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과학과 아나키즘' 논고에 대한 의견 - 에리코 말라테스타



크로포트킨의 아나키즘에서의 정의(니노 나폴리타노의 글)에서 그는 아나키즘이 처음 퍼질 당시 널리 퍼젔던 과학적, 철학적 사상을 자신의 위대한 명성을 이용하여 결합시켰고 그의 사상에 대해 아나키스트들은 비판 하나 없이 모두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보기엔 그러한 인식은 잘못되고 유해해보이기까지 한다. 서로 다른 것들을 혼동하고 있고 이를 받아들이는 아나키스트들은 윤리적인 문제를 다뤄야할 때 조차 실증주의적이고 자연주의 학파적 입장으로 다가가며 이런 입장으로서 다른 모든 이들의 추론을 약화시키며 강요하는 모순으로 인해 해롭다.

크로포트킨은 ‘현대 과학에서의 아나키즘의 위치’를 고치려는 시도에서 ‘아나키즘적 상태는 인간 사회를 제외한 모든 자연 현상에 대해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결정론적 해석에 기초한 우주의 개념’이라고 쓴 바 있다.

이건 철학이다. 이 철학을 받아들일 수도 있고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이것은 과학도 아나키즘도 아니다.

과학은 알려져 있거나 알려져 있어야 한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들을 수집하고 체계화하는 것이다. 과학은 어떤 사건을 설명하고 그 사건을 일반화하여 설명할 수 있는 법칙 즉 사건이 발생하고 반복하는 이유를 설명하고자 하는 학문이다. 이것은 특정한 지적 욕구를 충족시키면서도 매우 효과적인 권력의 도구로서도 작용할 수 있다. 과학은 자연법칙의 틀 안에서 인간 의지의 한계를 보여주지만 그 법칙을 다른 방향으로 바꿀 수 있는 수단 또한 제공하기에 인류의 실질적인 자유를 증가시키기도 한다. 과학은 모두에게 평등하게 적용한다. 선과 악, 해방과 억압 모두에게 공평하게 작용한다.

철학은 알려진 것에 대한 가설적 설명이거나 알려지지 않은 것을 추측하려는 시도이다. 철학은 적어도 지금까지는 과학의 능력을 벗어난 문제들을 제기하면서도 그 문제에 대한 답을 증명할 수 없었기에 철학은 서로 다르고 모순되는 해결책을 제시하였다. 철학이 단순한 말장난과 몽상으로서 전략하지 않았다면 철학은 과학의 안내자나 지적 자극제의 역할을 할 수 있었겠다만 그렇지 못하였다.

반면 아나키즘은 실제 또는 가정된 자연법칙에 근거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인간의 의지에 따라 실현될 수 있고 실현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인간의 열망에 기초한다. 아나키즘은 과학이 자연과의 투쟁에서 인간에게 제공되는 여러 수단과 대조적인 의지에 대항하는 수단으로부터 힘을 얻는다. 이는 사람들이 더 잘 추론하고 현실과 몽상을 잘 구별하도록 교육하게 하는 철학적 사고의 진보로부터 이득을 얻게 하기도 하지만 모순되는 영역에 빠지지 않는 한 과학이나 어떠한 철학적 체계로도 혼동될 수 없다.

하지만 결정론적인 자연법칙이 현실로 알려진 사실들을 설명할 수 있는가?

나는 이것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선 그것이 적어도 아나키즘, 또는 현실 속 지금과는 다른 상태를 원하는 열망과 화해하고 논리적으로 공존할 수 있는 개념인지 살펴보려고 한다.

역학의 기본 원리는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다. 에너지는 새로 만들어지지도 않으며 사라지지도 않는다.

물질은 같은 양의 에너지의 투입 없이는 다른 에너지를 만들 수 없다. 많은 열을 만들고 싶다면 그 양과 같은 양의 냉각 역시 필요하다. 한 형태의 에너지를 다른 형태로 변환(운동에너지를 열로, 열을 전기로, 혹은 반대로) 하지 않고는 에너지의 형태는 스스로 사라지지 않는다. 요컨대 물리적 세계는 10펜스를 가지고 5펜스를 쓴다면 지갑엔 5펜스만 남는다는 지극히 기본적인 사실에 지배를 받는다.

하지만 아이디어는? 아이디어는 수많은 이들에게 전달될 수 있지만 그 과정에서 아무것도 잃지 않는다. 아이디어는 더 많이 전파될수록 그 힘과 효과는 더더욱 커진다. 교사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지만 그렇다고 교사가 아는 지식이 사라지진 않는다. 오히려 교사는 그러한 가르침을 통해서 자신의 마음을 보다 더 풍요롭게 만들 수 있다.

한 살인마가 던진 폭탄이 천재를 죽일 때 과학은 죽은 천재가 살아있었을 적에는 어떻게 인간이라는 물질이 구성되고 서로 상호작용하는지를 설명하고 시체가 사라진 후에는 어떠한 형태도 남지 않지만 동시에 신체에 남아있던 모든 원자가 다른 물질로서 구성됨으로써 물질적 손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아이디어는 그 천재가 남겨놓은 생각과 발명품이 남아 확산되어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 말한다. 오히려 그가 죽지 않았다면 죽어서 생기는 더 발전된 아이디어가 없을 거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 힘. 정신의 산물로서 구성된 이 특별한 특성은 역학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제발 기계론적인 과학이 설명하지 못하는 것을 다른 방식으로 설명해달라고 하지 말아 달라.

나는 철학자가 아니다. 그러나 고작 몇 가지 지적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고 철학자가 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문제에 대한 답을 모른다고 불만족스러운 답을 받아들일 의무도 없다. 특히 철학자란 이들이 제시하는 답들이 너무나 많고 모순적일 때 특히나 그렇다.

이제 역학이 아나키즘과 같이 양립하는 것인지 살펴보자.

기계론적 관점에서(그리고 이론적으로 밝혀진 현실과 무신론자들의 관점에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결정되어 있다. 그 무엇도 결정된 값과 다를 수 없다.

실제로 아무것도 생성되지 않고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다면, 물질과 에너지가 (그것이 무엇이든) 기계적 법칙의 지배를 받는 고정된 실체라면, 모든 자연현상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 총량을 가진 불변의 관계이다. 이에 크로포트킨은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고 인간의 개인적 및 사회적 생활은 꽃의 피어남과 같이, 또한 개미나 벌의 사회생활의 발전과도 같이, 자연적 현상이니까 우리가 꽃에서 인간으로, 또한 해리의 정주지에서 인간의 도시로 연구를 진행해 나갈 때, 지금까지 우리의 연구에 극히 유효했던 방법을 저버리고 형이상학의 영토에서 다른 방법을 빌려올 까닭은 조금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앞서 18세기의 위대한 수학자 라플라스는 ‘자연을 움직이는 힘과 자연을 구성하는 물질들의 각각의 상태를 고려한다면 우리의 위대한 지성으로 충분히 현재뿐만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 또한 예측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이건 순수한 기계론적 사고다. 모든 것은 있어야 하고, 있어야만 한다. 모든 물질은 반드시 위치(어디에 있음), 움직임(어디로 가고자 함), 강도(변화에 저항하는 힘), 및 속도(시간당 위치 변화) 등의 모든 정보 값을 가지고 있으며 가저야만 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자유의지’, ‘책임’, ‘자유’ 같은 단어가 도대체 어떤 의미를 줄 수 있는가? 기계론적 관점에서 인류 역사의 예정된 사건은 우리가 별의 궤도나 꽃의 성장을 바꿀 수 있는 것처럼 바꿀 수가 없다. 그리고 나선?

도대체 이게 아나키와 무슨 관련이 있는가?

아나키스트들이 파리 법정에서 한 동지(에티방)가 자기 자신을 변호했을 때 했던 말을 인용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실제로 범죄를 저질렀다면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인해 범죄를 저질렀으며 주된 책임은 개인보단 사회 전체에 있다는 것으로 사회에 대한 비판으로서 변론을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 불쌍한 동지는 경찰의 폭력에 희생되어 철학에 흠뻑 젖어버렸고 훌륭한 결정론자로서 자신이 자유의지를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책임을 지거나 처벌을 받을 수 없으며 자연의 모든 것은 인과율이 결정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했다.

냉정하지만 재치 있는 판사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래 당신 말이 맞다. 그렇기에 나는 당신을 정의를 이유로 처벌할 수 없다. 당신이 말한 것에 의해 당신을 비난할 수 조차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와 같은 이유로 당신을 속인 신부도 책임이 없다. 당신을 굶긴 고용주도, 당신을 고문한 이들도 책임이 없으며 마찬가지로 나 또한 그대에게 고된 노동이나 단두대를 선고했을 때 내가 지어야 할 책임도 없다.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나야만 하니까.’

그래. 다시 돌아와서, 아나키즘은 이 모든 것에서 대체 뭘 할 수 있을까?

무수히 많은 철학적 체계가 있으며, 탄탄한 기초가 없는 모든 것들이 그렇듯 이 역시 사회적 트렌드를 따라간다. 지난 세기말에는 유물론이 대세였다면, 이번 세기에는 관념론이 대세이고 내일은 철학자들이 우릴 위해 다른 무언가를 발명할 수도 있다.

크로포트킨처럼 아나키즘을 위해 박해와 고문에 직면하는 이들, 불의와 억압에 맞서 사랑하고 고통받고 저항하는 아나키스트들은 과연 철학자와 과학자가 우주라는 이 거대한 신비를 설명해 줄 때까지 가만히 나 있어야 하는가?

어떤 철학적 체계를 원하고 있든 아나키스트가 될 수 있다. 유물론적인 아나키스트뿐만이 아니라 영성주의자도, 일원론적이어도, 다원주의자여도, 불가지론자여도, 그리고 나처럼 인간 지성이 가능한 만큼 발전시킬 수 있는 미래에 대해 낙관적으로 다가는 이도 있으며 이런 나를 무지하다고 부르는 이들 또한 아나키스트가 될 수 있다.

이론들이 현실 속 삶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에 대해 이해하는 것은 확실히 어려운 일은 맞다.

무신론과 기계론과 같은 기계론적 이론들은 논리적으로 무관심과 관성으로 이어지고 도덕적, 물리적 문제 모두에서 모든 것을 그저 순순히 받아들일 뿐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철학적 개념은 실천과 거의 또는 전혀 관련이 없다.

어쨌든 유물론자들과 ‘기계론자’들은 자신의 논리에도 불구하고 종종 이상을 위해 자신들을 희생한다. 종교인들 역시 영원한 천국의 기쁨을 맛보기 위해서 이 세상이 행복해지길 바라고 병에 걸리거나 죽음을 두려워지면 의사를 부른다. 어린아이를 잃은 가난한 어머니는 자신의 아이가 천국에 가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의 그녀는 울고 절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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