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파주의(Sectarianism)는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운동, 조직, 집단과 다른 입장, 의견, 이념, 실천에 대한 불관용을 말한다.
이는 대개 오만, 허영, 기회주의와 결합되어 나타나며, 결국 사회 변혁을 위한 투쟁보다 앞서게 되는 태도로 자리잡게 된다. 실천적으로 종파주의는 다른 주체를 부정하고 끊임없이 비난함으로써 갈등을 조장하는 정치를 지향한다. 그 결과, 집단적 합의와 동지적 논의는 뒷전으로 밀려나게 된다.
이러한 종파주의가 좌파 내부에서 나타날 경우, 그 해악은 더욱 크다. 계급의 적에 맞선 공동 투쟁이, 융통성 없는 교조주의적 세계관과 매력을 상실한 전위주의적 태도에 의해 약화되며, 결국 혁명적 대의에 동참할 수 있는 이들을 끌어들이기는커녕 오히려 겁먹게 만들고 밀어낸다. 종파주의자는 노동자들의 계급의 적보다, 다른 정치 그룹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더 큰 관심을 둔다.
좌파 내에는 정치적, 이념적, 전략적 차이가 존재한다. 그러나 어떠한 사회운동이나 이념도 사회 변혁의 과정에서 홀로 전진할 수 없다. 윤리를 지키면서도, 원칙과 전략적 프로그램을 포기하지 않고, 공통된 요구와 지점을 중심으로 집단적 합의를 추구하며 동맹을 구축하고 조직을 형성하는 능력이야말로 투쟁의 일부이다. 이는 대중을 강화하고, 궁극적으로 혁명적 목표를 달성하는 데 기여한다.
정치적 차이를 존중하며 노동계급의 힘을 지속적으로 강화하고자 하는 윤리적인 정치 실천은, 해방을 지향하는 제안과 권위주의적 과정, 민주주의적 목표와 강압적 방식의 차이를 가르는 핵심이다. 비공식적 조직 문화나 구조화되지 않은 느슨한 집단의 실천 또한 대중 권력을 향한 길에서 장애물이 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방식은 또 다른 형태의 전위주의, 즉 "숨겨진 지도"를 재생산하며, 집단적 실천을 위한 공간을 약화시키기 때문이다.
억압 관계는 우리 내부에도 존재할 수 있으며, 반드시 주의 깊게 직시하고 투쟁해야 한다. 대중의 삶의 현실과 소통하지 않은 채, 정해진 사상과 행동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모든 형태의 교조적 세뇌는 피해야 한다. 대중 권력을 건설하는 과정은, 모든 것을 알고, 대중을 대변하여 말하며 대중을 가르치는 전위가 무지하고, 듣고, 배우고, 복종하는 대중을 이끄는 권위주의적 방식이나 세뇌를 통해 이뤄질 수 없다.
대중이 자신들의 힘과 투쟁 능력을 일깨우는 것은 미사여구를 통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풀뿌리 조직화, 파업, 거리 시위, 공동체 활동 등 대중이 직접 참여하고 행동하는 구체적이고 효과적인 실천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다시 말해, 대중 권력을 축적해내는 집단적 실천의 과정 속에서만 가능하다. 마찬가지로, 대중적인 구호나 수사학만으로는 민중의 요구를 세상에 알릴 수 없다. 오히려, 조직된 민중이 일상의 삶 속에서 직접 정치적으로 참여하는 것, 현실을 포용하고 그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이론에 바탕을 둔 실천 속에서만 가능하다.
이는 “이상화”나 “이념화,” 비현실적인 “최대 강령”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일상과 현실과 끊임없이 대화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현실의 요구와 실천의 조건에 비례하는 목표를 설정하고, 최소 강령과 구체적 행동계획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가장 “혁명적인” 대의를 내세운다 해도, 조직화 과정을 인위적으로 가속화하려는 모든 욕망은 위험한 불균형과 뒤가 없는 급진성만을 낳는다. 이는 대중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보다 자신이 더 옳고 앞서 있다고 믿는 태도이다. 우리는 이미 “역량을 넘는 무리수는 두지 말라”는 교훈을 알고 있다. 이런 태도는 현실에 이념적 관점을 위에서 아래로 투사하여,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며 대중에게 자신이 바라는 행위를 강요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이 과정에는 흔히 “투사의 순교”나 “혁명적 이론의 권위”를 찬양하며 정치적 전위의 권위를 강화하려는 시도가 동반된다.
또 다른 흔한 종파주의적 실천은, 현실과 유리되었거나 집단적으로 구성되지 않은 행동을 일방적으로 감행하고, 이에 참여하지 않는 이들을 “개량주의자” 따위로 몰아붙이는 행위이다. 결국 이런 실천은 민중의 투쟁을 강화하기보다는 정치적 전위를 강화하는 데 목적이 있을 뿐이다. 집단적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외부의 지침을 강요하며 “급진화”를 억지로 밀어붙이는 권위주의적 실천은 오히려 역효과를 초래하며, 운동을 후퇴시킬 수 있다. 이처럼 겉으로는 “혁명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대중에 대한 감수성이 부족한, 그들과 함께 걷고자 하지 않음을 드러내는 것은 그 자체로 반동적 행위다.
이는 또한 정세의 가능성과 투쟁의 구체적 조건을 올바르게 분석하지 못하는 오만함으로 이어진다. 항상 민중을 교조적으로 ‘밀어붙이려’ 하는 태도는 책임 없는 행동이며, 이는 오히려 덜 학습된 계층의 손실을 초래할 수 있다. 발걸음을 억지로 내딛게 만드는 것은 종파주의와 대중 분열로 이어질 뿐이다. 혁명적 행동은 “급진적 외양”으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그 행동이 추구하는 목적과 그것을 구성하고 이끄는 방식으로 판단되어야 한다. 민중이 한순간에 정치 과정에 즉각적으로 헌신하길 바라는 것은 기초부터 차근차근 쌓아 올린 대중 조직화의 성과를 낭비하는 것이다.
“한 사람과 천 걸음을 가는 것보다, 천 사람과 한 걸음을 가는 것이 낫다.”
진정한 대중 권력의 형성과정은 ‘겸손함’에서 시작된다. 왜냐하면 아래로부터의 투쟁은 작고 구체적인 삶의 문제들과, 그 해결 가능성으로부터 자라나기 때문이다. 이때 모든 실천은 대중이 능동적 주체로서 직접 받아들이고 수행해야만 의미가 있다. 정치 조직의 위치는 앞도 아니고 뒤도 아니다. 그것들은 대중으로부터 형성된 존재들이기에, 대중의 한가운데에서 선동하고, 정책과 조직화를 제안하며, 투쟁을 함께 전진시켜야 한다.
이것은 일상 속에서, 시위나 대중 동원 등의 순간마다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민중 행동의 살아 있는 역동성에 대한 깊은 감수성과 존중을 요구한다.
우리는 사회 변혁을 위한 투쟁의 의지를 가져야 한다! 그러나 그 의지를 어떻게 실천하고 어떤 일상적 정치 실천으로 구체화하는가가 바로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새로운 세계의 성격을 결정짓는 핵심 요소이다.
민중의 길을 더 효과적이고 일관되게 가속할 수 있는 다른 방법들도 존재한다.
예컨대,
- 정세 분석,
- 조직화의 촉진,
- 내부 조직의 진전,
- 다른 집단 및 경험들과의 연대적 접촉,
- 정치적 (자기)교육의 장려,
- 대중의 직접적 참여와 존중을 바탕으로 한 윤리적 사회·정치 환경의 구성 등이 그것이다.
이 모두는 직접행동, 자율관리, 윤리, 상호부조, 계급투쟁과 같은 민중적 원칙들을 담고 있는 방법과 실천들이다. 이러한 가치들은 대중 권력과 사회 변혁의 과정 전반에 반드시 내재되어야 할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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