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자유의지주의적 공산주의 선언’은 1953년 조르주 폰테니스가 프랑스 자유의지주의적 공산주의자 연방을 위해 작성한 문서로, 아나키즘적 공산주의 흐름에서 중요한 핵심 문서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이 선언은 미하일 바쿠닌, 제임스 기욤, 에리코 말라테스타, 카밀로 베르네리의 주요 저작들, 그리고 러시아 혁명에서의 패배 경험을 바탕으로 네스토르 마흐노, 페트로 아르시노프, 이다 메트 등이 작성한 『아나키스트 총동맹의 조직적 강령』, 그리고 스페인 혁명의 패배로부터 영향을 받은 <두루티의 친구들>의 선언들에 의해 선행된 바 있다.
이 선언은 『강령』과 마찬가지로 슈티르너류 개인주의, 아나키즘적 생디칼리즘, 그리고 자유의지주의적 공산주의를 절충하려는 포르와 볼린의 ‘통합' 경향에 반대 입장을 취했다. 또한 이 선언은 『강령』이 그러했던 것처럼 아나키즘이 억압받는 계급들의 투쟁에서 기원한 계급투쟁적 성격임을 재확인했으며, 30여 년간의 추가적인 투쟁 경험을 바탕으로 ‘『강령』보다 발전된 문서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이 선언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의 역할에 대한 분석을 간과했으며, 여성 억압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을 제시하지 못했다. 또한 자유의지주의적 공산주의자 연방이 북아프리카에서 프랑스 식민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에 매우 적극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선언은 인종차별에 대한 분석을 포함하지 못했다.
이 선언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과도기’ 개념을 거부했다. 하지만 ‘당’과 ‘전위’ 개념을 사용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했다. 공정하게 말하자면, 과거 말라테스타는 아나키스트 운동을 묘사하는 데 ‘당’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적이 있었지만, 사회민주주의자 및 레닌주의자와의 연관성 때문에 이 용어는 부정적인 함의를 가지게 되었으며, 이를 피하려면 용어 자체를 버리는 것이 최선이라 여겨지고 있다. ‘전위’라는 용어는 과거 아나키스트들에 의해 사용된 것이며, 이는 레닌주의적 전위가 아닌 선진적인 사상을 가진 노동자 집단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다. 예를 들자면 스페인의 아나키스트 운동에서, 미국의 아나키즘적 공산주의자들이 기관지의 이름으로 『전위』를 선택하였다는 데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용어 역시 레닌주의와 엮이는 불우함을 겪고 있다. 우리는 선진적 노동자 집단이 존재하며, 아나키스트 운동이 계급 전반보다 선진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전체 노동 계급의 위대한 창조성 또한 충분히 인식해야 한다. 선진적 집단과 계급 전체 사이에는 복잡하고 단순히 흑백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모순이 존재하며, 이는 특정 집단이 전체 계급을 대체하는 레닌주의적 위험으로 이어질 수 있다. 아나키즘적 공산주의 조직은 이러한 문제를 인지하고 이러한 모순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물론 이 선언에서 말하는 전위는 레닌이 주장한 전문 혁명가 집단과 같은 외부 전위가 아니라, 계급 내부의 전위로 여겨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용어는 의심의 여지가 있다.
이 선언은 계급투쟁을 기반으로 한 효과적인 자유의지주의적 조직의 이념적·전술적 통일을 주장하는 논의를 이어갔다. 하지만 선언의 지지자들은 정치적 행동 과정에서 여러 실수를 저질렀다. 통일성이 좁은 의미로 해석되면서, 이들은 곧 선거에서 ‘혁명적’ 후보를 출마시키는 실패로 이어졌고, 이는 조직의 붕괴를 초래했다.
‘강령’이 ‘집행 위원회’라는 개념으로 인해 결점이 드러났듯이, ‘선언’ 역시 ‘전위’라는 개념으로 인해 결점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선언은 여전히 중요한 문서로 남아 있으며, 오늘날의 아나키즘적 공산주의 이론과 전략을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 이 선언의 가장 중요한 특징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 사회적 원칙으로써의 자유의지주의적 공산주의
자본주의가 발전하고 노동계급의 첫 번째 대규모 투쟁이 일어나던 19세기, 보다 정확히는 제1인터내셔널 (1861–1871) 내부에서, ‘혁명적 사회주의’라는 사회적 교리가 등장했다. 이는 개량주의적이거나 국가주의적인 합법 사회주의와는 대조되는 것으로, ‘반권위주의적 사회주의’ 또는 ‘집산주의’로 알려졌으며, 이후에는 ‘아나키즘’, ‘아나키즘적 공산주의’ 또는 ‘자유의지주의적 공산주의’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원칙과 이론은 조직화된 사회주의 노동자들의 반응으로 나타났다. 이는 점점 격화되는 계급투쟁과 밀접하게 연관된 역사적 산물로, 특정 사상가들의 관념론적 비판을 통해 형성된 것이 아니라, 역사적 조건과 계급 사회의 발전에서 기인한 것이다.
미하일 바쿠닌으로 대표되는 이 원칙의 창시자들은 스스로의 역할을 대중들의 진정한 열망과 반응, 그리고 경험을 표현하였을 뿐이지,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분석이나 기존 이론에 의존하여 인위적으로 이론을 창조하지 않았다. 바쿠닌과 제임스 기욤, 후대의 크로포트킨, 르클뤼, 장 그라브, 말라테스타 등은 노동조합과 농민 조직이 어떠한 상황에서 어떻게 조직하고 투쟁하는지를 관찰하는 것으로부터 자기 이론을 전개했다.
아나키즘이 계급투쟁에서 기원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도 아나키즘이 계급투쟁과 독립된 철학, 도덕, 윤리로 간주되며, 역사적·사회적 조건에서 분리된 인도주의의 한 형태로 여겨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몇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첫째, 초기 아나키스트 이론가들은 때때로 자신들보다 앞선 저술가들, 경제학자들, 역사가들의 의견에 의존하려 했다 (특히 프루동은 아나키즘 사상을 분명히 표현한 많은 저작을 남겼다).
그 뒤를 이은 이론가들은 심지어 라 보에시, 스펜서, 고드윈, 슈티르너 등의 저작 속에서도 아나키즘과 유사한 아이디어를 발견하기도 했다. 이들은 착취적인 사회의 형태와 그러한 사회에서 발견되는 지배 원리에 반대하는 점에서 아나키즘과 유사성을 보인다. 그러나 고드윈, 슈티르너, 터커 등의 이론은 단순히 사회에 대한 관찰일 뿐, 역사와 이를 결정짓는 힘, 혁명의 문제를 제기하는 객관적 조건을 고려하지 못했다.
한편, 착취와 지배를 기반으로 하는 모든 사회에서는 항상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인 반란 행위가 존재해 왔다. 이 중 일부는 공산주의적이고 연방주의적이며 진정으로 민주주의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 결과, 아나키즘은 인류가 자유와 정의를 향해 영원히 이어가는 투쟁의 표현인 양 논의되어 왔다. 그러나 이는 사회학적 · 역사적으로 충분히 근거를 두지 못한 모호한 발상이며, 아나키즘을 ‘인류’와 ‘자유’라는 추상적 개념에 기초한 막연한 인도주의로 전환시키는 경향이 있다.
노동계급 운동에 대한 부르주아적 역사서술은 아나키즘적 공산주의를 개인주의적이고 관념론적인 이론들과 혼동시키는 데 앞장섰다. 이들은 슈티르너와 바쿠닌을 동일 선상에 놓으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아나키즘이 스스로의 탄생 조건을 망각하면서, 아나키즘은 때로 일종의 극단적 자유주의로 축소되어, 그 유물론적, 역사적, 혁명적 성격을 상실하기도 했다.
그러나 19세기 이전의 반란이나, 개인과 인간 집단 간의 관계에 대한 특정 사상가들의 사싱이 아나키즘의 토대를 마련했다고 하더라도, 바쿠닌 이전에는 아나키즘과 그 교리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은 명백하다.
예를 들어, 고드윈의 저작은 계급 사회의 존재를 매우 잘 표현하고 있지만, 이는 관념론적이고 혼란스러운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개인이 집단, 가족, 종교, 국가, 도덕 등에 의해 소외되는 현상은 분명히 사회적 성격을 띠고 있으며, 카스트나 계급으로 나뉜 사회의 표현임이 분명한 데도 말이다.
반란자, 비순응자 또는 ‘광의의’ 아나키스트들의 태도, 사상, 행동 방식은 항상 존재해 왔다. 그러나 일관된 아나키즘적 공산주의 이론은 19세기 후반에야 정립된 것이며, 나날이 발전하고 더 정교해지고 있다.
따라서 아나키즘은 철학이나 추상적이거나 개인주의적인 윤리로 동화될 수 없다. 아나키즘은 사회적 맥락 속에서 태어났으며, 특정한 역사적 시기와 계급 대립의 특정 상태에만 아나키즘적 공산주의적 열망이 명확히 드러날 수 있었다. 그 이후에야 단순한 반란 현상에 불과하던 이 열망이 일관되고 완전한 혁명적 개념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아나키즘은 추상적인 철학이나 윤리가 아니기 때문에 추상적인 인간, 즉 일반적인 인간 자체를 대상으로 할 수 없다. 아나키즘의 관점에서, 우리의 사회에는 단순히 ‘인간’이라는 존재는 없다. 대신, 착취받는 피지배 계급과 특권 계급, 지배 계급이 존재한다. 만약 일반적인 인간에게 아나키즘을 호소하려 한다면, 이는 경제적·사회적 조건을 무시하고 ‘시민’이라는 개념으로 접근하는 자유주의자들의 오류나 궤변에 빠지는 것과 같다.
계급의 존재와 계급투쟁의 현실을 무시하면서, 단순히 ‘자유’와 ‘정의’라는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을 내세운 공허한 수사를 만족스럽게 여기는 것은, 자유주의자로 보이지만 사실은 보수적이거나 반동적인 부르주아 철학자들이 아나키즘에 침투하도록 허용하는 행위다. 이는 아나키즘을 막연한 인도주의로 변질시키고, 그 원칙과 조직, 그리고 활동가들을 무력화시킨다.
한때, 그리고 일부 국가의 특정 그룹에서는 지금까지도, 아나키즘이 절대적 평화주의나 감상적인 기독교적 이상주의로 전락한 사례가 있었다. 그러나 아나키즘은 이에 대해 반발했으며, 이제는 모호한 생각에 의존하지 않고 구체적으로 낡은 세계를 공격하려 한다.
아나키즘은 사회적 원칙이자 혁명적 방법으로서, 약탈당하고 착취당하는 사람들, 즉 프롤레타리아, 노동자와 농민을 대상으로 한다. 피착취계급만이 사회적 힘으로서 혁명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노동계급이 일종의 메시아적 계급을 구성하며, 착취 받는 사람들이 신의 섭리처럼 모든 것을 명확히 인식하고, 오직 좋은 자질만을 지니고 있으며 결점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그렇지 않다. 이는 노동자를 우상화하거나 새로운 형식의 형이상학에 빠지는 것이다.
그러나 착취 받고, 소외되고, 속고, 착취당하는 계급인 프롤레타리아는, 광의의 의미에서 보면, 전통적으로 정의된 노동계급 (육체노동을 수행하며 공통의 심리와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 뿐만 아니라 사무직 노동자 같은 임금노동자도 포함한다. 다시 말해, 생산 과정과 정치적 질서에서 단지 명령을 수행하는 역할만 맡으며, 통제권에서 배제된 대중이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속한다. 이 계급만이 자신의 경제적·사회적 위치를 통해 권력과 착취를 타파할 수 있다. 생산자들만이 노동자 통제를 실현할 수 있다. 만약 혁명이 모든 생산자들에 의한 통제로 전환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어떤 혁명일 수 있겠는가?
따라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무엇보다도 혁명적 계급이다. 그들이 일으킬 수 있는 혁명은 단순히 정치적 혁명이 아니라 사회적 혁명이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과정에서 전 인류를 해방시키며, 특권 계급의 권력을 깨뜨림으로써 계급 자체를 폐지한다.
오늘날 계급 간의 경계는 확실하지 않다. 계급 간의 분열은 주로 계급투쟁의 다양한 국면에서 발생한다. 명확한 경계는 없지만, 그럼에도 양극이 존재한다. 하나는 프롤레타리아이고, 다른 하나는 부르주아지 (자본가, 관료 등)이다. 중간계급은 위기가 올 때에는 분열되어 두 극 중 하나로 이동하게 된다. 그러나 중간계급은 스스로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다. 이는 그들이 프롤레타리아처럼 혁명적인 성격을 갖추고 있지도 않고, 부르주아지처럼 현대 사회를 실질적으로 통제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파업 상황에서는 일부 기술자들 (특히 전문가들이나 연구 부서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노동계급으로 다시 합류하는 반면, 다른 기술자들(상위 관리직에 있거나 감독 역할을 맡은 이들)은 노동계급에서 멀어지기도 한다. 적어도 일정 기간 동안은 그런 경향이 나타난다.
노동조합의 활동은 언제나 시행착오와 실용주의에 의존해 왔다. 노동조합은 역할과 직업에 따라 특정 부문을 조직화하고 다른 부문은 제외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결국, 계급을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임금이 아니라 직업과 태도이다.
프롤레타리아는 피착취계급의 가장 단호하고 가장 활동적인 부분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를 넘어서, 더 넓은 사회적 층위를 포함하는 집단이 있다. 이것이 바로 인민 대중이다. 인민 대중에는 소농, 빈곤한 장인 등과 함께 프롤레타리아도 포함된다.
이는 어떤 식으로든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신비주의적 접근에 빠지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대신 다음과 같은 구체적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는 의식에 도달하는 데 더딜 수 있고, 후퇴와 패배를 겪기도 하지만, 결국 혁명을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실질적 창조자라는 점이다.
바쿠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다음을 이해하여야 한다. 프롤레타리아, 육체노동자, 보통의 노동자는 세계 마지막 노예제도의 역사적 대표자이다. 그들의 해방은 곧 모두의 해방이며, 그들의 승리는 인류의 궁극적 승리이다...“
물론 특권 계층에 속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계급, 이념, 그리고 특권과 단절하여 아나키즘에 합류하는 경우도 있다. 이들의 기여는 상당하지만, 어떤 면에서 이들은 스스로를 프롤레타리아화한다.
바쿠닌은 또한 이렇게 말했다. "사회주의 혁명가들, 즉 아나키스트들은 도시와 농촌의 노동 대중과 소통한다. 그리고 과거와 완전히 단절하고 무조건적으로 아나키스트의 강령을 받아들이는 상류계급 출신의 모든 선의의 사람들과도 소통한다.“
하지만 이 모든 점에도 불구하고, 아나키즘이 사회적 계급을 고려하지 않은 채, 단순히 추상적인 인간, 일반적인 인간을 대상으로 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아나키즘의 계급적 성격을 제거하는 것은 아나키즘에서 형태와 내용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아나키즘은 지적인 부르주아 계층에게 흥미로운 철학적 유희나 동정의 대상, 이상을 갈망하는 이들의 공허한 목소리, 또는 학문적 토론의 주제로 전락하게 된다.
이렇게 결론을 내리자. 아나키즘은 추상적인 개인이나 일반적인 인간을 위한 철학이 아니다.
아나키즘은 철학이나 윤리로 볼 수도 있지만, 매우 구체적이고 명확한 방식에서만 그러하다. 이는 아나키즘이 표현하는 열망과 그것이 추구하는 목표를 통해 그렇게 된다. 바쿠닌의 말처럼, "프롤레타리아의 승리는 인류의 궁극적 승리이다.“
프롤레타리아는 계급적 기원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그 목표에 있어서만큼은 보편적이고 인간 중심적이며, 이를 달리 표현하자면 인본주의적이다.
이것이 사회주의의 원칙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진정한 사회주의/공산주의, 계급과 카스트가 없는 사회를 실현하고 자유와 평등을 가져올 수 있는 유일한 이론이자 방법이다.
사회적 아나키즘, 아나키즘적 공산주의, 또는 자유의지주의적 공산주의는 사회혁명의 원칙으로서, 프롤레타리아를 혁명의 주체로 바라본다. 이 원칙은 프롤레타리아의 열망을 대변하고, 그들의 진정한 이념을 지향한다. 이 이념은 프롤레타리아가 자신의 경험을 통해 스스로 깨닫게 되는 것이다.
2. 강령의 문제
아나키즘은 사회적 교리로서, 목적과 과제를 제시하는 분석과 제안의 집합체, 즉 강령을 통해 그 정체성을 명확히 드러낸다. 강령은 아나키스트 조직에 속한 모든 활동가들이 공유하는 공동의 규범을 형성하며, 이를 통해 조직의 일관된 방향성과 목표가 확립된다. 강령이 부재할 경우, 협력은 단순히 감상적이고 모호하며 혼란스러운 열망에 기초할 뿐, 명확한 관점의 통일성을 이루지 못하게 된다. 이는 서로 다른, 심지어 상반된 사상들이 동일한 이름 아래 모이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그 와중 이런 질문이 나올 수 있다. 강령은 동일한 이상, 또는 비슷한 명칭을 공유하는 사람들 간의 공통점을 고려하여 일종의 통합으로 구성될 수 없는가?
이 접근법은 갈등을 회피하기 위해 중요하지 않은 요소들만을 유지하려는 경향을 보이며, 결과적으로 실질적 의미가 결여된 공허한 조직으로 귀결된다. 이러한 시도는 반복적으로 이루어졌으나, 그 결과로 나타난 이른바 '통합'—즉, 연합, 연대, 동맹, 협약—은 항상 비효율성과 갈등의 재발로 이어졌다. 현실적인 문제에 직면했을 때, 각기 다른 해법이나 상반된 해법이 제시되면 이전의 논쟁이 반복되고, 결국 행동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빈약하고 비실용적인 가짜 강령의 실체가 드러나게 되었다.
게다가, 공통적으로 동의되는 사소한 부분들만을 결합하여 "짜깁기 강령"을 구성하려는 발상 자체는, 제안된 모든 관점이 동일하게 타당하다는 가정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이는 강령이 추상적이고 자발적인 방식으로, 개인의 사고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될 수 있다는 잘못된 전제에 기반을 두고 있다.
혁명적 강령, 즉 아나키스트 강령은 소수의 사람들이 만들어 대중에게 강요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반대로, 혁명적 전위 또는 활동적 소수가 제안하는 강령은 혁명을 이루려는 착취 받는 대중의 열망을 간결하고 강력하며, 명확하고 의식적인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 계급이 당보다 우선한다는 것이다.
강령은 대중이 끊임없이 추구해 온 것을 연구하고 시험하며 전통을 통해 결정되어야 한다. 따라서 강령을 구성하는 과정에서는 특정한 경험주의가 우위를 점해야 한다. 이는 독단주의를 피하고, 혁명가 소수가 설계한 계획을 대중의 행동과 사고에서 드러난 바에 대체하지 않도록 한다.
강령이 일단 구성되어 대중에게 전달되면, 이는 그들의 의식을 고양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정의된 강령은 상황과 대중의 경향에 대한 분석이 발전함에 따라 수정될 수 있으며, 더 명확하고 정확한 용어로 재구성될 수 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이해된 강령은 이제 단순히 사람들을 "거의 비슷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부차적인 항목들의 집합이 아니다. 대신, 강령은 그것을 믿고 그것을 전파하며 현실로 만들겠다는 결의를 가진 사람들만이 채택하는 분석과 제안의 체계가 된다.
물론,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이 강령은 결국 어떤 개인이나 조직에 의해 마련되고 작성될 것 아니냐고. 물론 그렇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강령이 아니라 사회적 아나키즘의 강령이다. 따라서 오직 착취 받는 계급의 이해, 열망, 사고, 그리고 혁명적 역량에 부합하는 제안들만이 받아들여질 것이다.
이제야말로 제대로 된 통합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제는 분열을 초래하는 중요한 요소를 배제하는 문제가 아니라, 중요한 본질적 요소들에 대한 제안들을 새롭고 공유된 텍스트 안에 융합하는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이는 연구 모임, 혁명가들의 집회, 그리고 회의를 통해 강령을 규명하고, 이를 바탕으로 다시 모여 조직을 설립하는 역할을 한다.
문제는, 여러 조직이 스스로를 진정으로 노동계급을 대표한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개량적 사회주의 조직, 권위주의적 공산주의 조직, 그리고 아나키스트 조직이 모두 이 범주에 속한다. 궁극적으로 누가 옳은지는 경험만이 판가름할 수 있으며, 그것이 답을 내려줄 것이다.
어떤 혁명도 그 혁명을 만들어갈 대중이 특정한 이념적 통일성을 바탕으로 결집하지 않고서는 가능하지 않다. 또한, 이들이 같은 정신으로 행동하지 않는 한 혁명은 불가능하다. 이는 우리가 생각하기에, 대중이 자신들의 경험을 통해 자유의지주의적 공산주의의 길을 발견하게 될 것임을 의미한다.
이와 동시에, 아나키스트 원칙은 그 세부적인 관점과 적용 방식에 있어서 결코 완성된 것이 아니며, 역사적 사건의 빛 속에서 끊임없이 창조되고 완성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파리 코뮌, 1917년 러시아의 대중 혁명, 마흐노주의 운동, 스페인에서의 성취, 각종 파업, 그리고 노동계급이 경험하는 국가 사회주의의 가혹한 현실 — 소련부터 국유화, 서방 정당들의 배신에 이르기까지 — 이 모든 부분적 경험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아나키스트 강령이 대중의 이념적 통일성이 드러나게 될 방향을 대표한다는 것이다.
우선,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강령을 요약할 수 있다:
계급 없는 사회와 국가 없는 사회.
3. 대중과 혁명적 전위 사이의 관계
강령의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는 억압받는 계급과 강령에 의해 정의되는 혁명 조직 (진정한 의미에서의 당) 간의 관계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단순히 “계급이 당보다 우선한다." 라고만 말하고 그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이를 더욱 확장하고, 활동적 소수 (즉, 혁명적 전위) 가 왜 필요한지 설명해야 한다. 단, 이 소수가 군사적 지도부나 대중 위에 군림하는 독재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다시 말해, 아나키즘에서 말하는 활동적 소수는 결코 엘리트주의적, 과두제적, 계급제적 성격을 가지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전위의 필요성
어떤 이들은 대중의 자발적 활동만으로 모든 혁명적 가능성을 충분히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역사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바에 따르면, 자발적 대중 운동이라고 볼 수 있는 몇몇 사건들이 존재하며, 이 사건들은 대중의 능력과 자원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례가 자발성이라는 일반적 개념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이를 일반화하는 것은 운명론적이다.
이러한 신화는 대중주의적 선동과 원칙 없는 반란주의를 정당화하며, 이는 반동적이고 소극적 태도 및 타협으로 이어질 수 있다.
반대로, 혁명적 주도권을 오직 전위 조직에만 부여하는 순수한 의지주의적 이념도 존재한다. 이런 이념은 대중의 역할을 비관적으로 평가하고, 대중의 정치적 능력에 대해 귀족적 멸시를 품게 하며, 혁명 활동을 은밀히 조종하려 하고, 결국 패배를 초래한다. 이 아이디어는 사실상 관료주의적이고 국가주의적 반혁명의 씨앗을 내포하고 있다.
자발성 개념과 가까운 또 다른 이론은, 대중 조직 (예를 들면 노동조합) 이 스스로 충분할 뿐 아니라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스스로를 완전히 반(反)정치적이라고 주장하지만, 사실상 이는 종종 순정 조합주의로 표현되는 경제주의적 개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이론이 일관성을 가지려면, 강령이나 최종적인 입장을 전혀 제시하지 말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이론의 지지자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이념적 조직을 구성하거나, 특정 방향을 승인하는 지도부를 형성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 이론이 논리적으로 일관되려면, 사회 문제를 사회적으로 중립적인 방식으로만 이해하고, 단순한 경험주의로 제한해야 한다.
우리는 자발주의, 경험주의, 의지주의 모두로부터 거리를 두고, 특정한 혁명적 아나키스트 조직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이 조직은 의식적이고 활동적인 대중의 전위로서 이해된다.
이 조직은 대중의 자발적 활동과 혁명적 능력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방향을 제시하고 대중과 함께 작동하며, 혁명을 위한 통일된 강령과 전략을 마련할 수 있는 역할을 한다.
혁명적 전위의 역할의 본질
혁명적 전위는 대중운동에 대해 분명히 지도적 역할을 수행한다. 이를 둘러싼 논쟁은 무의미하다. 혁명적 조직이 존재하는 이유 자체가 바로 그 지도적·방향적 성격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진정한 질문은 이 역할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와, 우리가 ‘지도’라는 단어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에 있다.
혁명적 조직은 대중의 발전 속도가 불균등하고 결속력이 부족하다는 현실에 직면한 가장 의식적인 노동자들이 그 필요성을 느끼면서 형성된다. 그러나 분명히 해야 할 것은, 혁명 조직은 결코 대중 위에 군림하는 권력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지도자로서의 역할은 대중의 경험과 열망을 바탕으로 이념적 방향 (조직적, 전술적 방향) 을 구체화하고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조직의 지침은 외부에서 명령으로 내려지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일반적 열망을 반영하는 거울과 같은 표현이 된다. 혁명적 조직의 지도적 기능은 강제적일 수 없으므로, 그것은 오로지 사상과 모범을 통해 대중의 인식을 고양시키는 데에서 드러나야 한다. 대중에게 이론적 원칙과 주요 전술 방향을 철저히 이해시키는 노력과 함께, 혁명 조직은 아이디어를 전달하고 설득하는 사상적 투쟁과 행동의 본보기를 통해 지도력을 발휘한다.
조직의 강령과 방향성이 대중의 경험과 열망을 반영하고 있으며, 조직된 전위가 본질적으로 착취 받는 계급의 거울이라는 점을 잊지 않는다면, 지도는 명령이 아니라 조정된 방향 제시가 된다. 이는 관료주의적 대중 조작, 군사적 규율, 맹목적 복종에 반대되는 것이다.
전위 조직의 핵심 과제는 대중의 직접적인 정치적 책임감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이는 대중이 스스로 조직할 수 있는 능력을 증대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러한 리더십 개념은 자연스럽고 동시에 대중의 인식을 고양시키는 역할을 한다.
조직 내부에서도 더 잘 준비되고 성숙한 활동가들은 다른 구성원들의 지도자와 교육자 역할을 맡는다. 이로써 모든 구성원이 이론적, 실천적으로 잘 준비되고 경각심을 가지게 하며, 궁극적으로는 모든 구성원이 각자 활동의 중심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한다.
조직된 소수는 더 큰 군집 (대중) 의 전위이며, 그 존재 이유를 바로 이 대중에게서 찾는다. 만약 활동적 소수, 즉 전위가 대중과 단절된다면, 더 이상 제 역할을 수행할 수 없으며 단순한 파벌이나 소규모 집단으로 전락한다.
결국, 혁명적 소수는 억압받는 자들의 봉사자일 뿐이다. 이들에게는 막대한 책임이 있지만, 어떠한 특권도 없다.
혁명적 조직의 또 다른 특징은 영속성이다. 때로 조직은 다수 대중을 대변하고 표현하며, 대중이 활동적 소수를 인정하고 자신을 투영하는 상황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후퇴의 시기에는 혁명적 소수가 폭풍 속의 배와 같은 역할을 하며, 고립되고 대중으로부터 단절되더라도 대중의 열망이라는 불변의 원칙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이러한 시기에는 대중의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특정 고립된 행동 (특정 목표에 대한 폭력, 반란 등) 을 수행해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위험이 따른다. 조직이 현실과 단절되거나, 종파적 집단이나 권위주의적 군사 지도부로 변질될 위험이다.
이러한 변질을 막기 위해 소수는 사건과 착취 받는 환경과의 접촉을 유지해야 하며, 가장 작은 반응, 가장 작은 저항, 가장 작은 성취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현대 사회를 세밀히 연구하여 그 모순과 약점, 변화 가능성을 파악해야 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소수는 모든 형태의 저항과 행동 (요구부터 사보타주, 비밀 저항, 공개 반란까지) 에 참여하면서, 작은 소란이나 불씨에도 개입하여 이를 확대하고 발전시킬 기회를 유지한다.
혁명적 소수는 사회적 사건과 그 발전에 대한 넓은 시각을 유지하고, 그날의 조건에 맞춰 전술을 조정하며, 항상 경계해야 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소수는 사건을 뒤쫓거나, 대중과 동떨어져 관찰자로 전락하거나, 대중으로부터 배제되는 것을 피할 수 있다. 소수는 추상적인 계산과 계획을 프롤레타리아의 실제 열망과 혼동하지 않는다.
강령을 고수하되, 사건 속에서 이를 조정하고 오류를 수정한다.
무엇보다도 혁명적 소수는 최종 목표를 잊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대중이 최고 수준의 의식에 도달하여 혁명을 완수할 때, 혁명적 소수가 대중과 동일시되며 자신을 해체하는 것이다.
혁명적 전위가 역할을 수행하는 방식
혁명 조직은 대중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두 가지 주요 방법이 있다. 첫째는 기존 대중 조직 내에서의 활동이고, 둘째는 직접적인 선전 활동이다.
직접 선전 활동
직접적인 선전 활동은 신문과 잡지 발행, 요구와 선동 캠페인, 문화적 토론, 연대 활동, 시위, 회의, 공개 집회 등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러한 활동은 때로는 다른 조직이 기획한 행사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직접 활동은 대중적 영향력을 확대하고, 기존의 접근이 어려운 여론의 일부에 도달하기 위해 필수적이다. 이는 직장과 지역사회에서 특히 중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은 ‘지도’가 어떻게 ‘독재’로 변질되지 않을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하지는 않는다.
기존 대중 조직 내에서의 활동
기존 대중 조직 내 활동은 다른 성격을 띤다. 우선, 이러한 조직들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이러한 조직들은 경제적 성격을 가지며, 구성원 간의 사회적 연대에 기반한다. 하지만 이들은 다음과 같은 다양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1. 방어적 역할: 저항, 상호부조.
2. 교육적 역할: 자치 능력 훈련.
3. 공격적 역할: 전술적 차원의 요구, 전략적 차원의 수탈.
4. 행정적 역할: 조직 관리.
노동조합이나 노동자 투쟁 위원회와 같은 조직은 위 기능 중 하나만 수행하더라도 대중과 함께 일할 수 있는 직접적인 기회를 제공한다.
경제적 구조 외에도 많은 대중적 모임과 단체가 존재하며, 혁명적 조직이 이를 통해 대중과 연결될 수 있다.
문화, 여가, 복지와 관련된 단체들에서 혁명 조직은 에너지, 조언, 경험을 얻을 수 있다. 또한, 이를 통해 자신의 방향성을 전파하고, 국가와 정치인들이 지배권을 확보하려는 시도에 저항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목적을 추구한다.
1. 이러한 조직이 고유한 성격을 유지하도록 방어한다.
2. 조직을 자치와 혁명적 동원의 중심으로 전환한다.
3. 미래 사회의 씨앗으로 작용할 수 있도록 발전시킨다.
이러한 사회적·경제적 대중 조직 내에서의 영향력은 외부에서 명령을 내리는 시스템이 아닌, 혁명적 아나키스트 활동가들의 적극적이고 조율된 참여를 통해 강화되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활동가는 자신의 능력과 태도에 따라 책임 있는 위치에 오를 수 있다.
그러나 활동가들은 단순히 행정적 업무에 매몰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는 정치적 반대 세력이 혁명적 활동가를 비효율적으로 만들기 위해 사용하는 전술일 수 있다.
일부에서는 이러한 활동을 ‘침투’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이는 혁명 조직이 소수에서 다수로, 적어도 영향력 면에서 다수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독점화를 피해야 한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상황은 피해야 한다.
1. 대중 조직이 혁명 조직의 모든 과제를 떠맡게 되는 경우.
2. 대중 조직의 지도부를 혁명 조직의 구성원으로만 채우고, 다른 의견을 배제하는 경우.
여기서 혁명 조직은 다음을 분명히 해야 한다.
1. 대중 조직의 민주적이고 연방주의적인 구조와 운영 방식을 옹호하고 발전시킨다.
2. 대중 조직을 개방적 구조로 만들어 누구든 쉽게 참여할 수 있도록 한다.
이렇게 하면 대중 조직은 새로운 사회적 세력을 끌어들이고, 더 대표성을 가지며, 혁명 조직과 대중 사이의 접촉을 강화할 수 있다.
혁명적 조직 또는 당의 내부 원칙
지금까지 강령, 전위의 역할, 활동 방식에 대해 논의한 내용은 이 혁명적 전위가 반드시 조직화되어야 함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렇다면, 어떻게 조직화되어야 하는가?
이론적 통일
행동하려면 일관된 사상의 체계가 필요하다. 모순과 망설임은 사상의 전달을 방해한다. 한편, ‘통합’, 또는 실질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것에만 동의하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사상들의 집합체는 혼란을 초래하며, 중요한 차이로 인해 결국 스스로 파괴될 수밖에 없다.
강령 문제에 대한 분석에서 도출된 이유들뿐만 아니라, 강령의 본질에 관한 심층적인 이념적 이유와 더불어, 진정한 조직이 반드시 이론적 통일성에 기반을 두어야 하는 실질적인 이유도 존재한다.
공유된 고유의 이론은 통합의 결과로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의 통합은, 기본적으로 유사한 사상들 사이에서 공통되고 본질적인 의미를 가진 하나의 표현을 찾아내는 과정을 뜻한다.
이론적 통일성은 강령에 의해 확립된다.
앞서 살펴본 (그리고 이후에 정의될) 강령은, 착취 받는 대중의 일반적인 열망을 표현하는 자유의지주의적 공산주의 강령이다.
여기서 다시 명확히 해야 할 점은, 특정 조직이 각 개인이 자신들의 인위적 이념적 신념을 가져와 맺는 연합체나 계약적 합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특정 조직은 유기적이고 자연적인 방식으로 발생하고 발전한다. 이는 실질적인 필요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이 조직의 발전은 단번에 만들어진 사상이 아니라, 착취 받는 자들의 깊은 열망을 반영한 일정한 사상들에 기초한다.
따라서 이 조직은 계급적 기반을 가지며, 원래 특권 계급 출신이지만 어느 정도 그 계급에서 배척당한 사람들도 받아들일 수 있다.
전술적 통일성과 집단적 행동 방식
조직은 강령을 기반으로 일반적인 전술적 방향을 도출한다. 이를 통해 조직은 구조적 장점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다. 이러한 장점에는 다음이 포함된다.
1. 작업의 연속성과 지속성
2. 구성원 간 능력과 강점의 상호 보완
3. 노력의 집중과 효율적인 자원 활용
4. 언제든지 필요와 상황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능력
전술적 통일성은 각 구성원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흩어지는 것을 방지하며, 서로 상충되는 전술이 운동에 미칠 수 있는 파괴적인 영향을 제거한다.
이론적 측면 (기본 강령과 원칙) 은 조직 내에서 이미 모두가 동의한 사항이므로 문제가 없다. 만약 필수적인 문제에 대해 의견 차이가 생기면, 분열이 발생하며, 조직에 새로 합류한 구성원은 이 기본 원칙을 수용해야 한다. 이러한 원칙은 만장일치로 동의하거나 분리를 감수하지 않고는 수정될 수 없다.
그러나 전술 문제는 다른 성격을 띤다.
만장일치를 추구할 수 있지만, 이를 지나치게 강조하면 결국 아무런 결정을 내리지 못하게 되고, 조직은 내용 없는 껍데기로 전락한다. 조직의 목적이 공동 목표를 향한 힘의 조율에 있으므로, 논쟁이 충분히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전술적 제안 간 해결할 수 없는 대립이 남아 있다면, 조직은 다음 네 가지 방법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1.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는다.
조직이 아무런 결정을 내리지 않고 행동을 거부하면, 조직의 존재 이유는 사라진다. 이는 모든 경우에서 배제되어야 한다.
2. 전술적 차이를 인정하고, 각자의 입장을 유지한다.
이 방법은 중요한 사안이 아닌 경우에 한해 허용될 수 있다. 다만, 이는 예외적 선택이어야 한다.
3. 조직의 의견을 투표로 결정한다.
투표를 통해 다수파가 결정권을 가지며, 소수파는 공공 활동과 관련해 자신의 전술적 입장을 철회하지만, 조직 내부에서 자신의 주장을 계속 발전시킬 권리를 가진다.
이 방법은 완벽히 객관적이지 않을 수 있다. (다수 의견이 항상 진리를 반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가장 가능한 방법이다.
이 방식은 강제적이지 않으며, 조직 구성원들이 이를 규칙으로 받아들이고 소수파가 필요성을 인정하는 한에서만 적용된다. 이를 통해 전술적 제안은 실제 상황에서 시험될 수 있다.
4. 다수와 소수 간 합의가 불가능할 때 분열이 발생한다.
이는 조직이 반드시 입장을 정해야 하는 중요한 문제에서 다수와 소수 간 의견이 합의되지 않을 경우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결과다.
전술적 통일성을 달성하려는 시도가 없다면, 회의는 단순한 논쟁의 장으로 전락하며, 비효율적이고 무의미한 결과를 낳을 것이다.
따라서,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음은 항상 배제해야 하며, 여러 전술을 병행하는 방법은 예외적인 경우에만 선택할 수 있다.
물론, 전술적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조직 전체를 대표하는 회의(예를 들어 총회, 대회)에서만 가능하다.
집단적 행동과 규율
조직이 일반적인 전술 (또는 방향성) 을 결정하면, 이를 실행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조직이 집단적 행동 방침을 설정하는 이유는, 조직의 각 구성원과 모든 그룹의 활동이 이 방침에 부합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다수와 소수가 견해 차이를 보이더라도, 함께 활동을 지속하기로 합의한 경우에는, 누구도 억압받는다고 느껴서는 안 된다. 이는 모든 구성원이 사전에 이 방식에 동의했고, 방침을 수립하는 데 참여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율적으로 받아들인 규율은 군사적 규율이나 명령에 대한 수동적 복종과는 전혀 다르다.
조직 내에는 강제적인 기구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조직 전체가 받아들이지 않은 관점을 강요할 방법은 없다. 대신, 이는 자율적으로 합의된 약속에 대한 존중에 기반을 둔다. 이 원칙은 소수파와 다수파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
물론, 조직 내의 활동가들과 조직의 여러 수준에 있는 단위들은 자율적으로 활동을 계획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조직의 공식 기구에서 결정한 합의와 조정에 모순되지 않는 한에서만 가능하다. 즉, 이러한 자율적 활동은 집단적 결정의 실행이어야 한다.
그러나 특정 활동이 조직 전체에 영향을 미칠 경우, 구성원은 반드시 조직의 대표 기구와 협의해야 한다.
따라서 활동은 집단적 행동을 통해 이루어져야 하며, 개별 활동가가 독단적으로 결정한 방식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조직의 각 구성원은 조직 전체의 활동에 참여하며, 동시에 조직은 각 구성원의 혁명적·정치적 활동에 책임을 진다. 이는 개별 구성원이 정치적 활동을 조직과 협의 없이 독단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전제에서 이루어진다.
연방주의 또는 내부 민주주의
중앙집권주의와 달리, 연방주의는 대중이 중앙에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체계를 거부한다. 대신, 연방주의는 필요에 따라 중앙화된 조정을 허용하면서도, 각 구성원이 자율적으로 결정하고 전체를 통제할 수 있도록 한다. 연방주의는 참여자 간 공유된 사안에만 관여한다.
연방주의가 물질적 이해관계를 기반으로 조직을 결속시킬 때, 이는 합의에 의존하며, 때로는 통합의 기반이 약해질 수 있다. 이는 노동조합 활동의 일부 영역에서 종종 나타나는 문제다.
그러나 혁명적 아나키스트 조직에서는 강령이 대중의 일반적 열망을 대변하며, 구성원들이 결속하는 기반 (즉, 원칙과 강령) 이 차이점보다 더 중요하다. 이로 인해, 조직의 통합은 강력하며, 이는 단순한 협정이나 계약이 아니라, 기능적이고 유기적이며 자연스러운 통합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연방주의를, 구성원이 조직에 대한 의무를 무시한 채 자신의 개인적 기호를 과시할 권리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연방주의는 구성원과 그룹이 공유된 목표를 향해 공동 작업을 위해 도달한 합의를 의미한다. 이 합의는 자유롭고 신중한 결속에 기초한다.
이러한 합의는 다음 두 가지를 전제한다.
1. 의무의 완전한 이행
합의를 공유하는 구성원은 자신이 수락한 의무를 철저히 이행하며, 집단적 결정을 준수해야 한다.
2. 조정 및 집행 기구의 통제
조정 및 집행 기구는 전체 조직의 총회나 대회에서 임명되고 통제되어야 한다. 또한, 이 기구의 의무와 권한은 명확하게 규정되어야 한다.
효율적인 혁명적 아나키스트 조직은 다음 네 가지 기반 위에 존재할 수 있다.
1. 이론적 통일
공유된 강령과 원칙을 통해 구성원들이 하나로 결속된다.
2. 전술적 통일
목표 달성을 위한 조정된 전술과 행동 계획이 마련된다.
3. 집단적 행동과 규율
모든 활동은 집단적 결정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며, 자율성과 책임의 균형을 유지한다.
4. 연방주의
자율성과 중앙화의 균형을 통해 구성원 간의 민주적 협력을 가능하게 한다.
4. 자유의지주의적 공산주의 강령
부르주아 지배의 양상 — 자본주의와 국가
자유의지주의적 공산주의의 목표와 해결책을 논의하기 전에, 우리가 직면한 적의 본질을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인류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인간 사회가 계급으로 나뉘기 시작한 이후 (특히 사회적 노동의 분업 이후) 계급 간에는 갈등이 존재해 왔다. 초기의 요구와 반란에서 시작된 이러한 갈등은, 더 나은 삶과 더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끊임없이 투쟁하는 연쇄적 과정으로 이어져 왔다.
아나키스트적 분석에 따르면, 현대 사회는 이전의 모든 사회들처럼 하나의 단일체가 아니라 두 개의 매우 다른 진영으로 나뉘어 있다. 이 두 진영은 사회적 위치와 기능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하나는 프롤레타리아 (광의의 의미에서), 다른 하나는 부르주아지이다.
이 계급적 분열은 계급투쟁이라는 형태로 드러난다. 이 투쟁은 복잡하고 미묘하게 진행되거나, 때로는 명백하고 급속히 드러나는 경우도 있다.
계급투쟁은 종종 부차적인 이해관계의 충돌, 같은 계급 내 공동체 간의 갈등, 또는 처음에는 계급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어 보이는 복잡한 역사적 사건들에 의해 가려지기도 한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이 투쟁은 언제나 현대 사회를 변혁하여 억압받는 자들의 필요와 열망, 정의감을 충족시키는 사회로 전환하려는 노력이다. 이 과정은 계급 없는 사회로 이어지며, 이를 통해 인류 전체를 해방하려는 목적을 가진다.
모든 사회의 구조는 법, 도덕, 문화 등을 통해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계급과 재산과 권력을 가진 계급의 상대적 위치를 표현한다. 현대 사회에서 경제, 정치, 법, 도덕, 문화는 모두 한 계급의 특권과 독점을 유지하려는 조직화된 폭력 위에 기반을 둔다.
자본주의
자본주의 체제는 종종 유일한 착취 사회로 간주된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비교적 최근에 등장한 경제적·사회적 형태일 뿐이다. 인류 사회는 씨족 사회, 야만적 제국, 고대 도시국가, 봉건제, 르네상스 도시국가 등 다양한 형태의 노예제와 착취를 경험해 왔다.
19세기 초 사회주의 이론가들은 자본주의의 탄생, 발전, 진화에 대한 분석을 시도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들을 체계화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분석은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억압하는 일반적인 현상과 그 기원에 대해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다.
권위가 재산보다 먼저인가? 또는 재산이 권위보다 먼저인가? 라는 논쟁에 얽매이는 것은 의미가 없다.
현재의 사회학은 이 문제를 절대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상태에 있지 않다. 그러나 경제적, 정치적, 종교적, 도덕적 권력이 처음부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는 점은 명확하다.
어쨌든, 정치적 권력의 역할을 단순히 경제적 권력의 도구로 한정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한계는 자본주의 현상의 분석이 국가 현상의 충분한 분석으로 이어지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는 사람들이 역사에서 극히 제한된 시기에만 집중했기 때문이다.
오직 아나키스트 이론가들, 특히 바쿠닌과 크로포트킨만이, 종종 자본주의의 초기 시기 (즉, 자본주의 상승기의 국가) 에 국한되어 이해되던 국가라는 현상에 충분한 중요성을 부여하려고 노력했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다음과 같은 단계를 거치며 진화하고 있다. 고전적 자본주의에서 지도적 자본주의, 이어서 국가 자본주의까지,
이러한 진화는 새로운 사회적 형태를 만들어냈으며, 기존의 요약적 국가 분석으로는 이를 더 이상 설명할 수 없다.
자본주의는 무엇인가?
(a). 자본주의는 착취 계급이 생산 수단을 소유하고 통제하는 계급 사회다.
(b).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재화, 심지어 임금 노동의 힘조차도 상품으로 간주된다.
(c). 자본주의의 핵심 동기는 사람들의 필요가 아니라, 이윤 (즉, 노동자가 생산한 잉여 가치, 그들이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 이상의 생산물) 을 극대화하는 데 있다.
(d). 노동 생산성이 증가해도 자본의 가치 증대는 소비 부족으로 인해 제한된다. 이 모순은 ‘이윤율 저하 경향’으로 표현되며, 이는 주기적인 경제 위기를 초래한다. 위기를 극복하려는 자본 소유자들의 방식은 생산 축소, 상품 파괴, 실업, 전쟁 등으로 나타난다.
자본주의는 다음과 같은 형태로 진화되어 왔다.
1. 전(前)자본주의 시대. 중세 말기부터 시작되어 상인 및 금융 부르주아지가 봉건 경제 체제 내에서 발전했다. 초기 자본 축적은 농민 계층의 파괴와 약탈, 몰락을 통해 이루어졌다.
2. 고전적 자본주의, 자유주의적 또는 사적 자본주의. 이는 자본 소유자의 개인주의, 경쟁, 확장을 특징으로 한다(초기 자본 축적은 몰수, 약탈, 농민 계층의 몰락 등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이후 서유럽에 자리 잡은 자본주의는 정복해야 할 세계와 막대한 부의 원천, 그리고 광대한 시장을 가진 듯 보였다).
부르주아 혁명은 봉건적 제약을 제거함으로써 새로운 체제가 발전할 수 있도록 도왔다.
산업화와 기술적 진보는 자본주의 생산 방식의 존재 기반이 되었으며, 15~17세기의 상업 부르주아지에서 산업 자본가 부르주아지로의 전환을 가능하게 했다. 이러한 발전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이 시기 동안 위기는 드물었고 그다지 심각하지 않았다. 국가는 배경에서 소극적인 역할을 하며, 경쟁이 약자를 도태시키는 시스템의 자유로운 작동이 이루어졌다. 이 시기는 기술적으로는 가스와 석탄의 시대였으며, 경제적으로는 재산, 개인 자본가, 경쟁, 자유 무역의 시대였다. 정치적으로는 의회주의가 자리 잡았고, 사회적으로는 임금 노동자에 대한 전면적인 착취와 극심한 빈곤이 특징적이었다.
(3) 독점 자본주의 또는 제국주의. 이 체제에서는 생산성이 증가하지만, 시장은 축소되거나 이전 속도로 확장되지 않는다. 과잉 축적된 자본으로 인해 이윤율이 하락한다.
경쟁은 협정 (트러스트, 카르텔 등) 으로 대체되고, 개인 자본가는 주식회사가 대신한다. 보호주의가 흔들리며, 상품 수출 외에 자본 수출이 추가된다. 금융 신용이 주요 역할을 맡게 되고, 은행 자본과 산업 자본의 융합으로 금융 자본이 형성된다. 금융 자본은 국가를 장악하고 그 개입을 요구한다.
이 시기는 기술적으로는 석유와 전기의 시대이며, 경제적으로는 협정, 보호주의, 자본의 과잉 축적, 이윤율 저하 경향, 위기의 시대다. 정치적으로는 전쟁, 제국주의, 국가의 성장의 시대다. 위기를 극복하려면 전쟁이 필수적이며, 파괴는 시장을 해방시킨다. 사회적으로는 노동 계급의 빈곤이 지속되지만, 사회 입법이 착취의 일부 측면을 제한한다.
(4) 국가 자본주의. 여기서는 이전 단계의 모든 특징이 강화된다. 전쟁만으로는 위기를 극복할 수 없으며, 상시적 전쟁 경제가 필요해진다. 이는 군수 산업에 막대한 자본을 투자하지만 이미 과잉 공급된 시장에 아무것도 추가하지 않는다. 국가 발주를 통해 상당한 이윤이 창출된다.
이 시기는 국가가 경제의 가장 중요한 부문과 노동 시장을 장악하는 것이 특징이다.
국가는 자본주의 자체가 되어 고객, 공급자, 노동력의 감독자로서 기능하며, 계획, 문화 등에 대한 통제를 점점 강화한다.
관료제가 발달하고, 노동에 대한 규율과 규제가 강화된다.
착취와 임금 노동 계급은 여전히 유지되며, 자본주의의 다른 본질적 특징도 지속된다. 그러나 더 많은 프롤레타리아트를 종속시키는 규정, 사회 보장, 연금 등 사회화된 형태가 나타난다.
국가 자본주의는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독일의 국가 사회주의 (나치즘), 소련의 스탈린주의적 국가 사회주의, '민주주의 국가'에서 점점 증가하는 국가 통제 등이 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식민지로부터의 잉여 가치가 여전히 방대하기 때문에 비교적 제한된 형태로 나타난다.) 정치적·경제적으로 이 시기는 전체주의적 성격을 띠게 된다.
따라서 국가주의는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형태로 동시에 드러난다. 이는 국가적 통제 아래에 있는 재정, 전쟁 경제, 대규모 공공사업, 강제 노역, 강제 수용소, 강제 이주, 전체주의 질서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예를 들면 소련의 왜곡된 마르크스-레닌주의, 히틀러의 국가 사회주의에서의 인종적 사상, 무솔리니의 파시즘에서 고대 로마의 신화적 이상 등) 로 나타낼 수 있다.
국가
자본주의는 그 변형과 적응에도 불구하고 잉여가치, 위기, 경쟁 등의 영속적인 특징을 유지한다. 하지만 국가는 더 이상 단순히 지배 계급의 손에 있는 억압의 공공 조직, 부르주아지의 대리인, 자본주의의 하위 기구로만 간주될 수 없다. 자본주의가 등장하기 이전의 국가 형태 (중세 국가, 유럽 절대군주정 국가, 파라오의 국가 등) 와 현대 국가 형태를 살펴보면, 국가는 단순한 도구 이상의 중요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국가는 그 자체로 현실적 존재이며, 통치 계급을 구성했다.
오늘날 자본주의의 제국주의적 단계에서 국가, 즉 현대 국가는 단순히 상부구조로 간주되던 것을 넘어 점차적으로 구조 그 자체로 변모하고 있다.
부르주아 사상에서 국가는 현대 사회의 조정 기구로 여겨진다. 이는 어느 정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다수가 소수에게 종속된 사회 형태 때문이다. 따라서 국가는 부르주아지가 노동자 계급에 대해 조직화한 폭력이며, 지배 계급의 도구이다. 그러나 이러한 도구적 측면 외에도, 국가는 점차 기능적 성격을 띠며 스스로 조직화된 지배 계급이 되어가고 있다.
국가는 정치적·경제적 권력을 가진 집단 간의 갈등을 극복하려 하고, 부르주아지의 다양한 부문을 단일 블록으로 결속하려 한다. 이는 내부적 억압 능력을 강화하거나 대외적 팽창력을 증대시키기 위함이다. 국가는 정치와 경제를 통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며, 모든 활동 영역에 대한 헤게모니를 확장하고, 노동조합을 통합한다. 노동자는 현대적 농노로 전환되며, 최소한의 보장 (수당, 사회 보장 등) 을 받지만 완전히 종속된 상태로 남는다.
현대 국가에서, 국가는 더 이상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로 독립적인 권력이 되고 있다.
이 단계에서, 이는 미국을 포함한 모든 국가에서 나타나며, 나치즘에 의해 시도되었고, 소련에서 거의 완벽히 구현되었다. 우리는 이것을 여전히 자본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아마도 자본주의 제국주의 단계의 이러한 수준의 발전은 자본주의와는 다른 새로운 형태의 착취 사회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이는 더 이상 자본주의 진화의 문제라기보다는 본질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의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용어와 평가의 문제일 뿐이며, 현재로서는 다소 섣부르고 본질적인 중요성을 지니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가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부르주아 사회가 지향하는 착취와 노예화의 형태이다. 국가는 계급 기구이자 계급의 조직으로, 도구적이면서도 기능적이고, 상부구조이자 구조이다. 국가는 부르주아가 프롤레타리아에 대해 가지는 모든 권력과 지배 형태를 통합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5. 자유의지주의적 공산주의의 특성
우리는 혁명이 새로운 사회, 즉 아나키즘적 공산주의 사회를 창조하면서 없애고자 하는 부르주아 사회의 특징을 가능한 한 명확하게 요약하려고 노력했다. 혁명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검토하기에 앞서, 이 자유지상주의 공산주의 사회의 본질적인 특성을 분명히 해야 한다.
공산주의: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 또는 완전한 공산주의로
공산주의 사회를 정의하는 더 좋은 방법은 오래된 격언인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가져간다”를 반복하는 것이다. 먼저 이 격언은 인간의 발전을 위한 필요에 따라 경제가 완전히 종속되며, 재화의 풍요로움, 사회적 노동의 축소, 그리고 각 개인의 기여를 자신의 능력과 실제 역량에 맞추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공식은 인간의 완전한 발전 가능성을 표현한다.
둘째로, 이 격언은 계급의 소멸과 생산 수단의 집단적 소유 및 사용을 포함한다. 오직 공동체에 의한 이러한 사용만이 필요에 따른 분배를 가능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필요에 따라 가져간다”라는 격언이 표현하는 완전한 공산주의는 집단적 소유 (노동자 평의회나 노동조합 또는 코뮌에 의해 관리됨) 뿐만 아니라 생산의 확장된 성장, 즉 풍요를 전제로 한다. 하지만 혁명이 일어날 때 그러한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는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자원의 부족 상태는 경제가 인간 위에 계속 존재함을 의미하며, 이는 일정한 한계를 나타낸다. 따라서 공산주의의 적용은 더 이상 “필요에 따라 가져간다”라는 원칙이 아니라 단순히 소득의 평등이나 조건의 평등으로 제한될 것이다. 이는 균등한 배급, 또는 제한된 유효 기간을 가지며 상품의 배포 기능만을 가지는 화폐 대용의 형태로 배분될 수 있다. 이러한 방식은 소비자가 자신들의 소득을 어떻게 사용할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한다.
또한 일부 사람들은 “노동한 만큼 가져간다”라는 공식을 따르는 방안을 상정하기도 했다. 이는 특정 계층이 계층적 사고방식에 집착하고 있을 경우 발생할 수 있으며, 차등 임금 체계를 유지하거나 특정 ‘하위’ 또는 매력적이지 않은 활동에서 생산을 유지하거나 증가시키기 위해 노동 시간을 단축하는 혜택을 제공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될 수도 있다. 또는 최대한의 생산 노력을 얻거나 노동력 이동을 유도하기 위해 이러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차등의 중요성은 최소한에 머물 것이며, 공산주의 사회는 낮은 단계( 일부는 이를 사회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에서도 가능한 한 높은 수준의 평등과 조건의 동등성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자유의지주의적 공산주의
집단적 소유와 평등의 원칙이 실현된 사회는 경제적 착취가 지속되거나 새로운 형태의 계급 지배가 존재할 수 있는 사회가 아니다. 그런 것들은 바로 부정되어야 할 대상이다.
이것은 심지어 공산주의의 낮은 단계에서도 마찬가지이며, 비록 경제적 제약이 어느 정도 존재할 수는 있더라도 착취의 지속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그렇지 않으면, 혁명은 거의 항상 자원의 부족이라는 상황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혁명 자체가 근본적으로 부정될 것이다. 자유의지주의적 공산주의 혁명은 처음부터 완전한 사회, 혹은 심지어 고도로 발전된 사회를 실현하는 것은 아니지만, 착취와 지배의 기반을 파괴한다. 이 점에서 볼린은 이를 ‘즉각적이지만 점진적인 혁명’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또 다른 문제가 있다. 바로 국가의 문제, 우리가 어떠한 형태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조직을 가질 것인가의 문제이다. 분명히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은 공산주의의 높은 단계에서는 국가가 사라질 것으로 상정하지만, 낮은 단계에서는 국가를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이른바 ‘노동자 국가’ 혹은 ‘프롤레타리아 국가’는 조직화된 강제력으로 여겨지며, 이는 경제 발전의 불충분, 인간 능력의 미진함, 그리고 적어도 초기에는 혁명에서 패배한 과거 지배 계급의 잔재들과의 싸움 때문에 필요하다고 본다. 혹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는 혁명적 영토 내외에서의 혁명의 정도 때문이다.
공산주의 사회가 가질 수 있는 경제적 관리 형태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무엇인가?
물론 이는 노동자들의 관리, 즉 전체 생산자 집단에 의한 관리이다. 착취 사회가 점점 더 권력의 통합을 실현하면서 착취의 조건은 사적 소유, 시장, 경쟁 등과 같이 점점 더 줄어들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경제적 착취, 정치적 강제, 이데올로기적 왜곡은 밀접하게 연결되었으며, 생산 관리가 권력의 본질적 기반이자 착취자와 피착취자 간 계급 분할의 선이 되었다.
이러한 조건에서 혁명의 본질적 행위, 즉 착취의 폐지는 노동자 통제를 통해 이루어지며, 이 통제는 모든 권위를 대체할 시스템을 나타낸다. 생산자 전체가 관리하고 조직하며, 자치, 진정한 민주주의, 경제적 평등 속에서의 자유, 특권과 지배 소수의 폐지, 경제적 필요와 혁명 방어의 필요를 마련한다. 사물의 관리가 인간에 대한 통치를 대체하는 것이다.
경제적 영역에서 명령을 내리는 자와 이를 수행하는 자 사이의 구분이 폐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영역에서 이 구분이 정당의 독재나 소수의 형태로 유지된다면, 그러한 시스템은 5분도 지속되지 못하거나 생산자와 정치적 관료들 간의 갈등을 초래할 것이다. 따라서 노동자 통제는 소수의 권력과 국가의 모든 형태를 철폐해야 한다. 더 이상 한 계급이 지배하고 지도하는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영역과 경제적 영역 모두에서 대중적 경제 조직, 코뮌, 무장한 인민에 의해 관리되고 운영되는 문제가 되어야 한다. 이는 인민의 직접적인 권력이지 국가가 아니다. 이것이 일부 사람들이 말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면, 그 용어의 유용성은 의심스럽다 (이 문제는 다시 논의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분명히 당이나 관료 체제의 독재와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 이는 단순히 진정한 혁명적 민주주의일 뿐이다.
자유지상주의 공산주의와 인본주의
따라서 아나키즘적 공산주의, 혹은 자유의지주의적 공산주의는 인류의 완전한 발전, 완전히 인본주의적인 여성과 남성의 사회를 실현함으로써 영구적인 진보, 점진적인 변형, 과도기의 시대를 열어간다.
이는 목표를 지닌 인본주의를 창조하는데, 이 인본주의는 계급 사회 안에서, 계급투쟁의 발전 과정 속에서 기원한 이념이며,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가 그들의 계급 사회에서 우리에게 제시하려는 추상적 인간에 대한 거짓된 주장들과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
따라서 혁명은 착취 계급을 해방시키면서,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권력에 기반을 두어 모든 인류를 해방시킨다.
6. 혁명: 권력의 문제, 국가의 문제
우리는 이제까지 지배 계급의 권력이 표현되는 형태를 개괄적으로 살펴보았으며, 자유의지주의적 공산주의의 본질적 특징을 제시했다. 이제 혁명의 과정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는지 자세히 설명해야 한다. 이는 아나키즘의 핵심적인 측면에 대한 논의이며, 이를 통해 아나키즘이 다른 모든 사회주의 흐름과 가장 분명히 구별된다.
혁명이란 무엇인가?
혁명, 즉 계급 사회에서 계급 없는 자유의지주의적 공산주의 사회로의 전환은 점진적인 변형의 과정으로 생각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봉기로 생각되어야 하는가?
공산주의 사회의 기초는 착취에 기반을 둔 사회 내부에서 마련된다. 새로운 기술적·경제적 조건, 새로운 계급 관계, 새로운 사상은 기존의 제도들과 충돌하며 위기를 야기하고, 이는 빠르고 결정적인 해결을 요구한다. 이 과정은 기존 사회 내부에서 오랫동안 준비된 변화를 가져온다. 혁명은 새로운 사회가 탄생하며 구체제 (국가 자본주의와 부르주아 이념) 의 틀을 깨뜨리는 순간이다. 이는 두 세계 사이의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전환이다. 따라서 혁명은 계급 체제의 최종 위기라는 객관적 조건에서만 발생할 수 있다.
이러한 개념은 봉기를 낭만적으로 묘사하거나, 아무런 준비 없이 하루아침에 변화를 가져온다는 구상과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 또한 이는 개량주의자들과 같이 혁명을 하나의 과정으로만 여기는 사람들의 순수한 진화론적 개념과도 관련이 없다.
우리의 혁명 개념은 봉기주의와 개량주의에서 모두 멀리 떨어져 있으며, 기존 사회 내부에서 오랜 기간 준비된 혁명적 행동과 그 최종 단계에서 대중 조직에 의한 생산 및 교환 수단의 장악과 관리라는 개념으로 설명될 수 있다. 혁명적 행동의 이러한 결과는 구체제와 신체제를 명확히 구분 짓는다.
혁명은 부르주아지의 경제적·정치적 권력을 파괴한다. 이는 단순히 이전 지배자를 물리적으로 제거하거나 정부 기구를 마비시키는 것에 그치지 않고, 국가의 법적 제도 (법률과 관습, 계층적 방법과 특권, 전통, 그리고 집단적 심리적 현실로서의 국가 숭배) 를 파괴하는 데 성공함을 의미한다.
이행기
이제 혁명과 관련된 표현인 ‘이행기’의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는 종종 혁명이라는 아이디어와 연결된다. 만약 이행기가 계급 사회에서 계급 없는 사회로의 전환을 의미한다면, 이는 혁명 행위와 혼동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이행기가 공산주의의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의 전환을 의미한다면, 이 표현은 부정확하다. 왜냐하면 혁명 이후의 모든 시대는 점진적이고 지속적인 발전, 사회적 격변 없는 변형으로 구성되며, 공산주의 사회는 계속해서 진화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유의지주의적 공산주의와 관련하여 이미 명확히 했던 것은 다음과 같다. 혁명의 행위는 즉각적인 변화를 가져오며 사회의 기초가 근본적으로 변화하지만, 공산주의는 지속적인 발전이라는 점에서 점진적인 변화를 의미한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표현은 여러 가지 다른 의미로 사용되어 왔다. 이 점만으로도 혼란을 야기한다는 이유로 이 표현은 비판받아야 한다. 마르크스에 의해 이 용어는 프롤레타리아트를 대표한다고 주장하는 당의 중앙집권적 독재를 의미할 수도 있고, 연방주의적 코뮌의 개념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이것이 승리한 노동계급에 의한 정치권력의 행사를 의미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정치권력이라는 용어로 인정되는 권력의 행사는 필연적으로 권력의 독점과 소수를 통한 대리 통치를 의미하며, 이는 계급과 분리되어 계급을 억압하는 방식으로만 실행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국가 기구를 사용하려는 시도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대중에 대한 당의 독재로 환원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그러나 만약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집단적이고 직접적인 ‘정치권력’의 행사를 의미한다면, 이는 곧 정치권력의 소멸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정치권력의 본질적 특징은 우월성, 배타성, 독점성이기 때문이다. 더 이상 정치권력을 행사하거나 장악하는 문제가 아니라, 이를 완전히 없애는 문제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표현은 부정확하고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표현이다.
노동자 직접권력
국가라는 개념 (이는 착취 계급의 존재와 지배를 내포하며, 그러한 상태를 지속시키려는 경향이 있음) 을 거부하고, 지도자와 피지배자 간 기계적 관계를 내포하는 독재의 개념을 거부하면서, 우리는 혁명적 직접 행동에서의 조정의 필요성을 인정한다. (생산 및 교환 수단과 행정 중심지를 장악해야 하며, 반혁명 세력, 우유부단한 집단, 그리고 뒤떨어진 착취 사회 계층 (예를 들어 일부 농민 계층)으로부터 혁명을 보호해야 한다.)
이는 분명 권력을 행사하는 것에 관한 문제이지만, 이는 움직이는 프롤레타리아의 지배, 효과적으로 조직된 무장 인민의 지배, 공격과 방어를 위한 보편적 경계 체제를 수립하는 문제이다. 러시아 혁명, 마흐노주의 운동, 1936년 스페인 혁명의 경험이 이를 증명한다. 그리고 우리는 스페인 혁명 한가운데에서 볼셰비키의 국가 개념을 반박하며 쓴 카밀로 베르네리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아나키스트들은 프롤레타리아에 의한 직접적 권력 사용을 인정하지만, 이 권력의 도구는 당의 정치적 독점을 배제하고 이에 반대하며, 지역적·국가적 수준에서 자유롭게 조직된 공산주의 조직 방식 (조합 제도 및 코뮌 제도) 전체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들은 조직적 중앙집권화를 최소화하려고 노력한다.”
따라서 대중과 분리된 전문화된 조직이 권력을 행사하는 국가 개념에 반대하여, 우리는 책임지고 통제되는 선출된 대의원 (언제든지 소환될 수 있으며, 다른 노동자들과 동일한 임금을 받음) 이 계층적이고 전문화된 특권적 관료제를 대체하는 노동자 직접권력의 개념을 제시한다. 행정 기관 (소비에트, 노동조합 및 코뮌) 과 같은 기구가 통제하는 민병대가 군대 대신 사회와 단절된 국가나 정부의 독단적 권력에 종속되지 않은 상태에서 인민 무장의 개념을 실현한다. 또한, 합의와 의무의 이행과 관련하여 발생하는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인민 배심원이 기존의 사법 제도를 대체한다.
혁명의 방어
혁명의 방어와 관련하여, 혁명에 대한 우리의 이론적 개념은 부르주아지의 모든 반격의 근거를 파괴하는 국제적 현상이라는 점을 명확히 해야 한다. 이는 자본주의의 국제적 조직이 생존의 모든 가능성을 소진하고 최종 위기 지점에 도달했을 때, 성공적인 국제 혁명의 최적 조건이 마련된다. 이러한 경우, 방어의 문제는 부르주아지의 완전한 소멸 문제로만 귀결된다. 경제적, 정치적 권력에서 완전히 단절된 부르주아지는 더 이상 계급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일단 패배한 부르주아지의 다양한 요소들은 프롤레타리아의 무장 기관에 의해 통제된 후, 최고 수준의 동질성을 향해 나아가는 사회에 흡수된다. 이 마지막 작업은 어떤 특별한 관료 조직의 도움 없이 직접 수행되어야 한다.
혁명 기간 동안 범죄 문제는 혁명의 방어 문제와 연결될 수 있다. 부르주아 법률과 계급 사회의 사법 및 감옥 시스템의 소멸은 여전히 반사회적 인물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게 해서는 안 된다 (부르주아 사회에서의 끔찍한 수의 죄수와 비교하면 적지만, 이는 주로 사회적 불의, 빈곤, 착취라는 조건에서 비롯됨). 또한, 어떤 방식으로도 동화될 수 없는 일부 부르주아지의 문제도 존재한다. 우리가 앞서 정의한 대중의 직접적 권력 기구는 이들이 해를 끼치지 못하도록 막을 의무가 있다.
살인자, 위험한 정신 이상자 등을 자유라는 명목으로 방치하여 동일한 범죄를 다시 저지르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들을 대중의 보안 서비스가 해를 끼치지 못하게 하는 것은 계급 사회의 비인간적인 감옥 제도와는 전혀 다르다. 자유를 박탈당한 개인은 사회에 안전하게 복귀할 수 있을 때까지 법적 처벌보다는 의료적 방식으로 다뤄져야 한다.
혁명은 필연적으로 모든 곳에서 동시에 실현되는 것이 아니며, 실제로는 점진적인 혁명이 일어나고, 이러한 혁명이 퍼지거나 최소한 국제적 프롤레타리아가 혁명을 방어하고 확장하기 위해 싸운다면 보편적 혁명을 이루게 될 수 있다.
따라서 혁명의 내부적 방어뿐만 아니라 외부적 방어도 필요해진다. 그러나 이는 무장한 민중으로 구성된 민병대를 기반으로 해야 하며, 국제적 프롤레타리아의 지원과 혁명의 확장 가능성을 전제로 한다. 혁명은 스스로를 제한하거나 자신을 방어하려는 명목으로 국가를 복원하고 계급 사회로 되돌아간다면 소멸하게 된다.
그러나 새로운 사회의 가장 좋은 방어는 자신의 혁명적 성격을 확고히 하는 데 있다. 이는 부르주아지가 복원될 시도를 할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한 기반을 신속히 창출한다. 혁명 지역의 사회주의적 성격을 완전히 확언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최고의 무기이다. 이는 국내에서 에너지와 열정을 창출하며, 국외에서는 혁명적 전염과 연대를 형성한다. 스페인 혁명이 자신의 성과를 과소평가하고 방어를 위한 군사적 임무에만 몰두했던 것은 아마도 가장 치명적인 실수 중 하나였을 것이다.
혁명적 권력과 자유
혁명적 투쟁 자체와 혁명이 창조한 변혁의 공고화는 모두 착취를 유지하거나 복원하려는 정치적 주장의 자유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이는 대중의 직접적 권력과 혁명 방어의 측면 중 하나이다.
여기서의 자유는 혁명이 실현한 바로 그 자유, 즉 착취와 소외의 종식, 모두의 통치, 그리고 사회적 삶에 대한 능동적 참여와 모든 사람을 위한 진정한 민주주의를 의미한다. 이는 계급 없는 사회에서 특정한 해결책을 제안하고 의견의 차이를 표현할 권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대중 조직에 의한 권력 행사를 공개적으로 또는 은밀히 반대하는 집단이나 조직의 문제는 전혀 다르다. 이는 패배한 부르주아지 집단뿐만 아니라 관료적 가짜 사회주의 집단에서도 발생할 가능성이 더 크다.
폭력적인 투쟁의 초기 단계에서는 착취 사회를 방어하거나 복원하려는 구조와 경향을 강제로 억압해야 한다. 적이 교묘하게 조직화하거나, 사기를 저하시키거나, 첩보를 수행하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투쟁의 부정이며, 사실상 항복이다. 마흐노와 스페인 자유지상주의자들 역시 이 문제에 직면했고, 적의 선전을 억압함으로써 이를 해결했다.
그러나 혁명의 성과가 공고화된 경우와 같이 반동적 이념의 표현이 혁명 결과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없는 상황에서는, 여전히 흥미롭거나 힘을 유지하고 있다면 이를 표현할 수 있다. 이념이 단순히 호기심의 주제가 되는 경우, 대중의 혁명에 대한 헌신은 그러한 이념의 독을 제거한다. 그것이 단순히 이념적 수준에서 표현된다면, 이는 금지가 아니라 그 수준에서만 싸워야 한다. 의식 있는 대중 속에서의 완전한 표현의 자유는 오직 문화를 창조할 수 있다.
이 문제와 모든 문제에 대해 판단하고 결정을 내릴 책임은 대중 자신의 조직과 무장 프롤레타리아에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에서 혁명이 만들어진 본질적 자유는 유지되고 보호된다.
7. 구체적 아나키스트 조직, 대중의 각기 다른 역할
우리가 방금 설명한 혁명의 개념은 몇 가지 역사적 조건을 전제로 한다. 그 하나로는 기존 사회의 급격한 위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의식화된 대중운동과 잘 조직되고 방향성을 가진 소수가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가 진보함에 따라 프롤레타리아의 의식과 능력은 발전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중 가장 진보된 부문은 혁명적 조직으로 나아갈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혁명적 조직은 전체 대중을 조망하며 그들의 자치 역량을 발전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혁명적 조직과 대중 간의 관계에 대해 우리가 살펴본 바에 따르면, 혁명 전 시기에는 구체적 조직만이 목표와 수단을 제시하기만 할 수 있고, 그 목표와 수단은 조직의 이념적 투쟁과 모범적인 실천을 통해서만 대중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
혁명 시기에도 동일한 원칙이 적용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나키스트 조직은 관료제로 타락하고, 대중과 분리된 정치적 세력이 되어 국가로 변환할 위험이 발생할 수 있다.
혁명의 진행 과정에서 정치적 전위, 즉 능동적 소수는 특정 과업(예: 적대 세력의 숙청)을 맡을 수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이러한 전위는 프롤레타리아의 의식을 대변하는 역할에 그쳐야 한다. 결국, 전위는 계급 없는 사회가 공고히 다져지고, 공산주의가 하위 단계에서 상위 단계로 진화함에 따라 그 역할을 다하게 되면 점차 사회 일반에 통합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대중 전체가 필요한 수준의 의식을 획득했을 때 가능해질 것이다.
구체적 아나키스트 조직은 혁명이 성공한 이후 대중의 자치 능력을 함양하고 혁명적 각성을 이루어내는 것을 그 과업으로 두어야 한다. 혁명의 성패는 구체적 아나키스트 조직의 태도와 역할 인식에 크게 달려 있다. 혁명의 성공은 필연적이지 않다. 대중이 투쟁을 포기할 수도 있고, 혁명적 소수의 조직이 보수화되면서 부르주아지의 복귀나 관료적 독재로의 회귀를 위한 기반이 다시 마련될 수도 있다. 심지어 아나키스트 조직 자체가 관료적 권력으로 변질될 가능성도 있다. 이러한 위험을 숨기거나 이를 방지하기 위한 조직적인 행동을 거부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매우 냉철한 자세로 투쟁에 임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냉철함과 경계심에 비례하여 아나키스트 조직은 그 역사적 과업을 완수할 수 있을 것이다.
자유의지주의적 공산주의의 도덕성
달성해야 할 목표를 설정하고, 전위 조직이 대중과 맺어야 할 관계의 성격을 규정할 때, 혁명적 아나키스트 이론은 특정한 행동 규칙들을 반영한다. 따라서 우리가 ‘도덕성’이라고 칭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도덕성을 반대한다
모든 사회의 도덕성은 어느 정도 그 사회의 생활 방식과 발전 수준을 반영하며, 그 결과로 매우 엄격한 규칙들로 표현된다. 이러한 규칙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일탈을 허용하지 않으며 (이를 어기거나 변화시키려는 의지는 범죄로 간주됨), 이러한 방식으로 도덕은 사회생활의 틀 안에서 분명한 필요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면서도, 동시에 사회적 정체와 관성적 행태를 지향한다.
따라서 도덕은 단순히 실질적인 중재의 필요를 표현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도덕은 종교적, 신학적 또는 형이상학적 성격을 띠며, 자신의 규칙들을 초자연적 명령의 표현으로 내세운다. 이러한 규칙을 따르거나 어기는 행위는 미덕이나 죄악 같은 신성한 성격을 가진다. 체념은, 분명 특정 사실 앞에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행위이지만, 주 앞에 스스로를 내려놓음은 주요한 미덕이다. 인간은 고통을 싫어하지만, 고통 자체가 최고 미덕으로 승격되어 고통을 추구하라 말하기도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기독교는 가장 혐오스러운 도덕 체계 중 하나이다.
도덕은 단순히 외적 제재의 집합이 아니다. ‘도덕적 양심’이라는 형태로 개인 내부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것이다. 이 도덕적 양심은 도덕에 내재된 종교적 성격이 힘입어 만들어지고 유지되며, 종교적이고 초자연적인 특성을 가진다. 따라서 이는 사회적으로 살아가기 위한 필요가 양심이라는 단어로 모인 것과는 성격적으로 다르다.
마지막으로,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도덕이 공개적으로 사회의 계급이나 계층의 분리를 드러내지 않는다 해도, 특권을 가진 집단들은 자신들의 지배를 정당화하고 보장하기 위해 도덕을 이용한다는 사실이다. 종교, 법률, 도덕은 모두 동일한 사회적 현실의 인접한 영역에서 표현된 것일 뿐이며, 도덕은 기존의 지배와 착취 조건 및 관계를 승인하고 고착화한다.
도덕은 이데올로기, 법률, 종교 등과 마찬가지로 착취 사회에서 인간 소외의 표현이다. 도덕은 정체, 신비화, 체념, 그리고 계급 특권의 정당화와 유지를 특징으로 하므로, 아나키스트들이 그 본질을 폭로하고 비판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인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도덕성을 가지고 있는가?
도덕이 진화하거나 수정될 수 있으며, 심지어 착취에 기반한 사회 내에서도 한 도덕이 다른 도덕으로 대체될 수 있다는 점이 종종 지적된다. 삶의 조건에 따라 미묘한 차이, 적응 또는 변형이 있었지만, 이러한 도덕은 모두 동일한 본질적 가치를 보호했다. 예를 들어, 복종과 재산에 대한 존중이다. 이러한 적응이 저항을 받았으며, 그 촉진자들 (예를 들면 소크라테스와 그리스도)이 종종 박해를 받았다는 점, 그리고 도덕이 관성을 띠는 경향이 있다는 점은 여전히 사실로 남아 있다.
어쨌든, 노예화된 사람들이 이러한 도덕에 그들 자신의 가치를 도입할 수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점은, 노예화된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열망을 표현하는 혁명가들이 그들만의 가치, 그들만의 도덕을 가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도덕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면, 착취와 지배에 기반을 둔 사회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이를 인정하는 도덕을 거부하고, 또한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 이상들로 가득 찬 이 도덕을 거부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기반으로 도덕을 세울 수 있는가?
이러한 겉보기에 모순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있다. 그것은 사고와 사회과학이 인간 종이 모든 면에서 번영할 수 있는 가능성을 구성하는 과정을 상상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은 진정한 사회주의, 즉 자유의지주의적 공산주의가 표현하는 억압받는 자들의 일반적인 열망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우리의 혁명적 목표가 우리의 이상이며, 우리의 당위이다.
이는 분명 도덕의 기반이 될 수 있는 이상이자 당위이다. 그러나 이는 종교적 계시나 형이상학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현실에 기반을 둔 이상이다. 이 이상은 일종의 인본주의이다. 그러나 아무런 기반도 없이 사회적 투쟁의 현실을 감추는 감상적 인본주의가 아니라, 사회의 혁명적 변화를 기반으로 한 인본주의다.
우리의 도덕성
프롤레타리아 내에서 이 이상을 보여주는 도덕적 가치는 무엇인가?
이 도덕이 규칙과 규율로 표현되는가?
우리가 반대하는 도덕을 ‘선’과 ‘악’이라는 관념으로 판단하거나, 행동의 동기를 ‘이기심’ 혹은 ‘이타심’이라고 불러야 하는지에 관한 무익한 말장난에 휘말려서는 안 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애정과 감정 (모성애, 사랑, 공감, 위험에 처한 사람을 구하는 것 등) 에서 비롯된 행동과 계약, 서면 또는 비서면 합의 (즉 법률) 에 의존하는 행동 사이에는 도덕적 관념과 도덕적 양심에 의존하는 사회적 관계가 있다.
계약 조항에서 진심 어린 존중의 보장은 어디에 있는가? 적에 대한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가? 자신에게 어떤 무기를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금지해야 하는가? 이 모든 질문에 대해, 안내인 역할을 하며 한계를 설정하고, 지속적인 소송과 배심원 의존을 방지할 수 있는 도덕은 단 하나뿐이다.
혁명적 실천과 자각한 프롤레타리아의 삶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가치를 발견한다. 연대, 용기, 책임감, 명료한 사고, 끈기, 노동계급 조직 및 아나키스트 조직의 연방주의 또는 진정한 민주주의. 이는 규율과 주도적인 정신을 동시에 실현하고, 혁명적 민주주의 — 즉 공산주의 사회 창조를 진심으로 추구하는 모든 흐름이 그들의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비판하며, 혁명적 이론과 실천을 완성할 가능성을 존중한다.
우리가 당위로 설정한 혁명적 원칙은 명백히 적, 즉 부르주아지와의 관계에서 그들이 혁명가들에게 그들 자신의 도덕적 금지를 수용하도록 만들려는 시도를 면제한다. 이 분야에서 우리의 행동을 지시하는 것은 오로지 목표뿐이다. 이는 목표가 인정되고 과학적으로 규정되면, 수단은 단순히 전술의 문제일 뿐이며, 따라서 목표와 추구하는 목적에 적합할 때에만 수단으로서 가치를 지닌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는 아무 수단이나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수단을 정당화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호한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라는 공식을 거부하고 더 간단히 말한다. “수단은 오직 목표에 따라 선택되고, 그 목표에 적합한 경우에만 존재하며, 적의 도덕이나 적을 기준으로 정당화될 필요가 없다.”
반면, 이러한 수단은 필연적으로 우리의 도덕 체계 내에 포함되며, 이는 우리의 이상에 부합한다. 즉, 자유의지주의적 공산주의라는 이상은 혁명을 포함하며, 혁명은 대중이 아나키스트 조직의 지도 아래 의식을 갖게 하는 것을 내포한다. 예를 들어, 이러한 수단은 연대, 용기, 책임감과 같은 우리가 앞서 언급한 도덕적 미덕을 필요로 한다.
하나 주목해야 할 점은, 우리 도덕의 한 측면이 사람들에게 연대의 의미와 연결될 수 있지만 사실상 우리 도덕의 정수인 진실이다. 부르주아지와 같은 적을 속이는 것은 당연하지만, 우리는 동료들 사이에서, 그리고 대중에게 진실을 말해야 한다.
어떻게 우리가 다르게 행동할 수 있겠는가? 무엇보다도 그들의 의식, 이해, 판단이 향상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르게 행동하려 했던 사람들은 대중을 굴욕감에 빠뜨리고 낙담하게 했으며, 진실, 분석, 비판의 감각을 잃게 했다.
부도덕한 냉소주의에는 프롤레타리아적이거나 혁명적인 것이 없다. 이는 공식 도덕의 공허함을 선언하면서도 어떤 존재하는 환경에서도 건강한 도덕을 찾을 수 없는 부르주아지의 타락한 요소들의 태도이다.
부도덕주의자는 외견상 모든 움직임에서 자유롭다. 그러나 그들은 더 이상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지 못하며, 다른 사람을 속였을 때 결국 자신도 속이게 된다.
목표만 있어서는 충분하지 않다. 목표에 도달할 방법도 필요하다.
자각한 대중들, 더 나아가 자유지상주의 공산주의 운동 내에서 도덕이 발전하는 것은 혁명적 이데올로기의 구조를 강화하고, 새로운 문화를 준비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한다. 동시에 이는 부르주아지의 문화를 완전히 거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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