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철폐 : 아나키즘적 · 마르크스주의적 관점 (7장. 공산주의 사회 실험) - 웨인 프라이스

7장. 공산주의 사회 실험

마르크스의 이행기 국가 개념은 이행기 경제 개념과 연관되어 있다. “우리가 여기서 관계하고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의 기초 위에서 발전한 공산주의 사회가 아니라 거꾸로 바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겨난 공산주의 사회이며, 그러므로 그 모태인 낡은 사회의 모반이 모든 면에서, 즉 경제적, 윤리적, 정신적으로 아직도 들러붙어 있는 공산주의 사회이다.”(『고타강령비판』) 마르크스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알 것 같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 사회의 더 높은 단계”를 자본주의의 철폐 이후 바로 건설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믿었다. 일정 기간, 생산력이 더 높아지기 전의 “공산주의 사회의 첫 번째 단계”동안 노동자들이 여전히 노동한 양에 따라 임금을 받는 체계가 필요할 것이라는 뜻이다. 가치 법칙으로 운영되는 시장이 유지될 것이고, 이 시장은 의식적 계획경제로 점차 이행할 것이다. 이 이행기 동안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가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이 독재는, 보통 새로운 국가로 해석된다.(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사회의 첫 번째 단계”를 “사회주의”로, “공산주의 사회의 더 높은 단계”를 “공산주의”로 표현한 것은 레닌이었지 마르크스가 아니었다. 오늘날의 좌파들은 대부분 레닌의 표현을 승인한다. 하지만 나는 “사회주의”를 “공산주의”를 포괄하는 더 광범위한 단어로 사용한다.)

하지만 아나키스트들은 크로포트킨 당시부터 지속적으로 완전한 공산주의 경제로 즉시 이행하는 것은 가능하며, (현대의 집단적 생산과정 속에서, 각 노동자의 노동 가치를 계측할 수 없기에)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는 이행기 체계는 작동하지 않을 것이며, (완전한 공산주의가 즉시 도입될 수 있기에)불필요하다고 주장해왔다.

바쿠닌은 아나키즘적 공산주의라는 궁극적 목표 이전에 이행기를 둘 수 있다고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쿠닌 사후, 바쿠닌의 친구였던 제임스 기욤은 바쿠닌의 혁명 이후 사회에 대한 관점을 정리했다. 바쿠닌은 자유의지주의적 공산주의라는 목표를 달성하는 것은 충분한 생산성을 확보하는 것에 달려있다고 보았다. “이행기 동안, 각 공동체는 집단적 노동의 생산물을 분배함에 있어 스스로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방식을 결정할 것이다.”(『Bakunin on Anarchism』)

하지만 마르크스나 바쿠닌의 시대로부터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났다. 그 시대 이후 자본주의는 기술의 개발을 통해 극도로 높은 생산성을 달성했고, 이 생산성은 자유의지주의적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기에 충분하다. 만약 사회주의(공산주의)의 건설 과정에서, 자본주의의 잔재를 모두 치워낸다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자동차를 그렇게 다양한 디자인으로 뽑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 다양성을 (사회가 합의한 수준으로) 줄이고, 철도 · 버스 · 전차 등을 늘리면 되지 않겠는가. 무엇보다, 사람들이 공동체 안에서 일하면서 일과 생활이 통합될 수 있지 않겠는가. 국제 사회주의의 승리는 무기 생산에 소모되는 천문학적 자원을 생산적으로 돌릴 수 있게 할 것이다. 중간관리직이나 보험업, 광고업 등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될 직업도 있을 것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생산할 수 있게 될 것이고, 노동 강도는 낮아지면서도 더 많이 생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혁명 이후의 사회는 매우 높은 수준의 생산성을 담보하는 기술을 가지고 시작할 것이고, 자본주의적 비효율을 청산할 것이며, 더 많은 생산적 노동력을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기술 발전이 심화하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즉시 자유의지주의적 공산주의를 적용하여야 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현대 기술의 잠재적 생산성은 매우 크다. 전체 사회의 노동량 중 매우 일부만 사용하더라도 모든 사람에게 높은 삶의 질을 보장할 수 있을 정도다. (이를테면, 농업 생산성을 보라. 전체 인구의 1%가 생산하는 농업 생산량은 북미 전체 인구를 풍족하게 먹일 수 있을 정도다. 인류사의 오랜 기간 동안, 이 정도의 생산량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99%가 농업생산에 종사해야 했다.)

그렇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누구도 의식주의 결여를 메우기 위해 일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로봇이 모든 노동을 하는 동안 멍하게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행동하고 싶어할 것이다. “필수적인” 노동보다 노동을 지망하는 사람이 많아질 것이다! 직업을 “만들어내”고 노동과 놀이가 결합된 창조적 생산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활동(단지 “노동”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은 인간의 가능성을 실현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아마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매우 생산적인 기술은, 즉각적으로 모두가 향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세계 대부분은 아직 산업화되지 않았다. 혁명 이후의 사회에서는 한때 압제당하던 민족들이 생태적으로 유지가능한 방식으로, 지역 인민들의 필요에 따라 발전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산업화된 국가들(이전의 제국주의 국가들) 역시 현존 기술을 생태주의적이고 자주경영이 가능한 방식으로 변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더하여, 혁명에 대한 저항은 파괴적인 내전을 불러올 수도 있다. 혁명이 승리한 이후, 재건 역시 필요할 것이다. 또한, 혁명이 세계 전역으로 확산하는 데에 시간이 걸린다면, 자유로운 사회 옆에 자본주의 국가가 존재하는 일도 발생할 것이다. 그렇기에 무기 생산 역시 여전히 필요할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노동자들이 매우 생산적이어서 소비에 제약이 없을 사회를 건설하는 데에 시간이 걸릴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전반적인 생산량이 충분히 늘어날 때까지, 사회의 생존에 필수적인 노동을 하도록 노동자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다. 노동자들은 필수적인 노동을 최대한 창조적이고 흥미로운 활동으로 전환해갈 것이다. 혁명은 이데올로기적 동기를 부여할 것이다. 혁명을 통해 건설할 작은 공동체를 기반으로 살아갈 때, 자기 노동의 가치를 발견하기는 더 쉬워질 것이다. 물론 인민의 심리가 하룻밤 사이에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이 노동을 지속하게 하기 위한 보상동기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제기되곤 한다.

바쿠닌은 이행기 체계도 아니고 완전한 공산주의로의 즉각적 이행도 아닌 제 3의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바쿠닌은 실험적 경제라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자본가들의 자본은 수용될 것이고 경제는 협력적이고 집산화된 형태로 노동자들에 의하여 민주적으로 운영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집행할 지는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달라야 할 것이었다.

아나키즘적 공산주의자인 에리코 말라테스타는 혁명 이후라 하더라도, 모두가,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자유의지주의적 공산주의에 설득될 것이라 기대해서는 안된다고 적고 있다. 아마도 혁명은 통일전선의 일종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애초에, 모두에게 자유의지주의적 공산주의를 강요하는 것은 그 사상 자체에 대한 모독이지 않은가. 착취적 방식을 제외한 여러 방식들이 실험되어야 하고, 이 실험의 과정에서 사람들은 본인들에게 가장 잘 맞는 방식을 찾아낼 것이다.

말라테스타는 “생산수단의 소유와 활용에 있어, 생산물의 분배에 있어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지역에서 실험해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 방식들은 모아내고 수정하는 과정에서, 어떠한 형태(들)이 가장 알맞은 것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 새로운 특권이 결성되는 것을 막아내고 있는 이상, 최적해를 찾아낼 시간은 충분할 것”이라고 쓰고 있다.(『말라테스타의 생애와 사상』)

그는 또한 “우리는 아나키를 하나의 방법론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아나키는 인민들이 시행착오를 통해 가장 만족스러운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 그 자체를 의미한다. 아이들을 어떻게 교육해야 하는가? 모른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부모와 교사, 이 문제에 관심있는 모두가 모여 논의하고, 관점에 따라 합의하거나 분열하면서, 최선이라 생각하는 방법론을 적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적용의 결과 그 방식이 최선이었다면, 그 방식을 도입하면 된다. 다른 모든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적는다.

모든 산업 각각에 맞는 단 하나의 최선의 방법이 있지는 않을 것이다. 제강 산업과 교육을 같은 방식으로 조직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지구상 모든 문화와 지역에 맞는 단 하나의 최선의 방법도 있지 않을 것이다. 민족의 역사나 전통, 기후, 천연자원에의 접근성 등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다원주의적인 연방 체계를 구성하는 최대의 장점은 서로 다른 지역에서 서로 다른 방식을 실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지역의 사례들로부터 배울 수도 있다. 이러한 사회는 “이행기” 사회라 불릴 수도 있다. 정확하게는, 언제나 변화 도상에 있는, 언제나 이행중인 사회 말이다.

우리는 다양한 사회적 형태를 실험해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 실험에는 특정한 제약이 있어야 한다. 어떠한 사회적 형태라 하더라도 민주적이고, 탈중앙화되고, 협동적이며 비착취적이어야 한다는 제약이 그것이다. 그리고 정확하게는, 이러한 사회적 형태에서야말로 비로소 사회적 실험이 지속될 수 있을 것이다. 전술하였던 부버와 파브리를 떠올려보자. 새로운 사회 구성의 원칙은 최대한 탈중앙적, 민주적, 협동적이어야 하고, 중앙집중과 위계질서는 필요최소만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폴 굿먼이 말한 것처럼 “우리의 정치적 표어는 다음과 같다. 가능한 모든 곳에서, 모든 방식으로, 최대한 탈중앙화하라. 하지만 어디서, 어떻게, 얼마나에 관한 것은 실증적으로 결정되어야 한다. 이것들에 대한 답은 연구와 실험을 통해서만 내어놓을 수 있다.”(이 지점에 있어 나는 굿먼에게 상당히 많이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굿먼은 개량주의자였기에, 이 사회를 실험적이고 점진적으로 바꾸어나갈 것을 원할 뿐, 노동계급의 혁명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나는 말라테스타나 바쿠닌, 마르크스의 입장을 따라, 혁명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하며, 이 실험은 혁명 이후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바라본다.)

서로 다른 공동체, 지역, 민족들은 각자의 조건에 맞추어 반권위주의적 사회주의의 다양한 모형들을 실험할 것이다. 이러한 모형 중 하나는 우리가 앞서 언급한 자유 공산주의 경제가 될 것이다. 모두가 돈을 위해서가 아니라 생명력이나 책임감, “게을러지지” 않고 싶어서 노동하는 사회말이다. 일부가 노동을 거부한다면, 어쩌라는 것인가? 사람들은 가장 힘든 일을 순번제로 할 것이고, 풍부한 생산물에 대한 소비는 무료로 이루어질 것이다. 사람들은 창고에서 원하는 만큼을 가져갈 수 있을 것이고, 언제나 필요 이상이 주어질 것이기에 그 누구도 필요한 것 이상을 가져가지 않을 것이다. 희소한 재화는 배급될 것이기에, 지금보다 더 높은 생활수준을 유지할 만큼의 생산량이 담보되어야 할 것이다. 배급되어야 할 재화가 너무 많다면, 사회는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수십년간 유지되어온 이스라엘의 키부츠야말로 이러한 것이 가능하다는 실례가 되겠다.

혹은, 사회주의적 공동체가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에 비례한 노동전표를 발행할 수도 있다. 노동전표의 양은 몇몇 업종들에 대한 인센티브를 유지하기 위해 조정될 수 있을 것이다. B.F.스키너는 『월든 투』에서 소규모 사회주의 공동체가 작동할 방식으로 이러한 방식을 제시한 바 있다.(물론, 그의 모형은 그다지 민주적이지는 않다.)

자유의지주의적 공산주의 모형과 비슷하기라도 한 모형을 바라보면, 재화의 생산과 소비에 있어 협동을 어떻게 조직할지에 대한 의문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민주적 방식으로 선출되거나 선임된 이들에 의한 다소간의 중앙 계획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중앙 계획의 비중을 너무 키우면, 이것은 경직된 관료제와 권위주의로 전락할 위험을 가지게 될 것이다. 반면, 이 비중을 너무 낮추면, 우리는 시장의 부활을 보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경제 계획을 탈중앙화된 민주주의와 결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초기의 테네시 밸리 정부가 그 예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카스토리아디스는 “계획 공장”이라고 불리는 계획 기제를 활용할 것을 제안한다. 이 계획 공장에서는 경제 계획을 제안할 것이고, 노동자 평의회의 연방에서 이 계획을 논의하고 결정하게 될 것이다.

마이클 알버트와 로빈 해널은 “탈중앙화된 사회주의적 계획경제”, 혹은 “참여경제”(“파레콘”)를 제안한다. 각 지역의 소비 평의회가 수요를 정리할 것이고, 공장 평의회도 생산에 필요한 원자재를 정리할 것이다. 공장 평의회는 가능한 생산량을 공지할 것이다. 몇 번의 실험과 상호 조정을 거치면, 소비자과 생산자들은 서로를 고려하게 될 것이고, 소비자들의 수요와 생산자들의 역량의 균형은 맞추어질 수 있을 것이다. 소비자와 생산자 모두는 결국 같은 사람이라는 지점에서 더욱 그러할 것이다. 결국 중앙에서 계획을 세우는 관료들이 없더라도(이 과정의 집행을 돕는 “집행위원회”는 있을 수 있겠지만) 계획은 자체적으로 도출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계획을 통하여 국가주도의 관료적 계획이나 소위 “시장 사회주의”에서 발생할 위험을 회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사회에서는 아이들과 장애인, 고령자 등을 제외하고는 일한 양에 따라 보상을 받을 것이기에, 공산주의 사회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파레콘”이 제시하는 바 “보수”의 체계는 마르크스가 “공산주의 사회의 첫 번째 단계”에 대하여 이야기한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파레콘주의자들과 마르크스의 결정적 차이는, 마르크스는 이러한 체계가 기본적인 (부르주아지 없는) 부르주아 원칙의 지속이 될 것이라는 것을 명확히 인지하였다는 것이다. “동일한” 노동량이 동일한 생산물량으로 교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원칙을 완전한 공산주의가 달성되기 이전에 존재할 수 있는 일시적인 시기의 원칙이라고 여겼다.

경제적으로 자유공산주의적 영역을 넓혀가면서, 사람들의 노동에 대하여 “보상하는” 사회를 상상할 수는 있다. 자본주의 아래에서도, 도로 · 공립학교 · 도서관 · 소방 · 수도 등은 “자유롭게” 이용 가능하다. 이러한 재화들은 공동체적으로 가격을 지불하여 모두에게 접근성을 보장하는 것이다. 사회주의 사회는 이 “자유로운” 영역을 확장하는 것일 수도 있다. 노동량/노동여부와 무관하게 기초적인 식량 · 의복 · 주거를 제공하는 사회 말이다. 굿먼은 이러한 (“기본소득”의 일종으로서의) 자유 공산주의 체계가 시장 등 다른 경제 체제와 공존할 수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사회보장 영역에서의 일자리를 모두가 가질 수 있도록 하고, 그 일자리에서 특정 기간 동안 일한 모든 사람에게 평생의 소득을 보장하자는 것이다. 자동화의 도움이 있다면, 사실 사회보장 영역의 노동마저 필요성이 없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영역은 자발적 복무나 매우 적은 추가 수당을 받는 사람들로 운영될 수 있을 것이다. 포토풀로스 역시 “공산주의적 원칙”으로 작동하는 “필수유지영역”과 “비필수유지영역”을 구분하여 둘 것을 제안한다. 각 노동자들은 자기 노동에 대하여 필수유지 쿠폰과 비필수유지 쿠폰을 받게 될 것이다. 전자는 노동자들이 행할 필수유지산업에서의 최소한의 노동에 대한 것이 될 것이고, 후자는 각 노동자들이 행하는 노동의 양에 대한 것이 되어 재화의 수요와 공급을 조정하는 인공적 “시장”같은 것이 될 것이다. 이러한 이중 체계를 고민할 수도 있지만, 나는 이에 더하여 생산성의 증대에 따라 필수유지영역을 더욱 확장시켜 거의 모든 재화와 용역을 다루도록 해야할 필요를 느낀다. 그리고 이것이 “공산주의 사회의 더 높은 단계”가 될 것이다.

계획의 대상 영역이 작을수록, 대중 참여의 난이도는 쉬워질 것이다. 지역 공동체는 생산과 소비를 매우 쉽게 조율하고, 일상적 마을 총회를 통해 계획을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 정도 규모의 국가에 대한 계획을 하는 것은 훨씬 어려운 일이 될 것이고, 결국 관료주의적 편향을 극복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그렇기에, 계획경제의 성공을 위해서는 최대한의 탈중앙화가 필요한 것이다.(알버트와 해널은 계획이나 기술에 있어 공동체의 탈중앙화의 필요를 거부한다. 나는 이것 역시 그들의 파레콘 계획에 있어 오류라고 믿는다.)

“탈중앙화된 시장 사회주의”라 부를 법한 모델도 있을 수 있다. 공동체 정부에 의하여 규제되는 시장은 있을 수 있지만, 대기업이나 국영기업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노동자들은 노동력을 사용자에게 판매하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착취는 없을 것이다. 노동자 자주경영 기업(생산자 협동조합), 소비자 협동조합, 소규모 개인사업자들, 수공예 상점, 공동체운영 기업, 가족 농장 등이 경제를 구성할 것이다. 녹색당원 일부와(스프레트나크 & 카프라, 1986) 달(1985)이 이러한 개념을 지지했다. 이러한 “시장 사회주의”는 상당 기간 동안 국가가 운영하는 경제를 조직할 수 있는 실질적 방법론이라 여겨져 왔다. 그 지지자들은 생산자 협동조합의 체계를 상정한 것이 아니라, 중앙이 시장을 섬세하게 모방하는 계획경제를 바라본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목적과 별개로, 그들의 주장 다수는 유용하다. 시장을 이용하는 것은 중앙 계획을 최소한의 규제 수준으로 제약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반면, 이 모델의 반대자들은 시장사회주의가 연대를 무너트리고, 이기심을 촉발하고, 불평등을 심화하며 자본주의를 재건할 것이라 말한다.

유고슬라비아의 국가공산주의는 이 모형을 따랐다. 그들의 공장은 사회적으로 소유되고 노동자 평의회가 운영하며, 전업 관리자들을 채용했다. 임금 수준과 이윤분배는 기업 내적으로 이루어졌다. 기업은 (독재정이었던) 국가의 규제 아래에서 내수 시장 내에서 경쟁했다. 이 체계는 경기변동 · 실업 · 기업간의 수익 불평등 · 지역간 불평등(이는 결국 티토 사후 발흥한 광적인 민족주의에 기름을 부었다.) 등이 그것이었다. 하지만, 이 체계는 최소한 전통적 자본주의 국가들만큼은 작동했고, 공산주의자들의 국가 계획경제 보다는 잘 작동했다.(티토주의가 붕괴하고, 유고슬라비아 내전이 발발한 이후 이 체계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추가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나는 이러한 체계에 대해 매우 회의적이다. 이 체계에서 경제는 그다지 민주적으로 운영되지 않고, 오히려 궁극적으로는 통제불가능한 시장에 의하여 운영된다. 이 체계에 대하여 언급한 것은, 혁명 이후의 사회실험에서 가능한 예시들을 나열하는 작업의 일부라 보아도 좋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시장경제 아래에서조차 생산자나 소비자들의 조합이 직접 운영하지 못해본 산업이나 기업은 사실상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1956년 설립되어 스페인의 바스크 지역에서 매우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몬드라곤 협동조합을 보라. 이 협동조합에는 생산기업, 도소매 협동조합, 신용협동조합, 기술학교 등이 포함되어 있다. 생산자와 소비자 협동조합에 대해 다루고 있는 글 역시 여럿 있다.(이를테면, 린덴펠트 & 로스차일드-휘트, 1982를 참조하라) 다시 말하지만, 협동조합은 매우 잘 작동한다. 그리고 너무나도 잘 작동하여 자본주의 체계에 아예 융합되기까지 한다. 피억압국가에서도 이러한 형태의 기업은 잘 작동하였다.(매슬레니코프, 1983)

나는 이러한 모형들을 지지하지도 반대하지도 않는다. 나는 아나키즘적 공산주의로 전진할 수 있도록 하는 모든 형태의 운동을 지지한다. 하지만, 그 중 무엇이 최선인지는 잘 모르겠다. 조건이 잘 갖추어진다면, 이 모든 것들은 제대로 작동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혁명 이후 각각의 다른 지역들이 각각의 모형들을 시도해보았으면 한다. 이러한 시도야말로 세계가 배울 수 있는 사회 실험이 될 것이다. 혁명 이후의 사회가 “이행기적”이라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혁명 이후의 사회는 언제나 이행기적 과정에 놓이게 될 “실험적 사회”가 될 것이라 보아야 한다.

실험적 사회라는 아나키스트적 방법론은 단지 경제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인류의 역사 깊은 곳에 그 뿌리를 박고 있는 여성에 대한 억압은 언제나 계급 착취의 다양한 형태와 함께 작동해왔다. 여성에 대한 억압은 사회가 아동을 길러내는 방식과, 우리가 사회화되는 방식과, 우리의 젠더와 깊게 연관되어 있었다. 모든 혁명에는 가장 억압된 노동계급을 포함하여 이루어져야 하고, 그렇지 않은 혁명은 실패할 것이다. 혁명이 여성을 배제한 채로 마법과 같이 이루어지더라도, 사회 변혁의 모든 영역에 여성을 포함하지 않는다면, 그 사회는 다시금 계급사회로 전락할 것이다.(스탈린주의 혁명이나 민족주의 혁명조차, 혁명의 과정에서 여성을 조직했다. 물론 새로운 주인님이 등장한 이후, 여성의 지위는 다시 이전의 상태로 돌아갔다.)

자본주의의 철폐는 자본가 계급의 철폐를 가져올 것이다. 하지만 성차별적 가부장제의 철폐는 남성의 철폐가 아니라 남성과 여성 사이의 새로운 관계의 건설을 가져올 것이다. 성애를 어떻게 나눌 것인가? 어떻게 결합하고 어떻게 아이를 기를 것인가? 이것에 대한 답을 우리가 제시할 수는 없다. 우리는 여성이 남성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지 않는 자유로운 사회를 건설할 뿐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여성은 잠재력을 최대한 끌어올릴 것이다. 아이에 대한 궁극적인 책임은 공동체가 질 것이고, 부모가 아이에 금전적으로 묶이지 않도록 할 것이다. 이러한 전제 위에서, 서로 사랑하고 관계맺을 각자의 방식을 발견하는 것은 그 공동체의 여성과 남성에게 달려있을 것이다.

자발적 연합과 자유 협동조합에 기반한 사회에서, 경제적으로 독립적인 여성들은 스스로의 자유를 쟁취하고, 남성우월주의에 맞서 스스로의 권리를 쟁취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여성해방에 동조하는 남성과의 동맹도 가능할 것이다. 성차별주의, 젠더역할, LGBT에 대한 억압 등은 투쟁 속에서 철폐될 것이다. 민주적 공동체는 젠더 간의 새롭고 더 자유로운 관계를 고민할 것이다. 이 속에서 남성이나 여성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자신과 같거나 다른 젠더에게 매력을 느낀다는 것이 무엇인지, 어떠한 젠더가 되고 싶은지에 대한 문제들이 재고려될 것이다.

자유로운 인민들은 사회실험을 통해 인종, 민족, 문화 간의 관계를 재정립할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노동계급의 가장 억압된 분자들을 조직하지 않는 혁명은 불가능하다. 미국의 경우라면, 아프리카계 미국인들, 라틴 아메리카계 미국인들, 아시아계 미국인들, 아메리카 원주민들, 이외의 유색인종들이 이 범주에 포함될 것이다. 북아메리카에서의 혁명은 다인종 · 다민족 · 다언어의 노동계급을 포괄하여 이루어져야 하고, 그 혁명의 선두에는 가장 억압된 이들이 서야 한다. 혁명은 빈곤과 빈민가, 실업과 노동현장의 끔찍함을 철폐할 것이다. 반권위주의 혁명은 억압당한 인종과 민족들이 스스로를 스스로가 원하는 방식으로 조직하는 것이 가능하게 할 것이다. 혁명이 또 다른 억압적 사회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렇게 되어야만 한다. 인종주의나 백인우월주의와의 지속적 전투를 치루어내지 않는다면, 옛 위계질서는 다시 등장할 것이고, 계급구조와 착취는 부활할 것이다.

특정 인종이 자기만의 공동체와 자기만의 연방으로 분열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면 된다.(국가 없는 사회에서는 분리독립의 대상이 될 국가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니 말이다.) 다른 인종과의 공존에 함께하고 싶은 이들이 있다면, 그렇게 하면 된다.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모든 동지들이 그것을 지지할 것이다. 하나의 연방 안에서, 사회 전체와 권리들을 공유하면서도, 분리된 “인종”의 조직으로 남고 싶어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렇게 하면 된다. 연방적으로 결합된, 다원주의적인, 실험적 사회에서는 이 모든 것들이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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