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혁명 개괄
스페인에서의 정권 교체는 입헌주의자들과 전제주의자들이 번갈아가며 정권을 잡는 고전적 순환의 형태를 띠었으나, 1923년 카탈루냐의 수도에서 괴팍하기 짝이 없는 주정뱅이이 장군이 일으킨 쿠데타로 인해 돌이킬 수 없이 붕괴되었다.
프리모 데 리베라의 독재는 무능한 행정, 독점 자본, 관료의 특권, 리베이트, 특혜 계약, 그리고 공권력의 비호 아래 자행된 각종 투기로 점철된 정치의 직접적 산물이었다.
1923년의 군사적 반동은 인민의 빈곤을 초래한 주요 원인 중 하나의 결과였다. 이 구조는 사실상 국가 예산 전부를 삼켜버리는 괴물이었고, 그 안에서 유지되어왔다.
스페인의 식민 제국은 모험가, 용병, 직업 정치인, 그리고 인신매매업자들로 구성된 악당들을 길러냈다. 칼을 든 관료들과 산업 자본가들이 해외 식민지에서 마음껏 약탈하고 수탈할 수 있었던 동안에는, 스페인 국가는 그럭저럭 무탈하게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구조는 소수의 파렴치하고 무자비한 자들에 의해 유지되던 것이었고, 식민지에서의 참패는 그것을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결정타가 되었다.
19세기 말, 군부는 자신들이 흠망하던 전리품을 박탈당했다. 그들은 피에 절은 금실 장식을 두르고 반도 본토로 되돌아왔지만, 군대로서의 본분조차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치욕도 함께 두르고 왔다.
그 순간부터, 스페인 인민은 중대한 문제와 마주하게 되었다. 매독에 걸린 왕의 비호를 받던 수천의 군인들은 더 이상 식민지 인민을 수탈할 수 없게 되자, 본국 인민을 먹잇감으로 삼기 시작했다. 식민지의 인민들은 장군의 견장과 휘장을 두른 스페인 대표들을 도둑이자 학살자라고 저주했고, 그 탐욕이 이제 자국 인민을 향해 되돌아온 것이다.
국가 재정은 즉각적인 돌파구를 필요로 했다. 알헤시라스 회담은 모로코 국경을 열어주었고, 로마노네스 백작이 탐냈던 리프 광산은 스페인 인민의 피와 돈을 끝없이 요구하는 심연이 되었다.
모로코 전쟁은 국가 재정에 10억 페세타의 손실을 끼쳤고, 수많은 인민의 생명이 로마노네스 백작이라는 ‘금권 귀족’이 대표하는 금융 카르텔의 이익을 위해 희생되었다.
스페인에서 벌어진 이 학살극에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벤니-부-이프루르 부족 지역, 아프-라텐 산 부근의 철광석을 둘러싸고 벌어진 바랑코 델 로보와 아누알의 참사였다.
악명높은 방위 훈타가 보여주듯, 군대는 언제나 노동 대중을 억압했다. 방위 훈타를 주도한 마르케스 대령은 군대에 자유주의를 주입하려 했지만, 라 시에르바의 후견과 권모술수가 일시적 선의를 가볍게 압도했다. 결국 마르케스는 박해당했고, 몬주익 감옥에 수감되었다.
프리모 데 리베라 장군은 이러한 과거 전체의 집약체였다. 그는 로페스 오초아의 무력과 부르주아지, 대지주, 성직자, 금융가들의 묵인 아래 권력의 정점에서 검을 휘둘렀다.
카탈루냐 총사령관 시절, 그는 피카소 보고서가 밝힌 진실을 덮기 위해 정치에 개입했다. 그러나 군부의 진정한 행동 촉발 요인은 노동계급의 소요였다. 약탈과 모욕에 질린 노동 인민은 자신들을 파괴한 자들을 스페인 땅에서 쫓아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에 금융과 산업의 부르주아지들은 군대를 지원했다. 그들은 신용 공급을 중단하고, 경제를 방해하고, 직장폐쇄를 단행하며 파업을 조장했다. 군부의 폴란드식 독재가 시작되었을 때, 카탈루냐 부르주아지는 이를 환영하며 박수를 보냈다.
프리모 데 리베라의 시대는 지배계급이 노동계급을 약화시키기 위해 벌인 시도로 봐야 한다. 그것은 과거를 좀 더 세련되고 포괄적으로 반복한 보복이었다. 그 안에는 썩어빠진 도덕과 끝없는 오만이 깃들어 있었고, 그것은 누더기를 걸친 채 언제나 고결했던 스페인의 시체를 다시 한번 능욕했다.
여색을 좇던 장군은 물러났고, 그 자리는 베렝게르가 이어받았으며, 다시 아스나르가 그를 대체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왕정에서 공화정으로의 권력이양을 지휘한 자는 로마노네스 백작이었다. 그는 정보기관의 요원이었고, 자신의 옛 비서였던 니세토 알칼라 사모라에게 권력을 넘겼다. 그는 마우라의 아들, 그리고 왕궁 주치의이자 정보기관 인물이기도 했던 마라뇬과 함께, 악취로 끝날 수밖에 없는 공화국의 토대를 만들었다.
새로운 공화국은 처음부터 인민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거리의 함성 속에서 단련된 사회주의 노선을 따르기는커녕, 과거 부르봉 왕조 시절의 기생충들이 그대로 권력을 잡았다. 정치는 여전히 왕정을 위해 봉사하던 자들의 손에 있었다. 알칼라 사모라는 완고한 왕당파였으며, 성직자와 대지주 계급의 대표였다. 아사냐는 한때 멜키아데스 알바레즈의 정당에 속해 있었고, 미겔 마우라는 또 다른 왕당파였으며, 알레한드로 레루는 명예도 없는 자였다.
슬픔에 잠긴 스페인은 배신과 무익한 밀실 정치의 길로 나아갔다. 4월의 희극은 피의 격류로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4월 공화국이 잉태한 것은 파국이었다. “페레르를 살해한 자의 아들”이자 “108건의 살인을 지시한 자”요, “조준 사격” 명령을 내린 자인 장관은 농촌을 수많은 장례용 십자가로 뒤덮었다.
자신들의 희망이 폭력적으로 짓밟히는 것을 본 노동 인민 대중은 4월의 파탄에 격렬히 분노했고, 이에 미겔 마우라는 갓 수립된 공화국의 무장 병력을 동원해 노동자를 짓밟고 파괴했다. 파사헤스에서. 아르네도에서. 백 카스티야에서. 세비야에서, 카탈루냐에서... 이 모든 지명들은 군주를 쫓아냈지만 그의 자금은 건드리지 않았고, 도리어 그를 군함으로 호위하여 떠나보낸 공화국의 진실된 본질이다. 알폰소 13세의 일가는 산후르호 장군과 따뜻하게 악수를 나눴다. 1932년 8월에도, 1936년 7월에도. 그 장군은 정치인들이 자유재량권을 준 틈을 타 인민을 향해 공격을 퍼부었다. 그는 왕당파 출신의 살인자였다. 엘 에스코리알 역에서는 로마노네스 백작이 “곧 다시 만나게 될 거요”라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공화국은 끝없는 ‘의견 교환’ 속에서 허망한 말장난만 이어갔다. 제헌 의회는 단 하나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했다.
군대 문제는 오직 총살만이 해결할 수 있었지만, 도리어 희극으로 전락했다.. 아사냐는 군인들에게 특별히 퇴역을 허용했고, 그 결과 비생산 인구는 급증했으며 병영은 왕당파 장교 계층에게 넘겨졌다.
종교 문제 역시 회피되었다. 교회에 대한 무조건적 몰수도, 종교 및 성직자에 대한 예산 지원 철폐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수도회들은 법적으로 인정받았고, 300개 수도회와 6,000개 수도원으로 숨어든 수천명의 사람들이 시민권을 부여받았다. 수 세기 동안 스페인의 영혼을 좀먹어 온 이 암을 제거하려는 시도조차 없었다. 멘디사발 내각조차 지금의 공화국보다 더 많은 것을 성취했으며, 그것은 100년의 추가 경험 없이 이룬 일이었다.
공화국은 예수회가 스페인 경제에 투자한 50억 페세타의 자산도 몰수하지 못했다. 재정 문제에 대한 해답도 없었다. 왕정 시기의 부채와 채무는 모두 인정되었고, 예산은 급증했으며, 비생산 계급은 팽창했고 관료 체계는 비대해졌다. 1814년에 30억 페세타였던 공공 부채는 식민지 상실과 모로코 전쟁의 재앙으로 폭증했으며, 비야베르데 시기 잠깐 수축되었을 뿐, 4월 공화국 시기에는 천문학적인 220억 페세타에 이르렀다.
1931년 4월 14일, 공화국은 지대소득자에게는 보호를, 소비자에게는 억압을 안겨주었다. 지대에 대한 과세는 무자비했다. 집권 세력이 사회주의자였음에도 시행된 정책은 명백히 부르주아의 것이었다. 독점은 여전히 일상이었고, 밀수업자 후안 마치는 자기 마음대로 감옥을 들락거릴 수 있었다.
자치권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다. 헌법의 한 조항에서 연방 공화국 혹은 연방주의적 공화국이 언급되었지만, 말뿐이었고 실제로는 중앙집권체계를 구축하고 있었다.
농지 문제는 파탄으로 끝났다. 농업 개혁 연구소는 연줄과 비리의 온상이었으며, 매년 5,000명의 농민을 정착시키겠다는 계획은, 실제 5백만 명의 농민이 땅을 필요로 하는 현실 앞에서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아무리 낙관적으로 보아도 완수까지 1,000년이 걸리는 계획이었던 것이다..
노동 문제에 대해선 이해할 수조차 없는 말장난을 들고 나왔다. 노동자 자주관리라 주장하던 무언가는 결국 사장과의 연줄에 따라 권한을 위임받는 수준에 그쳤다.
스페인의 식민지 상태는 ‘텔레포니카 사건’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프리에토는 허세 가득한 말투로 마드리드의 아테네오 토론회에서 텔레포니카 계약이 일방적이라고 비판했지만, 실제로는 북미 자본을 지키기 위해 거리로 나선 노동자들을 기관총으로 쏘아버리는 쪽을 선택했다.
우리는 두 번의 2년기를 겪었다. 붉은 2년과 검은 2년. 두 시기 모두에서 노동 대중은 악랄하게 탄압당했다.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의 앞잡이로 전락했다. 공화국 방어법, 공공질서법, 4월 8일 법령의 본질은 전면적인 탄압이었다. 우익은 이 법들을 자유롭게 이용했고, 노동계급은 수도원 방화, 1월 8일과 12월 3일의 바르셀로나·피골스 사건으로 응답했다. 바타와 비야 시스네로스로의 추방은 공화국을 프롤레타리아의 영원한 적들에게 넘겨주는 또 하나의 단계를 의미했다.
두 시기는 모두 비극으로 가득 차 있었다. 우익이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게 된 책임은 전적으로 사회민주주의에 있다. 혁명이 외세 개입을 피하지 못하게 된 것도 그들의 배신 때문이다. 1931년 4월, 이탈리아 파시스트는 아직 아도나의 가시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히틀러 추종자들도 아직 민족주의적 전체주의 국가를 수립하지 못했다. 객관적 조건은 유리했지만, 사회주의자들의 배신과 페스타나 및 그의 추종자들이 퍼뜨린 개량주의가 진실의 순간을 막았고, 그 대가는 나중에 더 큰 희생으로 되돌아왔다.
이렇게 불균질하게 뒤엉킨 상황 속에서 10월이 폭발했다.
7월은 아스투리아스에서 태어났다. 그곳에서는 용기와 맹렬한 투지로 투쟁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카탈루냐 안에서는 덴카스가 노동계급을 반란으로부터 떼어내려 했다. 그 반란은 결정적 국면이 될 수 있었음에도 말이다.
사회주의자들이 10월에 진정으로 원한 것은 알칼라 사모라가 우익에게 정권을 넘기는 것을 막는 일이었다. 과거 총파업으로 그를 겁준 것처럼 또다시 협박하려 한 것이다. 그들이 혁명을 원했다면, 1934년 6월 농민 반란을 활용하거나, 도시와 농촌을 연결해 시기를 맞췄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사회주의자들은 노동계급에게 밀려나고 말았다.
르뤼-길 로블레스 정부의 2년은 탄압과 수감으로 얼룩진 ‘검은 2년이었다. 그 2년은 “수감자 석방” 선거에서 정점을 맞았고, 7월의 열매를 배태했다.
7월 19일
스페인에서의 비극은 끝모르고 이어진다. 과거와 현재의 참변으로 몸과 마음에 지워지지 않는 흉터가 새겨진 대중의 비극은, 그 어떤 생생한 필자라도 묘사하는데에 실패할 것이다.
우리 저자들은 고통을 겪기 위해 태어난 듯한 한 민족의 시련을 온전히 묘사해내지 못하고 있다.
1936년 2월, 스페인은 암울한 현실이 그 어느때보다도 짙은 상태였다. 그 당시 스페인은 마치 거대한 수용소 같았다. 수천명의 노동자들이 감옥에 갇혀 있었다.
이제 7월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이제 군사반란으로 이어진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서 다시 상기해보자.
검은 2년 시기의 정책들은 이미 파산한 상태였다. 힐 로블레스는 추종자들의 요구사항을 충족하지 못했다. 알칼라 사모라와 인민행동당 지도부 간의 갈등이 점차 수면 위에 오르고 있었다. 예수회는 대통령을 지지하고 있었고, 대통령을 그들의 희망으로서 여기고 있었다. 대통령이 개헌과 종교를 전면에 내세운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의회의 존속 여부는 여전히 불투명했다. 급진공화당은 우익 연정에서 탈퇴했으며, 그들은 우익 연정이 민심으로부터 심하게 유리됐다고 판단했다. 의회에서 벌어지는 격렬한 논쟁들은 저열했고, 혐오스러웠으며, 그 노골적임이 마치 범죄적임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프롤레타리아는 보다 스스로에게 맞는 방식으로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발렌시아의 축구 경기장에서 열린 거대한 집회는 엄청난 인파를 불러 모았다. 그러나 이런 결의와 저항정신의 표출이 아사냐와 같은 낡은 반동적 인물의 정치생명을 회복시키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은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이는 이후 상당한 대가를 치러야 할 오류였다. 알칼라 사모라는 상황을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의회는 해산됐다. 프랑코, 고데드, 카바네야스, 케이포 데 야노, 몰라는 모두 사모라의 꼭두각시였다. 사모라는 자신의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금융업자이자 정치깡패였던 포르텔라 바야다레스를 등용했다.
국가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선거 결과는 포르텔라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부정 선거와 정부의 후보 승인제도에도 불구하고, 2월에 벌어진 선거 결과는 교황청조차 안심하지 못한 결과였다.
계획이 실패하자, 알칼라 사모라는 포르텔라에게 비상사태 선포를 촉구했다. 그러나, 포르텔라는 실행하지 못했다. 그는 사모라에게 스페인 인민이 이미 거리에 쏟아져나옴을 직시하고는, 아사냐를 불러들이는 것이 더 낫다 충고했다. 그의 판단은 옳았고, 소위 붉은 2년을 상징했던 정치인 아사냐가 일시적인 진정제 역할을 하는 데에 성공했다. 이것이야말로 당시의 반동 세력들이 노렸던 것이었고, 이는 오리엔테 광장에 모여들은 장군들이 반란을 준비하는 데에 시간을 벌어준 휴지기였다.
자신의 계획이 좌절되자 알칼라 사모라(Alcalá Zamora)는 포르텔라(Portela)에게 비상사태 선포를 촉구했다. 그러나 포르텔라는 감히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그는 스페인의 민중이 이미 거리로 나왔다는 것을 깨닫고 아사냐(Azaña)를 불러들이는 편이 낫다고 권고했다. 그의 판단은 옳았다. 이른바 「적색의 2년」(red biennium)을 대표했던 정치가 아사냐는 일시적인 진정제 역할을 할 것이었다. 바로 그것이야말로 당시 반동 세력들이 노렸던 바였으니, 이는 오리엔테 광장(Plaza de Oriente)에 모여들던 장성들이 반란 준비에 최종적인 마무리를 가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주기 위한 휴지기였다.
2월 선거의 성공은 사회주의자들을 깨우치지 못하게 만들었다. 투옥된 이들에 대한 대규모 집회, 아스투리아스에서의 10월 참변 이후 투옥된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열렬한 움직임들은, 큰 의미를 사회주의자들에게 주지 못했다. 그 대신, 과거의 방식에만 집착할 뿐이었다. 새로운 의회, 새로운 대통령 선거. 결국 사회주의자들은 알칼라 사모라의 계획을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서, 통제권을 인민이 아닌 군부에 넘기려는 그의 구상을 유지시키고야 말았다.
2월의 성공적인 선거 결과는 사회주의자들의 눈을 열지 못했다. 수감자들의 숫자에 항의하기 위한 대규모 집회, 10월의 대참극 이후 체포된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열렬한 움직임—이 모든 것이 그들에게는 별다른 의미를 지니지 못했다. 그들은 과거의 방식에만 집착했다. 또 하나의 새로운 코르테스(Cortes), 다시 치러질 공화국 대통령 선거. 결국 그들은 알칼라 사모라(Alcalá Zamora)의 계획을 그대로 수용함으로써, 통제권을 인민이 아닌 군부에 넘기려는 그의 구상을 유지시켜주고 말았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는 그들 스스로가 겪어낸 2번의 붉고, 검은 2년 기간 동안 교훈을 체득했다. 그들은 맹렬히 거리로 뛰쳐나왔다. 선동가들이 종교시설에 불을 지르기 시작했고, 투옥된 이들의 외침은 감옥을 넘어 울려 퍼졌다. 도시와 농촌은 똑같이 격렬한 흥분 상태에 휩싸였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무지로 인해 인민의 봉기는 지연되었다. 천만다행으로 5개월 뒤, 우익 세력의 미숙함과 아사냐와 프리에토의 진정한 반혁명적 역할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그들의 실책이, 이 모든 일들을 거리 위로 끌어내게 만들었다.
2월에서 7월 사이, 간헐적으로 폭력사태가 발발했다. 또 다시 노동자들의 피가 흘렀다. 마드리드 건설노조의 파업과 말라가에서의 충돌은 2월 선거를 통해 등장한 정치인들의 무능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우익 세력은 선거결과에 격앙되어 혼란스러운 정국을 타개하기 위해 과감하게 공격을 감행했다. 파시스트들은 암살과 같은 혐오를 조장하는 등의 비겁한 방식을 활용하며 증오심을 자극했다. 한편으로는, 스페인의 반동 세력들이 무언가를 계획하고 있다는 막연한 불안이 떠돌았으며, 군사반란의 가능성이 끊임없이 제기됐다.
의심의 여지는 없었다. 프롤레타리아는 7월로 향하는 길을 분명히 걷고 있었다. 정부는 사실상 뒷전으로 밀려났다. 파시즘과 프롤레타리아 사이의 선택을 두고, 정부는 전자를 택했다. 이에 자신의 책임을 감추기 위해 제1의 배신자 카사레스 키로가는 우익들을 위협해 그들을 거리로 나오도록 선동하였다.
칼보 소텔로의 암살은 사태를 일거에 극단으로 몰고 갔다. 쿠데타가 언제라도 일어날 것이란 소문은 충분히 현실적으로 여겨졌다. 그런데도 정부가 이에 대해 어떤 예방 조치라도 취했는가? 프랑코는 카나리아 제도에서, 고데드는 발레아레스에서, 몰라는 나바라에서 지휘권을 쥐고 있었다. 어째서 이들 모두를 해임하지 않았는가? 파시스트들은 정부 내부에서도 강력한 동조 세력에 의존할 수 있었던 것이다!
7월 17일, 마침내 우려하던 파국이 찾아왔다. 발레아레스, 모로코, 카나리아에서 군은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뭔가 조치를 취하긴 했는가? 카사레스 키로가, 그 개새끼의 정부는 뭘 했는가? 무기력 속에서 스스로를 가뒀을 뿐이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민에게서 은폐하고, 프롤레타리아에게 무기를 분배하길 거부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7월 17일부터 19일 사이에, 군부에 항복을 강요할 시간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러나 지극히 자멸적인 태도가 정부를 지배했다. 카사레스 키로가는 몰라의 공범이었다. 그는 몰라가 2월 선거 결과에 공개적으로 반기를 들고, 우익 음모론자들을 노골적으로 비호하고 있음에도 그를 팜플로나에 그대로 유임시켰다.
좌익으로부터의 배신도 명백했다. 인민들에게 무장이 지급되지 않은 것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이 프롤레타리아를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사라고사에서 노동자들과의 협상에서 지연과 기만으로 일관한 주지사, 베라 코로넬의 태도는 파시스트의 승리를 도왔다. 발렌시아에서는 이미 스페인 전역이 전쟁터가 되었음에도 반란군을 그대로 병영 속에 두었다.
이 피로 물든 역사적 순간에, 우리는 단호히 고발한다. 노동계급에 대한 두려움으로 파시즘에 대한 동조를 공공연히 자행한 공화파 정치인들을 고발한다. 아사냐, 카사레스, 키로가, 콤파니스, 그리고 사회주의자들. 4월의 단막극 위에 세워진 공화국이라는 희극의 주연들 모두를 고발한다. 공화국은 노동계급과 그 삶의 터전을 초토화시켰다. 이 비극은, 정세에 맞춰 혁명을 단행하지 못한 데에서 비롯됐다.
인민은 스스로 무기를 찾아나서야 했다. 인민은 그들 스스로의 노력으로서, 그들의 권리를 찾아 무장을 손에 넣었어야만 했다. 그들에게는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았다. 공화국 정부로부터도, 제네랄리타트로부터도, 그 누구로부터도 소총 한 자루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과거 모든 중대한 역사적 순간들마다 그랬듯, 7월 19일. 프롤레타리아는 거리로 몰려나왔다. 이미 며칠 전 부터 스페인 모든 지역에서 그들은 거리에서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카탈루냐의 수도에서는 과거의 영광스러운 투쟁의 순간들이 다시 소환되고 있었다.
바르셀로나 항에 정박중이던 보급선 마누엘 아르누스 호, 마르케스 데 코밀랴스 호에서 처음으로 무기들이 노동자들의 손에 들어갔다.
7월 19일 새벽, 반란군이 거리로 쏟아져나왔다. 카탈루냐 인민은 병영을 습격하며 맞섰고, 마지막 파시스트 거점이 점령될 때 까지 끝까지 싸웠다.
카탈루냐 프롤레타리아는 스페인 전역의 프롤레타리아를 파시즘에서 구해냈다. 프롤레타리아의 카탈루냐는 스페인을 비추는 등불이 됐다. 스페인 농촌이 파시스트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하더라도, 우리는 산업지대의 노동자들로서 동지들을 반드시 그들의 손아귀에서 구출할 것이다.
마드리드에서도 비슷한 양상이 반복됐다. 이 곳에서도 무기는 주어지지 않았고, 거리에서 얻어내야만 했다. 프롤레타리아는 몬타냐 병영을 습격했고, 전투를 벌였으며, 군을 압도했다. 노동자들은 엽총과 손에 잡히는 모든 무기를 들고 과다라마 산맥으로 향했다. 몰라 장군의 진격을 막아서기 위함이었다. 나바라 여단의 지원을 등에 업은 그는 카스티야의 수도를 함락시킬 준비를 하고 있던 것이다.
북부에서, 레반테에서, 아라곤, 안달루시아, 에스트레마두라 여러 지역에서 파시즘은 격퇴되었다. 그러나 그 외의 스페인 다른 지역에서는 노동자들이 무장해제되었고, 파시스트들에게 길을 터준 좌익 주지사들에 맞서야만 했다.
카사레스 키로가는 마르티네스 바리오에게 정권을 내줬다. 4월 제헌의회를 좌초시킨 장본인인 이 사람은 파시스트들과 타협을 통해 권력을 그들에게 이양하려는 의도를 내비쳤다. 그러나 노동계급의 빠른 대응이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배반행위 중 하나가 실현되는 것을 막아섰다. 이 배반이 행해지지 않은 것은 오로지 시간 부족 덕분이었다. 아사냐를 비롯한 정치인들은 이 파렴치한 술수의 대가를 목숨으로 치러야 할 것이다. 초기의 비관적 정세인식과 항복론이 관료들을 중심으로 확산되던 가운데, 프롤레타리아의 격렬한 저항은 이를 무력화시켰다. 마르티네스 바리오 정부는 히랄 정부로 대체되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사건의 전개를 개괄적으로 서술해왔다. 이제 우리는 7월 그 영광스러운 날들에 어떤 성격의 혁명이 이루어졌는지 심층적으로 고찰해보아야 한다.
7월에 일어난 일들에 수많은 이론적 해석들이 제기돼왔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은 7월의 대중봉기는 노동계급이 최악의 적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고 인식했기에, 이를 위한 자가방위적 행위였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을 기본 전제로 삼는다면, 7월의 사건들은 전형적인 혁명적이며 계급적 현상으로 간주될 수 없다는 논지가 이어진다.
이 논지는 전적으로 오류다. 혁명은 분명 예기치 않게 발발하는 경우들이 있지만, 그 과정에서 항상 오랜 준비의 과정을 거친다. 4월의 사건들은 하나의 새로운 시대를 열고, 다른 하나를 종결지었다. 그리고 그 4월 한복판에는,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는, 노동계급이 그 혁명적 전위의 역할을 차지하고 있다. 만약 7월에 노동계급이 거리로 나서지 않았다면 프롤레타리아는 또 다른 시점에 반드시 행동에 나섰을 것이다. 그리고 부르주아의 굴레로부터 스스로를 해방하려는 그 숭고한 사명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소부르주아들은 우리 모두가, 온갖 성향의 사람들이 거리에 나섰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일깨워줘야 한다. CNT와 FAI가 가장 위험했던 곳으로 빠르게 가지 않았다면, 10월 바르셀로나에서 벌어졌던 희극적 요소가 재현됐으리라는 점을 말이다.
카탈루냐에서는 조직된 CNT 노동자들이 주도적인 위치에 있다. 이를 부인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것은 무지에서 비롯됐거나 카탈루냐 땅에서 전개된 CNT의 역사적 행동을 의도적으로 외면하려는 시도일 것이다.
7월 혁명은 노동자계급으로부터 추진됐고, 그 본질에 있어 계급혁명이었다. 거리에서든 이론적으로든, 소부르주아의 행동은 사후적으로 드러났을 뿐이며,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나 어쩌면 더 중요할 수도 있는 고려사항도 있다. 자본주의가 17, 18, 19세기에 초래한 정치적 변화에 대한 기억들은 점차 희미해졌다. 1873년이나 이번 4월과 같은 일들이 가져온 결과에 대해,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이 품었던 환상은 철저히 산산조각 났다. 2월 이후 스페인에서 가능한 유일한 형태의 혁명은 사회혁명이었다. 7월에 눈부시게 타올랐던, 바로 그 혁명 말이다.
4월의 일련의 순간들이 결정적 분기점이었다. 이것만으로도 우리는 동일한 오류를 반복하지 않게 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오류란, 단지 우리가 겪은 억압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제기한 비논리적 주장에 국한하여 논의해보고자 한다.
4월은 결정적인 분기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우리가 동일한 오류를 반복하지 않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오류란 단지 우리가 겪은 억압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제시한 비논리적 주장에 국한하여 논의하고자 한다.
7월 혁명에서 우리가 수없이 비판해 왔던 오류들이 되풀이된 것을 우리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왜 우리는 7월에 사회혁명을 끝까지 관철하지 못했는가? 왜 노동자 조직들은 국가에 대한 전면적 통제권 장악에 실패했는가?
노동자 절대 다수는 CNT와 함께했다. 카탈루냐에서 CNT는 다수 대중이 속한 다수 조직이었다. 그럼 무엇이 문제였는가? 왜 CNT는 자신들의 혁명을, 인민의, 다수 인민의 혁명을 실현해내지 못했는가?
사실 결국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었다. CNT는 철저히 혁명적 이론을 결여하고 있었다. 우리는 구체적 강령조차 마련하지 못한 상태였다. 나아갈 방향에 대한 인식은 전무했다. 낭만적 수사는 넘쳐났지만, 수많은 노동자 대중을 어떻게 이끌지, 조직 내에서 분출된 인민의 열망에 어떻게 실체를 부여할 지에 대한 아무런 방안을 갖추고 있지 못했다. 무엇을 해야 할지를 몰랐기에, 우리는 혁명을 부르주아와 과거의 희극을 반복하려는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고스란히 넘겨준 셈이 되었다. 나아가 우리는 부르주아들에게 숨 돌릴 틈을 허용했고, 그들은 다시 돌아와 대열을 정비해 정복자처럼 행동하기에 이르렀다.
CNT는 그들 스스로에게 부여된 역사적 사명을 수행할 줄 몰랐다. 모든 결과를 감수하면서 혁명을 추진할 의지도 없었다. 그들은 외국 함대에 겁을 먹었고, 바르셀로나가 영국 함대의 포격을 받을 것이라며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 어떤 난관의 극복도 없었던 혁명이 있긴 했는가? 외세의 개입을 철저히 피하며 달성된 고도의 혁명이 이 세상에 나타난 적이 있긴 했는가?
두려움과 소심함에 흔들리는 이들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오직 담대하고 결단력 있는 이들만이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 소심한 이들은 대중을 이끌 자격이 없다.
어떤 조직이 혁명을 설파하는 데에 존재 자체를 바쳐왔다면, 유리한 정세가 도래했을 때 행동에 나설 책임이 있다. 그리고 7월, 그 기회가 분명 주어졌다. CNT는 국가의 통제권을 과감히 장악하고, 낡고 시대착오적인 모든 것에 대한 결정적 일격을 가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우리는 전쟁에서도 승리하고 혁명을 살려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CNT는 그 정반대로 했다. 국가가 모든 측면에서 붕괴하고 있었음에도 CNT는 부르주아와 함께 국가 운영에 협력했다. 콤파니스와 그 일당을 떠받쳤고, 이는 빈사상태로 공포에 질린 부르주아들에게 산소 한 모금과 같은 생기를 불어넣어준 셈이 되었다.
혁명이 죽어가고 CNT가 주도권에서 밀려나게 된 가장 직접적 원인 중 하나는, 그들이 거리에서 다수를 점하고 있었음에도 마치 소수파처럼 행동했다는 점에 있다.
혁명이 질식당하고 CNT가 주도권에서 밀려나게 된 가장 직접적인 원인 중 하나는, CNT가 거리에서 다수를 점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소수처럼 행동했다는 데에 있다.
이런 소수파적 시각에 사로잡혔기에, CNT는 스스로의 구상을 관철시키는 데 실패했고, 끊임없는 사보타주와 혼란스럽고 기만적인 정치의 그물망 속에 갇히게 됐다. 우리는 다른 어떠한 집단들보다도 많은 조직 구성원을 갖추고 있었음에도 제네랄리타트와 시의회들에서 열세에, 소수파의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거리에서 승리를 거둔 주체가 바로 우리였음에도 말이다. 대체 우리는 왜 거리를 어처구니없이 내어주고 만 것이었던가?
이러한 소수파적 시각에 사로잡힌 결과, CNT는 자신들의 구상을 관철시키는 데 실패하였고, 끊임없는 사보타주와 혼란스럽고 기만적인 정치 노선의 그물망 속에 갇히게 되었다. 헤네랄리타트와 시의회 내에서 우리는 타 집단보다 훨씬 많은 조합원 수를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의석 수는 오히려 열세에 놓였다. 더구나, 거리에서 승리를 거둔 주체는 바로 우리였다. 그런데도 우리는 어째서 그 거리를 이토록 어처구니없이 내주고 만 것인가?
또 한편으로, 우리는 누가 뭐라하건 간에 본질적으로 혁명이란 전체주의적 성격을 지닐 수 밖에 없다고 단언한다. 혁명의 다양한 순간과 측면들이 순차적으로 실현되는 것으로 보일 수는 있어도, 새로운 질서를 대표하는 계급이야말로 가장 큰 책임을 지는 주체임은 분명하다. 이걸 겨우 반 정도만 행동에 옮겼기에, 우리가 지금 논하는 7월의 참극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반파시스트 민병대 위원회가 7월에 구성됐다. 그러나 이는 계급적 성격을 지닌 기구가 아니었다. 내부에는 부르주아와 반혁명적 세력의 대표자들도 포함돼있었다. 겉보기에는 제네랄리타트에 대한 견제장치로 구성된 것 처럼 보인 이 위원회는 기만적인 기구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통제 순찰대는 조직되었고, 이들은 바리케이드의 투사들이자 거리의 투사들이었다. 공장, 작업장, 상점들이 접수됐다. 대지주들에 대한 조치도 실시되었다. 각 지역과 도시에서는 방위위원회와 보급위원회가 설립되었다.
7월 이후 16달이 흘렀다. 무엇이 남았나? 7월의 정신은 이제 기억 속에만, 과거 속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정치논리와 소부르주아들은 여전히 온전한 형태로 살아있다. 노동자들의 희생으로 몇몇 구역에 간신히 유지되고 있는 부르주아 우위의 하부구조 또한, 플라자 데 라 레푸블리카에 그대로 남아 있다.
5월 3일
카탈루냐의 병영이야말로 반혁명이 7월 혁명의 본질을 짓밟기 위해 가장 집요하게 움직였던 곳이었다.
카탈루냐의 경제 구조는 대규모의 노동 대중이 한데 집중될 여건을 만들었다. 이들은 공장과 작업장의 분위기 속에서 계급의식으로 단련된 존재들이었고, 이러한 제조업 중심지의 특수성은 혁명의 완성에 유리한 조건이었다. 7월, 카탈루냐의 노동 대중은 사회생활을 새로운 기초 위에 올려놓았다. 그것은 연맹 내부에서 수년간의 투쟁을 통해 비판적 자의식을 단련시켜온 불굴의 프롤레타리아가 마침내 부활한 것이었다. 사회혁명은 카탈루냐에서 실현될 수 있었다. 나아가, 이 혁명적 프롤레타리아는 관료적 개량주의로 휘청이는 마드리드와 가톨릭적 보수주의가 지배하는 바스크 지역에 맞서는 견제력으로 작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건은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혁명은 카탈루냐에서 실현되지 않았다. 프롤레타리아는 다시금 말장난이나 늘어놓는 지도부, 즉 소부르주아지에게 발목이 잡혔고, 7월에 뒷방으로 숨었던 이 소부르주아들은 급히 전면으로 돌아와 혁명을 짓밟기 시작했다.
우리가 중간계급을 언급할 때 가장 충격적인 사실은, 그 중 다수가 마르크스주의자로 포장된 자들이라는 점이다. 이들은 온통 가게 주인들과 리거 레저널리스타에 가입한 12만 유권자들이었다.
카탈루냐에서 사회주의는 비참하기 짝이 없는 존재였다. 카탈루냐 사회주의 대오는 혁명에 반대하는 인물들로 채워졌고, 결국 반혁명의 선봉장이 되었다. 사회주의는 GEPCI(카탈루냐 산업경제위원회)의 부속기관으로 전락한 UGT(총노동조합연맹)를 만들어냈다. 자칭 마르크스주의 지도자들은 반혁명을 찬양했고, ‘통일전선’이라는 구호를 조각해내는 동안, 먼저 POUM(통합마르크스주의노동자당)을 제거하고, 그다음은 CNT(노동총연맹)를 겨냥해 같은 작전을 반복하려 했다.
소부르주아지는 사회주의자 및 공산주의자들과 결탁하여 책략을 벌였고, 그것은 5월 사건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5월에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두고는 여러 상충하는 해석들이 존재하지만, 진실은 명확하다. 반혁명 세력은 노동계급이 조직되지 않은 채 거리로 나서기를 바랐다. 그래야만 그들을 짓밟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일정 부분 목적을 달성했다. 일부 지도자들이 총격 중지 명령을 내리고, 두루티의 동지들을 적에게 도발하여 오히려 적을 이롭게 하는 프락치라고 낙인찍었기 때문이다. 거리의 주도권은 노동자들이 쥐고 있었고, 적은 이미 퇴각한 상태였다.
반혁명 세력이 공공질서에 대한 통제권을 발렌시아 정부로 이관시키려 했다는 사실은 너무도 자명하다. 그리고 라르고 카바예로 덕분에 그들은 실제로 그것을 이뤄냈다. 이 시점에 CNT는 내각에 네 명의 장관을 두고 있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당시 소부르주아지는 무질서를 빌미로 외세 개입을 유도하려는 음모를 이미 준비해두고 있었다는 지적도 있다. 바르셀로나를 향해 외국 함대가 출항하는 것은 거의 확정된 상황이었고, 프랑스 육군의 기계화 부대가 국경에 배치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소문도 돌았다. 여기에 더해, 파리에서 비밀리에 만난 정치인들 사이의 음모 회합까지 있었다는 증언도 존재한다.
당시의 분위기는 극도로 긴장되어 있었다. CNT 회원증이 찢겨 나갔고, CNT-FAI 활동가들은 무장 해제당했다. 충돌은 끊임없이 벌어졌고, 정말 간발의 차로 대규모 유혈사태로 번지지 않을 수 있었다. 노동자들이 견뎌야 했던 도발은 일상적이었고, 책상 뒤에 숨은 관료들은 더 이상 숨길 생각도 없이 노골적으로 협박을 늘어놓았다.
사회주의자 롤단의 죽음은 반혁명 세력 전체가 참여하는 대규모 시위로써 무력 과시의 명분으로 악용되었다.
모든 실패는 CNT의 탓으로 돌려졌다. 아나키스트들은 온갖 재앙의 주범으로 지목되었고, 식량 부족 문제는 보급 위원회에 책임을 전가했다.
5월 3일, 결국 폭발했다. 당시 공공질서 담당관이던 로드리게스 살라스는 아이과데의 묵인 아래, 돌격대를 이끌고 바르셀로나 전화 교환소에 난입하여 CNT 동지들을 무장 해제하려 했다. 하지만 교환소는 CNT와 UGT의 공동 통제하에 있는 시설이었다.
PSUC(카탈루냐 통일사회당) 당원이었던 로드리게스 살라스의 이번 행동은 사실상 무장 봉기의 신호였다. 몇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바르셀로나 전역의 거리에는 바리케이드가 세워졌고, 소총과 기관총의 격발음, 대포의 포성, 폭탄의 폭발음이 도시 전체를 뒤덮었다.
몇 시간 후, 전세는 CNT에 속한 프롤레타리아들에게 유리하게 기울었다. 그들은 7월의 전투 때처럼 총을 들고 권리를 방어했다. 우리가 거리를 장악했다. 이 세상 그 어떤 권력도 그것을 우리로부터 되찾을 수는 없었다. 노동자 계급 거주구역은 순식간에 우리 손에 떨어졌고, 이후 적의 점령 지역도 서서히 잠식되어 갔다. 결국 적들은 부르주아지 거주지 일부, 즉 도심 한 구역의 고립된 거점으로 밀려났고, CNT 위원회의 배신이 없었더라면 그마저도 곧 함락될 운명이었다.
우리 그룹은 거리의 전투에서 드러난 우유부단함, 그리고 명백한 지휘력과 조직의 부재를 인식했다. 이에 우리는 전단을 배포했고, 곧이어 선언문을 발표했다.
그들은 우리를 프락치라 매도했다. 우리가 요구한 것은 무력도발의 주체들을 총살할 것, 무장세력을 해산할 것, 도발을 주도한 정당들을 해체할 것, 그리고 경제의 사회화를 추진하고 모든 경제 권력을 노동조합으로 이양하는 혁명 훈타를 구성하자는 것이었을 뿐인데 말이다.
그 긴장의 순간에 발표된 전단과 선언문에서 우리는 바리케이드를 무조건적으로 철수해서는 안 된다고 반복해서 강조했다. 승리한 군대가 한 치의 땅도 빼앗기지 않았는데 스스로 물러나는 일은 역사상 없었기에, 당연한 주장이었다.
우리는 우리가 더 이상 탄압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최소한의 보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CNT의 수뇌부는 제네랄리타트 내에 있는 CNT 대표들이 노동계급을 보호할 것이라며 안심시키려 했다.
그러나 몇 시간 전 발렌시아에서 벌어진 일이 곧 카탈루냐에서도 재현되었다. 우리는 아무런 정당한 이유 없이 바리케이드를 철수했다.
카탈루냐의 상황이 다시 "질서"를 되찾자마자, 마르크스주의자들과 공권력에 의한 만행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우리는 옳았다.
베르네리 동지는 자택에서 끌려 나와 거리 한복판에서 총살당했다. 사르다놀라에서는 30명의 동지들이 사체가 심하게 훼손된 채로 발견되었다. FIJL의 마르티네스 동지는 체카(Cheka)의 비밀 지하 감옥에서 어떤 방식인지조차 알 수 없는 죽음을 당했다. CNT와 FAI의 수많은 동지들도 잔혹하게 학살되었다.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베르네리 교수는 학식 있는 이탈리아 동지였고, 파시즘에 맞선 이탈리아의 투사였다. 이탈리아는 그를 비롯한 반파시스트들을 망명지와 수용소, 무덤으로 몰아넣고 있었고, 베르네리 역시 무솔리니 치하의 이탈리아에 더는 머물 수 없었던 자였다.
살인에 뒤이어 강도 높은 탄압이 자행되었다. 7월과 5월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수많은 동지들이 체포되었고, 노동조합과 집단농장, 두루티의 동지들 그룹, FIJL과 POUM의 사무실에 대한 공격이 자행되었다.
여기서 절대 넘어갈 수 없는 사건이 하나 있다. 안드레스 닌의 실종과 살해다. 지금까지도 반 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정부는 닌의 살해를 둘러싼 이른바 ‘미스터리’를 전혀 해명하지 않았다. 언젠가라도, 그를 죽인 자가 누구였는지를 알게 될까?
5월 이후, 반혁명 세력은 그 어느 때보다 자신감을 얻었다. 외세는 관료적 반동을 노골적으로 지원했고, 불과 며칠 만에 네그린 내각이 구성되었다. 이 내각은 두 가지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프롤레타리아 내부의 혁명적 세력을 철저히 소멸시키는 것, 또 하나는 베르가라의 포옹식 타협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한편 카탈루냐에서는 정당과 노동조합 대표들로 구성된 과도 정부가 출범했다. 그러나 루이스 콤파니스는 곧 제네랄리타트에서 CNT 대표들을 축출했다.
5월에 벌어진 일은 7월과는 완전히 달랐다. 5월의 프롤레타리아는 명백히 계급의식에 기반한 전투를 벌였다. 의심의 여지 없이, 노동계급은 혁명을 더욱 급진화하고자 했다.
반동 언론이 5월의 본질을 아무리 왜곡하려 해도, 역사는 5월을 프롤레타리아가 날린 정확하고 전격적인 일격으로 기억할 것이다. 노동 인민은 혁명이 위기에 처했음을 직감하고, 그것을 지키고, 되살리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5월, 우리는 혁명을 구할 수도 있었다. 그 역사적 순간에 휴전 명령에 응했던 것을 지금도 후회하는 이들이 많고, 감옥에 가득 찬 동지들의 모습을 보며 가슴 아파하는 이들이 많다.
두루티의 동지들 그룹은 제 역할을 다했다. 그 시대의 도전에 끝까지 맞설 수 있었던 유일한 세력은 우리뿐이었다. 우리는 그 결말을 미리 내다보았다.
5월은 결코 잊혀질 수 없다. 그것은 노동계급이 부르주아 계급의 대문을 두드린 가장 거대한 울림이었다. 훗날 역사에서 5월 사건을 이야기할 때, 역사가들은 반드시 카탈루냐 프롤레타리아에게 경의를 표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야말로 새 시대를 위한 기준을 제시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새 시대는 100퍼센트 프롤레타리아의 시대여야 한다.
스페인 독립
외세의 스페인 내정 개입은, 우리 나라가 항상 놓여 있어 온 영원한 딜레마를 다시금 부각시켰다.
16세기 이래로 스페인의 정치사는 줄곧 외국 권력의 담보물이었다. 합스부르크 왕가와 부르봉 왕가 (그리고 짧은 기간이지만 사보이 가문의 아마데오 왕조까지) 이 나라 인민은 1931년 4월 14일 공화국 수립 이전까지 지속적인 예속 상태에 놓여 있었다.
스페인의 독립은 언제나 허구였다. 영국 외무성과 프랑스 외무부(케 도르세이)는 스페인의 주요 정치 결정에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이를테면 1932년 8월의 산후르호 반란 후, 그에 대한 사면은 프랑스 정부의 압력 덕분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스페인의 경제는 철저히 농업 중심이었고, 이는 우리를 산업 강국의 치맛자락에 묶어두는 구조였다. 우리는 생산물을 수출하기 위해 국내에서 충분히 만들 수 있었던 기계조차 수입해야 했다. 영국이 우리 오렌지를 사는 대신, 우리는 영국산 석탄을 강제로 수입해야 했고, 그 결과 국내 탄광의 생산이 줄어들면서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은 단축되고 생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우리는 철, 구리, 기타 광물을 수출하고, 그 자원을 가져간 나라로부터 완성품 기계를 다시 수입해야 했다.
우리 국토의 지하자원은 대단히 풍부하지만, 그 소유권은 외국 자본에 장악되어 있다. 스페인은 국제 금융자본의 촉수에 휘감긴 상태이며, 그것은 인민의 재화를 탐욕스럽게 삼켜왔다. 스페인 노동자들은 외국 주주와 금융 재벌의 배당금과 폭리를 위해 땀 흘려 왔다.
우리 역사 초창기부터 독립의 정신은 언제나 살아 있었다. 수많은 침략이 있었지만, 독립이라는 신성한 불꽃을 완전히 끄지는 못했다.
하지만 오늘날의 침략은 과거와는 성격이 다르다. 이베리아인, 페니키아인, 카르타고인, 로마인, 아랍인, 프랑스인이 쳐들어왔을 때는 최소한 계급적·사회적인 침공은 아니었다.
나폴레옹의 침공 당시, 자유주의자와 전제주의자는 어쩔 수 없이 손을 맞잡고 싸웠다. 엘 엠페시나도와 메리노 신부 같은 전선에 섰다. 하지만 빈 회의의 승인 아래 앙굴렘 공작이 이끈 프랑스 왕당파 원정군이 침입했을 때, 반응은 갈라졌다. 메리노는 침략자 편에 섰고, 엘 엠페시나도는 무장 저항에 나섰다.
오늘날 벌어지는 사태는 페르난도 7세 시대의 재연이다. 다시금 빈에서는 파시스트 독재자들의 회의가 열렸고, 그들은 스페인을 침공하기 위한 계획을 짰다. 이에 맞서, 무장한 노동자들은 엘 엠페시나도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
독일과 이탈리아는 철, 구리, 납, 수은 같은 원자재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 자원은 프랑스와 영국이 이미 독점하고 있는 영역이다. 그럼에도 스페인이 예속의 위기를 맞이하자, 영국은 아무런 항의도 하지 않고 오히려 프랑코와 협상에 나서는 비열한 술책을 부렸다.
전쟁이 시작된 이후, 영국은 공화군이 장악한 항구를 봉쇄하는 데 가담했고, 파시스트 선박들은 반란군 항구에 전쟁물자를 실어 나르고, 그 대가로 광석, 가축, 기름 등을 싣고 돌아갔다.
국제 파시즘은 전쟁기계를 굴릴 식량과 자원이 필요하다. 히틀러의 구호인 “총을 더, 집사는 적게”와 무솔리니의 자급경제 구호는, 반란군 장군들의 철권 아래 농업지대를 약탈하도록 이끌었다.
경제 문제에 있어 스페인은 언제나 타국 의존적인 구조에 갇혀 있었다. 무역 협정과 지급수지는 단 한 번도 우리에게 유리하게 작동한 적이 없었고, 이 구조는 우리 경제를 옥죄는 악몽이었다.
스페인의 문제는 식민지 문제다. 자국 내부에서 봉건제를 소멸시킨 자본주의는, 이제는 모순적인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착취 대상으로 삼는 국가들에서는 오히려 봉건적 체제를 떠받쳐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는 스페인에도, 중국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스페인의 독립을 보장할 수 있는 주체는 노동계급뿐이다. 토착 자본주의는 결코 이 과제를 수행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국제 자본은 국경을 초월하여 움직이며, 이미 스페인을 짓누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오늘날 스페인이 처한 상황이다. 외국 자본가들을 뿌리 뽑는 것, 그 과업은 오직 우리 노동자들의 몫이다. 여기엔 애국심이 개입할 여지조차 없다. 이것은 계급의 문제다.
국제적 음모가 계속되는 가운데, 영국은 결국 치욕적인 현상 유지를 전제로 스페인 문제를 봉합하려 들 것이라는 사실은 거의 확실하다. 영국은 독일과 이탈리아에 경제적 양보를 할 것인가? 우리 지하자원의 부분적 권리를 외국 자본에 분할 양도할 것인가? 스페인을 분할통치의 대상으로 만들 것인가?
영국은 우리 광물 자원에 깊은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 전 세계에 퍼진 파시즘의 거대한 압력, 그리고 그들이 맺은 악명 높은 반코민테른 협정 속에서, 영국은 결국 굴복할 것이다. 다만 자국의 선박이 '우리 바다(Mare Nostrum)'를 자유롭게 통과하는 것만은 위협받지 않는 한에서 말이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국제연맹 따위에 어떤 신뢰도 두지 말아야 한다. 수많은 위원회와 소위원회, 그리고 니옹 회의처럼 시간만 잡아먹는 각종 회담에도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자. 다만 유의할 점이 하나 있다. 영국 보수당이 인도 대학살의 주범인 핼리팩스 경(Lord Halifax)을 소환했다는 사실이다.
우리에게 던져진 질문은 단 하나다. 프랑스는 과연, 해상 안보뿐만 아니라 자국 영토의 안보까지 걸고 이 문제에 개입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레옹 블룸 정부가 고안한 ‘불간섭 정책’을 끝까지 고수할 것인가? 프랑스는 자국 식민지 군대를 포기할 의향이 있는가?
우리는 누구도 믿어선 안 된다. 구원은 오직 우리 스스로의 손에 달려 있다. 외세는 언제나 ‘더 나은 악’을 고르고, 음모와 담합에 기대어 움직인다. 그러나 노동계급은 스페인이 탕헤르나 단치히, 자르처럼 국제적 관리 체제로 전락하는 것을 반드시 막아낼 것이다.
승리 아니면 죽음. 이것이 지금 우리가 마주한 선택이다.
계급협조와 계급투쟁
스페인에서는 여러 국가에서 그러했듯, 노동자 운동은 두 가지 경향을 보여왔다. 하나는 협조주의적인 경향이며, 또 다른 하나는 적과 그 어떤 타협도 받아들이지 않는 경향이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특히나 사회주의자들의 산하 조직인 UGT가 전형적인 개량주의의 역할을 수행해왔다. 이 조직은 배신자들이나 프롤레타리아를 부르주아들에게 끌려다니게 할 의도로 노동자 조직에 침투한 자들의 피난처가 되어 왔다.
붉은 2년의 시기에, 철도 노동자들의 파업 당시 인달레시오 프리에토가 남겼던 발언은 계급협조적 본질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그의 악명 높았던 발언은 다음과 같았다.
“나는 사회주의자이기 전에 장관이다.” 라고, 높으신 인달레시오 경께서는 말씀하셨다.
이러한 태도들은 개량주의자들이 끼친 해로운 영향에 스페인 혁명 발전에 방해가 되었고, 그 방향성을 흐리게 만들었음을 보여준다. 7월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사회적, 계급적 의미를 제대로 해석하려는 노력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CNT가 일관되게 주장해왔던 계급투쟁은, 혁명에 심각한 해안을 끼친 여러 사안들로 인해 부차적 위치로 밀려났다. 우리는 이러한 혁명의 왜곡을 개탄할 뿐만이 아닌, 계급적 토대 위에서 혁명적 노선을 일관되게 유지하지 못하고 혁명적 조합주의를 훼손함으로써 조직적 기반을 잃어버린 것에 대해 비판적으로 성찰해야만 한다.
노동조합은 자본주의에 맞선 영원한 투쟁 속에서 노동자의 계급의식을 진정으로 표출하는 기관이다. 만약 노동조합을 부차적 위치로 밀어낸다면, 프롤레타리아의 이해관계는 훼손될 수 밖에 없다.
계급협조주의는 언제나 배격되어야 한다. 부르주아 국가 안팎이든 정부 내에서든, 자본주의와는 그 어떤 형태의 협조도 해서는 안된다. 생산하는 이들로서 우리의 자리는 노동조합에 있으며, 혁명 이후 살아있어야 할 유일한 기관은 바로 노동조합이다.
계급투쟁은 노동자들이 최전선에서 싸우고, 군수 산업에서 일하는 데에 그 어떤 장애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행위들을 계급적 인식 하에서 수행해야 하며, 노동조합에 걸맞는 우선적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 필수적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노동조합의 힘을 제약하는 그 어떤 외부의 경제적 기구도 존재해서는 안된다. 동시에 국가는 노동조합과 공존할 수 없으며, 우리 손으로 강화하는 일이 있어서도 안 된다. 자본주의에 맞선 투쟁은 계속되고 있다. 우리 안에도 여전히 국제 부르주아와 연결된 국내 부르주아가 존재하고 있고, 이 문제는 수년 전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우리는 노동조합이 본래 해야 할 역할을 다하도록 유지해야만 한다. 7월 19일 이전까지 항상 그랬듯, CNT가 스페인 부르주아와의 대립 속에서 그려운 노선을 끝까지 견지해내야 한다.
계급협조주의자들은 부르주아의 동맹이다. 이 관계를 옹호하는 이들은 계급투쟁은 물론, 노동조합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조차 결여되어 있다.
우리는 결코 우리 적의 위치가 공고해지는 것을 용인해서는 안 된다.
적은 반드시 억제되어야 한다. 만일 일시적 공백이 발생하더라도 이런 일탈이 자본에 대한 공개적 협력으로 발전하는 것을 결코 허용해서는 안 된다.
착취하는 자와 피착취자 사이에는 그 어떤 공통점도 없다. 어느 쪽이 우위를 점할지는 오직 투쟁만으로 결정할 수 있다. 부르주아인가, 노동자인가. 둘 모두 고르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노동계급은 미래를 그들 손아귀에 쥐고 있다. 우리, 버려진 이들은 잃을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되려 노동자 계급 전체의 운명인 해방을 쟁취해낼 수 있다.
쇠사슬을 끊어내자. 노동조합을 더 강하게 만들자. 계급투쟁의 정신을 살아 숨쉬게 만들자.
우리의 입장
이제 구체적으로 말할 때다. 우리는 지금의 상황이 제기하는 여러 문제들에 대해 하나하나 분명히 입장을 밝힐 것이다.
전쟁 문제에 관하여, 우리는 군대가 전적으로 노동계급의 통제 하에 놓여야 한다는 입장을 지지한다.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성장한 장교들에 대해 우리는 그 어떤 신뢰도 하지 않는다. 실제로 탈영은 빈번했고, 우리가 겪은 대다수의 참패는 장교들의 명백한 배신에 기인한다. 우리가 바라는 군대는, 노동자들로만 구성된 혁명군이며, 만약 장교 계급이 필요하다면, 그들은 가장 엄격한 통제를 받아아야 한다.
우리는 전쟁의 지휘권이 노동자에게 있어야 한다고 단언한다. 그럴 충분한 이유도 있다. 톨레도, 탈라베라, 북부 지역과 말라가의 함락은 정부 내부의 무능과 비열함을 드러내는 상징적 사례들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리가 적의 침공에 맞설 무기를 확보할 수만 있었다면, 우리는 스페인 북부를 구할 수 있었다. 스페인 은행에는 충분한 금이 있었고, 그것으로 스페인 전역에 무기를 공급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는가? 시간도 충분히 있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불간섭 감시 체계’가 실제로 작동하기 시작한 것은 내전이 시작되고 몇 달이 지난 뒤의 일이라는 사실을.
전쟁 지휘는 재앙이었다. 라르고 카바예로의 기록은 참담하기 그지없다. 아라곤 전선이 절실히 필요로 하던 무기를 공급받지 못한 책임은 전적으로 그에게 있다. 그가 아라곤 전선에 무장을 꺼려한 탓에, 아라곤은 파시스트의 손아귀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킬 기회를 놓쳤다.
뿐만 아니라, 만약 아라곤이 제대로 무장되었다면, 마드리드와 북부 전선에 가해지던 압박도 완화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라르고 카바예로는 "아라곤 전선에 무기를 보내는 건 곧 CNT에게 무기를 넘기는 것이다"라는 발언으로 그 태도를 명확히 했다.
우리는 부르주아 계급과의 협조에 반대한다. 계급적 입장을 포기할 수 있다는 생각조차 인정하지 않는다.
혁명적 노동자들은 결코 관직을 맡아서는 안 되며, 정부 부처에 자리를 잡아서도 안 된다. 전쟁이 지속되는 동안, 협력은 허용될 수 있다 — 하지만 그 협력은 전선에서, 참호에서, 방벽 위에서, 그리고 후방의 생산 현장에서만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의 자리는 노동조합 안에 있다. 우리의 자리는 일터에 있다. 거기서 우리는, 다시금 피어날 반란의 정신을 꺼뜨리지 않고 살아 있게 유지해야 한다.
우리는 외국 외교 당국들과 결탁한 부르주아 정치인들의 정치적 조합에 어떤 형태로든 참여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곧 우리의 적을 강화하고, 자본주의의 올가미를 조이는 일에 가담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더는 장관직도, 부처도 필요없다. 동조합으로 돌아가자. 현장의 생산 라인으로 돌아가자. 거기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우리는 프롤레타리아 내부의 단결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이 단결은 노동자들 사이의 단결이어야지, 관료나 자리만 차지한 무위도식자들과의 연합이어서는 안 된다.
현 시점에서 CNT가 UGT의 혁명적 분파와 합의에 도달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카탈루냐의 UGT나 프리에토의 추종자들과는 어떠한 협약약도 성립될 수 없다고 본다.
경제의 사회화는 전쟁의 승리와 혁명의 진전을 위해 필요불가결한 것이다. 작금의 표류상태가 계속되어서는 안된다. 생산의 현장이 어떠한 협력적 체계도 없이 따로 돌아가는 것을 용납하여서는 안된다.
하지만 이 과업을 이루는 것 역시 노동자들 스스로여야 한다.
종교의 문제는 더이상 논의될 필요도 없다. 인민들은 이미 그 문제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다시 개장하려는 시도가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정부는 마치 1931년에 불타던 교회들을 잊은 듯 신앙과 미사의 자유를 다시 보장하였다.
물자는 철저한 배급제하에 분배되어야 한다. 노동자들이 굷주리는 동안 식당에 숨어든 사재기꾼들이 배부른 현실은 용납되어서는 안된다.
분배는 사회화되어야 하며 배급은 도입되어야 한다.
관료주의는 철저히 제거되어야 한다. 바르셀로나로 내려온 수천의 관료들은 우리가 겪은 최악의 재앙 중 하나다. 카페에서 빈둥거리며 농탕부리는는 관료의 직분은 노동자의 것이어야 한다.
관료제의 온전한 철폐
터무니없는 고임금 체계는 즉각 폐지되어야 한다. 민병대원들이 하루 10페세타를 받는 상황에서 관료들이 거액의 급여를 챙기는 것은 참으로 파렴치한 일이다. 아사냐와 콤파니스는 여전히 예전과 똑같은 고액 봉급을 받아가고 있다.
우리는 가족 임금제의 도입을 요구한다. 그리고 이로써 지긋지긋한 불평등에 단호히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사법의 주체는 인민이어야 한다. 우리는 지금처럼 기만적 방식의 사법 운영을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 처음에 우리는는 계급적 인민 법정을 두었었지만, 점차 직업판사들로 구성된 관료적 법원 체계로 후퇴해버렸고, 이제는 배심제조차 폐지되고 있다.
프롤레타리아 사법은 오직 노동자에게만 속한다. 그 누구도, 그 어떤 기구도 그것을 대신할 수 없다.
스페인 농업은 반드시 사회화되어야 한다. 집단농장의 파괴는 농업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고, 그로 인해 투기꾼들만 이득을 보았다.
도시와 농촌의 연대는 농민들을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더욱 가깝게 만들 것이며, 자기 땅만을 경작하는 데 익숙한 농민의 사고방식 또한 변화하게 될 것이다.
다른 모든 활동과 마찬가지로, 문화의 문제 역시 노동자들의 영역이어야 한다. 새로운 시대의 방향을 정한 것도 바로 노동자들이기 때문이다.
혁명적 질서는 노동자들이 직접 집행하여야 한다. 우리는 혁명을 담보하지 못하는 제복경찰의 해산을 촉구한다. 노동조합은 우리가 원하는 새로운 질서를 지키기 위한 인력을 제공하여야 한다.
대외정책에 대해 말하자면, 휴전은 없다. 그리고 우리의 혁명을 선전선동하는 과업은 외교관들의 사교의 장이나 첩보원들의 음모 속에서가 아니라, 각국의 생산현장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는 만국의 노동자들에게 혁명의 언어로 이야기해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가 ‘민주주의 수호’를 되풀이해왔다면, 이제는 노동자 조직과 모든 인민들에게 혁명을 말해야 한다. 그렇기에 그들도 행동해야 한다고, 파시스트 체제를 위한 생산을 사보타주하고, 스페인 인민을 학살하기 위한 무기의 운송을 거부하고, 그들의 정부에 맞서 투쟁하며 스페인의 대의는 바로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의임을 이야기해야 한다고 말해야 한다.
우리의 강령
혁명은 혁명을 이끄는 등대와 즉각적 목표 없이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7월 혁명에 부족했던 점이었다. CNT에게 힘은 있었지만, 그들은은 거리에서 자발적으로 솟구쳐 오른 행동을 조직화하고 이끌 방법을 몰랐다. CNT 지도부조차도, 본인인들 입장에서 보면 전혀 예기치 못한 사건들 앞에서 경악하고 얼어붙었다.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아무런 개념도 이론도 없었다.
우리는 수년간 추상적인 사변 속에 머물렀다. 그제야 지도부는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자문했했고, 그 사이에 혁명은 패배했다. 혁명이이 고양된 순간에는 망설일 시간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스스로가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메우고자 하는 공백이다.
7월과 5월에 벌어졌던 일이 다시는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는 확신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강령에 약간의 아나키즘적 변형을 도입하고자 한다. 그것은 곧 혁명 훈타타의 수립이다. 우리는 혁명을 지도하고, 조직된 방식으로 적대 세력을 억제할 수 있는 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현실은 반혁명세력은 결코 도태되지 않으며, 오로지 타도될 때에만 도태함을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물론, 몇몇 아나키스트 동지들이 이런 입장에 대해 이념적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경험에서 알수 있는는 교훈은 분명하다. 더 이상은 빙빙 돌며 말장난할 시간이 없다. 지금의 혁명과 같은 비극을 반복하고 싶지 않다면, 우리는 노동계급에 속하지 않은 모든 세력에 대해, 최대한의 단호함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 짧은 서문을 마치고, 이제 우리는 우리 강령의 항목들을 하나씩 제시할 것이다.
I. 혁명 훈타, 혹은 방어협의회의 설치
이 기구의 조직 구성은 다음과 같다.
- 혁명 훈타의 구성원은 노동조합 조직 내에서 민주적 투표를 통해 선출하여야 한다. 전선에 나가 있는 동지들의 수 또한 고려되어야 하며, 이들의 투표권 역시 보장되어야 한다.
- 혁명 훈타는 경제 문제에 관여하지 않는다. 경제는 노동조합이 전적으로 책임진다.
- 혁명 훈타의 임무는 다음과 같다.
a. 전쟁의 지도
b. 혁명질서의 감독
c. 외교
d. 혁명적 선전선동
- 각 직위는 주기적으로 재배치되어 툭정 개인이 특정 직위를 독점하여 권력화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 노동조합의 조합원 총회가 훈타의 활동을 감시하고 통제하여야 한다.
II. 모든 경제 권력을 노동조합에
7월 이후 노동조합들은 건설적 노동에 대한 거대한 역량을 유감없이 입증해왔다. 만약 우리가 그들을 주변부로 밀어내지 않았더라면, 그 잠재력은 훨씬 더 큰 결실을 맺었을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경제를 조직하는 주체는 노동조합이 될 것이다. 경제 활동의 조정을 보다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산업노조와 산업연맹의 특성을 고려한 경제 평의회회를 구성하는 것도 가능하다.
III. 지방자치
외국 왕조들이 들어서기 이전, 스페인에서는 자치권이 매우 강력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이러한 지방 분권적 전통은 새로운 국가 체제가 세워지는 것을 방해할 만큼 강력했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가 바라보는 새로운 스페인에서는, 한때 비야랄(Villalar)에서 무너졌던 자유 헌장이 다시 일어설 것이다. 소위 '카탈루냐 문제'와 '바스크 문제' 또한 해결될 것이다.
자치체(시·지방정부)는 노동조합의 고유 영역을 벗어난 사회 기능을 맡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건설할 사회는 오직 생산자들로 구성될 것이므로, 노동조합이 자치체를 물질적으로 뒷받침하게 될 것이다. 이해관계의 분열이 없기에, 충돌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자치체는 지방, 코마르카, 전국 단위의 연맹으로 조직될 것이다. 노동조합과 자치체는 각각의 수준에서 긴밀히 연계될 것이다.
새로운 혁명을 향해
7월 혁명은 매우 빠르게 몰락하였다. 사회혁명이라 여겨지는 모든 혁명 중 이처럼 아찔한 속도로 붕괴한 혁명은 없었다. 혁명이 단계적으로 진행될 것이라는 식의 이론화는 가당치도 않다. 왜냐하면 우리의 혁명은 아직 시작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스페인 프롤레타리아의 고갈되지 않는 창조력을 다시 한 번 불러내는 것이다. 우리는 앞장서 나아가, 새로운 출발을 만들어내야 한다.
스페인에서는 혁명이 자주 발생한다. 때로는 조건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혁명이 시도되며, 그렇게 실패해 버리는 경우우도 허다하다. 진정한 기회를 포착하려면, 심리적 조건과 물질질적 조건 모두를 고려하여 정확한 순간을 읽어낼 줄 알아야 한다. 그 선택이 옳았는가의 여부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
예측이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또 다른 7월이나, 또 다른 5월이 언제 도래할지.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스페인에서는 그러한 조건들이 다시 나타날 것이다.
지금처럼 전쟁이 불리하게 전개된다면, 휴전과 박애적 타협을 운운하던 모든 정치인들을 폐기처분해야 한다.
그 증거는 분명하다. 전쟁, 전쟁 산업, 보급 전반에 대한 노골적인 방해 행위, 그리고 식량 가격의 폭등 — 이 모든 것은 집권자들이 혁명을 질식시키기 위한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조성한 분위기의 일부다.
물론, 어떤 형태로든 협상에 의해 내전이 끝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그때야말로 무장투쟁이 필요한 순간이 될 것이이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오늘날 가장 첨예하게 제기되고 있는 문제들은 전선에서 돌아온 동지들의 발걸음과 함께 다시금 되살아날 것이다. 그 문제들에 우리는 어떤 해답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인가?
전쟁 산업을 어떻게 평화 산업으로 전환할 것인가? 무기를 들고 싸운 이들에게 어떠한 일자리를 보장할 것인가? 전쟁의 희생자들은 모두 제대로 돌봄을 받을 수 있을까? 장교 계급은 자신들이 누리던 특권권을 기꺼이 내려놓을 것인가? 우리는 무너진 시장을 다시 회복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가 앞서 서술한 세 개의 시기는 각기 다른 전망과 입장에 조응한다. 그 중 어떤 것이 현실화될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하나는 분명하다. 문제의 핵심은 새로운 봉기를 준비하는 것이다. 그 봉기를 통해 프롤레타리아가 나라의 통제를확실히 손에 쥘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가 과잉 반응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지금 이 순간은 혁명의 기운이 완전히 사라진 시기다. 반혁명은 대담하게 도발을 일삼고 있으며, 감옥은 노동자들로 가득 차 있다. 프롤레타리아의 권리는 노골적으로 부정당하고, 혁명적 노동자들은 하인처럼 취급받고 있다. 제복을 입었든 아니든 관료들의 언어는 참을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노동조합에 대한 공격은 말할 것도 없다.
이제 남은 유일한 길은 새로운 혁명이다. 그 준비에 나서야 한다. 그리고 혁명의 절정에서 우리는 다시 하나가 될 것이다. 오늘도 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동지들과, 감옥 속의 동지들과, 지금 이 순간에도 정의로운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꿈꾸며 기다리고 있는 모든 동지들과 함께, 우리는 거리에서 만날 것이다.
도시와 농촌의 노동자들이 모두 만족할 수 있는, 새로운 혁명의 승리를 위하여. 인간의 열망을 실현시킬 수 있는 아나키스트 사회의 실현을 위하여.
동지들, 전진합시다!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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