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동지이건 아니면 우리의 적이건, 자유의 실현이라는 문제가 오늘날 역사적 과제의 최전선에 놓여 있는 사실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실제로 누구도 공개적으로, 그리고 거리낌 없이 자유에 반대한다고 선언하지 않는다. 그러나 복음이 이미 이른 바, 신앙의 고백이 곧 현실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안타깝게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는 자유를 믿지 않는다. 따라서 여러 인물군이 자유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지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매우 다양한 유형으로 나뉜다.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높은 지위에 올라 있고 나이가 들었으며 경험을 갖추었다고 자처하는 사람들과 마주한다. 이들은 젊은 시절 정치적 자유를 두고 딜레탕트처럼 행동했던 자들이다. 어떤 저명하고 부유한 인물은 자유와 평등을 말하는 데에서 기묘한 쾌락을 느낀다. 그는 그러한 발언을 통해 자신의 사업에서도 매력을 확보한다. 그러나 이들은 이제 육체적·정신적으로 너무도 해이해졌고, 이를 ‘경험’이라는, 지나치게 남용된 단어로 덮으려 한다. 과거에 그들이 가졌던 자유에 대한 관심은 이미 사라졌고, 청년기의 활력 또한 함께 소멸했다.
이들과 대화하는 것은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는다. 이들은 애초에 자유를 진지하게 받아들인 적이 없었다. 자유는 그들에게 하나의 종교와 같다. 가장 극단적인 갈등과 가장 쓰라린 고통, 그리고 완전하고 무조건적인 자기부정을 통해서만 최고의 쾌락과 가장 높은 환희를 제공하는 종교 말이다. 우리는 이들과 대화할 이유가 없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이들은 늙었고 곧 죽어 사멸할 자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안타깝게도 이들과 동일한 신념을 공유하거나, 혹은 아무런 신념도 지니지 않은 청년들 또한 많다. 이들은 대체로 두 부류에 속한다. 하나는 독일에서 이미 오래전에 정치적으로 죽어버린 귀족 계급이고, 다른 하나는 상인·장교등으로 구성된 부르주아지다. 우리는 이들과도 함께 할 수 없다. 이들은 오히려 죽음이 가까운 신중한 노년층보다 더 상대하기 어렵다. 노년층은 적어도 한때는 미약하게나마 삶의 흔적을 지니고 있었지만, 이 청년들은 처음부터 생명력을 가져보지도 못한 살아 있는 시체들이다. 이들은 하찮은 이해관계와 금전적 이익에 완전히 얽매여 있다. 이들은 진부한 일상적 관심사에 전적으로 매달리면서 삶이 무엇인지, 그리고 자기 주변에서 무엇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최소한의 인식조차 하지 못한다. 만약 이들이 학교에서 역사나 정신의 발전에 대해 조금이라도 배우지 않았다면, 세상은 언제나 오늘과 같았다고 믿었을 것이다. 이들은 무채색의 유령과 같은 존재들이다. 선도, 악도 행할 수 없다. 우리는 이들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실제로 효과를 발휘하는 것은 오직 살아 있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는 유령과 어울리는 것이 더 이상 유행이 아니므로, 우리 역시 이들에게 시간을 낭비하지 않을 것이다.
세번째 부류는 아예 혁명에 적대하는 자들이다. 복고 이후 곧바로 전 유럽에서 형성된 반동 세력이 그들이다. 정치학에서는 이들을 보수주의자라 부르고, 법학에서는 역사법학파라 하며, 사변적 학문에서는 실증철학이라 부른다. 우리가 주로 논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들이다. 우리가 이들의 존재를 무시하거나 하찮게 여기는 것은 오히려 매우 저열한 태도다. 우리는 이들이 현재 도처에서 지배적인 세력이고, 더 나아가 그들의 권력이 우연의 결과가 아니라 근대 정신의 전개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된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역사에 우연은 없다. 역사는 자유의지가 전개하는 자유롭고도 필연적인 과정이다. 따라서 반동 세력 우위를 우연한 사건으로 규정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민주주의에 반하는 규정이다. 우리가 민주주의를 이야기 할 때, 그것은 인간은 모두 자유의지를 행사한다는 신념 위에서 성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기만적 위안은 우리에게 훨씬 더 위험하다. 우리는 아직 우리의 위치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힘의 진정한 원천과 적의 본질을 자주 오해한다. 그 결과 우리는 매일의 고된 현실에 짓눌려 용기를 잃어버리거나, 혹은 근거 없고 유치하며 무의미한 낙관에 빠진다. 그리고 인간은 절망을 오래 견디지 못하기에, 낙관이 더욱 위험하다.
우리 민주주의자들은 지피지기를 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인식을 통해 민주주의 진영은 유토피아적 불확실성에서 벗어나, 자신이 살아가고 고통받으며 결국 극복해야 할 현실로 나아갈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그 열정은 신중해지고 겸허해질 것이다. 민주주의 진영은 이러한 고통스러운 현실과의 접촉을 통해서만 자신의 사명을 자각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우리 자신을 가로막는 끝없는 난관을 통해 이 난관은 단지 적들의 반지성주의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추상적 이론으로도 완전히 포착할 수 없는 인간의 총체적 본성에서 비롯됨을 깨달아야 한다. 현재 우리의 존재양식이 불충분함을 깨달아야 한다. 동시에 적이 외부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도 존재하며, 우리는 내부의 적을 먼저 극복해야 함을 이해해야 한다.
또한 민주주의는 단지 전제주의적 정부에 대한 반대나 특정한 헌정적·정치경제적 개혁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세계의 조건 전체를 변혁하는 과정이며, 역사상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삶의 출현을 예고한다.
민주주의는 하나의 종교처럼 존재하여야 한다. 민주주의 진영은 종교적 성격을 획득해야 한다. 사유와 이론에 그치지 않고 삶의 가장 미세한 영역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원리에 철저히 충실해야 한다. 오직 이러한 조건이 충족될 때에만 민주주의 진영은 진정으로 세계를 정복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반동 세력의 현재 권세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라는 점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이들이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민주주의의 원리가 충분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인간의 평등이 자유 속에서 스스로를 실현한다는 민주주의 원리는, 시대정신이 내재한 가장 보편적이며 포괄적인 본질이다. 오히려 반동 세력의 현재 권력은 민주주의 ‘진영’의 불충분함에서 비롯된다. 민주주의 진영은 아직 자신의 원리에 대한 명확한 자각에 도달하지 못했으며, 그 결과 지배적인 현실에 대한 부정으로만 존재한다.
민주주의 진영이 단지 부정성으로만 존재하는 이상, 민주주의 진영은 인간의 삶을 총체적으로 논의할 수 없다. 스스로의 원칙으로부터 그 충만함을 전개할 수 없다. 이는 그들이 자신의 원리를 거의 전적으로 부정성으로만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민주주의 진영은 지금까지 오로지 당파로만 존재해 왔다. 아직 살아 있는 현실로 존재하지 못했으며, 현재가 아니라 미래로서 존재해 왔다.
다음의 내용은 사실이다. 민주주의자들은 오로지 당파로만 존재하고 있다. 우리는 외연이라는 측면에서 그 세력이 약하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대적하는 다른 당파의 존재 아래에서만 하나의 당파로 존재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들의 총체는 민주주의 진영이 지닌 본질적 결함을 드러낸다. 민주주의 진영은 그 본질과 원리에 있어 보편적이고 포괄적인 존재이다. 그러나 존재 형태에 있어서는 단지 하나의 특수한 존재에 그친다. 즉, 민주주의 진영은 부정성으로만 존재하며, 현존 체제라는 긍정성에 대립하는 것으로만 존재하고 있다.
부정성의 그 억제할 수 없는 힘은 긍정성에 맞서 승리하는 데에 의의가 있다. 그러나 부정성은 긍정성을 파괴하는 동시에, 자신의 본질에 부합하지 않는 특수적 존재로서의 스스로도 함께 파괴한다. 따라서 현재의 왜곡된 민주주의 당파는 전제주의라는 긍정성과 함께 스스로 파괴하여야 한다. 그래야만 민주주의는 자신의 자유로운 토대 위에서 다시 태어나 고유의 충만함을 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단순한 양적 변화도, 현재의 특수하고 왜곡된 존재를 단순히 확대하는 것도 아니다. 만약 현재의 민주주의 당파가 단순히 확대하는 것으로 귀결한다면 그것은 세계 전체의 평준화를 낳고 결국 역사의 최종 결과는 절대적 무에 이를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사태를 결코 원하지 않는다. 민주주의 진영이 이루어야 할 것은 질적 전환이다. 새로운 생명력을, 새로운 세상을 창출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모든 불일치를 조화로운 통일로 해소하는 것이다.
민주주의 진영의 불충분함은 우리가 당파로서 지니는 일면성을 현존 체제의 중재와 타협을 통해 극복하는 것으로는 결코 해소될 수 없다. 긍정과 부정은 근본적으로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부정성이 긍정성과의 대립 속에서 고립되어 있을 때, 그것은 처음에는 공허하고 무기력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전제주의자들이 민주주의자들을 공허하고 무기력하다 비난하지 않는가. 그러나 이러한 비난은 오해일 뿐이다. 실제로 ‘독자적 부정성’는 존재하지 않는다. 긍정성이라는 ‘상대’가 없이 오롯한 부정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긍정성을 파괴하겠다는 목적이 없이 홀로 선 부정성은 그저 없기 때문이다.
구체제(역자주 - 여기에서는 빈 체제를 말한다)는 “혁명적 선전은 그 가장 깊은 본질에서 기존 국가 질서를 부정”한다고 말한다. 참으로 옳다. 혁명이란 그 내적 본성상, 지금 지배적인 모든 질서를 파괴하는 것 외에 다른 어떠한 강령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묻는다. 자신의 전 존재가 오직 파괴만을 향하고 있는 것이, 반드시 파괴해야 하는 대상과 화해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오직 현존 체체–긍정성에도, 혁명–부정성에도 진지하게 서지 않는 간잽이들만이 이러한 중립론을 진지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반동 세력 내부에는 두 개의 주요 분파가 존재한다. 하나는 순수하고 일관된 근본주의 반동이며, 다른 하나는 비일관적이고 타협적인 반동이다.
근본주의 반동분자들은 혁명세력과의 대립을 순수한 형태로 해석한다. 이들은 긍정과 부정이 물과 불처럼 결코 공존할 수 없다고 본다. 그들은 부정파가 어떠한 건설적인 내용도 가지지 못하기에, 체제를 유지하려면 부정파를 완전히 억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이 옹호하는 체제가, 사실은 부정성과의 대립 속에서만 긍정성으로 성립한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한다. 또한 현존체제가 부정성에 대해 완전한 승리를 거둘 경우, 그 승리는 결국 부정성의 완성으로 전도된다는 사실도 이해하지 못한다. 맹목성은 모든 긍정의 본질적 특징이며, 오직 부정만이 본질적으로 통찰이라는 것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반동분자들에게 감사해야 한다. 오늘날처럼 타락하고 무책임한 시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비겁하게도 자신의 원칙이 지닌 엄격한 결함을 은폐하려 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은폐를 통해 자신이 세운 인위적이고 허약한 신념 체계를 지키려 한다. 반면 이 반동들은 오히려 진지하고 정직하다. 이들은 스스로 완전한 인간이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들과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없다. 이들은 결코 우리와 이성적인 논의를 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 부정성이 지닌 해체의 힘은 도처에 퍼져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들이 순수한 긍정파로 머무르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 결과 이들은 자신의 이성을 포기하고, 스스로를 두려워된다. 또한 자신의 신념을 입증하려는 가장 작은 시도조차 회피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시도는 곧 자기 신념을 반박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이 몰려있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말을 해야 할 때조차 거칠고 불쾌한 태도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정직한 인간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그러한 인간이 되기를 지향한다. 이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모든 반쪽짜리 태도를 혐오한다. 오직 완전한 인간만이 선할 수 있으며, 반쪽짜리 태도야말로 모든 악의 부패한 근원이기 때문이다.
이 광신적 반동파는 우리를 이단이라고 비난한다. 만약 가능하다면, 이들은 역사 속의 종교재판소라는 지하 권력을 다시 끌어내어 우리에게 사용하려 할 것이다. 이들은 우리가 선하지도 않고, 심지어 인간도 아니며, 오로지 적그리스도의 현현으로만 간주한다. 따라서 이들은 우리에게 가하는 모든 수단을 정당하다고 여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동일한 방식으로 대응해야 하는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에게도, 우리가 추구하는 이상에도 걸맞지 않다. 우리는 공정하고 편견 없이 판단할 수 있는 고귀한 특권을 가지고 있다.
편향성은 결코 진리가 될 수 없다. 진리는 편향성과 반하기 때문이다. 편향은 필연적으로 편파적이고 광신적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기에. 편향성은 다른 편향성이 존재하여야만 존재할 수 있지만, 동시에 다른 편향성에 대한 격렬한 배척을 통해서만 스스로 유지할 수 있다는 모순적 저주를 떠안고 있다. 이 저주에 걸린 인간은 아무리 선하다해도 다른 사람을 증오하게 된다.
이 점에서 우리는 훨씬 더 유리한 위치에 있다. 우리는 하나의 당파로서 긍정성과 대립하며 싸운다. 이 투쟁 속에서 우리 또한 온갖 악한 정념을 가지게 된다. 우리가 하나의 당파에 속해 있기에, 우리는 자주 편파적이고 불공정해진다. 그러나 우리는 단지 긍정에 맞서는 부정이 아니다. 우리는 무조건적 자유라는 전면적 원리를 따른다. 이는 현존 체제가 오로지 제한적으로만 보장하는 모든 긍정성을 포괄하는 동시에, 현존 체제보다 상위의 긍정성으로서 우리의 당파 또한 포괄하고 있다.
우리는 당파로서 정치를 수행한다. 그러나 우리가 정당성을 갖는 근거는 정무적 행동이 아니라 오직 우리의 원리에 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현존체제와 무엇이 다를 것인가. 따라서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심지어 그것이 우리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한이 있더라도, 무조건적인 자유라는 원리에 충실해야 한다. 즉, 우리는 우리가 속해있는 편협하고 정무적인 당파 그 자체를 극복하여야 한다. 우리는 총체적이고 다면적인 우리의 자유를 종교로 두고, 그 교리 아래에서 스스로를 끊임없이 극복해야 한다.
우리는 정치적으로만 행동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종교적으로 정치를 행해야 한다. 여기서 종교적이라는 것은 정의와 사랑으로, 우리의 자유를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기독교의 적이라 불린다.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가 제시한 가장 고귀한 계명이자, 참된 기독교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인 사랑을 그 무엇보다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의 대적들에 대해서도 공정하게 대해야 한다. 우리는 그들 역시 진정으로 자신의 선을 행하고 있음을 인정한다. 그들이 본질적으로 악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들은 본성적으로 선량한 삶을 지향하고 있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불운으로 인해 자신의 참된 소명에서 벗어났을 뿐이라는 사실 또한 인정한다. 자신의 악한 정념을 분출하기 위해 그들의 진영에 가담한 위선자들에 대해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오직 현존 체제의 긍정성을 진지하게 옹호하는 사람들을 인정한다.
이들은 선을 추구한다. 그러나 그것을 실제로 의지할 수는 없다. 이들은 자기 내부에서 분열된 안타까운 자들이다. 이들은 자유를 차갑고 건조한 추상적 개념으로 이해한다. 이들은 자유의 원리 속에서 살아 있는 것, 아름다운 것, 신성한 것을 볼 수 없다.이들은 자유가 현재의 왜곡되고 단지 부정성으로만 존재하는 ‘자유’와 동일시될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한다. 이들은 스스로의 자아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긍정성과 부정성의 범주를 초월하여 자기 긍정이 이루어져야만 함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들은 부정성이 스스로 확산성을 가진다고 믿는다.(사실 급진적 부정파의 구성원 다수도 이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부정성의 확산은 영적 세계의 평준화를 낳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물론, 우리 또한 이렇게 생각한다.) 동시에 이들은 감정의 직접성 속에서 살아 있는 충만한 삶을 향한 정당한 열망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부정적인 것 속에서 오직 평준화만을 발견하기 때문에 과거로 되돌아간다. 이들은 궁정성과 부정성 사이의 대립이 발생하기 이전의 상태로 회귀하려 한다.
과거는 살아 숨쉬는 하나의 총체였고, 어찌보면 그 과거는 현재의 분열 상태보다 더 생동감 있고 풍부하기에 그들의 말은 일견 옳다. 그러나 그 과거를 과거의 생명력 그대로 재현할 수는 없기에, 그들은 결정적으로 틀렸다. 과거의 총체성은 이제 현재의 불가피한 대립 속에서 쪼개어져 형태를 잃은 환영으로만, 총체성이라는 영혼을 소진한 긍정성의 시체로만 나타날 수 있다.
그들은 맹목적인 긍정성의 추종자이기에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들 역시 살아있는 인간이기에, 과거에 생명력이 없음을 분명하게 감지한다. 하지만 이들은 스스로가 현실을 긍정하는 태도 그 자체가 현실의 모순 또한 긍정함으로서 오히려 부정성을 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에, 부정성이 과거를 죽이고 있다고 말한다. 그 결과, 그들이 가지고 있는 삶과 진리에 대한 갈망은 결코 충족되지 못하고 결국 증오로 전이한다. 이것이 모든 일관된 긍정파에게서 필연적으로 전개되는 내적 과정이다. 따라서 나는 진실로 그들을 연민한다. 그들은 거의 언제나 정직하기 때문이다.
타협적 긍정파들은 이들과 전혀 다르다. 첫째로 이들은 시대의 사변적 병폐에 의해 더 깊이 부패하였기 때문에, 부정성을 절대적 악으로 무조건적으로 단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부정성의 상대적이고 과도적인 정당성을 인정한다. 둘째로는, 이들이 일관된 긍정파들이 가지는 강력한 순수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타협주의자들은 이론적으로 불성실하다. ‘이론적’이라는 말의 의미는, 이것이 타협주의자들 개인의 실천과 품성이 불성실하다는 비난이 아니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개인의 품성이 옳고 그름이 시대정신의 전개에 개입할 여지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이론적 불성실성은 본질적으로 실천적 불성실성으로 귀결할 수밖에 없다.
타협적 긍정성론자들은 전혀 다른 입장을 취한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일관된 긍정성론자들과 구별되는데, 첫째로는 시대의 사변적 병폐에 의해 그들보다 더 깊이 부패되어 있기 때문에, 부정성을 절대적 악으로 무조건적으로 단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에 일정한 상대적이고 과도적인 정당성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둘째로는, 그들이 동일한 강력한 순수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 순수성은 적어도 일관되고 가차 없는 긍정성론자들이 지향하는 것이며, 우리는 이를 충만하고 완전하며 정직한 본성의 특징으로 규정한 바 있다.
이에 반해 우리는 타협주의자들의 입장을 이론적 불성실성의 입장으로 규정할 수 있다. 내가 이를 ‘이론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떤 실천적·개인적 비난을 피하고자 하기 때문이며, 동시에 나는 개인적으로 악한 의지가 정신의 전개 과정에 실제로 방해적으로 개입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이론적 불성실성은 그 본성상 거의 언제나 실천적 불성실성으로 귀결된다는 점은 인정되어야 한다.
타협적 긍정파들은 일관된 긍정파들보다 더 영리하며, 더 큰 통찰력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영리한 인간들이며, 탁월한 이론가들이고,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또한 현 시대의 주요한 대표자들이다. 7월 혁명 초기에 한 프랑스 신문은 ‘중도파(Juste-milieu)’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좌파는 2 곱하기 2는 4라고 말하고, 우파는 2 곱하기 2는 6이라고 말하며, 중도파는 2 곱하기 2는 5라고 말한다.” 타협적 긍정파들 역시 마찬가지다. 물론 그들은 이러한 비교를 불쾌하게 여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의 지혜에 대해 가장 깊은 존중을 표하면서, 동시에 그들의 모호하고 난해한 본질을 진지하게 검토해보고자 한다.
그들을 상대하는 일은 일관된 긍정파들을 상대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 최소한 일관된 긍정파들은 자신들의 확신에 부합하는 실천적 에너지를 지니고 있으며, 분명하고 명확한 언어로 말하며,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그대로 말한다. 그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모든 불확실성과 모든 혼란을 증오한다. 왜냐하면 실천적으로 에너지를 지닌 존재로서, 그들은 오직 순수하고 맑은 공기 속에서만 숨 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협주의자들은 매우 기묘하다. 그들은 교활하다. 그들은 영리하고 또 현명하다. 그들은 진실과 그것을 향한 실천이라는 충동적인 무언가가 자신들의 정교한 이론에 반하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 그들은 소박하고 실천적인 양심의 간청에 귀기울이기에는 너무도 노회하고 교활하다. 그들은 우리를 높은 위치에서 내려다보며, 시혜적 태도로 대한다.
우리는 언제나 단순한 것만이 참이고 실질적이라고 말해왔다. 왜냐하면 오직 그러한 것만이 창조적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은 오히려 복잡한 것만이 참이라고 주장한다. 복잡한 것을 구성하는 데에 더 큰 수고가 들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복잡한 것이 참이어야만 학습되고 영리한 그들이 어리석고 무지한 대중과 구분되어 진리를 추구할 수 있지 않겠는가 말이다.
따라서 그들을 상대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떤 것에 의해 놀라움을 느끼는 것을 용서할 수 없는 약점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유를 통해 자연과 영적인 영역의 모두를 탐구했다고 믿고 있으며, 이처럼 길고도 고된 사변적 여정을 거친 끝에, 현실 세계와 실제적이고 생명적인 접촉을 맺는 것은 그럴 만한 가치가 없다는 확신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이들과 상호 이해에 도달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의 법률과 마찬가지로, 왼손으로 내어주는 것을 오른손으로 곧바로 거두어가려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결코 ‘예’나 ‘아니오’로 답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어느 정도까지는 당신이 옳다, 그러나……” 그리고 더 이상 할 말이 남아 있지 않을 때에는, “그렇군요, 신기하네요”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들과 맞서야 한다. 타협주의자들의 당파는 내적으로는 원칙이 없고 역량적으로는 자기 힘으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들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들은 오늘날, 최소한 수적으로는, 가장 강력한 당파이기도 하다. 그들은 하나의 중대한 시대정신이며, 그들을 무시하거나 우회할 수는 없는 것이다.
타협주의자들은 서로 대립하는 두 경향이 있다면, 그것들은 모두 편협하며 따라서 진실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만약 이 모순의 두 항이 각각 추상적으로 고립되어 있을 때 진리가 아니라면, 진리는 그 중간에 있어야 하며, 따라서 양자를 상호 연관시킴으로써 진리에 도달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논증은 반박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이 글에서도, 부정성이 긍정성과 대립하며 그 대립으로만 스스로를 규정하는 한, 그것이 편향적이라는 점을 인정한 바 있다.
그렇다면 이로부터 부정성은 필연적으로, 그리고 본질적으로 긍정성에 의해 완성되고 충족되는 것인가? 그리고 긍정성과 부정성을 화해시키려는 타협주의자들의 시도는 정당한 것인가? 만약 두 성질의 화해가 가능하다면 그럴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로 가능한가? 부정성의 유일한 의미는 긍정성의 소멸이 아닌가?
타협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서로 대립하는 두 일면성이 상호 의존적이라면, 그들은 양측면 모두를 본질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자기 모순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유리한 모순의 한 측면은 그들에게 불리한 측면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리한 측면이란, 긍정성이 아니라 부정성, 곧 파괴적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쪽을 다른 쪽보다 우위에 두어서는 모순에 빠지는 것이다.
타협주의자들께서 ‘모순’을 운운하시려거든, 헤겔의 「논리학」부터 다시 읽고 오시길 바란다.
모순과 그 내재적 발전은 헤겔 철학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다. 그리고 이 주제는 우리 시대를 지배하는 정신의 중심 주제이기도 하다. 이러한 점에서 헤겔은 의심할 여지 없이 당대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이며, 근대의 일면적이고 이론 중심적인 문화 형식이 도달한 최고의 정점이다. 그러나 그가 정점에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그가 모순이라는 주제를 이해하고 해결해내었다는 바로 그 사실로 인하여, 헤겔은 근대 문화 형식의 자기 해소의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그는 이론을 넘어서는 동시에, 이론 내부에서 새로운 실천의 세계를 정립하였다.이 세계는 이미 정식화된 이론들을 형식적으로 적용하거나 확산함으로써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실천적이고 자율적인 정신의 독창적인 행위를 통해 스스로를 완성하는 세계다.
모순은 어떠한 특정한 이론의 본질인 것이 아니라, 이론의 일반적 본질이다. 그렇기에 어떠한 이론이 스스로의 모순을 변증법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그 이론이 완결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완성은 곧 이론이 스스로를 해소하여, 하나의 원초적이고 새로운 실천적 세계로 이행하는 것을, 현실 속에서 실재하는 자유로 전이하는 것으로 마침내 끝을 맺을 수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여기에서 논의하지는 않겠다. 모순의 논리적 이론에 대한 논의로 돌아가도록 하자.
모순은 그 자체로서 정과 반의 일면성 모두를 포괄하는 것으로서, 전체적이며 절대적이고 참된 것이다. 모순은 부정성과 긍정성 모두를 포함하며, 이러한 전면적 포괄성 속에서 하나의 전체적이고 절대적인 충만함을 이루고 있다. 그렇기에 모순은 일면적이라거나 피상적이라거나 논리가 빈곤하다고 비난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모순의 성질은 타협주의자들이 두 일면적 계기 가운데 하나를 추상적으로 취하지 않고, 그것들을 결합되어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총체로서 파악되어야 한다고 요구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 그들에 따르면 오직 모순만이 참이며, 서로 대립하는 두 요소중 하나만을 취할 때에는 일면적(편향적)이 되므로 참이 될 수 없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는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모순을 전체적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문제의 시작이다. 모순은 확실히 진리이지만 실질적이고 현상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모순은 현상에 내재되어 존재할 뿐, 그 현상은 긍정과 부정의 대립과 분열로 드러날 뿐이다.
모순은 단순성과 분열이 하나로 결합되어 분리할 수 없는 통일체다. 이것이 모순의 내재적이고 은폐된 본성이며, 따라서 처음에는 모순을 파악할 수 없다. 그리고 바로 이 통일성이 은폐되어 있기 때문에, 모순은 그 요소들의 분열로서 일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현현하는 것은 오로지 긍정성과 부정성뿐이며, 이 두 요소는 상호배제만을 행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모순을 총체적으로 이해할 것인가? 두 가지 길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하나는 분열이 대충 없다고 치고, 분열 이전의 추상적 전체성으로 도피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불가능하다. 이해불가능한 것은 그저 이해불가능한 것일 뿐이며, 무엇보다 모순은 분열로만 드러나기 때문이다. 분열이 없다면 모순은 존재할 수 없다. 다른 하나의 방법은 긍정과 부정을 어떻게든 타협시키려는 모성애 넘치는 방식이다. 그리고 타협주의학파가 전심전력을 기울이는 것은 바로 이 방식이다. 그들이 성공할 수 있을지 한번 보자.
긍정성은 처음에는 정적이고 평온한 것으로 드러난다. 애초에 ‘긍정적’이기 위해서는 그것이 어떠한 불편도 없이 스스로 온전하고, 무엇도 부정할 필요가 없는 상태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긍정에는 운동이 없다. 모든 운동은 부정성의 일부기 때문이다. 긍정성은 정지한 상태에 안주하는 것이며, 절대적인 부동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나 부동성이라는 것은 운동성이라는 개념의 반성(reflection)으로만 존재할 수 있다. 아니, 오히려 부동성과 운동성은 상호간의 반성으로만 존재한다. 궁극의 안정성인 긍정의 상태와 궁극의 불안정성인 부정의 상태 역시 마찬가지다.
결국 긍정성은 부정성과의 관계에 있어 이중적인 위치를 가진다. 한 편으로 긍정성은 자기 안에서 내재적 완전성을 가지고, 어떠한 부정적 성분도 가지지 않는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바로 이러한 부동성 때문에 모든 부정성에 반하며 적극적으로 부정성을 제거한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부정성을 배제해나가는 것은 그 자체로 ‘운동’ 이 된다. 결국 긍정성은 그 긍정성 때문에 더 이상 긍정성으로 남지 못하고 부정성이 되어 스스로를 파괴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타협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긍정성과 부정성은 동등한 정당성을 가지지 않는다. 모순은 그들이 생각하는 긍정과 부정의 균형상태가 아니라, 부정성이 우위를 점하는 변증법적 과정이다. 긍정성의 생명을 규정하는 것은 부정성이다. 오로지 부정성만이 모순의 총체성을 내재하고 있다. 오로지 부정성이 절대적인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는 질문할지도 모른다. “당신 스스로도 추상적으로 취해진 부정성은 긍정성만큼이나 일면적이며, 그 악성은 세계를 평준화 할 것이라고 인정한 것이 아니냐”고.
맞다. 하지만 나는 부정성의 현상을 바라보고 위와 같이 말한 것이다. 일체의 긍정성을 가지지 못한 채, 평온하게 자기 자신을 지향하다 마침내 긍정성이 되어버린 부정성의 현상 말이다. 이러한 부정성은 긍정성에 의해 다시 부정된다. 그리고 일관된 긍정파들이 이러한 부정성, 즉 평온하게 자기 충족 상태에 있는 부정성을 거부하는 것은, 논리적으로도 종교적으로도 옳다. 물론 그들은 자기 스스로가 무엇을 행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일관된 긍정파-실증주의자 나으리들께서는 스스로가 부정성을 부정하고 있다고 생각하실 것이다. 하지만 그분들은 그저 이미 긍정화되어가고 있는 부정성을 부정하고 계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전투를 통해 부정성은 그 어울리지도 않은 속물적 안식에서 깨어나고, 그 거대한 소명의 길에, 모든 긍정적인 존재에 대한 거침없는 파괴의 도상에 다시 오르게 될 것이다.
부정성이 평온하고 이기적으로 자기 스스로에 만족하는 이상, 긍정성과 부정성은 동등하게 정당하다. 하지만 부정성은 이기적이어서는 안된다. 부정성은 긍정성 속으로 침투하여 그것을 먹어치워야 한다. 그리고 이 종교적이고 충실하며 생명력 넘치는 부정의 행동 속에서, 그 끝을 모르는 생산적 본성을 드러내야 한다.
긍정성은 부정성에 의해 부정되고, 부정성은 긍정성에 의해 부정된다. 그렇다면 이 두 성질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부정과 파괴, 긍정성을 먹어치우고자 하는 열정이다. 그리고 이것은 긍정성이 부정성으로 둔갑하여 숨고자 한다해도 마찬가지다.
부정성은 가차없는 부정 속에서만 절대적으로 정당하다. 부정성은 모순 자체에 내재된 실천적 정신이 작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실천적 정신은 파괴의 폭풍 속에서, 죄에 물들고 타협에 젖은 영혼들을 회개시키고, 진정으로 민주적이고 보편적으로 인간적인 자유의 종교 속에서 자기가 도래하였음을 선포할 것이다.
긍정성과 부정성이 화해할 방법은 딱 하나 있다. 긍정성이 스스로 해소하는 것이다. 이를 제외한 다른 모든 화해와 타협의 방법은 자의적인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타협을 논하는 작자들은 시대정신에 포함되지 않은 자들일 뿐이며, 멍청하고 원칙이 없는 자에 불과하다. 애초에, 시대정신에 전적으로 몸을 맡기지 않은 자들이 어찌 지성과 도덕성을 갖출 수 있겠는가.
타협주의자들이 인정하는 것처럼, 모순은 총체적이며 참되다. 하지만 그 총체성이 품고 있는 에너지와 생명력은, 그저 부정성이 내뿜는 순수한 불길 아래에서 긍정성이 자기연소하며 내뿜는 에너지일 뿐이다.
그렇다면 타협주의자들은 여기에서 무엇을 하려 하는가? 그들은 우리의 논리 모두를 받아들이고, 우리와 마찬가지로 모순의 총체성을 인정한다. 그들은 그저 모순으로부터 그 운동성을, 그 활력을, 그 영혼 전체를 강탈하고자 한다. 모순의 생명력은 그들의 불능한 유사-영혼과는 비교도할 수 없을만한 실천적 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타협주의자들의 강탈 시도는 무기력할 뿐이다.
앞서 말했듯, 긍정성은 그 자체로 어떠한 정당성을 가지지 않는다. 긍정성은 부정성을 부정하는 과정 속에서만 정당화될 수 있다. 그리고 이 과정 속에서 긍정성은 능동적 부정이 된다. 결국 모든 긍정파가 도달하게 되는 이 부정의 행동만이 긍정성의 유일한 정당성인 것이다. 하지만 타협주의자들은 이 부정의 행동을 금지하려 한다. 타협주의자들은 긍정성 속에서 이이 죽어있고 부패하였고 오직 파괴의 대상으로서만 가치있는 것들을 긍정하고, 긍정성이 보일 수 있는 유일한 생명력의 징표인 부정성과의 투쟁을 제거하려 한다. 이것이 기묘하고 이해불가능한 불운인 것인지, 타협주의자들의 실천적 원칙의 부재와 실질적 무능함에서 기인한 이해가능한 불운인 것인지는 모르겠다만.
그들은 긍정성-체제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사 여러분, 여러분은 관습이라는 썩고 시든 잔해를 승인합니다. 그것은 옳습니다. 이러한 폐허 속에서, 이 비이성적인 로코코 세계 속에서 사람은 참으로 아름답고도 안락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 공기는 우리의 폐병 걸린 영혼들에게 대단히 유익합니다. 마치 외양간의 공기가 폐병 환자의 육체에 그러하듯이요. 우리는 기꺼이 여러분의 세계에 정착할 것입니다. 이성과 인간 의지의 합리적 규정이 아니라, 오랜 존속과 부동성이 참과 신성의 척도가 되는 세계. 관료들과 죽간(竹竿)을 지닌 중국에 말입니다. 그러나 신사 여러분,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시대가 좋지 않습니다. 우리의 공통된 적인 부정성은 이미 많은 영역을 장악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여러분보다 더 그들을 증오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를 무절제하게 경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강력해졌고, 우리가 그들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지 않기 위해서는, 좋든 싫든 그들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그렇게까지 광신적일 필요는 없습니다, 신사 여러분. 그들에게 여러분의 사회 안에서 약간의 공간을 허용해 주십시오. 그들이 고대박물관 안에, 비록 매우 존중할 만하지만 이미 완전히 붕괴해버린 몇몇 폐허를 더 추가한다고 해서, 그것이 여러분에게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우리의 말을 믿으십시오. 여러분이 그들에게 이러한 명예를 부여해 준다면, 그들은 여러분의 존경할 만한 사회 안에서 매우 조용하고 신중하게 처신할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다만 가난하고 못배워먹어 격앙된 젊은이들에 불과하며, 그렇게 외치고 소란을 피우는 것도 오직 어떤 중요성을 획득하고 사회 안에서 안락한 자리를 얻기를 바라는 데에서 비롯된 것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부정파에게 몸을 돌려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여러분의 노력은 고귀합니다, 청년 여러분. 우리는 원칙적 순수성에 대한 여러분의 젊은 열정을 이해하며, 여러분에게 최대한의 공감을 표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말을 믿으십시오. 순수한 원칙은 그대로는 삶에 적용될 수 없습니다. 삶은 일정한 정도의 절충을 요구합니다. 세계는 여러분이 바라는 방식으로 정복될 수 없으며, 그것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양보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은 그 안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완전히 해칠 것입니다. 폴란드의 유대인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들은 마지막 폴란드 전쟁에서 폴란드인과 러시아인, 양측 모두를 동시에 섬기려 했고, 결국 양측에 의해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이처럼 이 불쌍한 사람들은 외적 화해라는 불가능한 일을 두고 스스로를 괴롭히며, 그 대가로 양측 모두로부터 경멸을 받게 됩니다. 오늘날의 시대가 솔론의 법을 적용하기에는 지나치게 나약하고 무기력하다는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아마 사람들은 내가 공허한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가장 정직하고 학습된 자들인 타협주의자들을, 존중받고 고귀한 자리에 있는 그들을 어찌 이렇게 무지하고 원칙없는 자로 폄하하느냐고 말이다. 하지만 사실인데 어쩌라는 말인가. 나는 그들을 개인적으로 공격하고 싶지는 않다. 인간의 내면은 감히 들여다볼 수 없는 성역이며, 어떤 척도로도 측정할 수 없는 것이고, 나는 그것에 대해 결코 판단을 내리지 않을 것이다. 개인의 인성은 주관적으로 무한한 가치를 지닐 수 있다. 그러나 객관적인 이야기를 할 때에는 결국 그들이 어떻게 현현하는가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모든 인간은 현실에 드러나는 것만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그래서, 검은색을 희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사랍들은 다시금 반박할 것이다. “타협주의자들의 노력이 당신에게 검거나 회색으로 보일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타협주의자들 역시 진보만을 원하고, 당신들보다 오히려 더 진보에 공헌하고 있다. 최소한 그들은 신중하게 행동하고, 세계 전체를 폭발사산시키려는 느그 민주주의자들처럼 행동하지는 않지 않은가!”
하지만 우리는 이 사람들이 말하는 “진보”가 무엇인지를 안다. 우리는 타협주의자들이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파괴의 운동을 왜곡하고 주저앉히는 것 말고는 어떠한 역할도 하지 않음을 안다. 타협주의자들은 이 시대가 모순의 시대임을 인정하면서도 모순이 완결됨으로써 새로운 긍정적이고 유기적인 현실로 전화되도록 내버려 두는 대신, 끝없는 점진적 단계화를 통해 이 상태를 현재의 초라하고 병든 상태 속에 영원히 보존하려 한다.
이게 진보인가?
타협주의자들은 긍정파에게 “구체제를 옹호하되 혁명파가 구체제를 점진적으로 해소하도록 허용하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부정파에게는 “구체제를 파괴하되 한번에 파괴하지는 마라. 그래야 너희 혁명파에게 지속적으로 역할이 주어진다. 너희 혁명파는 사회의 일면만을 대변하지만, 우리 선출직들은 모오두를 위한 행복을 추구한단 말이야!”라고 말한다.
비참한 영혼만이 만족할만한 비참한 총체성이 아닌가! 그들은 모순으로부터 그 운동성과 실천성을 빼앗아 그들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으로 전락시키며 기뻐한다. 그들은 오늘이라는 거대한 모순을 인간이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 자신을 내맡겨야 할 생동성이 아니라, 이론적 장난감으로 만든다. 그들은 실천적 시대정신을 따르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들은 부도덕하다. 그렇다. 그들이 그토록 자랑하는 그 도덕성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비도덕적인 인간들이다. 왜냐하면 도덕성은 자유로운 인간성의 종교 바깥에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오직 그 종교만이 천상의 기쁨을 가져온다.
그렇기에 우리는 타협주의자들에게, 계시록의 저자가 당대의 타협주의자들에게 한 말을 다시금 들려주려 한다.
“'나는 네가 한 일을 잘 알고 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차라리 네가 차든지, 아니면 뜨겁든지 하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그러나 너는 이렇게 뜨겁지도, 차지도 않고 미지근하기만 하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버리겠다. 너는 스스로 부자라고 하며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네 자신이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요한의 묵시록 3:15-17)
그러나 사람들은 또 나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당신은 이처럼 화해 불가능한 극단들을 주장함으로써, 이미 셸링과 헤겔에 의해 오래전에 극복된 추상적 입장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당신이 그렇게 높이 평가하는 헤겔 자신도, 순수한 빛 속에서도, 순수한 어둠 속에서도 아무것도 볼 수 없으며, 오직 이 둘의 구체적 통합 속에서만 비로소 무언가를 볼 수 있다는 점을 매우 정확하게 지적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모든 존재가 살아 있는 것은, 그것이 부정을 외부에 두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부에 내재적 조건으로서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며, 만약 그것이 오직 긍정적이기만 하고 그 부정을 외부에 둔다면, 그것은 움직임도 없고 생명도 없게 된다는 점을 입증한 것이야말로 헤겔의 가장 위대한 공헌이 아니겠는가?”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하나의 유기체가 살아있는 것은 그 내부에 죽음의 씨앗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헤겔을 인용하여 나를 비난하고자 한다면, 헤겔을 전부 인용해달라. 부정적인 것이 특정한 유기체의 생명을 위한 필수 조건으로 작용하는 것은 그것이 아직 그 안에서 단지 변증법적 단계로서, 전체성 속에 포함된 채 존재하고 있는 동안에만 그러한 것이 아닌가? 그러나 어느 순간이 되면, 부정적인 것의 점진적 작용이 갑작스럽게 단절되면서, 부정적인 것이 하나의 독립적인 원리로 전환되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리고 유기체에게 있어 바로 이 순간이 죽음이며, 헤겔 철학에서는 이것이 자연이 질적으로 새로운 세계, 곧 자유로운 정신의 세계로 이행하는 변증법적 단계로 규정된다.
역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자유라는 이론적 원칙은, 이미 사라진 가톨릭 세계에서부터 성립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원칙은 가톨릭이 부유했을 때에 만들어진 모든 이단의 원칙이기도 했다. 하지만 자유라는 원칙이 없었다면 다톨릭은 정지된 채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원리는 또한 가톨릭의 생명성의 원리이기도 했지만, 그것은 오직 그 원리가 순수한 변증법적 국면으로서 그 총체성 속에 유지되는 한에서만 그러했다.
프로테스탄티즘을 떠올려보라. 프로테스탄티즘은 가톨릭이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그 단초를 가지고 있던 것이 점진적으로 발전한 것이다. 그러나 이 점진성이 단절되는 순간, 이론적 자유의 원리는 자립적이고 독립적인 원리로 스스로를 들어 올렸다. 그때 비로소 모순은 순수한 형태로 처음 드러났다. 스스로를 프로테스탄트라고 칭하는 신사 여러분께서는 한번 떠올려보시라. 마르틴 루터 선생께서 자기 시대의 타협주의자들에게 무엇이라고 말했는지를.
보는 바와 같이, 모순의 본성에 대한 나의 견해는 논리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역사적 차원에서도 입증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어떤 증명도 소용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당신들은 그 불능 속에서, 역사를 들여다보기만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들이 ‘건조한 정리자들’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타협주의자들은 아직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모순에 대해 말한 모든 것이 사실일 수는 있다. 그러나 우리가 결코 인정할 수 없는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바로 지금, 우리 시대의 사정이 당신이 주장하듯 그렇게까지 나쁘지는 않다는 점이다. 물론 현재에도 모순은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이 당신이 말하듯 그렇게 위험한 것은 아니다. 보라, 모든 곳에 평온이 깃들어 있고, 모든 운동은 가라앉았다. 아무도 전쟁을 생각하지 않으며,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와 사람들은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모든 힘을 기울이고 있다. 왜냐하면 오늘날 정치와 보편적 문화의 주요 관심사가 된 것으로 보이는 물질적 이해관계는 평화 없이는 증진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7월 혁명 이후, 전쟁과 현존 질서의 붕괴를 유발할 수 있었던 중요한 계기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이 12년 동안, 평화롭게 해결되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던 갈등들이 있었고, 전면전이 거의 불가피해 보였던 순간들, 가장 두려운 폭풍이 우리를 위협했던 때들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어려움은 점차 해소되었고, 모든 것은 평온하게 유지되었으며, 마치 평화가 지상에 영원히 확립된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평화라. 옳다. 지금 시대야말로 평화의 시대일 수는 있겠다. 하지만 동시에 모순이 지금처럼 날카롭게 드러나는 시대도 없다. 역사를 거치며 그 갈등을 더해온 모순. 자유와 비자유 사이의 모순은 마치 서로마 제국 몰락의 전야와도 같은 우리 시대에 이르러 그 정점에 도달하여 비약하고 있다. 혁명이 세워낸 판테온 전면에 새겨진 두려운 단어 ‘자유, 평등, 형제애’를 읽지 못하는가? 이 단어들이 지금까지의 세계에 종언을 고하고 있음을 알지 못하는가? 혁명의 폭풍에 대해 알지 못하는가? 소위 ‘민주주의의 조교사’, 혁명의 적자 나폴레옹이 유럽 전역에 그 평준화의 원칙을 퍼트린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가?
칸트, 피히테, 쉘링, 헤겔에 대해 들어본 적은 있는가? 정신의 자율성이라는 평준화된 혁명적 원리를 지적 세계에 확립한 철학에 대해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것인가? 이 원리가 오늘날의 모든 긍정적 종교들, 모든 현존하는 교회들과 가장 첨예한 모순 관계에 서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가?
아마도 당신들은 여기에 동의하면서도, “이 모순들은 과거의 것이다. 가장 최근 프랑스에서 벌어진 혁명은 현명하신 시민왕 루이필리프의 통치 아래에서 진압되었다. 현대 철학 역시 쉘링 그 자신에 의해 극복되었다. 이제 모순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어디서나 해소되었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래서 당신들은 정말로 혁명정신이 굴복하고 해소되었다고 믿는 것인가? 장님이거나 귀머거리거나 하신가? 세계를 바라볼 눈도 귀도 없는 여러분께 분명하게 말씀드리거니와, 혁명의 정신은 굴복하지 않았다. 혁명은 단지 최초의 출현으로 세계의 기초를 뒤흔든 뒤, 다시 자기 안으로 물러났을 뿐이다. 그것은 곧 다시금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원리로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자기 속으로 가라앉았을 뿐이다. 그리고 바로 지금, 그것은, 헤겔의 표현을 빌리자면 두더지처럼 지하에서 파고들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혓되지 않았음은 우리의 종교적·정치적·사회적 토대를 뒤덮고 있는 수많은 폐허들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당신들은 혁명의 해소를 말하고 사회의 통합을 말한다! 그러나 주위를 둘러보고 말해 보라. 옛 가톨릭 세계와 프로테스탄트 세계 가운데, 무엇이 아직 살아남아 있는가? 당신들은 부정의 원리가 굴복했다고 말한다. 스트라우스나 포이어바흐, 브루노 바우어를 읽어본 적이 없는가? 그들의 저작이 모든 이들의 손에 놓여있다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당신들은 독일 문학 전체, 곧 서적과 소책자, 신문들, 심지어 긍정파 자신의 저작들까지도,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이 부정적 정신에 의해 관통되어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하는가? 그런데도 이것을 당신들은 화해와 평화라고 부르고 있다!
당신들도 잘 알고 있듯이, 오직 보편적으로 실천적인 원리를 채택할 때에만 인간성은 충족되어 평화로울 수 있다. 이 원리는 정신적 생활의 수천 가지 상이한 원칙들을 자기 안에 강렬하게 집중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원칙이 어디있는 것인가? 타협주의자 여러분의 삶이 아무리 음울한 것이라 해도, 최소한 여러분도 살면서 몇번쯤은 생기넘치고 인간적인 순간들을 경험해보기는 하지 않았는가? 일상의 사소한 관심사들을 떨쳐버리고, 참된 것, 고귀한 것, 신성한 것을 갈망하게 되는 그러한 순간들을 말이다.
가슴에 손을 얹고 솔직하게 말해달라. 한 번쯤은 무언가 생기넘치는 것을 발견한 적도 있지 않은가? 당신들이 갈망하는 이 폐허와 같은 체제 아래에서, 스스로의 몸을 던져 이루고 싶어지는, 새롭게 태어나고 싶어지는 무언가를 가져본 적이 없는가? 혹시 그것이 프로테스탄티즘이었는가? 하지만 프로테스탄티즘이야말로 가장 끔찍한 무정부상태가 아닌가! 대체 프로테스탄티즘에는 몇가지 분파가 존재하는 것인가? 쉘링은 ‘위대한 보편적 열정이 없다면, 오직 분파들만 있을 뿐 공적인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프로테스탄트 세계는 보편적 열정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하나의 산문적 세계를 구성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혹시 가톨릭인가? 하지만 가톨릭의 옛 영광은 어디로 갔는가? 한때 세계를 지배하던 가톨릭이 이제는 외재적이고 부도덕한 정책의 도구로 전락한 것이 아닌가? 아. 혹시 현대국가 안에서 평화를 누리려 하시는가? 참으로 굉장한 평화가 아닐 수 없겠다. 종교도, 보편적 신념도 상실한 국가야 말로 가장 깊은 내적 갈등 속에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와 영국을 보라. 독일에 대해서는 더 말을 하지 않겠다.
자아성찰이라는 것을 좀 해보시라. 그리고 솔직하게 말해달라. 이게 최선인가? 이 음울하고 초라한 시대에서 음울하고 초라하게 살아가는 것이 정말로 만족스러운 것인가? 당신들은 모순의 인간이 아닌가? 당신들은 온전한 인간인가? 무언가에 대한 신념이 있기는 한가? 스스로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는가? 아니, 무언가를 원할 수 있기는 한가? 현대적 사변이라는 전염병 속에서 건강은 하신가? 아니면 이 병 속에서 마비되고 파괴된 것이 아닌가?
제발. 인정할 것은 인정하자. 우리 시대는 음울한 시대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그 시대보다도 음울한 시대의 자식들이다.
한편, 우리 주변에는 이제 혁명의 징후들이 눈에 보이게 요동치고 있다. 지하로 숨어들어갔던 혁명정신이라는 두더지가 마침내 그 작업을 완수했고, 머지않아 다시 나타나 심판을 가져올 것임이 보인다. 프랑스와 영국에서는 기존의 세계와 전적으로 이질적인 사회적, 종교적 결사들이 형성되고 있다. 이들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원천에서 생명력을 받고, 조용히 스스로를 확장하고 있다.
의심의 여지 없이 인류 다수를 차지하는 자들, 가난한 자들을 보라. 이들은 이론적으로 그 권리가 인정되었지만, 여전히 태어난 바에 따라, 빈곤과 무지에 따라 실질적으로 예속되어 있다. 이들 진정한 인민들은 곳곳에서 위협적 태도를 취하기 시작하고 있다. 이들은 적들의 대오가 자신보다 약함을 눈치채었고, 이론과 법이 규정하는 자신의 권리를 실현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모든 인민들은 다가오는 미래가 구원의 복음을 발할 것이라는 전율 섞인 기대와 예감을 품고 있다. 저 끝없이 펼쳐진 눈의 왕국 러시아에서조차, 어두운 구름이 모여들며 폭풍의 도래를 예고하고 있다. 아, 그 공기는 숨막히게 무겁고 번개로 가득차있으니.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의 미혹된 형제들에게 외친다. 회개하여라!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
긍정파에게 말한다. 눈을 떠라. 죽은 자들이 죽은 자를 묻게 하라. 그리고 언제나 젊고 언제나 새로운 ‘정신’은 결코 무너진 폐허 속에서 찾을 수 없음을 인정하라.
타협주의자들에게 촉구한다. 진실에 마음을 열라. 당신들의 그 비참하고 맹목적인 지혜와 오만, 당신들의 영혼을 메마르게 하고 운동성을 마비시키고 있는 그 노예성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하라.
이를 통해 우리 모두가, 모든 생명의 무한한 근원이며 영원히 창조적일 자유의 성령을 믿도록 하자. 파괴를 향한 열정은 창조적 열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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