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운동과 우리의 관계에 대한 입장의 문제는 아나키스트들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다.
우리는 매우 오랫동안 이에 대해 논의해왔고 다양한 경험을 해왔다. 하지만 아직 완전한 합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마 이 문제에 대한 완전하고 영속적인 결론은 존재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매 투쟁마다 상황과 조건은 항상 다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우리가 다양한 비상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기준들은 만들 수 있다고 본다.
우리는 모든 인간의 정신적, 물질적 고양을 원한다. 모든 사람에게 자유와 안락을 제공할 우리의 혁명은 법과 법령의 힘으로 위로부터 이루어질 수 없다. 오로지 그것을 갈망하는 사람들의 의식화된 의지와 직접 행동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우리는 확신한다.
우리의 이상을 가능한 완벽하게 설계하고, 선전과 영웅적 행동을 위한 그룹을 구성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노동대중이 없이는 현존사회를 전복하는 것도,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것도 불가능하기에, 우리는 최대한 많은 노동대중을 우리 편으로 개종시켜야 한다. 그리고 현재 무해하게 복종하는 상태에 놓여있는 대다수 프롤레타리아트를 아나키즘으로 인도하기 위해 우리는 선전 그 이상의 행위를 해야만 한다. 일상생활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은 사상가의 달변보다 더 큰 변화의 촉매다. 그렇기에 우리는 대중의 삶 속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행해야 한다. 상황이 허락하는 모든 수단을 사용하여 대중의 반란의 정신을 일깨워야 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해방으로 가는 길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리고 이 수단 중에서 노동조합운동이 첫 손에 꼽히는 것임은 분명하다. 우리는 노동조합운동 진영 안에서 노동조건의 개선을 위해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만날 수 있다. 이들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선택한 수단은 잘못되었을 수 있다. 적어도 우리가 보기엔 그러하다. 하지만 최소한 그들은 착취에 굴복하지도 않고, 착취당하는 것을 정당화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투쟁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들이 착취당하는 동료 노동자들에 대한 연대감을 가지도록 조장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연대감이야말로 인간의 인간에 대한 지배를 철폐할 결정적 투쟁을 선도할 것이다. 우리는 그들이 점점 더 많은 것을 요구하도록, 더 강력한 수단을 동원하도록 유도할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스스로와 타인들을 투쟁 속에서 단련하고, 승리를 통해 이득을 얻어 노동조합과 직접 행동의 힘을 키우고 더 큰 요구를 제기하며, 역으로 그들로부터 더 강력한 수단과 더 급진적인 해결책의 필요성을 배울 수 있다.
무엇보다, 노동조합운동은 혁명의 그 날 생산과 교환의 조직을 담당하게 될 기술 노동자들을 준비시키는 기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운동에는 단점과 위험성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우리는 노동조합운동에 관한 아나키스트의 관점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 지를 고민할 때, 이 단점과 위험성을 고려해야 한다.
경험적으로, 세계 각국에서의 노동조합운동은 광범위한 진보와 인류애를 위한 저항과 반란의 운동으로 시작하였다가, 얼마되지 않아 세력을 확보하고, 이에 따라 타락하여 이기적이고 보수적이며 즉각적이고 제한적인 이익만을 추구하는 운동으로 변모한다. 그리고 스스로 더 비대한 조직이 되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관료제가 된다.
이러한 경험 때문에 많은 동지들은 노동조합운동에서 철수하고, 그 운동의 반동성과 해악에 맞서 싸우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 결과 우리의 영향력은 줄어들어버렸고, 이 운동을 노동자 일반의 해방이 아닌 개인적/정파적 이익으로 전용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노동조합운동의 영역을 넘겨줘 버렸다. 결국 이제 남은 노동조합이라고는 근본적으로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좁은 정신의 조직들(영국 노동조합이 이러하다)과 주로 “사회주의자”들로 구성된 정치인들의 영향 아래에서 투표 기계로 전락한 생디칼들 뿐이다.
다행히도 몇몇 동지들은 노동조합 운동이 항상 그 자체로 건실한 원칙을 가지고 있으며, 정치가들에게 그것을 내어주기보다는 그 방다향을 시 한번 원래의 목표로 돌려놓고, 이로부터 아나키즘적 대의의 이익을 취하는 작업을 수행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은 주로 프랑스에서 '혁명적 조합주의'라는 이름 아래 모든 부르주아적이고 정치적인 영향력으로부터 독립적으로 노동자들을 조직하여 임금 노예들의 고용주에 대한 직접 행동으로 그들의 해방을 쟁취하여야 한다는 새로운 운동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거대한 진보였다. 하지만 그 성취와 상상력을 과장하지는 말자. 이르레면 일부 동지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우리가 조합주의의 진보를 통해 아나키즘을 실현할 수 있다는 착각같은 것 말이다.
모든 제도는 그 기능을 확장하고, 스스로를 영속화하며, 그 자체로 목적이 되려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조합주의 운동을 시작하고 그 안에서 가장 두드러진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조합주의를 아나키즘과 동등한 것으로 간주하거나 적어도 그 실현을 위해 그 자체로 다른 모든 수단을 대체하는 최고의 수단으로 간주하는 습관에 빠지게 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우리의 입장을 잘 파악함으로서, 오류에 빠질 위험을 피할 필요가 있다.
혁명적 조합주의 운동의 지지자들은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이 운동은 지금까지 노동조합운동을 타락시킨 요소들을 모두 가지고 있다. 이 운동은 현재의 조건을 전제로 노동자들의 현재 이익을 옹위하는 운동이다. 그렇기에 이 운동은 현존 사회의 장벽을 넘어서는 이익을 고려할 수 없다.
노동계급의 이익이 전체 계급의 이익과 일치하는 한, 혁명적 조합주의는 그 자체로 연대를 교육하는 좋은 장이 될 수 있다. 일국 노동자들의 이익이 전세계 노동자의 이해관계와 일치한다면, 혁명적 조합주의는 국제적 연대를 교육하는 장이 될 것이다. 현재의 이해관계가 미래의 이해관계와 모순되지 않는다면, 혁명적 조합주의는 혁명을 준비하는 장이 될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러한 일은 흔히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이해관계를 조화롭게 가져가고, 모든 인민들 사이에 연대를 건설하기를 갈망한다. 이것이 우리가 투쟁하는 이유다. 하지만 이것은 실질적 조건은 아니다. 계급간 이해충돌의 문제만이 아니라, 심지어 같은 계급 안에서도 이해관계는 충돌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세계는 이해관계의 상호의존성과 상호적대성,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 대변된다. 그리고 자본주의 생산체계가 만들어낸 사회에서는, 즉, 생산이 생산수단의 독점에 기반하고, 사용자들의 이익을 위해 국제적으로 생산이 이루어지는 사회에서는, 필요한 노동보다 더 많은 노동력이 존재하고 노동자의 손에 쥐어지는 것이 턱없이 적은 이 사회에서는 이것 이외의 다른 원칙은 있을 수 없다.
어떠한 개인도, 어떠한 계급도, 어떠한 민족도 오롯이 홀로 설 수 없다. 각 개체의 삶의 조건은 인류 전체의 일반적 삶의 조건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진정한 평화를 이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혹은 상대를 공격하기 위한 싸움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고용안정은 각 개인의 이익에 기반한 요구다. 하지만 그 요구는 자국의 실업자들이나 타국의 이민자들의 이익에 반하는(혹은 경쟁하는) 것이다. 같은 직종의 다른 노동자들에 비해 더 좋은 노동조건을 유지하는 것은 각자의 이익에 기반한 요구다. 비싸게 팔고 싸게 사는 것 역시 각자의 이익에 기반한 요구다. 그렇기에 노동자들은 생산자로서 소비자들에게 대립하고, 소비자로서 생산자들에게 대립하게 되는 것이다.
단결, 합의, 착취자들에 맞선 연대투쟁. 오늘날 이러한 것들을 얻어내는 유일한 방법은 이상을 향한 마음으로 움직이고, 개인의 이익을 공통의 이익을 위해 희생하는 법을 배우고, 오늘의 이익을 미래의 이익을 위해 포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연대와 정의, 인류애라는 이상은 파괴를 통해서만, 모든 합법성을 포기하고 모든 현존기구를 철폐함으로서만 달성할 수 있다.
노동자들에게 이러한 이상을 제안하기 위해서는, 소수를 위한 즉각적 이익보다 미래의 광범위한 이익을 중요하게 여기도록 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조건에 적응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을 혁명으로 선도하는 선전과 행동을 위해서는, 아나키스트들은 노동조합 안팎에서 노력해야 한다.
혁명적 조합주의로는 이것을 할 수 없다. 설혹 가능하다 해도 제대로는 할 수 없다. 조합주의는 필연적으로 현재의 이익을 추구한다. 그리고 이 이익은 혁명을 위한 것이 아닐 때가 많다. 노동조합은 법의 테두리를 크게 벗어날 수 없다. 노동조합은 어느 순간에는 사용자나 정권과 교섭해야만 한다. 노동조합은 조합원들의 이익을 대중의 이익보다 우선해야 한다. 노동조합이 이것을 하지 않는다면, 사실 존재할 이유가 없다. 아나키스트나 사회주의자만을 조합원으로 받는 노동조합이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뒤처진 대중들을 교육하고 투쟁에 익숙해지게 만든다는 최소한의 효용도 저버린 것인데.
뿐만 아니라, 노동조합은 사장들로부터 더 나은 삶의 조건을 얻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열려 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그들은 그들이 사회의 일반적 구성에 대해 어떤 의견을 가지고 있건, 자연스럽게 그 지향을 완화할 수밖에 없다. 우선, 함께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겁을 먹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고, 또한 조합원의 수가 증가하는 것과 비례하여 의식화된 초동주체들의 의견은 당장의 소소한 이익에만 몰두하는 다수 속에 묻혀 버리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모든 노동조합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일정 수준의 영향력을 확보한다면, 그들은 합의주의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사장에 맞서기보다는 사장과 상생하고자 하고, 조합원들을 위한 특권들을 만들고자 하며, 특권을 나눌 사람이 너무 많으면 안되기에 조합 가입이나 공장 입사에 어려운 조건을 붙이기 시작하고, 어마어마한 자금을 확보하고, 정치 권력의 도움을 찾으며, 무엇보다 협조와 상호이익이라는 틀에 갇히게 되며, 마침내 보수주의적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볼 때, 혁명적 조합주의 운동이 아나키즘 운동을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해보인다. 그리고 조합주의 운동이 교육과 혁명적 준비의 수단으로 사용된다는 것조차도, 그것이 아나키스트들의 추동과 행동, 비판 속에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도 말이다.
그러므로 아나키스트들은 자신을 조합주의 운동과 동일시하는 것을 삼가야 하며, 조합주의는 자신들이 활용할 수 있는 선전과 행동의 수단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아나키스트들은 노동조합 안에서 혁명적 추동을 진행하면서 노동조합이 사회혁명적 관점에서 전투의 기구로 기능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아나키스트들은 노동조합 안에서 교육적 영향력을 확보하여 그들이 전투성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조합원들에게 이념을 선전하고, 파업을 할 수밖에 없는 조건을 만들고, 조합원들을 정치적으로 계도하고, 조합원들이 정치인들이나 권력자들을 불신하고 증오하도록 만들며, 조합원들이 다른 투쟁에 연대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아나키스트들은 노동조합 안에서 이기적이고, 평화주의적이며, 보수적인 요소들과 내부적으로 싸워야 한다. 그들의 직업적 자부심을 부수고, 단사에 국한된 좁은 사고방식을 확장시키고, 그들이 자본을 축적하는 것을 막고, 노동조합이 복지에 천착하는 것을 저지하며, 노동조합이 선량한 국가기구를 신뢰하는 것을 막아내고, 사용자들과 친분을 다지는 것을 저지하고, 관료들을 영구적으로 채용하는 것을 저지해야 한다.
오직 이 조건에서만, 아나키스트들이 노동조합 운동에 참여하는 것에서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전술은 때로는 특정 집단의 즉각적인 이익에 해를 끼치는 것처럼 보일 수 있고, 실제로 그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나키즘적 대의, 혹은 인류의 일반적이고 영구적인 이익을 위한 문제일 때는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혁명을 준비하는 동안 정부와 고용주로부터 가능한 한 많은 자유와 복지를 쟁취하기를 확실히 바란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노동자들의 희생으로 얻어지는 일시적인 이익을 위해 미래를 타협하지 않을 것이다.
조심하자. 노동조합운동을 포기한다는 오류는 아나키즘에 있어 커다란 상처로 남았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러함으로서 아나키즘의 고유한 성격 자체는 오염되지 않았다.
아나키즘적 운동과 노동조합주의를 혼동하는 오류는 더욱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의회 투쟁에 뛰어들자마자 겪었던 일이 우리에게도 일어날 것이다. 그들은 수적으로는 세력을 확대했지만 날마다 덜 사회주의적이 되었다. 노동조합운동 안에서의 우리도 숫자는 더 많아지겠지만 아나키즘적 성향을 버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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