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층위에서 우리의 과업을 실천하기 위한 조건 (1)
1969년 5월 19일, 몬테비데오
우리 사회에서 전개된 투쟁의 과정은 폭넓고 복합적인 경험의 총체를 드러내고 있다. 우리는 이 경험들을 분석함으로써 명확하고 구체적인 실천 지침을 도출해야 한다. 이러한 분석은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과제들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측면 중 하나인 노동조합 활동에서 비롯되는 몇 가지 문제를 짚는 것에서 시작할 수 있다. 우리는 이미 상당한 실천 경험을 축적했고, 다양한 일상적 투쟁을 행하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몇몇 사람들은 동일한 투쟁의 서로 다른 수준을 나타내는 실천 방식을, 오직 대립적이고 상호 배타적인 것으로 제시하려 한다. 그 방식들은 실제로는 상호 연결되며, 조화롭게 통합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하는데도 말이다. 이들은 대중 행동과 무장 투쟁, 노동조합의 동원과 직접행동 사이를 인위적으로 분리하고 대립시킨다. 이런 전략적 관점은, 흥미롭게도 기계적이고 추상적인 사고에 의해 지탱되는 주관적 “대안들”로 가득하다. 예컨대, “우리는 대중을 동원하고 조직하든가, 아니면 기관총을 들어야 한다”, “교육하거나, 아니면 모두 총을 들고 싸우기 시작해야 한다”는 식의 이분법이 그것이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주장들”은 반복되고 수 있다. 그러나 그 뒤에는 언제나 같은 결론이 따라붙는다. “조건이 아직 성숙하지 않았다. 그러니 우리는 합법적 선전과 평화적 활동, 선거 전선, 의회 투쟁, 비폭력적 파업과 저지투쟁에 집중해야 한다.” 동일한 의미와 동일한 실천 결과를 담고 있는 또 다른 표현도 존재한다. “우선 당을 건설하자”는 구호가 그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현실은 다르다. 서로 다른 수준의 투쟁, 서로 다른 방식의 실천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동시에 전개되고 있다. 이러한 방식들이 만들어내는 효과를 하나로 수렴시키고, 각 방식의 실천을 정교하게 다듬는 일은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중심 과제다.
이 과제는 상당히 새롭고 독창적인 과제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고도의 도시화, 광범위한 대중운동, 점진적이며 이질적인 모순의 전개 양상, 무장 투쟁 형태의 존재, 강화되는 국가 탄압 등과 같은 우리 사회의 특수한 조건 때문이다. 이러한 조건들, 그리고 과도기적 시기의 유동성과 복잡성은, 과거의 방식만으로는 오늘날의 조건에 대응하기 어렵다는 점을 보여준다.
우리는 실천의 경험을 통해 과거에 임금 인상을 이끌어내는 데에 유효했던 합법적이고 전통적인 방식들이, 이제는 임금 동결을 돌파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세계적 차원에서 다음과 같은 현실도 확인할 수 있다.
- 선거를 통한 권력 획득이라는 노선이 가진 무력함
- 기만적 의회주의의 부정적 효과
- 대규모 대중 조직과 제도들이 드러내는 취약성
- 그리고 기존의 선전 수단이 가지는 상대적 비효율성.
그렇다면 지금까지 말한 사실들을 인정한다는 것이 대중과 함께하는 실천을 포기하겠다는 의미인가? 대중으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그들을 조직하고 동원하며 의식을 고양시키는 과제를 내려놓겠다는 말인가? 물론 아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이러한 문제들과 관련하여 노동조합 활동의 방식들에 대해 몇 가지 핵심적인 지점을 짚어야 한다.
노동조합 활동은 다양한 수준에서 전개될 수 있으며, 그렇게 전개되어야만 한다. 실제로 노동운동은 이미 오래전부터 그와 같은 방향으로 움직여 왔다. 노동조합의 실천 속에는 이미 높은 수준의 투쟁 양식들이 형성되어 있다. 이들 각각은 개별적이고 단절된 것이 아니라, 노동조합 투쟁이라는 하나의 과정 속에 존재하는 서로 다른 국면일 뿐이다. 이를 간단히 도식화하자면 다음과 같은 단계들이 존재한다.
- 첫째, 선동 활동이다. 집회, 전단 배포, 벽보나 낙서, 시위 등을 통해 이후에 전개될 대중 동원의 정당성과 목적을 알리고 분위기를 조성한다.
- 둘째, 파업 또는 작업중단이다. 이는 직접적 성과를 목표로 한 실천 행위다.
- 셋째, 각자 다른 강도의가두 시위다. 이는 여론을 자극하고, 대오 내부의 결속과 동원 수준을 강화하는 데 목적이 있다.
- 넷째, 직접행동이다. 이는 대중적 주목을 끌고, 계급적 배신자나 억압자에 대한 처벌을 통해 정치적 충격을 발생시키며, 동원 자체를 보다 급진화하는 단이다.
개량주의 실천 방식의 주요 특징 중 하나는 노동조합 활동을 앞서 말한 첫 번째와 두 번째 수준의 실천 방식에만 고정시키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이들은 ‘조직 기구’에 대한 복종, 즉 ‘조합 규율’이라는 이름으로 위장된 복종을 강조하며, 각종 절차와 형식에 집착한다. 이는 노동조합 활동을 결국 의회로 유도하기 위한 흐름을 형성하며, 그 안에서 정당의 대표자들은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데 집중한다.
이것이 바로 개량주의가 노동조합 활동에 적용해온 전형적 방식이다.
만약 이러한 방식이 성과를 내지 못하더라도, 이들은 언제나 “또 하나의 위대한 승리”를 선언한다. 그리고는 정치적 성과를 수치로 환산한다. 예컨대, “수백 명의 신규 조합원 확보”, “수천 명의 신규 유권자 확보”와 같은 계산을 다가올 선거에 대한 전망으로 연결시킨다.
이 모든 흐름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으며, 하나의 관행처럼 굳어져 있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조건에서는 이러한 전략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노동조합이 대중 속에 깊이 뿌리내리면서도, 노동조합 본래의 기능을 포기하지 않고, 혁명적 방향과 전망을 갖고 실천하려는 시도는 여러 가지 난점과 문제들을 동반한다. 우리는 그러한 난점을 정확히 짚고, 그 성격을 밝히는 작업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노동조합이 요구 사항을 제기할 때, 그것을 혁명적 방향성과 적절한 실천 방식에 따라 구성하는 것에서 출발하여야 한다.
노동조합이 대중조직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정당성은 오직 투쟁의 기능에 있다. 바로 그 기능이 노동조합의 본질적 역할이다. 우리는 노동조합을 온갖 사회 문제에 대해 종합적인 입장을 내는 일종의 정치조직으로 만들려는 오류를 피해야 한다.
과거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의 투사들 중 일부는 이러한 잘못된 관점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계급적 비타협성의 원칙에 따라, 라플라타 지역에서 최초의 ‘저항 협회들’을 창립하는 어려운 과제를 해냈다.
오늘날의 조건에서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바라보아야 할 것은 노동조합이 수행하는 행동은 투쟁적이고 단호해야 하며, 대중이 가장 절실하게 느끼는 요구를 실제로 쟁취할 수 있는 방향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몇 가지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 투사의 역할은 투쟁이 스스로 발생하기를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투쟁을 격려하고, 고무하며, 촉진해야 한다. 투쟁이 적절한 경로와 시기, 형식을 갖추고 실현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조건을 마련해야 한다. 그 조건에는 조직적 기반, 재정적 수단, 정보 전달 체계 등이 모두 포함된다.
- 우리는 투쟁의 초점을 어디에 둘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갖고 있어야 한다. 사실 대부분의 노동조합에는 요구 사항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넘쳐날 정도로 많다. 문제는 그 가운데 어떤 요구를 우선적으로 선동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대중을 동원할 것인지를 선택하는 데 있다. 이 선택의 성패가 곧 전체 투쟁의 성패를 결정짓는다. 그 어떤 구호도 단지 끼워넣듯 붙여서는 안 된다. 애매하거나 혼란스럽거나, 너무 많은 과제를 한꺼번에 제시해서도 안 된다. 여러 구호를 동시에 외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구호들은 모두 명확하고, 잘 정의되며, 실제로 도달 가능한 목표를 기반으로 해야 한다.
- 소수 투사들만 관심을 갖는 사안으로는 결코 깊이 있는 동원을 이끌어낼 수 없다. 주관적인 착상만으로는 대중을 움직일 수 없다. 오직 대중이 절실하게 느끼는 요구만이 노동조합을 실질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조합 내에서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는 부문이 이 요구를 먼저 포착하고, 그 내용을 명확히 하며, 노동조합 전체의 공동 요구로 정식화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 노동조합은 본질적으로 대중조직이다. 올바른 관점에서 보자면, 이를 수직적 통제 구조나 상명하달식 기제로 만들려는 시도는 전혀 정당화될 수 없다. 노동조합의 조직 기구는 대중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아니라, 대중의 흐름을 전달하는 통로여야 한다. 우리가 채택하는 조직 형태는 항상 조합원 대중과 지도 기구 간에 가장 넓고, 가장 빠르며, 가장 직접적인 접점을 보장할 수 있어야 한다.
- 반동적이고 억압적인 정부 정책 아래에서, 오늘날 노동조합이 벌이는 모든 갈등은 심각한 난관에 직면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현실을 객관적이고 현실적으로 분석해야 하며, 노동조합 대중에게도 그것을 명확하면서도 패배주의적이지 않게 제시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이 투쟁을 원한다면, 우리는 그 투쟁을 멈추게 해서는 안 되며, 끝까지 함께해야 한다. 우리는 이미 여러 차례 이 점을 분명히 해왔다. 가장 나쁜 패배는 싸우지 않고 당하는 패배다.
- 노동조합이 투쟁 과정에서 마주하는 장애물 앞에서 후퇴하려 하고, 내부적으로 전투성을 더 이상 불어넣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그 이유가 조직의 취약함 때문이든 현실적으로 극복할 수 없는 조건 때문이든, 우리는 무리하게 전진을 고집해서 고립된 상황을 자초해서는 안 된다. 이럴 때일수록 질서 있게, 적절한 시점을 선택해, 방향을 잃지 않고, 대중에게 항상 명확하고 솔직하게 설명하면서 물러날 수 있어야 한다. 존재하지 않는 승리를 꾸며내서는 안 된다.
- 대중 동원을 시작할지, 혹은 후퇴가 필요한지를 판단하려면, 조건과 가능성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 분석에서는 몇 가지 요소를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첫째는 노동조합 자체의 상황이다. 조직 수준, 의식화 정도, 투쟁 경험, 활동가의 확보 정도 등이 그것이다. 둘째는 전체 대중운동의 조건이다. 다른 부문에 영향을 미치거나 연대를 얻어낼 수 있는 가능성, 지도부와 조직 기구 내에서 우세한 정치적 경향 등을 분석해야 한다. 셋째는 해당 시기의 특수성이다. 투쟁의 고조나 후퇴 국면, 적대 세력의 상황과 가용 수단 등을 모두 파악해야 한다. 이러한 유형의 분석을 대중과 긴밀히 접촉하면서 수행할 수 있다면, 가장 어려운 조건에서도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
- 오늘날과 같은 시기에는, 개별 노동조합이 고립된 상태에서 벌이는 투쟁은 실패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우리는 모든 투쟁이 가능한 한 넓게 확장되고, 동시에 조합 내부에서 투쟁의 전통이 깊이 있게 뿌리내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조합 외부로의 확장은 운동의 외연을 넓히는 것이고, 내부로의 심화는 조합원 대중의 폭넓은 지지를 확보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적절한 조직 형태와 구조가 전제되어야 하며, 조합 전체의 구성원들이 가진 의견과 반응을 정확하고 충실하게 반영할 수 있는 기초 구조가 필요하다. 또한, 조합 간부들 사이에는 자유로운 토론과 비판이 최대한 보장되어야 하며, 이는 모든 의견이 제약 없이 표현될 수 있도록 만드는 핵심 조건이다.
- 노동조합 내부의 방향이 투쟁적으로 정립되었을 때, 개량주의자들은 전면에 나서기보다는 몸을 낮춘 채 조용히 상황을 관망한다. 그러다가 투쟁이 가장 힘겨운 국면에 접어들면, 그들은 후퇴와 항복이라는 선택지를 전략적으로 밀어붙이기 시작한다. 탄압이 거세지거나 승리가 더디게 다가올 경우, 그들은 ‘모험주의 반대’라는 익숙한 구호를 들고나온다. 그러나 이러한 인물들 가운데 상당수는, 대중 동원이 막 시작되어 고조되던 시점에야말로 ‘비현실적이고 감각적인’ 모험주의적 제안을 먼저 내놓았던 작자들이기도 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고립을 피하는 것은 핵심적인 과제 가운데 하나로 떠오른다. 투쟁적 성향이 가장 강한 투사들이 노동조합 내부에서 고립되지 않도록 하고, 동시에 노동조합 자체가 전체 대중운동으로부터 단절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를 실현하려면, 투쟁 의지가 분명한 모든 세력이 참여할 수 있는 안정적이고 실질적으로 기능하는, 폭넓고 비정파적인 조율 구조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 문제를 제기하는 순간, 우리는 자연스럽게 다른 문제들도 함께 검토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대중층위에서 우리의 과업을 실천하기 위한 조건 (2)
1969년 5월 26일, 몬테비데오
오늘날처럼 복잡한 정세 속에서, 노동조합과 대중운동 내에서 혁명적 투사들이 수행해야 할 과제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전국노동자협의회 제1차 정기 대의원대회 과정에서 취합된 경험을 참고하는 것이 유의미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당시 실천의 의미를 보다 분명하게 밝히기 위한 몇 가지 쟁점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이는 특히 오늘날 여러 가지 이해관계에 따라 의도적으로 조작되거나 평가절하되고 있는 측면들과 관련된다.
1.
전국노동자협의회 대의원대회는 노동운동과 대중운동이 지닌 잠재력의 크기를 다시 한 번 분명히 보여주었다.
반동세력의 공격과 그 과정에서 나타난 여러 편향, 주저, 배신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 운동은 여전히 중요한 잠재적 힘을 갖고 있다. 적절한 전략에 따라 이 힘을 조직하고 전개할 수만 있다면, 인민을 위한 실질적 전진을 이끌어낼 수 있다.
우리가 이 점을 분명히 인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아직은 조건이 안 된다”, “전선을 보존해야 한다”며 반동의 공격 앞에서 계속해서 후퇴만을 정당화하는 논리가 반복될 때, 우리는 이 같은 노동운동의 가능성과 힘을 다시 확인해야 한다.
노동계급 외부에서 ‘동맹’을 확보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될 때가 있다. 이와 함께, 이른바 ‘민족 부르주아지’에 과도한 정치적 중요성을 부여하고, 노동계급의 역할을 ‘국민전선’의 좌파로 제한하려는 시도도 나타난다. 또한, 우리 사회에서 노동조합 운동이 대중의 동원과 투쟁을 주도하는 위치에 설 수 있는가에 대한 회의적 시선이 거듭 제기된다. 이런 흐름이 존재할 때일수록 우리는 가용한 대중적 역량이 어느 정도인지를 객관적이고 현실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에만, 우리는 현재 조건 속에서 대중운동이 수행할 수 있는 역할과 수행할 수 없는 한계를 명확히 설정할 수 있다. 그리고 나아가, 이 조건에 적합한 방식으로 조직과 방법을 갖춘 특정한 정치조직의 과제 역시 분명하게 규정할 수 있다.
2.
둘째, 대회에서는 노동조합과 대중운동 내부에서 입장 정리가 점차 진행되고 있음이 드러났다. 주요 쟁점들에 대한 논의 과정에서 서로 상반된 두 가지 입장이 명확하게 드러났다. 첫 번째는 CNT 기구 내 다수 경향으로, 이번에도 자기만족적인 주관적 입장을 반복했고, 자기 비판에 끝내 실패했으며,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스스로의 개량주의적 경향을 방어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노선의 해악은, 분파적 편견에 눈이 가려 있지 않은 이들에게는 더 이상 숨겨지지 않는 수준에 이르렀다.
다른 한편, 또 하나의 경향이 예상하지 못한 규모로 등장하여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총 509명의 대의원 중 약 150명이 이 입장을 지지했으며, 이는 CNT의 방향과 활동 방식에 대한 근본적 변화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고 있음을 반영하고 있었다. 이들은 다양한 부문 출신이었지만, 공통적으로 한 가지를 반복해서 강조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보다 투쟁적이고, 지속적이며, 긴밀하게 조율된 공격적 실천이라는 것이다. 이는 CNT가 제시한 강령적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그리고 가장 시급하게는 정부가 강제한 임금·급여 동결 조치에 맞서기 위해 필요한 과제였다.
이러한 경향의 등장은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다. 이번 대회에 참석한 대의원들의 의지가 우연히 합쳐진 결과도 아니다. 이 경향은 CNT의 지도부와 집행 기구 수준에서는 여전히 과소대변되고 있지만, 조합 하부로부터 점점 더 넓게 확산되고 있는 공감대를 실질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이미 지난해 7월, 보안조치가 한창 적용되던 시기에도 여섯 개의 노동조합이 이러한 흐름을 표출한 바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조합 영역을 넘어선 폭넓은 부문들에서 나타난 분위기를 반영하며, 매우 구체적인 비판을 제기했고, 이에 근거하여 반동적 공세에 대응하기 위한 투쟁 계획안을 제안했다. 그러나 CNT의 지도부는 이 제안을 수용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내용을 조직적으로 은폐하거나 왜곡하려고 시도했다. 지도부는 이를 두고 “모험주의”, “유치함”이라 비난했다.
그 직후 대중 투쟁은 극도로 축소되었고, COPRIN 참여가 수용되었으며, 보안조치 해제가 ‘위대한 승리’라는 허위 주장까지 제기되었다. 당시의 개량주의적 집행부는 전투적 노선을 지지하던 세력들을 회유하고,, 그리고 그 노선을 지지한다고 말하면서도 우유부단하고 혼란스러웠던 주변 세력들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기준을 관철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노동조합 운동 내부에서 그들의 헤게모니가 얼마나 심각하게 도전받고 있는가가 명백해졌다.
오늘날, 공세적인 투쟁 계획의 수립과 직접행동 방식의 채택 필요성은 이론이 아니라 일상의 실천을 통해 제기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일정 수준 이상의 모든 노동조합 투쟁에서는 이러한 방식이 정상적 실천의 일부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탄압이 거세지고 조건이 악화되는 상황에서, 격렬한 투쟁 방식은 자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과거에는 “모험주의”라며 손쉽게 낙인찍혔던 실천이, 이제는 오히려 대중 동원의 일상적 수단이 되었다.
개량주의 집행부가 여전히 교조적으로 고수하는 관점과는 달리, 전투성과 실천 중심의 노선은 점점 더 많은 부문에서 힘을 얻고 있으며, 실제로 성장하고 있다. 이 성장은 개량주의 지도부가 대회 준비 과정과 본 대회에서 취한 각종 통제와 절차에도 불구하고 나타난 것이다.
3.
이번 대회는 충분한 준비 없이 진행되었다. 지난 1년 동안 이어졌던 긴 투쟁의 과정을 거쳐, 그 사이 상황이 크게 변화한 만큼, 기층 조합원들 사이에서 광범위한 토론이 필요했고, 그동안의 실천을 냉철히 평가할 수 있도록 솔직한 자기비판의 장이 마련되어야 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향후 과제를 설계하기 위한 실질적 결론을 도출했어야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 대회 준비는 결국 이전에 반복되어온 낡은 행정적 처리 방식으로 되돌아갔다. 관련 보고서들은 늦게 제출되었거나 아예 도착하지 않았고, 보고서에 대한 토론도 형식적으로만 진행되었으며, 실질적인 논의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반대 의견을 제기한 대표자들은 강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예전부터 반복되어온 방식 그대로, 이들의 주장은 근거 없는 모욕과 공격의 대상이 되었고, 정당한 비판은 묵살되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단결’이라는 외침은 짓밟혔다. 맹목적 추종을 거부하는 이들은 곧바로 ‘분열주의자’로 몰렸고, 낡은 전술들이 다시 동원되었다. 이 모든 것은, 기층의 실천을 조직하고 지도하는 데는 아무런 쓸모도 없는, 그러나 각종 기구와 자리를 장악하는 데에는 익숙한 경직된 관료적 지도부가 여전히 상층을 장악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대회가 노동계급의 실제 감정과 인식을 온전히 반영하지 못한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문제들을 지적하는 일은 분명 의미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관심을 온통 집어삼켜서는 안 된다. 결국 결정적인 쟁점은 한 가지다. 누가 다수파인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누가 실제로 투쟁을 조직하고 이끌고 있는가를 분명히 밝히는 일이다.
본질은 투쟁이다, 모든 우회로를 경계하라
1969년 6월 2일, 몬테비데오
국회가 다시금 유행이 되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행동, 회의 내 토론과 표결에 대중의 기대를 쏠리게 만들고자 갖은 홍보와 선전을 진행하고 있다. 방송 차량들은 실시간 중계를 통해 국회 회의 과정을 스포츠 중계처럼 흥분된 어조로 전달한다, 신문은 제목을 부풀려 호외를 터트리고, 라디오 방송은 넘쳐난다.. 한동안 정족수를 채우지 못해 보안조치 해제에 대한 논의조차 열지 못했던 국회가 이제는 국가의 중대사가 벌어지는 현장이라는 허상을 만들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 거리에 울려 퍼진 탄압의 총성에 침묵하고, 해고자와 징계자를 외면하며, 정부 정책에 공범으로 남아 있던 고액연봉의 ‘조국의 아버지’들은 다시금 조명을 받고자 한다. 그들은 주목받기를 원하고, 대중이 이 위선적인 연극무대에 다시 시선을 돌리길 바란다. COPRIN이 승인될 때는 모습을 감췄고, 해산의 위협 앞에서는 순순히 고개를 숙였던 이들이, 지금은 굽신거리며 ‘투표함의 심판’을 영웅적으로 받아들이겠다고 말하고 있다.
이 복잡하게 얽힌 정치적 책략이 실제로 새로운 선거로 이어질지는 아직 단언할 수 없다. 설령 일정이 확정된다 해도, 그것이 실제 시행될지, 그 결과가 존중받을 수 있을지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그러나 한 가지는 명백하다. 이 의회 소동이 겨냥하는 목적, 그리고 서로 정부의 반동적 정책을 지지해온 정치세력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 ‘갈등’이 어떤 선거를 만들어낼 것인가 하는 점이다. 선거가 실현되든 그렇지 않든, 이 사안을 둘러싼 접근 방식과 그에 쏟아지는 무게감은 분명 상징적이다. 언론이 전방위적으로 퍼뜨리는 선거 중심의 선전 캠페인은, 이들이 얼마나 철저히 ‘주인의 명령’에 복종하고 있는가를 스스로 드러낸다.
이 모든 흐름은 최근 일관되게 전개되어온 국가의 탄압 정책을 보완하고 있다. 먼저 구타와 탄압을 자행하고, 그 뒤에 선거가 이어지는 구조가 형성되고 있다. 임금과 급여가 동결된 현실에는 정치가 유동적이고 활기차다는 착시가 덧씌워지고, 민중의 열악한 생활 조건을 개선할 가능성은 차단된 채, 선거라는 허상이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다. 정부의 경제정책이 초래한 사회적 긴장은, 또 하나의 희극으로 포장된 선거국면으로 인위적으로 흘러가고 있다. 실제 조건은 악화되고 있으며, 반동 정치의 냉혹한 실상은 더욱 뚜렷해지고 있지만, 그 위에는 국회의 변화라는 공허한 기대만이 붙어 있다.
지금 이 순간, 지배계급은 투쟁이 아닌 투표를 해법으로 다시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 메시지는 그들의 정치 대리인을 통해 민중에게 전달되고 있다.
반공파 대 공산당, 에체고옌 대 파체코, 호르헤 바예 대 에체고옌, ‘야당’ 대 ‘여당’, 현행 헌법 대 헌법 개정. 정치판은 온갖 대립 구도를 흩뿌리며 선택지를 풍부하게 보이게 만들고 있지만, 실상은 그 모든 이름 뒤에 언제나 동일한 지배계급이 권력을 유지한다는 점이다. 파체코든 에체고옌이든, 바예든 갈리날이든 누구를 내세우든 마찬가지이며, 그 정치극은 대중에게 다시 한 번 믿음을 심어주고, 다시 한 번 스스로를 속이게 만들며, 이번에는 뭔가를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부풀리는 장치로 기능한다. 그러나 이들의 계획이 틀어질 경우, 그들은 언제든 기만의 무대를 접고 다시금 폭력에 호소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선거가 실패하면 판 자체를 걷어차는 선택지를 예비하고 있다.
새로운 선거가 가져올 수 있는 유일한 변화란, 정부 내부에서 서로 다른 과두 세력들이 점유하는 영향력의 분배 비율이 재조정되는 것뿐이다. 그들은 모두 현재 추진 중인 반동적 정책을 지속하는 데 동의하고 있으며, 문제는 그 정책을 통해 각 세력이 얼마만큼의 몫을 챙길 것인가에 있다. 이들이 민중에게서 얼마나 수탈할 것인지, 그리고 그 전리품이 대지주와 금융자본, 재벌, 투기 세력 사이에 어떤 방식으로 배분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 외에, 의회 ‘쇄신’이라는 이름으로 달라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민중이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변화는 선거를 통해 실현되지 않는다. 그런 변화는 오직 길고도 고된 투쟁을 통해서만 만들어질 수 있으며, 그 투쟁은 반동세력이 조장하는 유토피아적 선거 환상주의의 경로와는 전혀 교차하지 않는 다른 길을 따라야 한다. 이 점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언제나 이를 알지 못하는 척하는 자들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정치적 움직임 속에서 함께 추진되고 있는 몇 가지 부차적 목적들을 짚어두는 일은 여전히 유용하다.
우선 첫 번째 목적은, 체제 내에서, 평화적이고 비폭력적인 수단을 통해 중대한 변화를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을 다시 불러일으키려는 것이다. 그들은 지금 민중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느끼고 있다. 또한 투쟁이 더욱 격화되고 직접행동의 방식이 대중 속에 확산되고 있으며, 혁명 세력의 영향력과 위신이 강화되고 있다는 점에 불안을 느끼고 있다. 그들은 노동자 민중운동 내부에서 개량주의적 경향이 후퇴하고 있다는 점을 목도하고 있고, 자신들의 정치에 대한 저항이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체제 유지를 더욱 위태롭게 만드는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음을 감지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여전히 이 체제가 ‘개선 가능하다’고 믿게 만들려 한다. 평화로운 방식으로 나아갈 길이 열려 있고, 싸움이 아니라 투표를 통해 변화가 가능하다는 이미지를 심으려 한다. 그러나 바로 그들이 이처럼 거듭 강조할수록, 그들이 제시하는 노선이 실제로는 얼마나 무력한지를 스스로 인식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체제가 더 이상 실질적인 개혁을 제공할 능력을 상실했기에, 대중의 불만을 엉뚱한 방향으로 돌릴 필요성은 점점 더 절박해지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시점에서, 민중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없는 조건과 얽혀 있는 지배계급은, 현실에서 탄압함과 동시에 선거라는 기만을 존치하려 한다. 이제 그들이 말하는 ‘투표 가능성’은, 실질적인 개혁이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가리는 가장 가까운 대체물로 등장하고 있다.
선거는 과두지배 세력의 정치 대표자들이 대중과 접촉하고, 영향력을 회복하며, 스스로를 인민의 ‘대표자’로 가장하는 기제다. 국회의원들과 정치인 전반에 대한 불신과 혐오는 이미 폭넓게 퍼져 있으며, 기존처럼 일자리를 나눠주거나 특혜를 배분해가며 정치적 ‘고객’을 유지하는 방식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지금, 정당 조직 기구들은 점차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전에는 지역 클럽이나 파벌 수장들이 ‘무언가를 시혜할 수 있는 존재’였지만, 이들이 내줄 수 있는 것은 점점 줄어드는 반면 민중의 절박한 필요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그들은 정당의 존재감과 정치적 무게를 회복하기 위한 명분으로 ‘정치 생활의 재활성화’를 추진하고자 한다. 그 수단이 되는 것이 바로 선거운동이다. 선거를 통해 이들은 ‘쇄신’과 ‘변화’에 대한 기대를 조장하고, 대규모 선전을 통해 여전히 감정적으로 유효한 낡은 상징들을 동원함으로써 대중의 기억과 정서를 자극하려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은 반동세력의 이해관계에서 볼 때 결코 부차적이지 않은 또 하나의 목적을 수행하게 된다.
그것은 실질적인 요구나 해결을 중심으로 조직하여야 할 인민을 결론조차 명확하지 않은 선거판의 허구적인 대결 속에 가두고 분열시키는 일이다. 투쟁 속에서 사람들은 구체적인 이유로 함께 뭉친다. 하지만 선거 속에서 그들은 추상적인 구호와 실체 없는 환상에 따라 분열한다.
지배계급은 결코 분열하지 않는다. 정당이나 계파가 달라도, 민중에 맞서는 일에서는 늘 하나다. 내부 갈등이 있어도 자신들의 이익을 함께 지키는 데는 단 한순간도 흔들리지 않고 스스로를 기만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선거가 민중의 의사를 표현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한다. 최소한 그들이 다수를 유지하는 동안에는 말이다.
결국 우리가 혼란을 조장하고 민중을 선거라는 막다른 길로 유도하려는 모든 기획에 대응할 방향은 단 하나뿐이다. 투쟁을 확대하고, 그 뿌리를 더 깊게 내리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당장 임금 동결 정책을 깨뜨리기 위한 공동 투쟁을 만들고, 투쟁하는 노동조합을 더 넓은 연대로 지지하며, 전면적이고 강고하게 대중을 동원해야 한다. 이후 있을지도 모를 '평화적인' 선거를 위해 투쟁을 유보하거나 속도를 늦추려는 모든 시도를 거부하고, 노동조합과 민중운동을 선거적 이해관계에 종속시키려는 경향과 맞서야 한다. 오늘도, 내일도, 언제나 현실을 바꾸는 힘은 조직된 투쟁뿐이며,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대중층위에서 우리의 과업을 실천하기 위한 조건 (3)
1969년 6월 9일, 몬테비데오
최근 며칠 동안 발생한 사건은, 인민이 지닌 거대한 전투력과 저항 의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동시에, 제국주의 체제가 라틴아메리카 각국 정부를 통해 추진한 반동적 정책이 실패하고 있음을 명확히 드러냈다. 지배계급은 사회를 “평온하게 만든다”는 명목으로 탄압적 정책을 시행했지만, 이러한 방식은 효력을 잃었다. 가까운 사례로 아르헨티나를 보라. 아르헨티나의 프롤레타리아트와 학생들은 수년간의 잔혹한 독재에도 불구하고, 오가니아가 도입했고 호르헤 바예와 파체코가 찬탄했던 탄압 “모델”로는 인민을 지배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가장 설득력 있게 입증했다.
우리 나라에서도 노동자와 학생들의 투쟁이 확대되고 있다. 이러한 대중적 동원은 록펠러 사절단이 주장하는 “성과”에 가장 어두운 전망을 드리우며, 정부가 추진하는 반동적 정책에 대해 가장 명확한 심판을 내리고 있다.
한편, 검약과 희생을 내세운 시민적 모범을 과시하려 했던 시도는 의회 안에서 하나의 희극으로 전락했다. 호르헤 바예는 대중이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했고, 선거가 에체고옌과 파체코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가능성에 내몰렸다. 그는 “정부를 지지한다”고 말하면서도 유럽에 앉아 페이라노에 대한 탄핵을 지시했다. 정부는 의도적으로 페이라노를 대중적 분노를 흡수하는 일종의 피뢰침으로 만들어 두었는데, 그가 정부와 거리를 두는 행위는 또 하나의 “완화” 시도로 기능할 뿐이다. 페이라노가 각료직에서 물러난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졌는가. 혹은 무엇이라도 달라질 것인가. 정부 스스로가 내놓은 논리와 발언은 오히려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정부가 취해 온 반동적 경제 노선이 바뀔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 노선을 규정하는 원인은 매우 강력하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그 근본적 이유는 국외에 있다.
한편, 이 의도적으로 연출된 정치적 위기를 조장한 자들이야말로 이른바 “경제적 안전조치”를 회피한 자들이다. 그들은 현재 추진 중인 정책 전반에 대해 기본적 동의를 표명하는 자들과 동일하다. 사실상, 모든 어려운 정세에서 그러하듯이 과두지배의 각 분파는 상호 간에 부차적 모순을 유지하면서도, 핵심적 목표에 대해서는 보조를 맞춘다. 그렇기 때문에 대중의 시선을 의회에 집중시키고, 인민이 필요로 하는 근본적 변화가 그곳에서 나올 수 있다는 기대를 직간접적으로 부추기는 행위는 매우 해롭다. 그 변화는 오직 투쟁을 통해서만 성취할 수 있다. 그 투쟁은 여러 층위를 지니며, 각 층위는 서로를 보완하면서 유기적으로 결합해야 한다.
노동조합의 투쟁과 대중의 활동은 그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는 정부의 반동적 노선에 맞서 계획적이고 공세적이며 심층적인 행동을 시급히 조직해야 하는 현재의 정세 속에서, 이 문제를 다시 제기하고자 한다.
노동운동과 인민운동이 수립해야 할 전략과 관련하여, 여전히 충분히 해명해야 할 쟁점과 과제가 남아 있다.
그 과제 몇개를 확인해보도록 하자.
최근 수년간의 경험은 하나의 고립된 노동조합이 아무리 강력하더라도, 현 정세의 틀 안에서는 성과를 거두기 어렵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드러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노동자들은 사전에 협의된 총투쟁의 필요성을 분명하게 인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은 이러한 협의를 실행하지 못하거나, 극히 불완전한 수준에서만 수행하고 있다.
왜 그렇게 된 것인가?
실질적인 장애물과 인공적인 장애물 모두가 있다. 그리고 인공적인 장애를 만들어내는 자들은 실질적 장애물들을 핑계로 들어 자신의 태도를 정당화하곤 한다.
각각의 장애물들을 분석해보자.
- 체제가 각 노동조합들에 적용한 서로 다른 임금과 처우는 노동조합간 서로 상이한 요구들을 불러일으켰다. 이 현상 자체는 특별히 새로운 것이 아니다. 모든 노동조합 운동은 초기에 대체로 이러한 경로를 따른다. 노동자들은 즉각적이고 국지적인 목표에 더 큰 가치를 두며, 각 노동조합의 개별적 요구를 우선적으로 고려한다.
- 그러나 이것이 노동조합 투쟁에 있어 자연스럽고 영구적이며 불변하는 속성으로 간주한다면 그것은 오류이다. 이러한 노동 통제의 방식은 경제가 팽창 국면에 있고, 번영하는 부르주아지로부터 양보를 이끌어내는 일이 그다지 어렵지 않을 때에만 가능하다. 정세가 변화하면 노동자들은 다른 방식으로 대응해야 한다. 노동자들은 보다 복합적인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그러므로 노동조합 투사들은 더 높은 성숙도와 창의성, 유연성을 갖추어야 한다. 동시에 그들은 더 강한 단호함과 전투성을 발휘해야 한다. 일부가 주장하듯이 이러한 조건은 앞서 말한 요소들과 모순되지 않는다.
- 우리 나라에서 임금위원회 제도는 노동조합의 분절적 경향을 제도적으로 고착시키고 강화했다. 각 산업부문은 각각의 위원회를 소집을 요구했고, 사용자와 정부가 해당 부문의 요구를 수용하도록 압박했다. 노동자들은 서로 다른 요구를 놓고 각기 다른 속도로 교섭하거나 투쟁했다.아마 이 투쟁들을 통합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정세가 투쟁의 분열을 촉발했음은 분명하다.
- 반복된 관행 이러한 분산과 실질적 고립주의를 가장 일반적인 관습으로 굳혀 놓았다. 많은 경우에 노동자들은 파업과 동원, 심지어 총파업까지 동시에 전개했지만, 그들 사이에는 실질적인 조정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은 동일한 노동조합에 속한 여러 산별 사이에서도 발생했다. 조직 차원의 형식적 조정은 있었지만, 행동을 결합하는 실천적 조정은 결여되었다. 우리가 말하는 실천적 조정은 서로 성명서나 선언을 써주거나, 대표단 파견, 행사 개최, 부분적 연대파업을 의미하지 않는다. 노동자들은 이러한 조치를 자주 실행해 왔고, 지금도 실행한다. 그러한 조치는 정당하며 계속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 정세에서는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가 이해하는 조정이란, 어느 한 노동조합에서 발생한 쟁점을 해결하도록 강제할 수 있는 구체적 연대 조치를 모든 노동조합이 공동으로 채택하는 것을 뜻한다.
- 고립된 투쟁의 접근 방식은 그동안 취해온 다소 자생적인 형태와 맞물려 있다. 물론 요구 투쟁에 접근할 때에는 해당 노동조합이 절감하는 열망만을 배타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조합원 대중이 공유하지 않는 목표를 강제로 상정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으며, 인위적으로 대규모 동원을 유발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요구 사항의 '자생적' 기원을 말할 수 있다.
- 대중의 전투성이 자생적으로 고양되는 것은 모든 혁명 과정의 중요한 요소이며, 이러한 추동력을 억누르거나 방해한다고 해서 투쟁이 급진화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자생성'에 대해 비판하고자 하는 지점은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에서 자생적 충동을 적절히 통로화하여, 그것이 가장 효과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도록 조직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핵심적이라고 확신한다. 이를 위해, 가장 적절한 시점에 최대의 힘을 집중하여 타격을 가하려면 반드시 예측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는 곧 자생적 단계를 넘어 스스로를 조직하는 것을 의미하며, 정세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를 바탕으로 단계별 목표, 작업 기준, 공동 조치를 설정하는 투쟁 계획을 수립하는 것을 뜻한다. 또한 이는 사건이 발생한 뒤에 뒤쫓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건을 주도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실질적인 지도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함의한다.
대중층위에서 우리의 과업을 실천하기 위한 조건 (4)
1969년 6월 16일, 몬테비데
노동자 민중 운동 내에서 정부의 반동적 정책에 맞서 더욱 단호하게 대결하려는, 보다 전투적인 정향을 관철시키려는 경향이 점증하고 있음은 명확하다.
우선 우루과이금융노동조합(AEBU) 선거 제19선거구에서의 중요한 진전이 있다. 다음으로는 전국노동자협의회(CNT) 대회에서 전투적 노선을 중심으로 가치 있는 핵심 역량이 결집했다. 그리고 최근에는 푼사(FUNSA) 노동조합과 몬테비데오 중등교사 조합과 같이 상이한 성격의 조직들에서도 동일한 정향이 그 타당성을 높여가고 있다.
우리는 푼사 노조의 내부 선거에 관하여 이아기하자면, 이는 의심할 여지 없이 푼사의 노동자, 사무직, 관리자 노동조합이 수년간 견지해 온 노선에 대한 최종적인 확증이며, 이 조직이 전국 노동운동 내에서 선도적 위치를 차지하는 데 기여했다.
매우 다른 특성을 지닌 조직인 몬테비데오 교수 연합(Gremial de Profesores de Montevideo)은 비교적 최근에 형성된 단체로, 68번 명단을 통해 선거에 처음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광범위한 지지를 얻어 집행위원회 15석 중 6석을 차지했다.
이러한 사실들은 CNT 집행부가 견지해 온 개량주의 노선이 점차 신뢰를 잃고 있음을 반영한다. 이는 노동자·학생 저항 세력을 결속시키는 경향이 다양한 노동조합 계층에서 강화되고 있음을 증명한다. 노동조합 기층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이러한 징후들은, 전투적 입장과 대중적 지지의 결여 혹은 '모험주의'를 연결 짓는 이들의 논리가 잘못되었음을 보여준다. 퇴행을 정당화하는 이론을 퍼뜨리는 자들은 대중이 획득한 의식의 수준과 전투성을 과소평가하고 있다. 최근의 투쟁을 거치며 대중적 전투성과 의식 수준이 광범위하게 발전했다는 사실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민중의 저항을 꺾으려는 탄압의 실패를 의미하는 이러한 결론을 도출하는 것은, 보안조치가 시행된 지 정확히 1년이 되는 지금 시점에서 특히 중요하다.
우리가 수행해야 할 주요 과제는 동원되고 있는 거대한 역량을 조직적으로 다루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위해 이들을 결집시켜 노동자 및 민중 운동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강력한 경향을 형성하여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몇 가지 사항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 노동조합 내에서 우호적인 여론을 형성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이를 조직적으로 구현해야 한다. 가능성이 있는 모든 노동조합에서 명확한 투쟁과 대결의 노선을 유지하고자 하는 모든 이들을 결속시키는 집합체를 창설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 여기서 '집합체'라 함은 단순히 유사한 입장을 가진 동료들 간의 일시적인 모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노동조합 선거에서의 명부 제출이나 그와 같은 배타적인 목적만을 위해 구성된 집단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우리가 말하는 그룹은 독자적인 실천 수단을 갖추고 상시적인 활동을 전개하는, 안정적이고 체계적인 구조를 갖춘 조직을 의미한다. 이는 노동조합의 정향에 영향을 미치는 동시에, 동일한 경향을 가진 다른 그룹들과 조정하며 독자적인 행동을 전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 그룹 내에서는 종파주의 없이 폭넓게 행동해야 하지만, 명확하고 정밀한 입장을 토대로 해야 한다. 경향 그룹은 항상 전투적 종파주의나 입장의 불명확성이라는 두 가지 위험에 직면하며, 이는 결국 활동을 제약하게 된다.
- 고립을 초래하는 종파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종파적 태도는 대개 노동조합 내의 경향 그룹에 특정한 정치조직의 과업을 부여하려는 잘못된 접근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오류로 인해 그룹에 광범위하고 소모적인 정치적 정의를 요구하게 되며, 때로는 정치적 이데올로기 수준의 정의를 강요하기도 한다. 사실상 이들은 일종의 지역적 '미세 정당'으로 변질된다. 이러한 오류에 빠지는 경향은 주로 자신의 정치적 관심을 특정 조직 내에서 적절히 해소하지 못하는 독립적인 개인들 사이에서 관찰되며, 이들은 경제적 투쟁 그룹을 파르티잔화하려 시도한다.
그리고 이는 다음의 지점으로 이어진다.
대중층위에서 우리의 과업을 실천하기 위한 조건 (5)
1969년 6월 23일, 몬테비데
지난 서한에서 우리는 경향 그룹 내에 과도한 수준의 정의를 도입하여 노동조합 내부의 '작은 정당'처럼 만듦으로써 발생하는 위험을 언급했다. 이러한 방식은 조직을 급격히 종파화하고 폐쇄적으로 만들며, 이는 대중 조직보다 더 명확한 의제를 바탕으로 광범위한 대중적 접촉을 확보하려는 본래의 목적을 가로막는다.
반면, 마비를 초래하는 불명확성 또한 피해야 한다. 앞서 언급한 것과 반대되는 오류는 그룹의 목표를 충분히 명확하게 설정할 필요성을 과소평가 함으로써 발생한다. 원칙이나 한계가 너무 모호하여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이 되면, 그룹은 경향으로서의 정체성과 정밀한 정의를 상실하고 활동하는 노동조합과 완전히 동일시된다. 이러한 기준은 그룹을 지나치게 이질적 분자들의 결합으로 만들어 집행력을 떨어뜨린다. 모든 입장 채택에 끝없는 내부 토론이 필요하게 되고, 지속적인 실천 과정에서 잠재적 이견이 표면화되어 분열과 와해, 실패의 조건이 형성된다.
조직은 특정 목표를 향한 투쟁을 전개하기 위한 수단이자 도구이다. 조직은 그 목적을 달성하는 정도에 따라, 그리고 그 기능이 목적에 부합하는 정도에 따라 성장한다. 따라서 조직적 성장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것은 잘못이다. 조직적 기준의 적용에만 매몰된 동료들은 종종 이러한 결정적인 측면을 예측하지 못한 채 그룹 창설을 추진하곤 한다. 명확한 목표가 없으면 조직은 기능을 상실하고, 존재의 목적이 흐려지며 대중과의 접촉을 잃게 된다. 대중은 구체적인 목표를 위해 구체적인 행동을 추진하는 이들만을 지지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회의가 열리고 그룹이 결성되며 조직적으로 도구화되어 특정 목표(선거 참여, 동원 활동 등)를 위해 작업이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일단 그 과정이 끝나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 발생한다. 회의는 활력을 잃고 끝없는 일반론적 토론으로 흐른다. 그룹은 목표를 잃고 '할 일'이 없는 상태에 빠진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면 필연적으로 무력함과 실패로 귀결된다. 그룹의 규모가 아무리 크고 잘 조직되어 있더라도, 단순히 그룹으로 존재하거나 노동조합 내에서 어떤 직위를 차지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목표가 없고 그것을 위해 능동적으로 싸우지 않는다면 절망적으로 실패할 것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작은 그룹이라도 목표를 적절히 선택하고 열정적으로 투쟁을 추진한다면 성장할 것이다. 싸우고자 하는 이들(현재 상황에서는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은 그곳으로 모일 것이며, 그룹을 구성하는 동지들이 노동조합 내에서 당장 지도부가 아니더라도 그들을 실질적인 지도자로 인정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중요한 지도적 기능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말하는 목표란 무엇인가? 현재 투쟁이 전개되고 있는 단계와 수준에서, 경향 그룹의 목표는 대개 노동조합적인 요구 사항들이 될 것이다. 우리는 이미 채택해야 할 요구 사항들이 조합원 대중이 느끼는 시급함의 정도에 의해 정의된다고 밝힌 바 있다. 이 문제에 있어 '자의적인 발상'이 끼어들 자리는 없다. 오직 인민이 실제로 절감하는 요구만이 채택될 것이다. 그러나 경향 그룹의 기능은 자신이 활동하는 노동조합 조직이 그러한 요구 사항들을 일반적인 경제적 행동의 목표로 삼도록 만드는 것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러한 그룹은 (모두에게 열려 있는) 일반 노동조합 조직보다 높은 수준의 정치적 합의를 체현하는 만큼, 요구 사항에 대해서도 독자적인 접근 방식을 가져야 한다. 그룹의 기능은 노동조합 내에서 투쟁을 이끄는 것이며, 따라서 그룹 고유의 접근 방식은 노동조합 조직의 제한된 접근 방식을 넘어서야 한다.
모든 구체적인 요구는 보다 일반적인 문제들이 국지적으로 나타난 부분적인 현상이다. 예를 들어 임금 요구의 경우, 그것들이 모두 정부의 일반 정책과 충돌한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요구 투쟁을 활용하여 대중 수준에서 이러한 정책의 이유와 특성을 명확히 짚어내는 것은 때때로 일반적인 조합주의적 틀 내에서는 수행하기 어려운 과업이다. 그러한 경우에 그룹은 독자적으로 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정치적 이해와 의식의 일반적 수준이 발전함에 따라, 이러한 유형의 관계 설정과 의미 부여는 이미 노동조합의 공유 자산이 된 경우가 많다. 그러한 경우에는 대중 수준에서 더욱 명확한 접근, 즉 더 높은 정치적 수준의 접근을 시도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요약하자면, 다음 세 가지를 놓치지 않는 것이 핵심이다.
- 경향으로서 그룹을 규정하는 것은 노동조합 전체 내에서 스스로를 명확히 차별화하고 고유한 프로필을 부여하는 정치적 입장과 접근 방식이다. 이것이 바로 모든 이가 참여하고 총회나 선거 등의 정황적 다수에 따라 입장이 변할 수 있는 일반 노동조합 조직과 (내용, 목적, 구조 면에서) 구별되는 이유다.
- 그룹 내에서의 정의 수준은 현재로서는 이른바 특정 정치적 '파벌' 그룹과 완전히 동일시되지 않을 정도로 충분히 넓어야 한다.
- 일정한 정치적 정의를 갖는다는 것이 요구 사항과 관련된 문제들을 무시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룹의 작업에는 항상 구체적인 목표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목표들은 가능한 한 노동조합 내에서 추진해야 할 요구 사항들을 포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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