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역자 서문
우크라이나 농민 아나키스트 네스토르 마흐노는 1918년 6월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볼셰비키 지도자 스베르들로프와 레닌과의 광범위한 면담을 가졌다. 그로부터 수년 후 프랑스에 망명한 마흐노는 격동의 1917~18년을 회고록으로 남겼다. "나의 크렘린 방문"은 그가 볼셰비키 거물들과의 만남을 다룬 두 개의 챕터를 번역한 것이다. 이 인터뷰에서 발췌한 내용은 영어로 된 여러 저작에 인용되었지만, 전체 내용은 1979년 이 책에서 처음으로 소개되었다.
1918년 6월, 모스크바
1918년 6월, 볼셰비키 정권은 혁명과 내전의 참혹함으로부터 잠시 쉬어가고 있었다. 적대 세력에게 포위당하기는 했지만, 최소한 즉각적인 군사 위협에 놓여있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부터 동맹국의 붕괴와 종전까지의 짧은 기간 동안 지속된 이 반가운 휴식기를 통헤 볼셰비키는 그들의 정치적/군사적 권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러시아 아나키스트들이 보기에,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은 혁명의 분수령이었다. 동맹국과 강화를 체결하기 위해 볼셰비키는 영토와 자원 상당량을 넘겨주었다. 하지만 러시아 아나키스트들이 보기에 더 중요한 것은, 볼셰비키들이 대중이 주도하는 혁명을 지속하는 것을 포기하고 제국주의자들과 조약을 체결하였다는 것이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직후 볼셰비키들은 그들의 동맹을 배반했다. 사회혁명당 좌파와 아나키스트들 말이다. 반혁명분자들을 척결하기 위해 만들어진 체카는 어느덧 반볼셰비키 좌익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볼셰비키 정권은 모스크바의 아나키스트들을 진압했다. 미국 정부의 대표단이 아나키스트들이 자동차를 훔쳤다고 고발한 것이 그 명분이었다.(영국 정부 대표자였던 브루스 록허트에 따르자면, 아나키스트들이 훔친 것은 트로츠키의 자동차였다.)
4월 11일 밤, 체카는 아나키스트 근거지 26개를 동시다발적으로 습격했다. 가장 규모가 큰 근거지였던 말라야 디미트로브카 가의 ‘아나키의 집’에서는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십수명의 아나키스트와 체카가 사망했고, 수백명이 체포되었다.
아나키스트들에 대한 공식적 탄압은 공산당 내부에도 영향을 미쳤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이후 공산당 최고 지도부의 부하린 계파는 볼셰비키의 급격한 우경화를 멈추기 위한 쿠데타를 계획했다. 하지만 이 불만분자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정권에 대한 무비판적 지지로 입장을 선회했다.
1918년 우크라이나
러시아에서 혁명이 시작된 이후에도 우크라이나에서 혁명은 시작하지 않았다. 우크라이나의 산업은 주로 농업이었다. 1918년 우크라이나 인구 중 단지 1%만이 산업 노동자였고, 그마저도 동부와 남부에 집중되어 분포하고 있었다. 우크라이나의 농민들은 차르 권력의 전복과 정치적 공백에 대해 매우 느리게 반응했다. 하지만 그들의 혁명은 서서히 동력을 얻어가고 있었다. 우크라이나의 혁명은 대중 봉기의 역사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만큼 전방위적인 운동이 되어가고 있었다.
1917년 2월 혁명 이후 키예프에는 허약한 민족주의자 정권인 <첸트랄나 라다>가 수립되었다. 페트로그라드 임시정부로는 이 정부를 인정하지 않앗고, 그들을 계승한 볼셰비키 정권 역시 마찬가지였다. 1918년 초, 안토노프 장군이 이끄는 볼셰비키 군대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첸트랄나 라다는 어떠한 대중적 지지를 확보하지 못했고, 결국 침략군을 물리치지 못했다. 2월 초, 적군은 키예프를 확보했고, 첸트랄나 라다는 동맹국과 평화협정을 체결하면서 볼셰비키에 대항하기 위한 군사적 협조를 부탁했다. 오스트리아와 독일은 우크라이나에 파병했고, 4월 말에는 러시아군과 빨치산들을 소탕해내었다. 동맹국은 우크라이나를 점령하고 식량과 원자재들을 착취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첸트랄나 라다가 우크라이나의 점령에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 판단하고, 귀족 지주인 파벨 스코로파드스키의 쿠데타를 기획했다. 스코로파드스키는 스스로를 전 우크라이나의 헤트만이라고 자칭했다. 헤트만 정권은 봉건주의 반동의 대변인이었다. 그리고 사치스러운 의상과 종교적/역사적 의식을 다시 불러오는 것으로 이 반동은 완성되었다. 결과적으로 우크라이나의 농촌에서 혁명적 요소는 지하로 숨어들거나 해외로 추방되어야 했다.
마흐노
네스토르 마흐노가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그는 27살이었다. 그는 인생의 1/3을 감옥에서 보냈다. 그리고 그 중 7년은 모스크바의 부티르카 감옥에 수감되어 있었다. 그는 고향인 훌랴이폴레 지역에서의 아나키스트 활동으로 1908년 체포되어 종신형과 강제노역을 선고받았다. 그는 2월 혁명 이후 석방되어 훌랴이폴레로 돌아왔다. 이렇게 그는 10년 전 분쇄된 혁명 조직의 유일한 생존자가 되었다. 마흐노는 석방 직후부터 노동조합과 코뮌, 소비에트들을 조직하는 데에 투신했다. 첸트랄나 라다의 권위는 그의 활동영역까지 미치지 못했다. 지역의 농민들은 지주로부터 토지를 몰수하고 있었다. 1918년 1월, 볼셰비키가 우크라이나에 진입하였을 때, 마흐노와 그가 조직한 아나키스트 농민 조직은 첸트랄나 라다의 세력을 리보베레주나 우크라이나(드네프르강 동안)에서 온전히 몰아내면서 그들을 지원했다.
3개월 후,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군대가 볼셰비키들을 우크라이나 동부 국경 바깥으로 완전히 밀어낼 때, 마흐노의 농민 조직 역시 그들과 함께 퇴각했다. 4월 말, 타간로크에서는 우크라이나 아나키스트 대회가 열ㄹ렸다. 이 대회에서는 우크라이나 농촌에서 지하운동을 건설하자는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마흐노는 해당 대회의 대표로서 러시아에 방문하였다. 대회가 그에게 부과한 것은 그가 다른 아나키스트 그룹들과 접촉하고, 동시에 우크라이나 아나키스트들에 대한 볼셰비키의 태도를 판단하는 것이었다. 마흐노는 몇 차례의 끔찍한 모험을 겪으며 혼란스러운 초기 소련의 내륙을 가로질러 천천히 나아갔다. 그는 6월 초 모스크바에 도착하여 주요 아나키스트들과 다른 정파의 대표들을 만났다. 반볼셰비키 좌파는 아직까지는 용왼되었지만, 행동의 자유를 제한당한 채 미약한 세력만을 유지하고 있었다. 마흐노는 구 사회질서가 아직 전복되지 않아 혁명 활동이 여전히 활발한 지역만을 보았기에, 모스크바에 확산하고 있던 혁명의 침체와 패배주의를 견딜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회고록에서 우크라이나에서 전개될 활발한 아나키즘 운동에 반하여 러시아 지식인들의 "종이 혁명"을 비난하는 글을 쓴 것이다.
레닌과 스베르들로프
마흐노가 크렘린을 방문한 명목상의 목적은 숙소를 얻을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가 실질적으로 볼셰비키 지도부를 만나 그들이 우크라이나 농민 혁명에 대하여 어떠한 태도를 가지고 있는지 확인하려 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1918년 6월, 볼셰비키 정부는 아직 충분히 유연하고 관료화되지 않았기에 마흐노와 같은 “문맹에 가까운 농부”도 그저 크렘린을 거닐다가 최고 지도부를 만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는 부하린을 만났고, 이후 스베르들로프의 비서를 만났고, 결국 스베르들로프를 만났으며, 그는 레닌을 소개해주었다. 볼셰비키 지도자들 역시 마흐노와 비슷한 정도의 젊은 사람들이었고, 풍부한 혁명 운동의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부하린은 30세였고, 스베르들로프는 33세였다. 동료 볼셰비키들이 48세의 레닌을 “노인장”이라고 부를 정도였으니 말이다. 1918년, 레닌이 트로츠키에게 “만약 백군이 우리를 죽인다면, 부하린과 스베르들로프가 우리 뒤를 맡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했다는 것을 떠올려볼 때, 마흐노가 만난 사람들은 볼셰비키 최고 지도부 4인이었다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트로츠키도 당시 모스크바에 있었지만, 적군을 조직하느라 바쁜 상태였다.)
야코브 스베르들로프는 오늘날 많이 알려진 사람은 아니다. 그가 1919년 3월, 스페인 독감에 걸려 요절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소한 1918년까지 그는 전러시아소비에트중앙집행위원회의 의장으로서 이론적으로는 소련의 수장이었다. 나아가 그는 러시아 공산당의 실질적 서기장이기도 했다. 그의 후임 중 하나였던 이오시프 스탈린을 생각해보면, 그의 실질적 중요성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스베르들로프가 이처럼 중요한 지위를 얻은 것은 그가 볼셰비키의 지하 운동에 기여한 것에 대한, 그리고 그가 레닌에게 헌신한 것에 대한 보상이었다. 그는 다른 지도부들과 달리 이론가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다른 볼셰비키 지도자들로부터 “그는 이상이 없다... 그는 무엇하나 창안하지 못했다.”는 소리를 듣는 사람이었다. 스베르들로프는 재능있는 조직가였으며, 당에 대하여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당서기로서 당원들을 각 부서에 배치하기 위한 정성적 평가를 주도했다. 그가 무명의 농민 반란 주도자의 이야기를 그토록 오랜 시간 듣고, 나아가 레닌에게 그를 소개한 것은 아마도 사람의 능력을 판단하는 이 능력 때문이지 않았을까 한다.
면담
마흐노는 면담 이후 수년이 지난 뒤에야 그에 대하여 기록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의 기억이 정확하지 않을 가능성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볼셰비키 지도부들은 분명히 마흐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그 인상에 대해서는 모스크바의 동지들과 깊게 검토한 바 있다. 그렇기에 이 기록이 모두 온전한 사실은 아닐 수 있지만, 최소한 실제로 벌어진 일에 대한 근사치라고 바라보는 것은 합리적인 추론일 것이다.
하지만 마흐노의 회고록이 역사학적으로 정교한 필요를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히 고려해야 한다. 애초에 그는 역사학적 정교함을 위하여 글을 쓰지 않았다. 마흐노가 글을 작성한 것은 우크라이나의 농민과 노동자들에게, 그의 혁명이 왜 패배하였는지를 해석하고 설명하기 위함이었다. 그렇기에 그가 우크라이나의 주권에 대해 볼셰비키들과 논쟁하였다는 것이 사실일지는 의문이 든다. 그는 스베르들로프와 레닌을 대러시아 쇼비니스트로 묘사하면서, 스스로를 우크라이나 자치의 지지자로 묘사한다. 물론 1918년 당시 스베르들로프와 레닌이 우크라이나 자치에 반대했다는 것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당시의 마흐노에게 “우크라이나인”은 민족적 구분이라기보다는 첸트랄나 라다의 지지자들을 겨냥한 정치적 수사에 가까웠다. 그렇기에 민족성에 대한 강조는 아마도 후대에 첨가된 것으로 보인다. 마흐노는 망명 과정에서 민족문제에 대한 관점을 수립했다. 하지만 그는 너무나도 반국가주의였기에 민족주의자가 될 수는 없었다.
첫 만남
크렘린의 문 앞에서, 나는 레닌과 스베르들로프를 만나 대화를 나누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입구 뒤에는 군인 한명이 앉아있었고, 그는 모스크바 소비에트에서 발급받은 나의 신원 증명서를 확인한 이후 통행증을 발급해주었다. 이렇게 나는 크렘린 내부로 들어갔다. 크렘린 안에는 라트비아 소총수 한 명이 오가고 있었다. 나는 그를 우회하여 중앙 광장에 진입했고, 그곳에서 다른 경비병을 마주쳤다. 나는 그에게 내가 가려는 건물의 위치를 물어보았다. 그 이후부터 나는 자유롭게 크렘린 내부를 돌아다닐 수 있었다. 표트르 대제 시대의 대포와 총부터 ‘차르의 종’까지, 유명한 것들이 잔뜩 전시되어 있었고, 나는 그것들을 지나 궁전 중 하나로 들어갔다.
나는 그곳에서 왼쪽으로 돌아 이름을 기억할 수 없는 궁전 중 하나로 들어갔다. 그 궁전의 3층에서 나는 ‘당 중앙위원회’나 ‘도서관’ 등의 명패가 붙어있는 길고 비어있는 복도를 마주했다. 나는 목적지를 찾아 헤매면서 그 복도를 따라 걸어갔다. 누군가가 방 안에 있는지는 신경쓰지 않았다.
그러자 아무 것도 적혀있지 않은 방들이 나타났다. 그래서 나는 길을 되돌아가 ‘당 중앙위원회’ 앞에 서서 그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시오”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방 안에는 3명이 완벽한 침묵 속에 앉아있었다. 나는 그들 중에서 2-3일 전 볼셰비키 모임에서 만난 자고르스키 동지를 알아보았다. 나는 그들에게 중앙집행위원회는 어디에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 세명 중 한 명이(아마도 부하린이었을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서류철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그는 다른 동료들에게 “이 동지를 중앙집행위원회에 안내해주고 오겠소”라고 설명한 뒤 문으로 나아갔다. 나는 남아있는 동지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부하린을 따라갔다. 복도는 무덤마냥 조용했다.
부하린은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물었다.
“우크라이나에서 왔소.”
그러자 그는 나에게 우크라이나의 공포정치에 대하여, 그리고 내가 어떻게 모스크바까지 올 수 있었는지를 물어보았다. 우리의 대화는 계단 앞에서 멈추었다. 그곳에서 부하린 동지는 문 하나를 가리켰다.
우리는 악수를 나누었고, 부하린은 계단을 내려갔다.
나는 문을 두드리고 들어갔다. 여성동지 한 명이 용건을 물었다.
나는 답변했다.
“노동자와 농민, 병사와 코사크 소비에트의 중앙집행위원회 의장인 스베르들로프 동지를 만나고 싶소.”
그녀는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나의 신원증명서와 통행증을 받아갔다. 그녀는 그것을 확인하고 몇몇 정보를 받아적은 후 다른 통행증을 발급해주었다. 그 통행증에는 내가 가야할 사무실의 방 번호가 적혀있었다.
통행증에 적혀있는 그 사무실에 들어갔을 때, 나는 중앙집행위원회의 서기 한 명을 만났다. 그는 피곤해보이는 건장한 체격의 남성이었다. 나는 그에게 신원증명서와 통행증을 제시했다. 그는 나에게 흥미를 느꼈고, 질문을 시작했다.
“그러니까 동지는 남부러시아에서 온 것이지요?”
“나는 우크라이나에서 왔습니다.”
“동지는 케렌스키의 시대부터 이미 혁명방위위원회의 의장이었던 것이고요.”
“맞습니다.”
“그러면, 동지는 사회혁명당원인 것이오?”
“아니요!”
“지역 공산당과 무언가 관계가 있소?”
“몇몇 볼셰비키 활동가들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기는 합니다.” 나는 알렉산드로프스크 혁명위원회 의장인 미하일레비치 동지나 예카테리노슬라프의 투사들 몇몇의 이름을 이야기했다.
서기는 잠시 침묵하더니 ‘남부 러시아’ 농민들이 독일과 첸트날라 라다의 군대에 대해 가지고 있는 태도와 그들이 소비에트 권력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에 대해 질문했다.
나는 간단하게 대답했고, 그는 만족했다. 하지만 나는 더 정확한 설명을 하지 못한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그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고, 전러시아소비에트중앙집행위원회 의장인 스베르들로프 동지의 사무실로 나를 안내했다.
스베르들로프와의 면담
사무실로 가는 길에 나는 반혁명분자들이 퍼트린 헛소리를 떠올렸다. 물론 그 소문의 확산에는 레닌과 스베르들로프, 트로츠키의 정책에 적대하는 내 친구들이 기여한 것도 많기는 했지만. 그 소문에 따르자면 레닌과 스베르들로프와 트로츠키는 지상에 현현한 현인신이며, 수많은 경호원들이 그들을 지키고 있어 오직 윤허된 사람만이 그들을 친견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여기 내가 있다. 중앙집행위원회 서기 단 한명과 스베르들로프 동지를 만나러 가고 있다. 저 헛소문들이 얼마나 멍청한 것인지를 굳이 더 말할 필요는 없겠다. 스베르들로프 동지는 미소를 띄며 직접 문을 열어주었다. 그는 나에게 매우 친밀하게 굴며 내 손을 잡고 의자로 안내했다. 그 이후 서기는 방을 나갔다.
스베르들로프 동지는 서기보다 더 건장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의 지난 수개월간의 상황에 더 관심을 가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직설적으로 물어왔다.
“고통받는 남부에서 온 동지여. 당신의 활동에 대해 말해주겠소?”
“나는 우크라이나의 혁명적 노동자 대중이 참여하는 활동을 건설하고 있소. 이 노동자들은 적극적으로 혁명에 참여했소. 그들은 스스로의 총체적 해방을 위해 투쟁했소. 그 대오는, 감히 말하건데, 항상 혁명의 전위에 서있었지요. 그리고 지금, 우크라이나의 혁명 전선은 무너졌고, 이렇게 잠시나마 모스크바에 와있는 것이오.”
스베르들로프가 끼어들었다. “무슨 말을 하는 것이오, 동지? 남부의 농민들은 거의 다 쿨라크이거나 중앙 라다의 민병대가 아닌가?”
나는 웃음을 터트렸고, 그에게 훌랴이폴레 지역에서 아나키스트들이 조직한 농민들이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점령군에 맞서 취한 행동들을 알려주었다.
스베르들로프 동지는 당황하여 질문을 이어갔다.
“그렇다면 왜 그 농민들이 우리 적위대를 지지하지 않았던 것이오? 우리 정보부서는 남부의 농민들이 극단적 우크라이나 쇼비니즘에 중독되어 독일군과 첸트랄라 라다의 군대를 해방자로 맞이했다고 보고했는데 말이지요.”
나는 스베르들로프의 주장을 반박하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여러 민병대 부대들을 조직하고, 그들을 지휘하여 독일과 첸트랄나 라다의 군대에 맞섰음을 자인했다. 그리고 그에게 농민들은 스스로 강력한 군대를 조직하고, 적들에 맞설 수 있다고 재차 확인해주었다. 단지 지금의 농민들은 혁명 전쟁의 목적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것 뿐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나는 적위대는 단지 무장열차를 중심으로 철로 주변에서만 싸울 뿐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들이 적의 진격 여부를 신경쓰지도 않은 채, 병사들도 버려놓은 채, 수십마일을 포기했다고도 말했다. 이러한 부대들은 고립된 촌락에서, 무기도 없이, 총칼을 마주하는 농민들에게 신뢰를 줄 수 없는 것이다. 심지어 철로 가까운 곳에 있는 마을에 부대를 파견하지도 않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나는 스베르들로프에게 적위대는 농민들에게 무기를 제공하지도 않았고, 혁명의 적에 대한 반란을 선전하지도 않았으며, 함께 싸우자는 말을 하지도 않았다고 전했다.
스베르들로프는 나의 불만을 주의깊게 들었다. 그는 때때로 “어찌 이런 일이!”라며 추임새를 넣었다. 나는 보다 침착하게, 적위대가 철로를 방어하는 데에 집중하는 한 농민대중은 그들을 결코 신뢰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무장열차는 진격도 빠르지만 퇴각도 빠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크라이나의 농민대중은 혁명 속에서 압제자를 제거할 방법을 찾아내었다. 이 압제자는 단지 대지주나 부유한 쿨락뿐 아니라 이 자본가들의 하수인으로서 정치적/행정적 권력을 활용하는 국가 공무원도 포함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농민들은 프로이센 융커들과 헤트만의 학살과 총체적 파괴에 맞서 스스로의 성취를 방어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스베르들로프는 말했다.
“맞소. 적위대에 대한 동지의 의견은 정확하오. 그렇기에 우리는 그들을 붉은 군대로 재조직하려는 것이오. 남부 농민들이 그토록 혁명의 정신으로 가득 차있다면, 독일군과 헤트만을 청산하고 우크라이나에 소비에트 권력을 세워내는 날도 머지 않을 것 같소.”
“우크라이나에서 조직 중인 지하운동의 성과에 달려있겠지요. 이 운동의 필요성은 그 어느 때보다 지대하오. 우리의 운동이 투쟁적일 때에야 도시와 농촌의 대중들에게 독일과 헤트만에 맞선 반란을 선동할 수 있을 것이오. 우크라이나 내부에서 혁명적 성격의 반란을 조직하지 못한다면,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우크라이나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고, 그들을 몰아내지 않는다면 헤트만과 그 추종자들을 몰아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오. 잊지 마시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은 여전하고, 러시아 소비에트와 외국과의 관계를 둘러싼 정치적 요인들도 고려해야 할 것이오. 지금 시점에서 붉은 군대에 의한 공세는 상상하기 어렵소.”
스베르들로프 동지는 나의 의견을 들으며 메모를 작성하고 있었다.
스베르들로프 동지가 말했다. “이 안건에 대하여 나는 동지의 의견에 완전히 동의하오. 하지만 우선, 동지의 소속이 어디인지 궁금하오. 동지는 공산주의자요? 아니면 사회혁명당 좌파요? 동지가 우크라이나에서 왔다는 것은 동지의 억양으로 알 수 있겠소. 하지만 이 두 정파 중 어디에 소속되어 있는지는 억양에 드러나는 것이 아니잖소.”
그가 이 질문을 할 것이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예상할 수 있었다고 해서 덜 당황한다는 것은 아니다. 무어라고 답해야 할까? 스베르들로프에게 솔직하게, 내가 그의 당과 국가체계가 두 달 전에 공격한 아나키즘적 공산주의자라고 말하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정체를 숨기고 그에게 거짓을 말하는 것이 좋을까?
니는 머뭇거렸고, 스베르들로프는 이를 알아차렸다. 나는 이 면담 도중에 나의 사회혁명에 대한 관점과 정치적 관점을 밝히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를 속이기도 마찬가지로 싫었다. 그렇기에, 수초간 고민한 후 나는 스베르들로프에게 말했다.
“내 정치적 관점에 대해 왜 궁금해하는 겁니까? 내 서류를 보면 내가 누구이고, 내가 어디 출신이며, 그곳에서 내가 어떠한 활동을 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오. 나는 노동자들을 조직했소. 동시에 나는 빨치산과 민병대를 조직하여 우크라이나의 반혁명분자들에 맞서 투쟁했소. 이것이면 충분하지 않소?”
스베르들로프 동지는 이에 대해 사과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혁명가로서의 명예를 걸고 그가 나를 믿지 못한 것이 아니라고 확언했다. 그의 사과는 매우 진중한 것이었고, 그렇기에 오히려 나를 불편하게 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그에게 모든 것을 밝히기로 했다. 내가 바쿠닌-크로포트킨류의 아나키즘적 공산주의자라고 말이다.
“동지. 동지는 노동대중을 조직하고 그들이 자본가들에 맞서 벌여낼 투쟁을 지도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소. 그런데 동지가 어떻게 아나키즘적 공산주의자란 말이오?” 스베르들로프가 웃으며 물었다.
나는 대답했다.
“아나키즘은 현대 세계와 실질적 사건을 무시하기에는 너무도 현실적인 이데올로기요. 아나키즘의 실천가들은 달성해야할 목적과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을 명확히 이해하고 세계에 뛰어드는 것이오.”
“그것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오. 하지만 동지는 말라야 디미트로브카에 모여있는 모스크바 아나키스트들과 전혀 비슷하지 않은데 말이오.” 스베르들로프는 이 화제를 더 확장하려 했다. 하지만 나의 생각은 달랐다.
“말라야 디미트로브카의 아나키스트들에 대한 공격은 혁명의 미래 이익을 위해 다시는 일어아지 말아야 할 분명한 비극이었소.”
스베르들로프는 무언가를 중얼거리더니 의자에서 일어나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동지는 우리가 우크라이나에서 퇴각한 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그리고 농민들이 실제로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매우 잘 알고 있는 것 같소. 레닌 동지도 동지에게 이야기를 듣고싶어할 것이오. 잠시 전화 한 통만 해도 되겠소?”
나는 내가 레닌 동지를 도울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을 것이라 답했지만, 스베르들로프는 이미 전화를 걸고 있었다. 그는 레닌에게 남부 러시아 농민들이 독일군의 점령에 대해 가지고 있는 태도에 대하여 중요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동지가 있다고 전했다. 그리고 레닌과 면담 일정을 조율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스베르들로프는 전화를 끊었고, 다음 날 재방문을 위한 출입증을 발급해주었다. 그는 출입증을 건네며 말했다.
“내일 오후 한시, 이곳으로 바로 오시오. 그리고 함께 레닌 동지를 만나러 갑시다. 동지를 믿어도 되겠지요?”
“믿으시오. 하지만 우선 중앙위원회 서기장의 명의로 모스크바 소비에트가 나에게 임시 무료 숙소를 제공하도록 하는 명령서를 제공해 줄 수 있겠소? 숙소가 없으면 나는 공원 벤치에서 자야만 할 것이오.”
스베르들로프는 내일 그 문제를 정리하자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인사를 건네고 차르의 궁전을 나왔다. 라트비아 경비병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나는 차르 시대의 대포와 소총들을 돌아보며 내일을 기약했다.
나는 소비에트 농민부가 제공한 아파트로 돌아가지 않았다. 소비에트 농민부의 대표는 아르시노프 동지의 감방 동기인 부르체프였고, 그는 아르시노프 동지를 포함한 많은 동지들에게 숙소를 제공해왔다. 그것 자체가 그에게 점점 큰 부담이 되고 있었고, 나는 추가적인 부담이 되고싶지 않았다. 나는 아르시노프 동지의 또 다른 감방 도익였던 노동조합센터장을 만나러 갔다. 하지만 그는 불편함을 드러냈고, 결국 나는 “미친 놈”이라 불리는 아나키스트 마슬로프에게로 향했다. 나는 그를 강제노역장에서 만났던 적이 있었다.
나는 마슬로프 동지에게 잘 곳이 없으니 하루만 재워달라고 요청했다.
마슬로프 동지는 반대하지 않았고, 그렇게 나는 그의 집에서 하루를 보냈다. 내가 그의 강도 높은 개인주의가 모스크바 아나키즘적 코뮌주의자들의 조직의 관계를 망치고 있다고 비판한 적이 있었음에도, 그는 나를 환대해주었다.
레닌과의 면담
다음날 1시, 나는 크렘린에서 스베르들로프 동지와 만났다. 그는 즉시 나와 함께 레닌을 만나러 갔다. 레닌은 다정하게 나를 맞이했다. 그는 나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 내 어깨를 쓰다듬으며 안락의자로 안내했다. 스베르들로프 동지를 다른 의자에 앉게 한 후, 레닌은 비서에게 “두시까지는 우리를 방해하지 마시오”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그는 내 반대편에 앉아 질문을 시작했다.
그의 첫 번째 질문은 다음과 같았다.
“동지는 어느 지역 출신이오? 동지가 온 지역의 농민들은 농촌 소비에트에 모든 권력을!이라는 구호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소? 첸트랄나 라다와 같은 우리의 적들은 이 구호에 어떻게 반응하고 있소? 우크라이나의 농민들이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침략자들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소? 만약 그러했다면, 무엇이 부족했기에 지금껏 혁명을 용기있게 수호해혼 우리의 적위대가 그 반란에 호응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총봉기에 이르지 못한 것이오?”
나는 이 모든 질문들에 답했다. 레닌은 내가 하나하나 대답할 수 있도록 질문의 방식을 조절했다. 이를테면, 그는 “동지가 온 지역의 농민들은 농촌 소비에트에 모든 권력을!이라는 구호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소?”라는 질문을 세 번 반복했다. 아마 이러한 대화의 방식이 그의 뛰어난 재능이었으리라. 나는 이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농민들은 그 구호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소. 그들은 그 구호가 의미하는 바가 다음과 같다고 생각하오. ‘삶의 모든 영역에서, 모든 권력은 노동대중의 의식과 의지에 의해 정의되어야 한다.’ 농민들은 도시와 촌락에 건설된 노동자와 농민의 소비에트들이 분명하게도 혁명의 조직이자 부르주아지와 그 하수인인 우파 사회주의자 및 그 연립정부에 맞서 노동대중의 경제적 자주관리를 건설하는 수단이라 인식하고 있소.”
레닌은 깜짝 놀라 질문했다.
“동지도 그들의 해석이 옳다고 생각하오?”
“물론이오”
“흠, 그렇다면, 우크라이나의 농민들은 아나키즘에 경도된 것이 분명하오!”
“그게 나쁜 일이오?”
“그런 의미는 아니오. 오히려, 나는 그것이 우크라이나에서도 공산주의가 자본주의를 이겨내고 있다는 것이라 생각하여 매우 기쁘지요. 하지만 나는 이 현상이 자발적인지는 모르겠소. 아마도 우크라이나에서 아나키스트들의 선전활동이 잘 이루어져서일 것이고, 또한 아마도 그것이 오래가지는 못할 것이오. 그리고, 우크라이나의 반란이 반혁명분자들에 의해 무너지고 조직조차 남기지 못한 지금의 상황에서, 혹여라도 그 혁명적 열정이 이미 사라진 것은 아닐까 걱정이오.”
나는 레닌에게 지도자는 비관론자여서도 안되고, 히의론자여서도 안된다고 지적했다.
스베르들로프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러니까 마흐노 동지가 하는 말은, 우리가 농민대중 안에서 아나키즘적 경향성을 장려해야 한다는 것이오?”
“아. 동지의 당은 당연히 그것을 장려하지 않겠지요.”
이 때 레닌은 기회를 포착했다.
“오히려 우리가 왜 아나키즘을 장려해야 하오?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세력을 분열시키고, 반혁명의 길을 열고, 마침내 우리 스스로와 프롤레타리아트를 자멸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
나는 이에 불만을 표현했다. 나는 레닌에게 아나키즘은 반혁명이 아니고, 아나키스트들은 프롤레타리아트를 그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레닌은 답했다.
“내가 말하려던 것은 그게 아니오. 나는 그저 대중조직을 가지지 못한 아나키스트들은 프롤레타리아트와 빈민을 조직할 입장조차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오. 결국 그들은 피억압대중이 쟁취한 소중한 승리를 방어할 입장도, 대중이 그것을 방어하도록 선동할 입장조차 아닌 것이지요.”
레닌은 다음 질문이었던 “적위대와 그들의 혁명적 용기에 대하여” 자세한 대답을 듣고자 했다. 우크라이나에서 적위대가 벌인 문제가 이후에도 그 부대를 페트로그라드 밖으로 보내어 레닌과 그 당의 임무를 수행하도록 해야 했던 그의 걱정거리였던 것이 분명하다.
“1917년 12월부터 1918년 초까지, 나는 독일전선에서 퇴각하는 코사크의 무장을 해제하는 데에 참여했소. 그렇기에 나는 그 누구보다도 붉은 군대와 그 지도부의 ‘혁명적 용감함’을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오. 하지만, 레닌 동지, 동지가 알고 있는 정보들은 우크라이나에서 적위대의 활약을 과장하고 있는 것 같소.”
그리고 내가 이 답을 했을 때, 레닌은 감정적이 되었다. 그리고 그 감정은, 그야말로 증오스러운 사회질서에 맞서 열정적으로 투쟁했던 그 혁명가의 감정이었다.
“어떻게 말이오?”
“적위대는 혁명의 정신과 용기를 보여주었소. 하지만 최소한 동지가 말한 방식으로는 아니었지요. 적위대가 첸트랄나 라다의 하이다마키들과 독일군에 맞서 싸울 때를 봅시다. 그들은 분명 때때로 혁명의 정신과 용감함을 보여주었지만, 매우 나약한 모습도 보여주었소. 아마도 적위대가 급조된 것이고, 빨치산이나 정규군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싸웠기 때문일 것이오. 적위대는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오직 철로 주변에서만 싸웟을 뿐이오. 철로에서 10-15마일만 떨어진 곳조차도 점령하지 못하였단 말이오. 혁명을 지지하건 말건, 그 인접지대를 오가는 데에는 어떠한 제약도 없었소. 당연히 기습을 쉽게 당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소? 적위대가 전선을 펼치고 공격을 할 수 있는 거점은 철도가 지나는 도시들 뿐이었소. 하지만 그러면서도 후방지역과 철도 교차로 인근에는 방어선이 없었소. 혁명의 공세는 반혁명의 역공 앞에 무너져 내렸소. 너무도 급하게 무너져내려서, 적위대는 무장열차를 이용하여 퇴각하기 전까지 점령지에서 선전물을 제대로 나눠주지도 못했단 말이오. 농촌의 사람들은 적위대를 보지도 못했고, 당연하게도 그들을 지원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소.”
레닌은 재차 질문했다.
“대체 농촌의 혁명가들은 뭘 했단 말이오? 농업 프롤레타리아트들이 적위대에 새로 입대하거나, 아니면 아예 자체적인 적위대를 조직하여 반혁명의 공세에 대응할 생각을 하지 않고!”
“동지, 너무 앞서 나가지 맙시다. 우크라이나의 농촌에는 혁명 선동가들이 별로 없고, 따라서 많은 것을 할 수 없소. 하지만 반혁명 세력은 매일같이 수백명의 선동가를 보내고, 반혁명을 지지할 바람잡이들을 파견했소. 이런 상황에서 혁명가들이 세력을 건설하고, 반혁명에 맞서도록 조직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너무한 일이오. 이러한 과업은 모든 혁명가들이 함께 행하는 결정적 행동으로만 이룰 수 있는 것이오. 그리고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크라이나에서 반혁명분자들이 헤트만을 도와 권력을 공고하게 만드는 것을 용납할 수밖에 없을 것이오.”
스베르들로프는 나와 레닌을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레닌은 손뼉을 치며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 잠시 생각에 잠겨있다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동지의 말을 들으니 그저 안타까울 뿐이오.”
그는 스베르들로프에게 말했다.
“적위대를 붉은 군대로 재편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지에 맞서 승리할 수 있는 올바른 방식을 채택해야 하겠습니다.”
“맞습니다. 맞습니다.” 스베르들로프는 열정적으로 대답했다.
그리고 레닌은 나에게 말했다.
“동지가 모스크바에서 하고자 하는 일은 무엇이오?”
나는 내가 오래 머무를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타간로그 대회의 결정에 따라, 나는 7월 초까지는 우크라이나에 돌아갈 계획이었다.
“비밀리에 가려는 것이지요?”
“그렇소.”
레닌은 스베르들로프를 향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나키스트들은 자기 절제와 희생을 각오하는 사람들이오. 하지만 그들은 맹신적 광신도들이기도 하지요. 그들은 현재를 무시하고 먼 미래만을 바라보오.”
그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비판이 나를 지칭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듯,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지만 동지는 우리 시대의 문제에 대하여 보다 현실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어 보이는 군요. 만약 러시아 아나키스트들의 1/3만이라도 동지와 같았다면, 그렇다면 우리 공산주의자들이 그들과 특정 조건 하에 협력하여 생산자들의 자발적 조직을 건설해볼 수 있을텐데 말이오.”
이 순간 나는 레닌에 대한 존경심이 솟아나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나는 그가 모스크바의 아나키스트 조직 탄압에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 탄압은 다른 도시에서의 탄압의 신호탄이 될 것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렇기에 나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레닌에게 어떻게 말해야할지 고민하다가, 그저 직설적으로 말하기로 결정했다.
“혁명과 그 승리는 아나키즘적 공산주의자들에게 소중한 것이오. 이 관점에서 볼 떼, 그들도 다른 진정한 혁명가들과 마찬가지지요.”
레닌은 웃으며 반박했다.
“그렇게 말할 필요는 없소. 우리는 동지만큼이나 아나키스트들을 잘 알고 있소. 그들 대부분은 현재에 대해 아무 생각도 없소. 최소한 거의 생각이 없는 것은 분명하오. 하지만 현재는 너무도 중요한 것이고, 그렇기에 혁명가들은 언제나 현재에 대하여 고민하거나 현재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입장을 취해야 하오. 그렇지 않는 것은 그저 수치일 뿐이오. 대부분의 아나키스트들은 현재를 이해하지 않은 채 미래에 대해 생각하고 글을 쓰지요. 그리고 이것이 우리 공산주의자들이 아나키스트들과 다른 점일 것이오.”
레닌은 의자에서 일어나 걸음을 떼며 말을 이어갔다.
“암, 암. 아나키스트들은 미래에 대한 이상은 훌륭하게 가지고 있소. 하지만 현재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그들은 땅에 발을 붙이고 있지 않소. 그들의 태도는 개탄스러울 뿐이오. 그들은 내용이 없는 광신을 행할 뿐이오. 결국, 그들은 스스로 꿈꾸는 미래를 가져올 실질적 고리를 가지지 못하지요.”
스베르들로프는 나를 향해 비웃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레닌 동지의 말이 정당함을 부정할 수는 없겠지요.”
레닌은 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그래서 아나키스트들은 스스로가 현재에 대한 관점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는 거요? 아. 그게 문제라고 생각조차 하지 않겠군요.”
나는 레닌과 스베르들로프에게 나는 반쯤 문맹인 농민일 뿐이기에, 레닌이 아나키스트들에 대해 제시한 의견을 훌륭하게 반박하지는 못한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해야하겠습니다, 레닌 동지. 동지는 아나키스트들이 ‘현재’를 현실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아나키스트들이 현재와 어떠헌 연결성을 가지지도 못하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라고 했지요. 근본적으로 오해입니다. 우크라이나(당신들 볼셰비키들이 이르는 바, ‘러시아 남부’ 말이오)의 아나키즘적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이 ‘현실’에 공고하게 발을 딛고 있음을 수없이 많이 증명해 내었소. 첸트랄나 라다에 맞선 우크라이나 농촌의 투쟁 전체는 아나키즘적 공산주의자들이 이데올로기적으로 지도한 것이오. 아. 사회혁명당원들도 일부 조력하기는 했지요. 이들 역시 아나키즘적 공산주의자들과 완전히 다른 목표를 가지고 있지만 말이오. 볼셰비키들은 우크라이나 농촌에서 거의 존재감을 가지고 있지 않소. 설혹 그들이 침투해 들어왔다고 해도, 그 영향력은 미미하오. 우크라이나의 코뮌과 농민 조직들 대부분을 건설한 것이 아나키즘적 공산주의자들이오. 반혁명과 오스트리아/독일의 침략에 맞선 무장투쟁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조직적으로 지도한 것도 오직 아나키즘적 공산주의자들 뿐이오.”
나는 말을 이어갔다.
“우리의 과업을 인정하는 것이 동지의 당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해하겠소. 하지만 최소한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맙시다. 동지 또한 우크라이나의 자유 혁명 세력의 효과성과 투쟁 역량을 완벽히 알고 있지 않소? 그 동지들이 공통된 혁명의 성취를 방어하기 위해 영웅적으로 투쟁하게 만든 그 용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소. 그들 중 최소한 정반은 아나키즘의 깃발 아래에서 투쟁했소. 모크로우소프 동지, 마리아 니키포로바 동지, 체데레드니아크 동지, 가린 동지, 루네프 동지... 아나키즘적 공산주의의 깃발을 들고 혁명의 충실한 병사들을 이끈 지휘관들은 너무도 많소. 내가 속한 조직에 대해 말해보리까? 우리와 빨치산 조직들은 혁명을 방어하기 위해 나선 ‘자원자 부대’를 조직했소. 그리고 우리는 적위대의 지휘에 있어 필수불가결한 존재였소. 자. 레닌 동지. 동지가 우리 아나키즘적 공산주의자들이 땅에 발을 딛고 있지 않다고 말한 것이 얼마나 큰 오해였는지를 이해하였으리라 믿소. 이번 면담에서 내가 동지에게 말한 것은 의심의 여지없는 진실이오. 그리고 내가 말한 것이 동지의 결론과는 모순된 것이라는 것도 알 수 있을 것이오. 우리가 ‘현재’에 공고하게 발을 디디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원해 마지않는 미래를 불러오기 위한 수단을 찾고 있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현재의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고 있다는 것은 모두가 알 수 있는 일이오.”
여기까지 말하고 나는 스베르들로프를 바라보았다. 그는 얼굴이 붉어졌지만 계속 미소를 짓고 있었다. 레닌은 팔을 벌리며 말했다.
“아마도 내가 오해했던 것 같소.”
“그렇소. 레닌 동지. 동지는 우리 아나키즘적 공산주의자들에게 너무하였소. 아마도 동지가 우크라이나의 진정한 상황과 그곳에서 우리가 하고 있는 일들을 잘 몰라서 그랬겠지요.”
“거기에는 반박할 수 없군요. 하지만 현재의 조건에서, 오해는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은 알아주었으면 좋겠소.”
나는 약간 흥분하고 있었다. 레닌은 그것을 알아차리고 아버지와 같은 태도로 나를 달래고자 했다. 그는 면담의 주제를 다른 것으로 돌려놓으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성격이 나쁜 사람이다. 그렇기에 나는 레닌 동지를 존중하면서도 더 이상 면담에 관심을 둘 수 없었다. 레닌 동지가 다양한 주제를 이야기할 수 있는, 배울 것이 많은 사람인 것을 알지만, 나는 모욕감을 느꼈다. 나의 대답은 더 간략해졌다. 내 안의 무언가가 삐걱거리며 혐오감을 느꼈다.
레닌은 내 태도가 바뀐 것을 잘 다루려 노력했다. 그는 다른 것을 이야기하며 나의 화를 달래려 했다. 내가 그의 노력에 반응하여 조금씩 흥분을 가라앉히는 것을 보면서, 그는 질문했다.
“그러니까 동지는 비밀리에 우크라이나로 돌아가려는 것이지요?”
“그렇소.”
“혹시 도움을 좀 드려도 되겠소?”
“감사히 받겠소.”
레닌은 스베르들로프에게 말했다.
“남부에 정보원들을 보내는 것을 담당하는 동지가 누구요?”
“카르펜코 동지, 아니면 자톤스키 동지일 것입니다. 확인은 해봐야 합니다.”
스베르들로프가 우크라이나 비밀 정보원 담당자를 찾기 위해 전화를 거는 동안 레닌은 나에게 아나키스트에 대한 공산당의 입장이 그렇게 적대적이지는 않다고 설득했다.
“우리가 아나키스트들을 말라야 디브트로브스카에서 쫓아낸 것은 그곳에 이곳저곳에서 모인 범죄자들이 숨어있었기 때문이오. 그렇기에 그 사건의 주된 책임은 우리가 아니라 굳이 그곳에 머문 아나키스트들에게 있을 것이오. 그 아나키스트들은 말라야 디브트로브스카 근처의 건물로 이주할 수도 있었고, 그곳에서 이전과 같은 활동들을 이어나갈 수 있었소. 그것을 이해해주시면 좋겠소.”
나는 레닌에게 질문했다.
“말라야 디미트로브스카의 아나키스트들이 범죄자들을 숨겨주고 있다는 증거는 있소?”
“그렇소. 체카가 그 정보를 확언했소. 그렇지 않았다면 아무리 우리 당이라고 해도 그러한 수단을 사용할 권한은 없소.”
그 와중 스베르들로프가 돌아왔고, 카르펜코 동지가 비밀요원 파견을 담당하고 있고, 자톤스키 동지 또한 그 일을 잘 알고 있다고 말하였다.
레닌은 즉각적으로 말했다.
“자. 동지. 내일 오후 이후 언제라도 카르펜코 동지에게 가서 우크라이나에 밀입국에 필요한 도움을 요청하시오. 카르펜코 동지는 전선을 넘어갈 수 있는 경로도 알려줄 것이오.”
나는 위화감을 느끼고 질문했다.
“전선이라니요?”
“최신의 정보까지는 모르나 보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에는 전선이 세워졌소. 독일군이 그 전선을 지키고 있소.”
나는 레닌에게 말했다.
“그런데도 우크라이나를 ‘러시아 남부’라고 보는 것이죠?”
레닌은 답했다.
“동지. 무언가라고 ‘본다’는 것과, 무언가‘이다’는 다른 말이오.”
내가 반박할 겨를도 주지 않고 그는 말을 덧붙였다.
“카르펜코 동지에게 내가 동지를 보냈다고 말하면 되오. 만약 카르펜코 동지가 믿지 않는다면, 나에게 전화하라고 하시오. 카르펜코 동지 사무실의 주소는 여기있소.”
우리 모두는 자리에서 일어섰고, 악수를 나누고, 정중한 감사를 교환했다. 나는 레닌의 사무실을 나왔다. 모스크바 소비에트에 무료 숙소를 제공해달라는 요청은 온전히 잊어버리고 말이다.
그렇게 나는 크렘린을 나와 다시 부르체프 동지를 만나러 간 것이다.
역자 후기
레닌의 도움으로 마흐노는 우크라이나에 돌아갈 수 있었다. 볼셰비키는 마흐노에게 교사용 여권을 발행해주었다. 볼셰비키는 마흐노가 우크라이나에서 그들의 정보요원으로 일해주었으면 했지만 마흐노는 그것은 거부했다. 마흐노는 자신의 고향 훌랴이폴레에서 반동들이 집을 불태우고 형을 살해한 것을 알게 되었다.
마흐노와 스베르들로프/레닌의 면담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것이라는 증거는 없다시피 하다. 면담 이후에도 볼셰비키의 대우크라이나 정책에는 변함이 없었다. 볼세비키는 농촌지역에서 본인들의 세력을 과신했고, 1918년 8월 7일 대규모 봉기를 호소했다. 결과는 대학살극이었다. 그리고 1918년 말 그들이 다시 우크라이나로 진군했을 때, 그들은 이전의 실수를 동일하게 반복했고, 동일한 결과를 받아들었다. 농촌지역에서 ‘인민의 전쟁’을 벌여야 한다는 마흐노의 주장은 2차 세계대전 후 제3세계의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에 의하여 반복되었다. 역설적인 일이다.
우크라이나에서 마흐노는 자기 이름을 딴 운동을 조직해냈다. 마흐노우슈치나는 우크라이나 남동부에서 3년간 투쟁하며 아나키스트 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다. 군사적 관점에서 마흐노 마적단은 내전의 결과에 큰 영향을 주었다. 데니킨과의 전투에서 많은 아나키스트 투사들이 목숨을 희생했고, 모스크바를 향해가던 백군의 보급선을 잘라내는 데 성공했다.
레닌과 크로츠키는 마흐노의 활동을 주의깊게 지켜보았다. 그들은 한때나마 우크라이나 일부를 아나키스트들에게 할양하고 그 사회실험을 계속하게끔 하는 것을 고민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마흐노우슈치나는 수천명의 농민들의 죽음 속에 잠겨들었다.
1920년, 엠마 골드만과 알렉산더 버크만은 레닌을 방문하여 러시아에 수감되어 있는 아나키스트들의 사면을 요구했다. 레닌은 다음과 같이 응답했다.
“아나키스트라고? 개소리하지 마라! 우리 감옥에는 분명 폭도들이 있다. 그리고 마흐노주의자들도 있다. 하지만 ‘아나키스트’ 이데올로그같은 자들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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