일 뿐이다.
샹탈 무페와 그녀의 동료들은 사회주의를 포함하는 급진적 민주주의 이론을 개발하고자 큰 노력을 기울였다. 무페는 그녀가 이르는 바 “급진민주주의”가 현존국가의 대안이 될 수 없고, 현존국가의 연장선에 있음을 분명히 한다. “우리가 지지하는 것은 일종의 ‘급진적인 리버럴 민주주의’다. 이것은 리버럴 민주주의 체제에 반대하는 것도 아니고, 사회의 새로운 정치적 형태를 제시하는 것도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무페는 오직 “국가”에 반대하여 “시민사회”를 반대하는 자들과 논의할 때에만 국가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룬다. “시민사회”가 자본주의, 가부장제, 인종주의의 영역이며, 국가로부터의 구원을 위한 토양이 될 수 없음을 보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시민사회”는 압제자와 피압제자 사이의 긴장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갈등을 내재하고 있다.
무페는 국가 역시 갈등을 내재하고 있기에, 국가를 부정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를테면, 그녀는 국가가 젠더 차별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키거나, 지주에 대하여 농민을 보호하는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다시금 말하지만, 기업의 경영진도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인상해주곤 한다. 노동자들의 투쟁이 그것을 강제하거나, 임금을 인상해주는 것이 노동조합이 생기는 것보다 장기적으로 더 싸다고 느낄 때 그러하다. 하지만, 이러한 임금인상이 있다고 해서, 그 인상의 이유가 무엇이건 간에, 경영진은 여전히 자본가이자 노동자들의 적이다. 경영진 역시도 서로 성향이 나뉠 수 있다. 하지만 이 서로 다른 성향은, 결국 피압제자들을 어떻게 더 잘 탄압할 수 있는가에 대한 성향일 뿐이다. 어떠한 경영진도, 마찬가지로 어떠한 국가도 노동자나 여성, 농민의 친구일 수 없다. 경영진이나 국가나, 그들을 움직이게끔 하는 방법은 외부로부터의 압력이지 그들과의 결합이 아니다.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샹탈 무페는 국가가 “시민사회”에 반대할 때도 있다는 것을 첨언한다. 국가가 “사회 위에 군림하도록 강제되어진 관료적 돌연변이”인 억압적 체제도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이들은 미국과 같이 다수가 지지하는 체제를 가진 국가에서, 국가는 사회 위에 군림하는 관료적이고 군사적인 돌연변이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을 할 수는 있지만, 이것이 어떻게 “급진적”일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민주주의 이론에 아나키즘이 필요한 것처럼, 아나키즘 역시 민주주의를 필요로 한다. 역사적으로, 아나키즘에도 권위주의적 경향이 존재했다. 아나키스트들은 꽤나 자주 개량주의에 빠져들어 현존국가를 지지하거나, 스탈린의 혁명적 국가를 지지하곤 했다. 폴 굿먼이나 노엄 촘스키를 개량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은 합당한 일이 될 것이다. 머레이 북친의 선거주의에 대해서는 앞서 논의한 바 있다. 혁명적 상황을 마주하여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정부에 장관으로 합류한 1930년대 스페인 아나키스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러시아 혁명 이후 볼셰비키에 합류한 아나키스트들도 있었다. 1960년대에는 『해방』지의 아나키즘적 평화주의자들은 카스트로나 호치민의 옹호자가 되었다. 이러한 예시는 수도 없이 많다.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할 드레이퍼는 아나키즘의 근본적 문제는 아나키즘이 민주주의를 거부하는 것에 있다고 말한다. 그는 아나키즘의 본질은 개인의 우월성과 개인이 원하는 모든 것을 행할 권리에 있기에, 소수의 지배계급도, 심지어 민주적인 다수에 의한 통제도 거부한다고 보았다. 그는 아나키즘은 아래로부터 통제되는 민주주의 사회가 가장 완벽한 사회주의적이고 민주주의적인 통제 아래에 있을지라도 그것을 거부한다고 말한다. 드레이퍼는 “원하는 것을 행하지 못하고, 가지지 못하는 모든 사람은 정부에 맞서, 혼자서라도, 반란을 일으킬 권리가 있다”는 프루동을 인용하면서 “사회로부터 제약되지 않는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전제군주 뿐”이라고 말한다. 드레이퍼는 상호부조적 연합을 조직하여 그 독재관으로 군림하는 계획을 담은 프루동의 개인적 노트나 매우 중앙집중적으로 구성된 비밀 “형제단”을 통해 대중운동을 흑막에서 통제하겠다는 바쿠닌의 판타지를 들면서 이것이 아나키즘적 권위주의의 증거를 발견하였다고 말한다.
아나키스트 전통에 권위주의적 측면이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나키즘의 이론과 실천 양면에 자유의지주의적이고 민주주의적인 측면 역시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사회주의적 아나키스트들은 “민주주의”라는 단어의 사용여부와 무관하게 관료기구를 자주적 연합(즉, 민주주의)으로 대체할 것을 주장해왔다. 그리고 내가 주장해왔던 것처럼, 개인과 소수에 대한 권리를 강하게 옹호하는 것은 민주주의나 다수에 의한 지배와 필연적으로 충돌하는 것이 아니다. 아나키스트들은 민주노조를, 인민군을, 자주경영적 집단농장을, 노동자 협동조합을 건설해왔다. 마르크스주의 역시 민주주의적 측면과 권위주의적 측면 모두를 가지고 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의 주류 경향이라 할 수 있는 사회민주주의와 스탈린주의는 권위주의적 국가주의였다. 마르크스주의와 아나키즘 중에서 더 민주적이고 자유를 지향하는 이론과 전통을 가진 것은 아나키즘이었다. 또한, 아나키스트들은 마르크스주의자나 레닌주의자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아나키스트 이론가들을 바라본다. 우리는 “아나키스트”지 “프루동주의자”도 아니고 “바쿠닌주의자”도 아니다. 아나키즘은 역사적 위인들에게 결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그들의 오류를 부정하는 데에 거리낌이 없다.
하지만 아나키즘이 태생적으로 민주주의에 적대적인 것이 아닐지라도, 아나키즘은 민주주의와 모순된 관계를 맺어왔다.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의 경향성이야말로 이 측면에서 최악인 것이었고, 귀족정을 정당화하는 것으로 귀결한다. 아나키스트들은 아나키즘을 극단적인 혁명적 민주주의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아나키즘에 약점들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약점들은 아나키즘 전통 내부에서 충분히 교정할 수 있다.
아나키즘의 목적 관료적 · 군사적 국가기제를 최대한 탈중앙화된 인민총회와 연합의 연방으로 대체하는 것에 있다. 이는 국가 없는 민주주의를 의미한다. 현존 국가의 제약 안에 머물면서 현존 국가를 “더 민주주의적”으로 만들고자 하는 다른 정치사상들(“민주사회주의” 혹은 “급진민주주의”)은 “민주주의”가 소수에 의한 지배를, 가부장적이고 인종차별주의적인 자본주의와 관료국가를 정당화하도록 용인하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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