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철폐 : 아나키즘적 · 마르크스주의적 관점 (8장. 국가없는 세계) - 웨인 프라이스


8장. 국가없는 세계

죽은 백인이 생각해낸 유럽적이고 서구적이 사상이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는 유효하지 않을 것이라는 비판을 듣게 되곤 한다. 아나키즘과 마르크스주의는 유럽에서 제일 먼저 만들어진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현대 정치 사상들 역시 그렇다. 이는 자본주의와 산업주의가 유럽에서 발흥하여 세계를 뒤덮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민족주의, 민주주의, 노동계급투쟁 등의 사상이 유럽에서 제일 먼저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것들은 유럽적 사상인 것이 아니라 인간적 사상이 되었다. 이러한 사상들은 각 문화에 맞추어 다양한 형태로 발현한다. 모든 사람은 자신들의 문화에 대하여 반동적이면서 동시에 자유의지주의적이고 민주주의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아마도 모든 사람들이 서로 다른 계급적, 민족적, 젠더적 억압의 역사를, 이 억압에 대한 저항의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본주의적 산업화가 세계 전역으로 확산하는 과정에서, 인민들은 저항의 수단을 찾아 헤매었고, 유럽에서 먼저 고통받아오던 이들의 사상을 수용하여 각자의 전통과 사상으로 체화해내었다. 이렇게 자유의지주의적 사회주의가 등장한다.

오늘날 아나키즘은 세계 전역에 퍼져있다. 라틴 아메리카 전역에는 1900년대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그러했던 것처럼, 아나키스트들이 널리 퍼져있다.(니카라과의 민죽국가주의자들인 산디니스타민족해방전선은 그들의 상징색으로 흑색과 적색을 사용한다. 이 색이 니카라과의 노동운동의 상징색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색에서 알 수 있듯이, 그 노동운동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이 촉발한 것다.) 아프리카 전역에도, 한국, 일본, 중국 및 중동에도 아나키스트들이 퍼져있다. 구소련의 아시아 부분에도 아나키스트들이 있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신뢰는 많이 떨어졌고, 세계전역의 인민들은 대안적인 급진 사상을 찾고 있다. 자본주의의 세계화와 함께, 국제 노동계급은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상황을 마주하게 되었다. 가장 빈곤한 국가에도 산업 프롤레타리아트가 형성되었다. 컴퓨터와 운송수단의 발전으로 국제 시장은 그 어느 때보다 밀접하고 가까워졌다. 국제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라는 역사적 이상은 그 어느 때보다 만국의 노동자들에게 현실적으로 다가오고 있다.

국가주의자들의 최후의 보루는 중앙집중화 된 세계정부의 필요성에 대한 주장이 되었다. 이는 특정한 부분에 특화된 다양한 국제 기구(이를테면 유니세프나 무역협력체)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자발적인 국제적 연맹체(UN과 비슷하지만, 국가가 없는 UN)를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다. 아나키스트들은 국제주의자이자 반민족국가주의자로서 이러한 국제연맹체에 대하여 반대하지 않는다. 국가주의자들이 말하는 바 세계정부는 군대와 경찰을 가지고 세계를 지배하는 국제적인 국가다. 이러한 세계정부는 끔찍한 관료주의적 악몽이 될 것이다. 이 세계정부의 필요성에 대한 주장들을 검토해보자.

먼저, 전쟁을 철폐하기 위해 세계정부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있다. 민족국가의 정부가 도시국가 사이의 전쟁을 멈춘 것처럼, 국제 국가는 민족국가들 사이의 전쟁을 멈출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지역적 전쟁들을 멈춘 것은 정부가 아니었다. 통일국가와 그 정부는 경제적 · 사회적 축적이 증대한 결과물이었다. 통합되지 않은 민족국가 내에서도 전쟁은 가능하다. 이러한 전쟁은 내전(혹은 민족해방전쟁, 혁명전쟁)이라 불린다. 역사상 가장 끔찍했던 전쟁중 하나는 미국 내전(남북전쟁)이었다. 미국이라는 국가 정부를 설치한 것은 남북전쟁을 막지 못했다. 국제 정부를 설치한다해도, 그것은 국제적 “내전”을 막지 못할 것이다.

전쟁을 멈추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민족적 압제를 철폐하는 것이다. 처절한 국제 자본주의적 경쟁을 철폐하는 것이다. 제국주의를 철폐하는 것이고 부유한 지배계급의 이익에 복무하는 민족국가를 철폐하는 것이다. 전쟁은 민족적 압제와 착취를 위하여 발발한다. 그리고 이 압제와 착취는 자본주의 체제 하의 민족국가라는 경쟁적 체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협동에 기반한 국가없는 세계에서는 전쟁이 존재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민족국가는 지배계급의 이익에 따라 전쟁을 선포하기 위하여 존재한다. 이것이야말로 민족국가가 존재해야 할 주요한 이유였다. 현존 국가를 유지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더 크고 강력한 국가를 만들어내는 것은, 전쟁을 철폐하기 위한 방법이 아니라, 전쟁을 일으키기 위한 방법이 될 것이다.

사회주의적인 국제 경제 계획을 중앙에서 집행하기 위하여 세계정부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있다.(니콜라이 부하린 역시 이러한 주장을 제기했다.) 그러니까, 남부 아프리카와 그린란드에 있는 공장 모두가, 이를테면, 제네바의 본부에서 관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놀라운 비효율성이다! 이러한 개념은 현대의 경제 제국주의가 침략적 필요에 의하여 만들어낸 세계 경제의 과도한 중앙집중성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 방직기업들은 방글라데시의 여성들을 고용한다. 이것은 미국인들이 바느질하는 법을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방글라데시인들을 고용하는 것이 더 싸기 때문이다. 반면, 반권위주의적 사회주의자들은 인민들이 필요한 만큼의 식량, 에너지, 의복, 주거, 지역기반 산업 등을 스스로 생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최소한 대륙단위로는, 그 거주민들에게 충분한 자원이 존재한다. 그것으로도 부족하다면, 여전히 각 지역간의 교역은 가능할 것이다. 교역의 규모가 크지 않을 것이기에, 무역협회와 제한적 국제기구를 통해 이를 관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극좌파들 역시 세계 정부의 필요성을 주장하기도 한다. 세계 혁명을 완수한 다음이라도, 이전까지 제국주의 국가였던 부유한 국가와  이전까지 칙취당하고 있던 가난한 국가는 존재할 것이다. 그렇기에 모든 인류가 평등해질 때까지 유지되는 세계 단일 국가를 통하여 부유한 국가들이 가난한 지역과 부를 공유하게 하여야 한다는 주장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트로츠키주의자인 시모어는 “맨하탄 부촌에 설치된 아나키즘적 코뮌과 인도의 농촌에 설치된 아나키즘적 코뮌”은 결코 같을 수 없다면서, “중앙정부에 의하여 국제적으로 계획된 사회주의 경제”가 필요할 것이라 주장한다.(시모어, 2001) 마오주의자인 아바키안 역시 국제적 독재가 형성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이전까지의 제국주의 국가에 설치된 아나키즘적 코뮌은 그저 “제국주의가 수행하던 억압과 착취를 ‘코뮌화’할 뿐”이라 말한다. 이러한 계획은 실질적 문제를 지적하고 있는 것은 맞지만, 동시에 전세계적 혁명 독재를 의미하는 바, 끔찍한 생각이다. 북미, 서유럽, 일본 등지에서의 국제적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아프리카나 서인도제도에서 노동자 민주주의로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이 국제적 전체주의 국가가 이들 국가를 지배하기 시작할 것이다.

북미/유럽 등지의 혁명이 “제 3세계”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은, 그저 물러나는 것이다. 서구 국가들이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에 불공정 무역을 강제하고, 불평등한 투자를 멈추고, 피억압민족의 고혈을 빨아먹기 위해 고안해낸 파멸적 국제 금융의 부채를 탕감한다면, 이들 제 3세계는 손수이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단지 국제 부채의 탕감만으로도 제3세계의 발전은 가속할 것이다. 가난한 이들이 산업화된 국가의 과학기술을, 국제 저작권료를 내지 않고 사용할 수 있게 “허가”하는 것만 해도 그러할 것이다.

이러한 뺄셈적 원조 말고도, 부유한 국가들은 빈곤한 국가가 스스로의 방식으로 “산업화”하는 것을 도울 것이다. 반권위주의적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함으로서 스스로 자유로워진 사람들은 매우 이상주의적이 되어 타인을 돕고 싶어질 가능성이 높다. 자본주의적 과대 생산을 종식시키고, 군수 생산에 소요되는 대규모 지출을 없애는 것은 다양한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잉여자원들을 제공할 것이다.

동시에, 가난한 국가를 돕는 것은 부유한 국가의 이익에도 부합한다. 빈곤한 이들 사이에 고고히 솟은 사회주의의 낙원이라는 유토피아는 존재할 수 없다. 빈곤은 불안정성을 촉발하고, 계급 사회의 부활의 기반을 닦을 것이다. 가난한 이들의 고통은 반동적이고 반계몽주의적인 이데올로기(민족주의, 종교 근본주의, 스탈린주의)의 발흥을 촉발할 것이다. 빈곤은 가난한 국가들 간의 전쟁을 촉발할 것이고, 이 전쟁에는 부유한 국가도 끌려들어가게 될 것이다. 부유한 국가로 향하는 이민의 파도를 낳아 부유한 국가가 인구와 환경 사이의 생태적 균형을 달성하기 어렵게 만들 것이다.(물론 이러한 것이 국가가 만들어낸 국경을 바탕으로 이민을 제약하려는 시도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간단히 말해서, 구 제국주의 국가들이 빈곤한 국가를 돕는 것은, 그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실천적인 탈중앙주의적 기술은 빈곤한 국가가 스스로의 방식으로 개발하는 것을 돕기 위해 고안되었다. 거대한 댐이나 공장, 도시와 마천루, 최신식 공항으로 이들을 “산업화”하는 것은 그저 그들의 새로운 주인님인 민족 부르주아지와 국가 관료들의 배를 불릴 뿐이다.(동시에 서구 은행에의 부채를 늘릴 뿐이기도 하다.) 이러한 원조 대신에 서구의 자유의지주의적 사회주의 국가들은 중간 기술을 도입하기 위한 자본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역 인민들과 함께 이러한 개발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생태적으로 균형잡히고 민주적으로 수행되는 빈곤으로부터의 탈출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탈중앙주의는 개발된 세계와 모순되지 않는다. 오히려 탈중앙주의야말로 개발의 전제라 할 수 있다.

세계 전역에서 사람들은 자기 자신과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을 보살피기 위하여 노동한다. 하지만 이들의 노동과 생산성을 빨아 배를 불리는 것은 자본가 계급이다. 언제나 어디에서나, 국가는 군대와 경찰, 공무원과 관료, 법원과 세금, 정치인들을 사용하여 자본가 계급과 손을 맞잡고 나아간다. 모든 이들은 이러한 끔찍한 지배를 끝낼 역량을 갖추고 있다. 자유와 자주경영은 전 세계를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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