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농민의 10월
1917년, 노동자와 농민은 혁명에서 승리했다. 그리고 볼셰비키의 공식적인 입장은 이를 ‘10월 혁명’이라 불렀다. 이 명칭은 일정 부분 사실에 부합하지만, 혁명의 전 과정을 온전히 설명하지는 못한다. 1917년 10월, 러시아의 노동자와 농민은 혁명 전진을 가로막던 거대한 장애물을 돌파하여 자본가 계급의 형식적 권력을 무너뜨렸다. 그러나 그 시점에 이르기 훨씬 전부터, 그들은 결코 그에 못지않고 어쩌면 더 근본적인 혁명적 성과를 이미 쌓아 올리고 있었다. 도시노동계급은 자본가 계급으로부터 경제적 권력을 탈취하여 자유롭고 제약 없는 노동의 권리를 확보했고, 비록 공장 전체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행사한 것은 아니더라도 그 운영은 실질적으로 장악했다. 농촌에서는 대토지 소유자의 땅을 몰수했다. 이와 같이, 노동자들은 10월 이전에 이미 자본주의의 토대를 철저히 파괴하고, 그 위에 남아 있던 것은 상부구조뿐이었다.
만약 노동자들이 자본을 전면적으로 몰수하여 부르주아 국가기구를 파괴하지 않았다면, 정치혁명은 그토록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을 것이며 심지어 성공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았다면 자본 소유자들의 저항은 훨씬 더 거세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10월에 이루어진 사회혁명의 목표는 단순히 자본주의를 전복하는 것이 아니었다. 당시 노동자들 앞에는 사회적 자주관리와 사회주의적 재건이라는, 장기간의 실천 경험을 쌓아야 하는 과제가 놓여 있었다. 비록 이러한 전망은 이후 수년간 급격히 위축되었지만 말이다. 따라서 10월은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의 여러 단계 중 하나였을 뿐이며, 물론 매우 힘있고 결정적인 중요한 국면이었지만 혁명 전체를 대변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10월만으로는 사회혁명의 전모를 담아낼 수 없다. 우리는 10월의 승리한 날들을 떠올릴 때, 러시아 사회혁명을 규정했던 구체적 역사적 조건들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또 하나의 중요한 지점은 ‘10월’이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는 점이다. 하나는 사회혁명에 참여한 노동 대중과 그들과 함께한 아나키즘적 공산주의자가 이해한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혁명에 대한 열망을 발판으로 권력을 장악한, 무력을 동원해 그 혁명과 그 이후의 모든 전개를 배반하고 질식시킨 정치 정당이 부여한 의미이다.
이 두 해석 사이에는 거대한 간극이 존재한다. 노동자와 농민에게 ‘10월’은 평등과 자주관리의 이름으로 자본가계급의 권력을 종식한 사건을 뜻한다. 반면 볼셰비키에게 ‘10월’은 혁명적 지식인 정당이 권력을 장악하고, 대중을 지배하기 위해 국가 ‘사회주의’와 ‘사회주의적’ 통치 방식을 수립한 사건을 뜻한다.
2월 혁명은 모든 혁명 정당을 혼란에 빠뜨렸다. 그들은 다가오는 혁명이 지닌 심대한 사회적 성격을 파악했을 때, 그들은 예외 없이 크게 놀랐다. 처음에는 아나키스트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이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노동계급의 가장 급진적인 열망을 대변한다고 자처하던 볼셰비키당조차 부르주아 혁명의 한계를 넘어서는 전망을 전혀 내다보지 못했다.
러시아에서 실제로 어떤 변화가 진행되고 있는가라는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된 것은 1917년 4월 볼셰비키당 대회에서였다. 논쟁의 핵심은 이번 혁명이 단지 차르 체제를 전복하는 데 그칠 것인가, 아니면 자본주의 자체를 타도하려는 더 큰 목표를 지녀야 하는가였다. 후자가 가능하다는 것은 볼셰비키가 전술 전반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레닌은 다른 볼셰비키들보다 먼저 혁명의 사회적 성격을 인식했고, 권력 장악의 필연성을 예견했다. 그는 노동자와 농민의 운동에서 산업 부르주아지와 농촌 부르주아지의 토대를 서서히 무너뜨리는 결정적 힘을 보았다.
10월 이전까지 볼셰비키당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단일한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다. 이 시기 내내 당은 대중의 사회적 구호와, 자신들이 수립하고 발전시켜온 사회민주주의 혁명론 사이에서 줄타기했다. 볼셰비키당은 소부르주아지와 대부르주아지가 내건 제헌의회 소집 구호를 반대하지 않으면서도, 거세게 속도를 높이는 군중의 흐름을 따라가며 그것을 통제하려 했다. 차르 체제가 무너진 이후, 노동자들은 새로운 활력을 얻어 거침없이 전진했다. 그들은 좌우 양쪽의 적을 꺾으며, 전투적 기세로 승리를 향해 나아갔다.
전국의 대토지 소유자들은 농촌을 떠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농민봉기를 피해 도시로 달아나, 생명과 재산의 안전을 도모했다. 농민들은 지주와 함께 살거나 공존하는 방안을 단호히 거부하며, 토지를 직접 재분배했다.
도시에서는 노동자와 기업주 사이의 관계가 급격히 역전되었다. 대중의 노력과 집단적 역량에 힘입어 즉 공장과 운수, 광산 현장 등에서 노동자 평의회가 결성되었다. 평의회들은 생산에 과감히 개입했고, 기업주의 경고를 무시하고 오히려 자본가들을 생산 과정에서 배제하는 문제를 논의했다. 이처럼 러시아 전역에서 노동자들은 일터의 사회화를 시작했다.
러시아의 혁명적 노동자들은 방대한 노동자·농민 소비에트망을 구축했고, 이는 곧 자주관리 기관으로 기능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혁명을 발전시키고, 방어하며, 확장했다. 형식상으로는 여전히 자본주의적 지배와 질서가 존재했지만, 그와 병행해 거대한 사회·경제적 노동자 자주관리 체제가 태어나 성장하고 있었다. 소비에트와 공장위원회 체제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 국가 기구를 무력화시킬 잠재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들의 탄생과 발전은 권위주의 원리와 무관한 것이었다. 그 체제는 사회·경제적 자주관리의 대중 기관이었지 결코 국가 권력 기관이 아니었다. 이들은 대중을 지휘할 수 있다고 자부하는 국가기구에 맞서 세워졌고, 그 기구와의 결정적 충돌을 준비했다.
도시와 농촌의 혁명 대중은 “공장은 노동자에게, 토지는 농민에게!”라는 구호 아래, 부유한 계급의 국가기구를 타도하기 위해 투쟁했다. 그들은 새로운 사회 체제의 이름으로 공장위원회와 사회·경제적 소비에트라는 기초 세포를 세웠다. 이 구호는 노동자 러시아 전역을 관통하며 확산되었고, 노동자들의 직접행동을 관철시켜 부르주아와 사회주의자의 연립정부에 맞섰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노동자와 농민은 1917년 10월 이전부터 러시아의 산업·농업 체제를 전면적으로 재구성하기 위해 활동해 왔다. 1917년 6월부터 9월까지 빈농들은 농업 문제를 사실상 해결했다. 도시 노동자들은 국가와 자본가 모두로부터 생산 조직의 역할을 빼앗으며, 사회·경제적 자주관리 기관을 세웠다. 10월 혁명 동안 노동자들은 그들의 혁명을 가로막는 마지막이자 가장 큰 장애물이었던 유산계급의 국가 권력을 전복했다. 이로써 사회혁명을 완수할 거대한 가능성이 열렸고, 혁명은 사회주의적 사회 재건이라는 창조적 경로에 들어섰다. 이 경로는 노동자들이 이미 수개월 전부터 선택한 길이었다.
이것이 노동자와 농민의 10월이었다. 극도로 착취당해 온 육체노동자들에게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토대를 전면적으로 파괴한 거대한 성취를 뜻했다. 도시와 농촌의 프롤레타리아가 평등, 독립, 자주관리 원칙에 따라 세우는 노동자들의 새로운 사회가 건설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 10월은 자연스러운 결말에 이르지 못했다. 볼셰비키의 10월이 이를 폭력적으로 가로막았고, 그 독재는 점차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볼셰비키의 10월
볼셰비키를 포함한 모든 국가주의 정당들은 러시아 혁명의 목표를 사회민주주의 정권 수립에 한정했다. 볼셰비키는 러시아 전역의 노동자와 농민이 농업 부르주아 질서를 본격적으로 뒤흔들고, 사회혁명이 되돌릴 수 없는 역사적 사실로 드러났을 때에야 비로소 혁명의 사회적 성격을 직시하고 그에 따른 전술 수정 필요성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10월에 이르기까지 볼셰비키당은 혁명의 성격과 방향에 관해 의견을 하나로 모으지 못했다. 게다가 볼셰비키당 중앙위원회는 두 개의 경향으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었다. 레닌이 이끄는 일파는 사회혁명의 필연성을 내다보고 권력 장악 준비를 제안했다. 반면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가 이끄는 다른 일파는 사회혁명 추진을 모험주의라고 비난했고, 제헌의회를 소집하여 그곳에서 볼셰비키가 극좌파에 해당하는 위치를 차지하는 것 이상의 목표는 두지 않았다(트로츠키, 『10월의 교훈』 참조). 결국 레닌의 견해가 당내에서 우세해졌다. 볼셰비키당은 임시정부에 맞선 결정적 대중 투쟁을 준비하며 세력을 모았다. 볼셰비키는 공장위원회와 노동자 소비에트에 대거 침투해, 이 미성숙한 자주관리 기관에서 가능한 한 많은 자리를 확보하려 했다. 볼셰비키당이 소비에트와 공장위원회를 바라보는 시각과 접근법은 대중과 근본적으로 달랐다. 노동자 대중이 이를 사회·경제적 자주관리 기관으로 보았던 것과 달리, 볼셰비키는 이를 부르주아지로부터 권력을 탈취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여겼고, 그 권력은 당의 노선에 따라 행사될 예정이었다.
여기에서 혁명 대중이 이해한 10월과 볼셰비키당이 이해한 10월 사이의 인식과 전망의 거대한 차이가 드러난다. 혁명 대중에게 10월 혁명은 이미 존재하던 노동자·농민 자주관리 기관을 강화하고 확대하기 위해 권력을 전복하는 과제였다. 반면 볼셰비키당에게 10월은 이 기관들을 지렛대로 삼아 권력을 장악하고, 모든 혁명 세력을 당에 종속시키는 과제였다. 앞서 보았듯, 이 둘 사이의 간극은 매우 컸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벌어져 러시아 혁명의 향후 전개 전체에 심각한 결과를 초래했다.
볼셰비키가 10월 혁명 과정에서 정치 권력을 장악하고 이후 혁명 전체를 당에 종속시킨 사실은 소비에트 권력이라는 개념을 사회혁명과 대중의 사회적 해방이라는 개념으로 대체한 ‘눈속임’에 지나지 않는다. 언뜻 보기에 이 두 개념은 모순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대중이 ‘소비에트 권력’을 ‘소비에트가 행사하는 권력’으로 오해하는 일이 종종 발생하였기에, 사회혁명이라는 개념이 ‘소비에트 권력’이라는 개념으로 대체되는 일은 쉽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실제 역사와 이후의 경험에서 이 두 개념은 격렬히 충돌했다. 볼셰비키 국가가 구현한 ‘소비에트 권력’은 소수 개인에게 집중된 전통적인 부르주아 권력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권력을 통해 인민 생활에서 가장 근본적이고 가장 강력한 요소, 곧 사회혁명을 당의 권위에 종속시키려 했다.
볼셰비키는 자신들이 대부분의 직책을 차지하는 ‘소비에트 권력’ 개념을 활용해 권력을 장악했고, 혁명 영토 전역에서 독재를 선포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노선에 동의하지 않는 모든 노동자 혁명 세력을 억압하고, 러시아 혁명의 전 과정을 왜곡하여 혁명이 본래 의미와 배치되는 수많은 조치를 채택하게 만들었다. 이를테면 전시 공산주의 시기 이루어진 노동의 군사화가 있다. 수백만의 사기꾼과 계급적 기생충들이 평화와 사치를 누리며 살아가는 동안, 노동자들은 군사적 통제에 종속되었다. 당의 정책이 촉발한 도시와 농촌 간의 갈등 또한 이에 포함된다. 이 정책은 농촌을 혁명에 있어 이질적이고 신뢰할 수 없는 요소로 간주했다. 이러한 조치들은 자유의지주의적 사상을 질식시켰고, 러시아 혁명에 활력을 불어넣고 그것을 사회혁명으로 이끌었던 아나키즘 운동을 함께 억눌렀다. 노동자들을 겨냥한 다른 조치로는 독립적 노동자 운동의 금지와 자유의 억압이 있었다. 여기에는 노동자들의 표현의 자유와 노동자 언론의 자유가 모두 포함됐다. 모든 것은 중앙권력에 집중되었으며, 노동자들의 활동·사상·생활 방식에 관한 모든 지침이 그곳에서 내려왔다.
이것이 볼셰비키의 10월이었다. 혁명적 사회주의 지식인들은 그들의 이상과, 그 이후 수십 년에 걸친 발전 과정을 구현했다. 이제 이러한 것들이 전러시아 공산당의 독점적 독재를 통해 마침내 실현되었고, 노동자들이 얼마나 참혹한 억압에 시달리고 있건 지식인 지배계급에게는 만족스러운 결과가 되었다. 그리고 볼셰비키는 이제 10년의 집권을 맞아 이 결과를 성대하게 기념하는 것이다.
아나키스트들
혁명적 아나키즘은 1905년 혁명과 1917년 혁명 초기라는 두 시기 모두에서 노동자와 농민에게 사회혁명 사상을 전파한 유일한 정치·사회적 흐름이었다. 만약 우리가 대중의 투쟁 방식과 결합했더라면, 아나키즘은 혁명에서 막대한 역할을 맡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어떤 정치·사회 이론도 아나키즘만큼 혁명의 정신과 전개방식에 조화를 이루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1917년, 노동자들은 아나키스트 연설가들의 발언에 놀라울 만큼 신뢰를 보내고 관심을 기울였다. 단결한 노동자·농민의 혁명적 잠재력과, 아나키즘의 이념·전술이 하나로 결합하면 저항할 수 없는 힘이 될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결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부 개별 아나키스트들의 치열한 활동과 달리, 우크라이나의 나바트와 마흐노우슈치나를 제외하면 지속적이고 조직적인 행동을 선도하고, 아나키스트들과 거대한 노동대중을 하나로 묶어낼 역량을 가진 대규모 아나키스트 조직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처럼 중요한 혁명적 시기에도, 아나키스트들은 대체로 소규모 집단의 틀 안에 머무를 뿐, 대중의 정치적 요구와 행동의 안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공통의 아나키즘 정치와 전술이라는 문제를 직시하고 해결해내려 하지 않고 내부 논쟁의 바다에 빠져드는 것을 선택했다. 이러한 결함으로 인해, 아나키스트들은 이 중차대한 혁명적 시기에서 무력한 상태로 스스로 걸어들어갔다.
이와 같은 참혹한 상황의 원인은 의심할 여지 없이 아나키스트 운동의 분산, 조직 부재, 집단적 전술의 결여에 있다. 아나키스트들은 이러한 오류들을 오히려 원칙으로 격상함으로써, 사회혁명을 위한 전략을 수립하기 위한 단 하나의 조직적 조치도 취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물론 이제 와서 선동과 경솔함, 무책임으로 이 현실을 초래한 이들을 비난하는 것은 무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아나키스트들의 행동이 결국 노동 대중을 패배로 몰아넣고, 아나키즘을 파멸의 문턱으로 끌고갔다는 비극적 경험은 반드시 직시해야 한다. 우리는 아나키즘 내부의 혼란과 무질서를 존속시키려 하는 자들, 아나키스트 조직과 그 발전을 가로막고, 나아가 노동 해방과 아나키즘적 공산주의 사회 건설을 위한 운동의 투쟁을 가로막는 자는 그것이 누구라 할지라도 격렬하게 경멸하고 가차 없이 조롱해야 한다. 노동 대중은 아나키즘을 이해하며 그것에 본능적으로 이끌릴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아나키즘의 이론적·조직적 일관성에 확신을 갖기 전에는 아나키스트 운동과 함께 행동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이러한 일관성을 실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결론과 전망
지난 10년간 볼셰비키가 행한 것을 보자. 그들은 해마다 노동자들의 사회적·정치적 권리를 조금씩 더 축소하고, 혁명에서 쟁취한 모든 것을 빼앗아 왔다. 이제 볼셰비키당의 ‘역사적 사명’은 아무 의미도 없다. 그들은 러시아 혁명을 그들의 최종 목표로 이끌려 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임금노예제를 기반으로 한 국가자본주의를 건설하는 것, 다시 말해 착취자의 권력을 강화하고 피착취자의 빈곤을 심화시키는 것이 그것이다.
우리가 볼셰비키당을 도시와 농촌의 노동 대중 위에 군림하는 사회주의 지식인 정당이라 이르는 것은, 그 지도부 중핵의 출신성분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들의 출신과 교육, 생활양식은 노동계급과 전혀 접점이 없다. 그럼에도 이 지도부는 당과 대중의 삶 전반을 세부에 이르기까지 지배하고 있다. 이들은 프롤레타리아트 위에 군림하려는 의지를 결코 버리지 않을 것이며, 노동자들은 그들에게 단 하나의 기대도 가질 수 없다.
볼셰비키당의 기층 활동가들, 특히 공산주의 청년 조직의 경우는 조금 다를 수 있겠다. 지금까지 이들은 당의 부정적이고 반혁명적인 정책에 소극적으로 가담해 왔다. 하지만 이들은 결국 노동계급의 심장에서 나왔고, 언젠가 노동자와 농민의 진정한 10월을 인식하고 맞닥뜨릴 수도 있다. 우리는 이들 가운데서 노동자의 10월을 위해 싸울 인물이 나타날 것이라 의심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들이 10월 혁명의 아나키즘적 성격을 신속히 받아들이고, 그 실현에 나서기를 바란다. 이를 위해 우리가 지금 해야할 것은 아나키즘 운동과 10월 혁명의 진정한 본질을 최대한 분명히 보여 줌으로써, 대중이 혁명에서 쟁취한 중요한 성과를 되찾고 지켜낼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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