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9장 : 1936년 7월 19일의 봉기) - 바딤 다미에


3: 스페인 혁명

9장 : 1936년 7월 19일의 봉기

봉기를 준비하고 조직한 것은 바르셀로나에서 CNT, 이베리아 아나키스트 연방(Federación Anarquista Ibérica, FAI), 청년자유의지주의자(Juventudes Libertarias)의 조합원, 구성원들이 조직한 노동계급의 지역공동체 “방어위원회”였다. 봉기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행동한 것은 아나키스트 정파 노소트로스(부에나벤투라 두루티, 프란치스코 아스카소, 후안 가르시아 올리베르, 리카르도 산츠, 아우렐리오 페르난데스 등이 그 구성원이었다)로서, 이들은 중앙혁명방어위원회와 같은 것을 구성했다.

바르셀로나의 군사반란은 진압되었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군부대와의 단순 충돌로 스스로를 제약하지 않았다. 이들은 자발적으로 사회혁명을 집행하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은 기업을 점거하고 노동자 자주경영을 도입했다. 노동자들은 물자, 운송, 사회서비스를 확보했다. 노동자들은 새로운 삶을 조직했다. CNT의 식품산업노동조합의 조합원들은 인민들이 무료로 식사할 수 있는 공동체 식당을 열었다. 전투중에도, 바르셀로나 식량위원회의 노동계급 부문은 식량의 징발을 조직하고 생산품으을 농민들의 식량과 교환하기도 했다. 시장과 화폐경제는 비화폐적 교환으로 대체되었다. 이러한 교환을 통해 얻어진 식량은 위원회가 설정한 기준에 따라 분배되었다. 의복과 다른 소비재들은 도소매상을 통하여 분배되었다.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혐오의 상징으로써 은행과 조폐창을 약탈하고 화폐를 불태운 적도 있었다. 전당포의 물자들은 그것을 저당맡겨야 했던 이들에게로 반환되었다. 노동조합은 대규모 정부 건물과 민간 건물을 몰수하고, 그곳에 본부를 두었다. 다수의 공장, 운수산업, 사회서비스산업에서는 노동자 집단의 총회가 열려 경영위원회를 선출했다. 경영위원회의 다수는 CNT의 대의원들이었다. 이러한 생산수단의 집단적 점유는 “집산화”라고 불리웠다. 여러 산업부문(바르셀로나의 목공, 제빵, 철도 등)에서 산업의 집산화는 사회화의 다음 단계로 나아갔다. 산업의 시작부터 끝까지 전반적인 과정은 노동자 자주경영의 대상이 되었고, 해당 산업의 노동자들은 그에 걸맞는 기구들을 건설했다. 바르셀로나는 수일 내에 일상을 되찾았다. 대중교통은 여전히 운행중이었고, 공장은 가동되었고, 상점은 개점했으며, 통신 체계도 작동했다. 연구자들은 바르셀로나에서 발생한 혁명적 방법론과 뒤이은 일상생활의 정상화는 기본적으로 CNT 노동자들의 자발적 행동에 근거한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총연맹의 상위 위원회 따위가 이러한 지침을 내린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행동을 주도한 것은 CNT 산하조직의 평조합원들이거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아나키즘의 최전선 활동가들이었다.

CNT 섬유노동조합의 조합원이었던 안드레 카프데비야는 “카탈로니아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의 혁명적 선전에 흠뻑 젖어있었다. 수십년에 달하는 기간 동안, 기회가 왔을 때 혁명을 집행할 수 있는 것은 노동자들 뿐이라는 관념이 노동자들 사이에 뿌리를 내렸다. 그렇기에 그 가능한 시기가 왔을 때, 노동자들은 그렇게 했다”고 말한다.

혁명은 다른 도시들(특히 카탈루냐)에서, 농촌 지역(카탈루냐, 아라곤 일부, 안달루시아, 발렌시아)에서 주도권을 쥐었다. 대농장 지역에서 농민들은 지주로부터 토지를 점유했다. 많은 지역에서 이들은 집단적으로, “집단농장”을 구성하여 농업을 집행하기로 합의했다. 아라곤이나 안달루시아 등지에서, 아나키스트들은 수십년간 농민대중들의 소요를 일으켜 왔다. 이 소요를 목격하고, 참여했으며, 연구해온 가스톤 레발은 “우리의 동지들은 자신이 파견된 가장 후진적인 지역에서 농장 작업에 참여했고, 기술적 발전에 대하여 이야기했고, 아이들에게 읽는 것을 가르쳤다. 이렇게 (아나키즘이라는) 복음이 가장 후진적인 농촌에 사회적으로 침투할 수 있었”다고 전한다. 독일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 아우구스틴 서치는 아라곤의 무네사 마을에서 온 아나키스트의 이야기를 전한다. 그는 오랜 시간 바르셀로나에서 노동했고, 그가 태어난 마을로 돌아가 농민들에게 자유의지주의 사상을 알렸다. 그의 영향력 아래, 무네사 마을의 농민들은 집단농장, 혹은 자유코뮌을 조직했다. “크로포트킨의 <빵의 쟁취> 스페인어판은 식탁위에 놓여있었다. 저녁에는 집단농장의 구성원들이 그 테이블 근처로 모여, 그 중 한명이 책을 큰 목소리로 읽곤 했다. 그야말로 새 시대의 복음서였다.”

혁명의 첫 수일 간, 사회적 자주경영을 위한 새로운 구조들이 등장했다. 이 구조들은 공장, 마을 코뮌, 도시 구획 등지에서 혁명적 노동자와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구성했다. 이 구조들은 언제나 거주민, 혹은 조합원의 총회를 기반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혁명위원회, 공장위원회, 군인위원회 등을 선출하여 일상적이고 협력적이며 기술적이고 집행적인 기능을 수행했다. 이 위원회들의 구성원들은 자신을 선출한 총회의 지시를 수행한다는 틀 안에서 행동했고, 언제라도 재소환될 수 있었다. 위원회들의 중요한 결정은 코뮌의 구성원들의 의사에 합치하게 이루어졌다.

바르셀로나 혁명위원회는 CNT 지역방어위원회와 “바리케이드 위원회”에서 태어났다. 이들은 거리층위의 조직, 즉 식품 등의 서비스를 조정하고, 질서를 유지하는 과업을 자임했다. 군사반란의 실패 직후 많은 마을들에서 거주민들은 지방정부를 제거하고 총회를 통해 선출된 혁명위원회가 행정적이고 경제적인 기능을 장악했다. 혁명위원회는 모든 소유권에 관한 문서를 불태우고, 대지주들의 토지, 건물, 작물, 창고를 몰수하고, 교회를 창고로 바꾸고, 토지를 집산화하고, 자경단을 조직하는 등 혁명적 조치를 즉시 집행하곤 했다.

대중 조직의 구성에 참여한 것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만이 아니었다. 다른 노동조합, 이를테면 사회당을 지지하여 온 노동조합총동맹(Unión General de Trabajadores, UGT)의 평조합원들도 이에 참여했다. 결과적으로 대중조직의 구성은 CNT, UGT, 그리고 다른 세력들의 역관계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어떠한 경우라 하더라도, 국가의 권력은 스페인 영토 다수의 지역에서 기능을 멈추었다. 마드리드에 있던 공화국 중앙정부는 군사반란을 저지하는 것에서 무능함을 보여주었고, 모든 권위를 상실했다. 루이스 콤파니스가 이끌던 카탈루냐 지방정부(제네랄리타트)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정부청사 건물뿐이었다. 지역 행정은 철폐되거나 무력화되었다. 군대와 경찰은 해산되거나 파괴되었다. 바르셀로나는 주로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로 구성된 노동자의 자경단이 통제하였다. 현대의 연구가 아벨 파즈는 “권력은 거리에 있었고, 무장한 인민으로 체현되었다”고 적는다. 카탈루냐 노동자들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하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이 권력으로 무엇을 할지에 대한 결정을 내릴 필요가 있었다. 이들은 이 권력을 파괴할 수도, 스스로 가질 수도, 다른 이에게 넘겨줄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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