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우루과이 노동조합운동은 오래전부터 쿠데타에 맞서 싸우기 위한 기준을 분석, 토론 및 결정해왔다. 1968년 6월, CNT 대의원회는 “쿠데타 또는 그에 준하는 상황이 발생할 경우 모든 사업장에서 점거투쟁 및 총파업투쟁에 돌입할 것”을 만장일치로 결의했다. 이후 제1차 대의원회와 제2차 대의원회, 그리고 모든 노동조합의 총회와 기층위원회(1972년 5월)에서 이 결의를 재확인했다. 이 기간 동안 다양한 노동조합과 그 지도부는 파체코주의로 대변되는 과두 세력의 공세에 맞서기 위해, 서로 다른 노조들의 서로 다른 투쟁에 대한 입장을 통합한 통일적 투쟁 계획의 필요성을 지적해왔다. 오직 노동조합의 비타협적인 투쟁만이 CNT 결의의 이행을 가능케 하는 방법으로서 노동조합의 의식과 조직 수준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파체코 정권 (pachecato) 이 만들어낸 새로운 정세에 맞추어 노동조합의 구조, 운영 형태 및 지도 관행을 조정할 필요가 있었다(부문별 또는 사업장별로 견고한 기층위원회를 발전시킬 것). 또한 중간 간부 층위에서의 지도력을 확립 및 발전시키고, 지도부와 기층대중 간의 유대를 강화하며, 모든 수준에서 활동가를 양성하고, 각급의 상이한 지향과 경향의 표현을 존중하면서 노동조합 단결을 심화해왔다.
파체코의 경제 사회 정책을 분쇄하고, 그 정책이 공고화되어 절대주의적으로·탄압에 기반한 국가 기구의 통제를 저지하기 위해 정권에 강력히 맞서야 했다. 사실 지배세력의 교체 과정과 과두지배 세력 내부의 모순은 파체코의 경제 정책을 타격할 더 없을 기회였다. 하지만 우리는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과두집권 세력의 공세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계획 없는 분산된 투쟁 관행이 이어졌고, 1968년 8월과 1969년 6월과 같은 여러 국면에서 노동계급이 충분히 가능하였던 정치적 목표 달성에 실패함으로써 민중 운동은 약화되고 과두 세력의 강화가 허용되었다.
CNT 지도부는 노동운동 전체에 걸쳐 효과적인 이행을 보장하기 위한 적절한 조치들을 연구하고 계획해야 했다.
6월 27일의 쿠데타
모든 전문가들은 1955~57년부터 경제적-구조적 위기가 형성되어 점진적으로 악화되었다는 데 동의한다. 권력을 공유했던 두 거대 정당은 몰계급적 지지 기반과 포퓰리즘부터 극우까지 폭넓은 경향의 스펙트럼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그 무엇도 과두 지배 세력의 이익을 해치지 않았다. 경제적-구조적 위기의 심화와 분배할 부의 감소는 사회적 긴장을 고조시켰다. 1960년 이후, 임금 노동자와 도시 및 농촌의 소규모 생산자들을 희생시켜 대지주, 거대 산업가, 은행가 및 수출업자의 몫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IMF의 처방(임금 동결)을 적용하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노동자들은 임금의 일부를 상실했다. 노동조합은 이 위기에 대한 응답으로 계급 투쟁을 배치했고, 그 투쟁 속에서 다섯 가지의 중차대한 사건이 발생했다.
- 국가 역사상 유례없는 규모의 노동조합 조직화 확산. 노동조합주의는 더 이상 육체노동자 전유의 현상이 아니라 모든 고용인의 현상이 되었다.
- 강령적 제안으로 표출된 노동조합의 정치적 동원 수준 향상.
- 투쟁 방법의 점진적인 강성화 및 급진화.
- 노동조합적 단결과 일하는 민중이 만들어낸 강령의 대중적 표현으로서의 CNT 창설.
- 임금 삭감.
1964~66년, CNT의 창립 대의원회에서 모든 가맹조직이 수용한 원칙과 강령, 규약을 통해 노동조합은 단결하였다. 과두지배 세력은 노동자 저항이 도달한 새로운 수준에 대해 '오렌지 개혁'과 파체코의 헌법적 독재로 응답했다. 파체코 정권은 과두지배 세력이 행정권력을 장악하고 국가의 경제 정책을 수립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손에 넣는 ‘수단’으로 전락했다. 그리하여 결국 '치코(chico)' 협약을 통해 표현된 의회의 보증과 함께, 행정부 내의 과두지배 세력은 군대를 자신의 탄압 정책에 복무하도록 만들었다. 노동조합과 민중은 1966년부터 현재까지 이 과정에 맞서 싸워왔다. 과두지배 세력의 탄압 가능성과 노동조합 및 민중 운동의 투쟁 잠재력 사이의 불안정한 균형 속에서 사실과 계급적 대결들은 은폐되고 있으며, 과두지배 세력은 내부 모순을 해결해가고 있다.
정치적 '위기'는 그러한 모순의 표현이자, 의회에서 표출되는 정당의 형식적 권력 위에 군림하는 과두 세력의 실질적 권력을 보여준다. 한편, 이 정책의 지지 기반으로 점차 편입되어 1972년('선동'과의 투쟁) 병영을 떠난 군대는 자신들이 속한 국가 기구의 틀 내에서 일정한 자율적 특성을 가지기 시작했다. 1973년 2월은 군대가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시기였다. 포고령 4호와 7호는 당시 군 내부에 존재했던 실재하는 열망의 표현이었을 수도 있고, 단순한 포퓰리즘적 선전 도구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점은, 민중 운동이 2월 이후 군의 행동에 대해 가졌던 수동적 기대가 실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노동자들에게 매우 중요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것이 어떻게 해석되든) 포고령 4호와 7호의 지점들과 일치하는 독자적 목표 달성을 즉각적으로 결단하지 못한 채 그저 동원된 것은 실수였다. 걷잡을 수 없는 인플레이션과 대중의 전투적 분위기를 보여준 3월 19일 및 6월 1일의 대규모 시위에도 불구하고 임금 인상은 7월까지 연기되었으며, 노동조합의 권리 존중과 일자리 방어를 위한 연대 행동은 산발적으로 전개되었을 뿐이다(후안 라카제 시에서의 분규, 은행의 개입, 프리고날, 자치 이사회의 통합 문제 등). 양모 투기, 메르칸틸 은행 경영진의 압박 등의 호조건에도 불구하고 은행, 대외 무역 및 냉동 산업 국유화 캠페인은 전개되지 않았다. 등록된 HISSA 노조들에 대한 공격에 대응하기 위한 연대 조직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러한 기대 심리의 정점으로서 메이데이 행사는 심지어 축제로 계획되기도 했는데, 이는 계급 투쟁의 가혹함에 비추어 볼 때 완전히 부적절한 태도였다. 마침내 6월 27일 쿠데타와 함께 군대는 과두 세력과 제국주의 이익을 위한 무력 집단으로서의 위치를 명확히 했다.
파업의 전개과정
쿠데타 당일 아침, 각급 회의의 결의에 따라, 중앙의 명령을 기다리거나 주저하지 않고 주요 사업장(특히 공장들)이 점거되었다.
정오 무렵 점거투쟁은 전 산업으로 확장되었고, 심지어 노동조합의 역사가 짧은 곳들에까지 확산되었다.
6월 27일부터 7월 4일까지 파업은 거의 전면적으로 이루어졌다. 이 시기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 전력 생산이 노동자 통제 하에 유지되었으며 연료 공급은 전적으로 노동조합 결의에 의존했다.
- 6월 30일과 7월 1, 2, 3일에 걸쳐 공세적 강제 퇴거 작전이 이어졌다. 대부분의 경우 재점거가 이루어졌으나(어떤 곳은 최대 7회까지), 라나수르는 군에 의해 일방적으로 점거되어 노동자들이 재점거할 수 없었다. 알파르가타스, 바오 등에서는 극심한 폭력이 행하여 졌으나 공장을 재점거한 노동자들과 활동가들의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 6월 28일 목요일과 29일 금요일, 군은 국영석유공사(ANCAP)에서 연료를 탈취했다. 30일 토요일, 군은 이곳을 점령하고 비축 연료를 장악했다.
- 언론 노조 조정기구에 심각한 어려움이 보고되었다.
- 6월 30일 토요일부터 운송 부문의 난관이 관찰되기 시작했다.
7월 4일부터 8일 사이, 운송 부문의 파업대오가 무너졌으며 시청, 부두 노동자, 항만노조(SUANP), 철도 회사들에서 파업이 깨졌다. 파업이 유기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던 정부직원연맹(COFE)도 마찬가지였다. 자발적으로 파업을 선포했던 부문들에서도 이탈이 발생했다. 누가 이러한 이탈에 책임이 있는지, 혹은 누구와 합의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인민대중은 희생된 학생들의 장례식과 7월 9일 월요일의 대규모 투쟁에서는 높은 수준의 참여와 전투성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7월 11일 수요일, CNT 지도부는 파업을 무조건적으로 철회했다. 그 결과 여전히 해고자, 소송 대상자, 징계 대상자, 박해받는 자들이 남아 있다. 당시 점거된 장소들에서 벌어진 투쟁들은 노동계급이 보여준 확고함과 인민의 전위로서의 역할을 웅변하고 있다. 전투는 지역적 지지와 함께 민중의 열기 속에서 치러졌다.
파업의 교훈
이번 총파업은 우루과이 프롤레타리아트 전체가, 임노동의 모든 영역이, 학생 사회 및 방대한 사회 부문이 수행한 가장 중요한 정치적 행동이다. 이 파업이 남긴 주요한 정치적 기여는 다음과 같다.
- 파업과 사업장 점거라는 형태로 수행된, 독재에 맞선 정치적 항거로서의 대규모 인민대중이 공동 행동 참여.
- 민중 운동의 정치적 지도력으로 질적 도약을 이뤄낸 노동계급의 주도적 역할.
- 민중이 스스로의 힘에 대하여 자각함. 그리고 민중의 강령을 현실화하기 위해 필수적인 인민 권력 투쟁을 위한 정치적·조직적·기술적 조건 창출의 필요성 확인.
- 극도로 어려운 조건 하에서 실천된 거리 시위의 노동운동 전체로의 확산.
- 투쟁의 발전을 위해 투쟁 계획(기준과 목표, 계획 수립, 조직 및 예측)이 갖는 중요성 인정. 계획의 부재는 투쟁 잠재력의 완전한 발휘를 가로막는다.
- 기층조직의 강화와 업종·단위사업장·중층부 활동가 양성이 어떠한 경우에도 자주경영 경영을 지원하고 행사하는 기반으로서 중요하다는 사실을 재확인.
- 현장에서 출발한 지역 및 권역 구조의 필요성 식별, 이를 통해 견고한 중층 지도부 구축.
- 여러 노동조합이 파업대오를 유지하지 못하고, 최악의 경우에는 파업을 선포되지도 못한 이유는 타협적 노동조합주의 관행, 투쟁이라는 방법론의 체계적인 약화, 노동운동의 일부 세력에 의한 급진적 투쟁에 대한 지속적인 비난에서 찾아야 한다. 이는 적절한 투쟁 계획의 결여, 적절한 노동조합 구조의 부재와 연결되어 있으며, 기층에 뿌리박은 중층 간부의 부족과 정치강령과 단절된 경제주의 중심의 노동조합주의 관행 때문이기도 하다.
노동조합은 패배하지 않았다. 패배한 것은 특정한 사업의 방식이며 특정한 정치적 구상이다.
요약하자면, 역사적으로 그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었던 독재에 맞선 총파업의 힘은 분명히 일정부분 효과가 있었다. 총파업 투쟁은 독재를 전복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으나, 독재에 맞서 불균등하게 구조화된 세력들의 매우 광범위한 전선을 결성해냈다. 투쟁은 모든 정파, 모든 조직, 모든 노동조합의 사업구조와 전술적 기준을 시험대에 올렸다.
이제 우리는 경험에 비추어 결함을 수정하고, 다음 민중 운동의 파도가 독재를 집어삼켜낼 수 있도록 진지하게 지난 파업을 분석하여야 한다.
작금의 정세
우리는 쿠데타의 원인이 과두지배 세력이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공세를 강화한 것임음을 지적했다. 그리고 이 쿠데타는 우루과이에 있어 결말이 아니라 1968년에 시작된 하나의 과정의 또 다른 이정표이다.
점점 더 심각해지는 경제적·구조적 및 정치적 위기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에 지정학적 이유(라플라타 분지에 대한 외국 독점 자본과 제국주의의 이해관계)가 더하여 지면서 정권은 정치적으로 고립된 채 군대만을 실질적 지지기반으로 두고 있다. 독재정권은 이러한 현실을 인식하고, 사회적 지지 기반을 만들기 위하여 정보 독점권을 이용한 선동 정치를 실천하고 있다.
과두지배 세력의 경제 정책은 그들 자신과 외국인, 그리고 제국주의의 이익을 위한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의 통치는 위기의 구조적 원인이었던 우리 부의 소외와 생산의 정체를 악화시킬 것이다. 이는 반애국적이고 반민족적인 징후를 띠며 독립적인 동부 국가라는 우리의 약점을 점점 더 노출시키고 있다. 독재정권은 사회적·정치적 고립이라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정보를 독점하고 군대를 포함한 국가의 모든 권력을 쥐고 있으며 국제 제국주의의 지원을 받고 있다. 경제 분야에서는 중기적으로 어떠한 대재앙이나 붕괴도 예측할 수 없으며, 오히려 지금까지와 같은 경제적 정체가 예상될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독재의 패배는 기본적으로 민중 운동이 전개하는 저항과 투쟁에 달려 있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노동조합과 민중은 단기전이 아닌 장기전을 앞에 두고 있다.
15일간의 파업 동안 민중 저항의 중추였던 노동계급은 그 핵심적 역할을 계속하여 수행해야 한다. 이 상황에 대한 해법은 저항의 과정에서 노동계급과 그 가장 전투적인 부문들이 갖는 비중에 달려 있다. 우리가 이 저항의 단계에서 인민 권력으로 전진할 수 있느냐는 노동계급과 그 가장 투쟁적인 부문들의 무게감에 달려 있다. 오직 민중의 주도적 역할만이 이 투쟁이 막후 협상으로 끝나는 것을 막고, 민중과 특히 노동계급에게 새로운 좌절을 안겨주는 것을 방지할 것이다.
우리의 관점
이상의 논의로부터 우리는 독재 정권에 대해 '휴전도 정당화도 없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그러나 우리는 파업 이후 이루어진 1973년 7월 4일 포고령의 틀 안에서 고용주들이 노동조합을 타격할 기회를 찾았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노동운동의 총체적 행동은 그간 부차적이라고 여겨지던 노조들이나 지역/권역 노조들이 보여준 보편적 노동조합운동의 가능성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임을 이해하는 것은 분명한 노동조합 운동 회복의 한 과정이다. 우리는 이러한 행동들이 투쟁 속에서 이들을 결속시키고 안내할 다음과 같은 즉각적 강령과 연결되어야 한다고 판단한다.
- 모든 구속 동지의 석방과 고문의 즉각적인 중단. 정보 및 집회의 권리 완전 회복. 노동조합 규제 및 모든 탄압 입법의 철폐, 박해 중단 및 CNT의 합법화.
- 노동조합 활동을 이유로 해고, 소송 및 징계당한 모든 이들의 복직.
- 7월(73년) CNT가 설정한 지표에 따른 임금 조정, 가족 장바구니 필수 제품의 물가 억제 및 보조금 지표로 업데이트. 실업 대책 및 새로운 일자리 창출.
여기에서 도출할 수 있는 단기적 과업은 총파업의 교훈을 이해하고 내면화하며, 운동의 전망과 현재 및 미래 투쟁의 성격에 대한 최소한의 공동 평가를 바탕으로 활동가들을 단결시키는 것이다. 이는 해고자와 수감자들을 위한 투쟁을 조직하는 데에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을 강조하고자 한다.
- 독재는 사회적 기반 확대를 꾀하고 있으며, 우리는 이를 저지해야 한다. 노동조합은 가능한 한 폭넓게 진행하면서 독재에 반대하는 다양한 사회 부문과 조율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경제적·정치적 관점에서 드러난 보르다베리(Bordaberry) 일당의 반동적 성격을 안다면, 그 독재에 헌신적으로 부역하는 자들에 대한 엄중한 처벌(혹은 사회적 심판)이 필연적이라는 것도 분명하다. 노동계급은 이러한 공통 인식 아래에서, 독재에 반대하고 민중 운동이 이미 승인한 강령적 변화(대외 무역, 은행, 토지, 냉동 산업 등의 국유화)를 실행하는 데 동의하는 모든 세력을 결집시키는 '인민 저항 전선'을 건설해야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를 단결시키는 이익과, 노동계급 및 민중의 목적지로 우리를 인도할 수 있는 다양한 수준의 동맹을 찾아야 한다.
- 의회 해산이후 과두지배 세력은 노동조합, 대학 및 교육, 학생회, 야권 정당 및 정치운동을 향한 공격을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이 공격의 목적은 이들을 파괴하려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운동을 제한하려는 것이다. '작업장 안전'이라 불리는 포고령이 바로 이 목적을 가지고 있다. 노동조합은 독재 정권과 고용주에 의한 모든 규제에 반대한다. 우리는 가능한 역량 아래에서 모든 종류의 계급투쟁의 전술을 채택하여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항상 해왔고 기꺼이 할 용의가 있는 비밀 투표에 의한 선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선거에 압도당하는 것을 허용하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는 노동운동이 100년의 경험과 총파업을 통해 만들어낸 투쟁 방법들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 노동조합의 투쟁 방법과 조직 지침을 시스템이 설정한 탄압 수준의 현실에 맞게 조정할 것. 모든 수준에서 계급 투쟁의 강고함으로부터 발생한 책임을 질 것. 전술적 분산에 빠지지 말고 상황에 따라 노동조합 투쟁의 형태들을 단결시키고 결합할 것.
- 가두 투쟁은 반드시 진행되어야 하되, 적절한 준비가 이루어져야 한다.
- 정권이 선전을 독점하고 있는 만큼, 민중 운동의 모든 수준에서 선동 및 선전 전선을 발전시키는 것.
민중 운동의 모든 수준에서, 저항과 투쟁이 필요하다. 우리는 경험을 쌓았다. 우리는 전투를 치렀고, 또 다른 전투들도 치루어낼 것이다. 우리는 무너지지 않는다. 우리는 청산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인민이다.
조직적 영역
모든 노동조합은 최근의 교훈을 활용하여 조직 구조, 사업 방법 및 기능을 재검토하여야 한다.
전국의 노동조합 본부가 상설 기구가 되고, 노조 사무국 및 적절한 지역적 조직에 따라 사업을 조직하여야 한다..
본 문건에 대한 토론 이후, 노동운동의 현실에 따른 대의원단을 선출을 시작하여야 한다.
사무국에는 파업의 핵심 하중을 견뎌낸 노동조합들이 결정적 다수를 확보하여야 한다. 또한 노동운동 내에서 활동하는 모든 계급적 조류가 대변되도록 보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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