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 1920년대와 30년대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내 이데올로기적, 이론적 논의
많은 국가들에서 경험한 패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독재자들의 폭압과 공산주의자들의 정치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운동을 무너트리려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1920년대와 30년대는 아나키스트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 사이의 이데올로기적, 이론적 논쟁이 활발하던 시기였다. 이 논쟁에 참여한 자들은 단지 현재 자본주의적 사회에 대한 통찰적 분석을 제시하였을 뿐 아니라, 사회적 대안의 윤곽선을 높은 통찰력으로 묘사해내었다.
IWA가 생산한 모든 문건과, 그들이 내린 모든 결정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의 단결을 강조하고 있었다. 이들의 공통된 목적(자유의지주의적 공산주의, 자유사회주의)와 공통된 원칙과 공통된 투쟁의 방법론(사회혁명에 이르는, 또는 사회혁명을 포함하는 직접행동)이 있어서의 단결이 그것이었다. 하지만 국제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운동은 이 틀 안에서도 크게 다른 흐름들을 보여주었다. 루돌프 로커는 1925년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IWA 2차 총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조직 내에서, 나아가 여러 국가의 조직들의 국제적 협의회 안에서 온전한 합의에 이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한 조직 안에서의 의견 차이가 정신적 발전을 보조하고 독립적 판단을 촉진한다는 것을 안다. 이것이 IWA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러시아 혁명과 1차 세계대전 이후 혁명의 경험은 자유의지주의자들이 현대 사회와 그 대안을 바라보는 관점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 시기에 소위 “아나키즘적 수정주의”가 등장했다. 이탈리아에서 에리코 말라테스타와 카밀로 베르네리가 그 선전의 일선에 나섰다.
오랫동안 아나키즘적 공산주의의 선도적 이론가였던 에리코 말라테스타는 러시아 혁명의 경험으로부터 “광범위한 공산주의 사회를 조직하기 위해서는, 경제생활 전체(생산수단, 화폐, 소비)를 급진적으로 변혁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한 번에 한 단계씩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도출했다. 말라테스타는 혁명의 과정에서 아나키스트들은 최초에 소수일 것이나, 그 스스로의 이상과 생각을 사회 전체에 도입하여서는 안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가 보기에 혁명은 다수의 코뮌들이 공산주의적으로, 그러나 동시에 상업적 관계로 묶여있는 다원사회의 등장을 촉발할 것이다. 베르네리는 아나키스트 사회에서 서로 다른 경제구조의 공존에 대한 상을 발전시켰다. “모든 아나키스트들은 무신론자이지만 나는 불가지론자다. 모든 아나키스트들은 공산주의자이지만 나는 자유주의자다. 나는 협동조합과 개별 노동자 사이의 자유경쟁과 거래를 지지한다.”
몇몇 아나키스트들은 볼셰비키들이 왜 러시아 혁명에서 승리했는지를 고민하다가, 전술과 조직이라는 측면에서 볼셰비키로부터 배울 것이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렇게 “강령주의자”(네스토르 마흐노와 페트르 아르시노프가 선도하는 그룹)들이 등장하여 역사에서 계급투쟁의 원칙을 인지하고, 아나키스트의 강력한 조직을 건설하여 소비에트와 노동조합 내에서 단결된 세력으로 기능하고, 혁명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선도하고 그를 통해 건설적인 역할을 하려하였다. 필연적으로 “강령주의자”들은 혁명적 과정에서의 단계론을 긍정하고, 소비에트가 정부의 기능을 충족하는 것도 긍정한다. 이들은 미래 사회의 생산 체계에서, 탈중심화와 생산통합의 문제는 통합된 경제의 필요성에 따르는 기술적 문제일 뿐, 원칙의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생산의 산업적 조직 구성을 승인하였고, 사적소유를 철폐하고 생산에 대한 통제력을 공장평의회에게로 이관할 것을 주장했다.다수의 아나키스트들(브세폴로드 볼린과 러시아 망명자들, 에리코 말라테스타, 세바스티앙 포레)는 이러한 입장을 비판했다. 이들은 이것이 반권위주의적 원칙과 자유의지주의적 공산주의의 가치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바라보았다.
아나키즘적 공산주의의 즉각적 도입에 대한 다른 반론은 자유 코뮌이라는 것이 범용성과 특화라는 산업사회 역사발전단계의 “진정한 정신과 경향”에 반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를테면, 유명한 아나키즘 역사가인 막스 네틀라우는 “아나키즘적 공산주의가 내포하고 있는 인류의 농촌-산업 원자화”를 비판하면서 “탈중심화는 연대와 정반대에 있는 무언가를 생산하며, 마찰과 갈등을 배증시킨다. 발전에 대한 우리의 희망은 연대를 건설하는 것에 있다. 더 큰 단위를 연방으로 묶어내는 데에 있다. 지역적 경계와 장벽을 허무는데 있다. 천연자원과 여러 형태의 부를 집단적으로 통제하는데 있다.”고 비판한다. 동시에 네틀라우는 “집산주의”의 원칙(노동에 따른 분배_와 노동의 화폐 대체가 생산을 조직하는 산업적 형태에 걸맞다고 주장한다.
IWA 안에서 벌어진 사회혁명의 궤적에 관한 논쟁과 다툼은 일정부분 20세기 초에 존재하던 아나키즘적 공산주의자와 조합주의자의 갈등의 지속과도 같았다. 전자는 자본주의와 국가의 철폐만이 아니라, 공장이라는 전제정을, 노동의 분절을, 비인간적 기술을 철폐하고자 했다. 반면 후자는 산업-기술적 진보를 환영하고, 이에 기반하여 사회주의적 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다.
이들의 싸움은 자본주의 발전의 최신경향, 즉 포디즘과 테일러리즘에 입각한 생산의 합리화에 대한 분석과도 연관되어 있었다.
산업 발전의 이 단계는 기계화와 컨베이어벨트 기술을 통한 대량 생산, 노동 과정을 여러 작업들의 연쇄로 분할하는 것, 그리고 노동자의 통제력을 극도로 낮추어 노동자가 전체적인 관점과 자기 노동의 의미를 잃게 하는 것에 기반하여, 그 대가로 대량생산의 가능성을 열었다.
“자본주의적 합리화”의 문제는 리에주에서 1928년 열린 IWA 3차 총회에서 처음 다루어졌다.
총회에 참석한 대의원들은 “노동의 모든 영역에서의 진보”에 찬성한다고 선언하면서도, 그것이 자본주의적 생산의 영역에서 현현하는 방식이 노동자에게 있어 부정적이라고도 말했다. 총회에서 통과된 결의안은 진행중인 산업발전 과정이 “구식의 사적 자본주의”에서 “현대의 집단적 자본주의”로, 무제한적 경쟁에서 단일 시스템에 의한 전세계의 착취로 이행중인 사회발전의 새로운 단계의 직접적 결과라고 평가했다. 결의안은 합리화가 자본가들의 이익에 따라 집행되고 있으며, 그것이 노동자들에게는 육체적, 정신적 피폐화와 “산업노예제” 체제에의 종속을 가져오고 있다고 강조한다. 합리화는 노동인민에게 실업을, 그리고 그에 따른 더 나쁜 생활조건을 강요한다. 총회는 자본주의 경제의 이러한 변화가 사회주의의 전제조건이라기보다는 미래의 국가자본주의의 전제조건이라고 선언했다. 결의안은 사회주의로 향하는 길은 생산의 지속적 성장이 아니라 인민의 명확한 사고와 굳건한 의지에 의하여 정의된다고 적었다. 사회주의는 단지 경제적 문제인 것이 아니라, 문화적, 심리적 문제이기도 하다. 사회주의는 인민이 스스로의 역량을 신뢰하는 것을 전제한다. 그리고 이 작업은 복잡하고 통합적이다. 이 모든 것들은 현재의 합리화와 맞지 않았다.
결의안은 경제의 중앙집중이 아닌 탈집중화를, 특화와 분업이 아닌 통합을, 모든 인민의 역량이 통합적으로 구성되어 발전할 것을 대변했다. 거대한 국가적, 국제적 자본의 구조가 건설되는 것에 대항하여, 노동자들은 스스로의 국제 경제조직을 강화해야 하며, 이를 통해 일상적 요구를 위한 투쟁 뿐 아니라 사회의 재조직을, 노동시간의 단축을, 실업에 대한 저항을 위한 국제적 파업과 직접행동들을 조직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산업자본주의 체제의 발전에 대한 비판적 입장과 이에 대한 급진적 투쟁의 요구는 맑스주의자들과 같이 사회주의를 기술과 노동생산성의 발전과 연관지어 생각하는 상당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의 반대에 마주했다.
이들은 기술의 새로운 형태와 생산의 조직이 사회주의와 호환이 가능하다고 여겼다.
이러한 접근은 논리적으로 생산과 전체 경제의 집중화를 수반하고, 탈집중화되어 자급자족적 코뮌들의 연방이라는 개념에 대한 부정을, 결과적으로 분배에 관한 공산주의적 원칙에 대한 부정을 가져왔다. 산업의 세기에는 집산주의의 옛 사상이 더욱 적합하다고 여겨졌다. 1920년대 말에는 로커조차도, 원칙적으로 아나키즘적 공산주의에 동의하면서도, “모두가 각자의 노동에 따른 모든 생산물을”이라는 집산주의적 원칙이 혁명적 변혁의 시기에는, 새로운 사회 건설의 첫 장에는 더 적합하다고 여기기 시작했다. 로커는 혁명에 필연적으로 뒤따를 경제적 어려움에 대하여, 현대 사회에서 증가하고 있는 이기적 태도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맑스주의자들처럼)공산주의적 분배의 도입이 물질적 “풍요”와 관련이 있다고 말하였다.
서치는 이 문제에 대하여 코르넬리센과 토론하는 과정에서 “순수한 분배경제를 이룩하는 것은 오직 산업화되지 않은 사회의 소규모 공동체에서만 가능하다. 현대 산업사회에서, 개별 국가가 벗어날 수 없는 국제경제의 상호의존성이라는 조건 아래에서, 상품의 교환은 필연적으로 가치를 결정할 수밖에 없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교환이 가격을 정하고, 가격이 임금을 정하게 된다.”고 제안하였다. 결국 대안은 아나키즘의 원칙에 반하는 중앙의 계획이 될 것이고, 그는 이것이 최소한 보편적 풍요의 시기까지는 지속될 것이라 보았다.
산업적 발전의 문제와 미래의 자유 사회의 본질에 대한 활발한 논의는 실절적으로 IWA의 기관지였던, FAUD가 펴내던 잡지 <디 인터내셔날레>를 통해 이루어졌다.
이전의 FAUD가 스스로 “공산주의적 아나키즘의 전도사”라고 명확히 선언하였다면, 이제는 많은 활동가들이 “필요에 따른 분배”라는 아나키즘적 공산주의의 원칙이 “미친 생각”이라고 여기며 반대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현존 경제 영역을 학습하고(헬무트 뤼디거), 분배를 실질적 노동 “생산력”에 맞추어 조정할 것(게르하르트 바르텐베르그, “게르하르트”)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재정적 규제를 통한 “배급”이 공산주의적 아나키즘보다 “더 공정하다”는 의견마저 제시되었다.(프리츠 데트머) “사회주의 연방 체계에는” 조정되고 계획된 경제와 경제적 민주주의라는 의미로서의 “생산력의 산업적 연쇄”가 존재하여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프리츠 리노프), 그리고 누군가는 혁명 이후라 할지라도 국가의 사회적 기능들은 “온존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고(바르텐베르크), 다른 누군가는 평의회의 연방은 혁명 이후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이 소수가 될 “통일전선”을 구성하는 이행기를 거쳐야 건설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라이노르트 부시) 반면, 독일의 일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아나키즘적 공산주의의 반산업주의적 원칙을 고수하였다.
그렇기에 하인리히 트리뷔스는 산업적 혁신을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이라 비판하고, 현재의 이윤기반 경제의 완전한 변혁을 지지했다.
그는 노동자들이 아래로부터 계획을 조직하고, 인민의 실질적 필요에 기반하여 생산하는 비화폐적 공산주의 경제의 건설을 지지했다. 그는 맑스주의에서 빌려온 개념인 “대량생산”과 중심화를 거부하고, “산업화”에 반대하는 의미에서의 “농업화”에 기반한 경제생활의 재조직을 선호했다. 1932년, FAUD의 지도부는 거센 이데올로기적, 이론적 논쟁 속에서 거의 마비되었다.
산업주의적 경향이 가장 강했던 것은 프랑스의 CGT-SR이었다. 프랑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의 이론가이자 실천가였던 피에르 베스나르는 1차 세계대전 이전의 조합주의자들처럼 인간성의 산업적 발전이 가지고 있는 진보성에 대한 가정에서 논의를 시작한다. 베스나르에 따르면 (생산라인과 연관된, “포드주의-테일러주의” 시대의)기술적 변화는 노동자의 사회적 해방에 새롭고 광범위한 관점을 열어주었다. 노동자의 조직은 자본주의에 맞서 투쟁하면서 동시에 내적구조를 자본주의의 경제 구성과 유사하게 재조직하여 혁명적 총파업의 승리 이후 경제의 운영을 즉시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르게 말하자면, 자본주의 내에서 자라난 노동조합과 그 연맹은 새로운 사회의 신경체계가, 경제적 협력과 계획의 기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베스나르가 이르는 바 “자유의지주의적 공산주의”는 그 첫 단계로서, 화폐체계의 요소를 가지고 “노동에 따라” 분배하는 단계가 될 것이다.
베스나르가 “자유 공산주의”라고 부르는 2단계가 되어서야, 자주경영적 공산주의 사회의 이상이 완전히 시행될 수 있을 것이다.
아나키즘적 공산주의의 원칙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은 라틴 아메리카의 아나키스트들, 특히 아르헨티나 FORA의 활동가들의 날카로운 반응을 촉발했다. FORA의 이론가들은 혁명적 조합주의에 대한 전통적 비판(혁명적 조합주의가 본질적으로 유사맑스주의라는 비판)과 유럽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에 대한 비판(아나키즘과 혁명적 조합주의를 통합하려는 시도라는 비판)에 공고하게 근거하고 있었다. 이들은 혁명 전 사회의 조합주의적 구조라는 개념에 대한 문제를,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통일전선이라는 개념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동시에 이들은 노동운동과 유리된 아나키스트의 “이데올로기적-정치적” 조직이라는 시도(말라테스타에 의해 제안된 것, 그리고 강령주의자들에 의하여 제안된 것)에 대해서도 역시 비판했다. FORA는 이러한 시도에 대해 “노동자의 아나키스트 조직” 모델을 강화하는 것으로 응수했다. 이 조직은 노동조합의 형태를 가지고 있지만, 스스로를 경제적 문제의 해결로 제약하는 것이 아니라 연대와 상호부조, 아나키즘적 공산주의의 문제에 역시 나설 것이었다.
FORA의 이론가들은 맑스주의적이고 산업주의적인 역사관을, 현대 자본주의를, 사회혁명을 섬세하게 비평했다. 20세기 들어 이러한 비평이 나온 것은 처음이었다. 무엇보다 이들은 맑스주의적인 사적 유물론에 입각한 선형발전 이론을 비판했다. 이들은 인류가 경제법칙에 귀속되어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크로포트킨이 말한 것처럼)윤리적 개념과 매혹적 사상의 진화에 의해서도 발전한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FORA는 경제적/역사적 결정론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자본주의와 그 경제조직이 본질적으로 진보적이라는 개념을 부정한다. FORA의 이론가들은 산업자본주의 사회의 경제구조(공장 체계, 특화, 극도의 분업 등)이 “정치적 국가”(정부)에 대응하는 의미로서 “경제적 국가”라고 받아들인다. 새로 건설될, 자유로운 사회는 구체제의 법칙에, 그 논리에 따라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로부터 결정적이고 급진적으로 분열해야만 할 것이다. 새로운 사회는 자유코뮌과 자유연합에 기반해야 한다. 새로운 사회의 표어는 “모든 권력을 노동조합에!”가 아니라, “누구에게도 권력이 없게!”여야 한다. FORA의 이데올로그 에밀리오 로페스 아란고는 아나키즘적 공산주의의 체제는 구체제 기구의 내적 성격으로 건설되어서는 안 되고, 그렇지 않으면 결국 러시아 혁명의 운명을 맞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산업적 제국주의의 파고를 막는 방파제가 될 운명에 놓여있다.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 문명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사회적 문제를 이해할 수 있도록 윤리적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만이 반자본주의적이고 반맑스주의적인 혁명의 파괴불가능한 기저가 될 수 있다. 이 혁명은 대규모 산업과 금융, 산업, 상업 트러스트의 체제를 끝내는 혁명이 될 것이다.” 자본주의 내에서 프롤레타리아의 순수하게 경제적인 이익은 현존 체제의 틀 안에서, 다른 프롤레타리아를 착취함으로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프롤레타리아트의 통일전선이 불가능한 이유가 된다.
연대와 자유라는 습관과 개념을 확산시키는 것은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경제적 직접행동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궁극적인 목적을 시야에서 놓쳐서는 안 된다. 아나키스트 노동자 조직은 단지 “모든 노동자의 조직”이 되어서는 안 되고, 아나키즘적 공산주의의 이상을 공유하는 이들의 조직이 되어야 한다.
자본주의의 발전에 수반한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전술의 변경에 대한 논의는 1931년 마드리드에서 열린 IWA 4차 총회에서 가장 활발히 터져 나왔다. 이 총회는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이 자본주의적 합리화의 당연한 결과라 바라본 대공황의 한복판에서 열렸다. 합리화는 생산양을 폭증시켰지만, 동시에 일자리를 줄이고 노동자의 구매력을 줄인 것이다. 총회에서 산업적 경향과 반산업적 경향은 험악하게 부딛혔다. IWA 총회에서의 논의들에 관한 역사적 저작의 저자인 무뇨스 콘호스트는 이 논의의 본질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고 적었다.
“한 편에는, 샤피로가 써낸 합리화에 관한 문서 초안이 총회의 결정에 따라 최종적으로 발표될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문서는 기계화와 연관된 새로운 생산의 방법론이 유리한 것이라 고집했다. 이 생산의 방법론은 노동대중의 의식을 준비시키는 근본으로 여겨져야 하며, 혁명의 경제적 내용을 조직하기 위한 시작점으로 여겨져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에는 (로커가 쓴 - 작가 주)생산자가 생산에 직접 책임을 지고, 자신의 생산활동을 다른 개인들의 활동태와 분리시킬 수도 없고, 분리시켜서도 안된다는 보다 아나키스트적인 내용이 있었다.
“이러한 접근은 합리화를 반대한다기보다는 개인의 사회적 생산에의 참여와 개인의 개별성 보존 사이의 균형을 요구한 것이다.” 로커는 “혁명은 착취당하는 노동자라는 수세기간 전통과 교회라는 이름으로 신성한 의무가 되어버린 노예적 개념을 변혁해야만 한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그 형태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더 조화로운 인간관계에 어울리는, 총체적 노동에 기반한 형태가 되어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루돌프 로커는 기술적 발전이 삶을 인간적으로 만들 수 있지만, 인간이 생산을 위해 존재하게끔 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럴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사람들이 소외와 생태적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기 오래전부터, 로커는 건강에 해로운 상품의 생산이 “사회적 자살”이라고 언명해왔다. 기계의 단조로운 리듬에 맞추어 일하는 것은 개인의 인성을 말살한다. 경제의 중심에 있어야 하는 것은 인간이고, 생산은 실질적 소비자의 수요에 따라 조직되어야 한다. 로커는 “노동의 합리화가 지금의 형태로 50년을 지속한다면, 사회주의의 희망은 사라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베스나르는 당시 발생하고 있던 변화에 대한 산업적 분석에 근거하여, 샤피로의 재정적 경영의 통제권을 확보할 공장위원회 건설 허가에 대한 제안에 반대하면서, “국제 조합주의 재조직 계획”을 제안했다. 자본주의가 “경제적, 사회적 합리화라는 고통을 던지고 있는 이상” 조합주의 운동은 “우리의 적과 동일한 층위에 위치해야 하”며, 스스로의 “국제적 규모의 합리화”를 통하여 투쟁해야 한다. 그는 모든 국가에서 아래로부터 조직된 산별노조 형태의 국제 조직을 다시 세워낼 것을 호소했다. 사업장의 노동조합들이 전국적 네트워크로 모이고, 그 네트워크가 국제 산별조직에 가맹한다. 이 국제조직의 과업은 경영과 기술적 정보를 모으고, 노동자의 기업 통제를 적용하며, 노동력을 재배치하고 노동자가 모든 층위의 생산을 통제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 될 것이다.
FORA는 로커의 합리화 비판보다 더 멀리 나가면서 베스나르의 입장을 날카롭게 공격했다. 아르헨티나 대의원 중 한명은 총회장에서 “산업자본주의는 파시즘만큼이나 위험한 폭압의 형태다. 동지들은 경제적 문제만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라 바라본다. 하지만 지금 형태의 자본주의의 도구들을 우리가 손에 쥔다고 해도, 그것은 거대한 메커니즘에 의하여 박살난 인류를 해방할 도구가 될 수 없다. 대공황은 기계화와 합리화를 크게 진전시켰다. 그리고 이 진전은 도시의 산업에만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농업에도 마찬가지로 확산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사회혁명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는 세계적 재난”이라고 선언했다. 결과적으로 라틴아메리카의 대의원들은 프랑스 조합주의자들이 제안한 국제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운동을 산별노조의 국제 구조로 만들어 혁명과정에서 현존 산업생산을 확보하자는 재조직 계획을 거부했다. 이들은 “산업화는 필수적인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산업화 없이도 수천 년을 살아왔다. 행복한 삶과 더 나은 삶은 산업화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고 첨언하면서, “다가올 혁명이 모든 것을 한 순간에 결정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말자. 다가올 혁명은 마지막 혁명이 아닐 것이다. 혁명적 봉기에 대한 준비는 봉기가 시작하는 순간 내던져질 것이고, 혁명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스스로 만들어낼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르헨티나 대의원들은 프랑스 조합주의자들이 “IWA를 기계화하려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생산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생각하여야 함에도 말이다. 우리의 주된 고민은 경제 체제를 조직하는 것이 아니라, 아나키스트 이데올로기의 선전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인간이 사회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인간을 위해 존재하기에” 합리화에 반대한다고 말하면서 “순수한 생디칼리즘을, 자연으로의 회귀를, 농업으로의 회귀를, 코뮌을” 부르짖었다. “이 원칙을 따를 때만, 우리는 시장을 위한 생산을 극복하고 자유로운 분배로 전환할 수 있을 것이다.”
우루과이의 FORU 역시 FORA를 따라 베스나르의 계획에 반대했다.
일본의 노동조합연맹인 전국노동조합자유연합회는 조합주의적 산업주의를 라틴아메리카 아나키스트들보다 더 격렬히 비판하였다. 이들은 아나키즘적 혁명에 대한 개념을 상세히 설명하면서 산업자본주의의 논리와 중대한 차이가 있음을 이야기했다. 이들은 현재의 체제가 분업과 그에 수반하는 위계에 기반하고 있다고 말했다. 분업과 기계화는 노동자들에게서 책임감을 앗아갔고, 협력과 행정을 주관하는 권위를 요구하며, 이것은 자유의지주의적 공산주의의 원칙에 합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미래의 자유로운 사회의 구조는 현재의 권위주의적이고 자본주의적인 구조와 합치할 수 없다. 새로운 사회는 산업주의와 그 영혼파괴적 분업을 극복하고, 다른 형태의 생산과 소비의 상호관계에, 특히 소비에 기반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새로운 사회의 기본 단위는 자급자족적이며 자율적인 산업-농업의 통일체인 코뮌이어야 할 것이었다.
일본 아나키스트들은 계급투쟁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것이 자유의지주의적 혁명의 기저가 될 것이라고 바라보는 것은 거부했다. 이들은 혁명이 자본주의의 모순에서 촉발되는 것도 아니고, 계급의 물적 이익에서 비롯될 것도 아니며, 자유와 계급의 철폐에 대한 인간의 열망에서 비롯할 것이라고 보았다.
일본 아나키즘의 이론가인 핫타 슈조는 “계급투쟁과 혁명은 같은 것이 아니기에” “혁명이 계급투쟁적 방법론을 통해 올 것이라 보는 것은 중대한 오류가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전국노동조합자유연합회는 전통적 조합주의를 거부했다. 이들은 전통적 조합주의가 산업자본주의 모델의 재생산적 요소라 바라보았다. 사회를 직업에 따라 분할하는 것은, 공장 체계와 중앙집중을 존속시키는 것은, 사회를 직종별, 산별 노조에 기반하여 조직하는 것은 분업과 경영위계를 영속화할 것이라는 것이다. 핫타 슈조는 “조합주의는 생산의 자본주의적 방법론을 수용할 것이고, 대공장 체계를 존속시킬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분업과 경제적 조직의 형태를 유지시켜, 자본주의적 생산방법론이 영속하게 할 것이다.” 노동조합의 구조는 자본주의적 생산 방법론에서 비롯하기에 산업자본주의의 거울상을 만들어낸다. 만약 단순히 자본가들을, 사용자를 몰아내고 광산을 광부에게, 주조공장을 주조공들에게 쥐어준다해도, 서로 다른 생산의 부문 간에서, 각개 노동자 집단 안에서의 모순은 존속할 것이다. 결국 다른 분야들 간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조정기구가 필요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계급이 다시 생겨날 위험이자 노동조합 관료제의 형태로 새로운 국가나 정부가 출현할 대한 위협이 될 것이다. 일본 아나키스트들은 새로운 사회를 노동자 평의회에 기반하여 세우는 것도 완전히 잘못되었다고 주장했다. 노동자 평의회 또한 생산으로부터 비롯하였기에,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적 분업을 재생산할 것이다. 나아가 노동자 평의회는 필연적으로 권력의 기반이 되고, 물질적 부의 생산에 직접 참여하지 않는 이들이나 경제의 “2차적” 산업에 참여하는 이을 차별하게 할 것이다. 핫타는 “평의회가 얼마나 경제적 지향을 가지고 있건 간에, 평의회의 건설은 권위주의적 지배를 낳을 것이라는 은 분명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제 선택의 순간이 왔다. 코뮌인가 산별노조인가. 산업의 합리화인가 탈중앙화된 산업/농업 경제의 총합인가. IWA의 가맹조직 중 다수는 이 두 극단 사이 어딘가에 위치해있었다. 1931년의 총회는 “국제적 재조직”의 문제를 총투표에 붙이기로 결의했다. 1935년 파리에서 개최된 IWA의 정기 총회에는 정부의 백색테러로 부수어진 라틴 아메리카 조직들이 참여할 수 없었고, CGT-SR의 제안이 가결되었다. 하지만 IWA의 재조직에 관한 결정은 실질적으로 집행되지 못했다.
FORA의 구상은 당대에는 놀라울 정도로 훌륭한 산업자본주의 체계의 소외적, 파괴적 성격에 대한 비평을 포함하고 있었다. FORA의 제안은 반세기가 지난 오늘에 와서야, 생태주의 운동의 추천사이자 처방전으로 읽히기 시작했다.
그들의 비평에 약점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들은 미래 사회에 대한 구체적인 상을 그리는 것을, 그 사회에 어떻게 도달하고 무엇을 준비하여야 하는지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것을 총체적으로 거부했다.
아르헨티나 이론가들의 생각에 따르면, 이렇게 하는 것은 대중의 혁명적 자발성과 즉발성을 제한할 것이었다. 사회주의의 성취는 기술적이고 조직적인 준비의 문제가 아니라 자유와 평등과 연대를 향한 감정의 씨앗을 뿌리는 것에서 온다고, 아르헨티나의 노동자-아나키스트들은 고집했다. 하지만 유럽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이러한 접근이 권위주의에 대한 보호를 제공하지 못하며, 혁명의 성취를 엘리트주의적 “전위”에게 넘겨주기에 딱 좋은 접근이라고 주장했다. 맑스주의자들은 사회주의적 사회 기능의 구조와 기전에 대하여 상상하려 하지 않았기에, 미성숙하고 무지한 대중에 대한 “과학적 사회주의자”들의 지배라는 개념이 논리적으로 뒤따랐다. 혁명의 시기에 대중은 무엇을 원하지 않는지는 알고 있지만, 새로운 해방된 삶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대중은 “교육적 독재”라는 계몽주의적, 자코뱅적 개념으로 귀결하게 된다. 4차 총회에서 스웨덴의 대의원 알베르 젠슨이 말한 것처럼 “사회혁명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세밀하게 준비되어야 한다. 모든 것을 즉흥적으로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이러한 입장은 혁명의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정치 선동가에게 이용당할 것이고, 독재를 구축하는데에 이용당할 것이다.” 이 시점에 특히 관심을 끈 것은 스페인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이었다. 스페인에서 사회혁명은 곧 현실이 될 것처럼 보였다. 이것이 CNT의 대의원단이 베스나르의 제안을 지지한 이유였다. 빅토르 오로본 페르난데스는 “노동자들의 건설적 역량을 키워낼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는 스스로 사멸하지 않는다. 건설적 행동은 바리케이드보다 중요하다”고 선언했다. “파괴는 그 자체로 창조적인 것이 아니다. 혁명에서 가장 중요한 날은 혁명 다음날이다. 바로 이 날 새로운 건설이 시작된다.” 그는 러시아에서 “아나키스트들은 투쟁했다. 그리고 그러는 와중 볼셰비키들은 건설을 시작했다.”고 말한다. 더 많은 사람이 혁명을 준비할수록, 더 많은 사람이 자본과 국가의 철폐와 수용 이후에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이 혁명을 준비할수록, 전위당에 의한 혁명의 탈취의 위험은 줄어들 것이다. 유럽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의 주장의 요지는 자유의지주의적 가치와 사상을 확산시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CNT는 인민을 기술적으로, 조직적으로 준비시켜 그들이 혁명 이후에 생산의 운영을 탈취할 수 있도록, 생산의 영역을 틀어쥐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주장을 계속했다. 벤투라 마르케스 시실리아는 스페인 아나키스트들의 이론지인 라 레비스타 블랑카에 “다음과 같은 사실은 자명하다. 특정한 사상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그 사상이 옹호자들의 머리 속에 스며들어야만 한다. 인민의 준비 부족은 동요를 낳을 것이고, 동요는 혁명의 방어에 치명적이다. 이것이 우리가 사회의 아나키즘적 재조직을 진행하기 전에 인민들이 준비할 필요가 있다고 보는 이유라고 하겠다”고 강조했다. 그는 혁명이 폭력적일 수 있지만, 새로운 사회를 여는 주요한 길은 선전에 있다는 주장을 지속했다. “승리는 오직 총체적 노력이 다수 인민의 지지를 얻을 때의 결과로만 얻어질 수 있다. 이 복합적 행동은, 다수 인민의 지지는 오직 이데올로기적이며 경쟁력있고, 진지하며, 섬세하고, 책임감있는 프로파간다의 사전작업을 거침으로서 얻어질 수 있다.” 라 레비스타 블랑카의 또 다른 작가인 후안 마스고미에리는 이것이 모든 인민이 아나키스트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만 하는 지루한 작업인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아나키즘적 사회혁명이 전체 인민대중을 위한 불가변적 승리의 힘이 되기 위해, 모든 사람이 특별한 지적 노력이 없어도 새로운 조직적 기능과 질서에 대하여 인지하고 이해하여야 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리고 이 명확한 이해는, 새로운 체계에 대한 물질적 지식은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학습보다 더 분명하게 혁명의 승리를 담보할 혁명적 의식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스페인 아나키스트들은 일부 조합주의자들이 제시한 아나키스트 사회와 자유의지주의적 공산주의 사이의 차이에 대한 개념을 거부한다. 모든 제약이 단순히 사라진 상태로서의 아나키에 관한 모호한 관념은 “서글픈 정세”를 만들고, “자기 스스로의 이상에 대한 무의식적 사보타주에 이르게끔하여 새로운 향이 첨가된 정치인들의 길을 닦아줄 것이다.”
CNT 내에는 혁명적 조합주의에 가까운 조류도 존재했다. 이 조류는 “사회의 조합주의적 건설”이라는 개념과 “자유의지주의적 공산주의”라는 개념에서 혁명적 조합주의와 유사했다. 총파업과 반란을 통하여 혁명이 승리한 이후에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논쟁은 진행중이었다. 아나키즘적 공산주의의 전통을 따르는 공동체주의자들은 미래 사회의 기저는 최대한 자율적이고 자급자족적인 자유의지주의적 코뮌(“자유로운 자치구”여야 한다고 믿었다. 이에 따라, 공동체주의자들은 코뮌간의 경제적 연결과 협업의 조율에 대하여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들은 모든 잉여생산물은 무료로 교환될 수 있을 것이라 가정했다. 산업주의자들은 혁명적 조합주의의 일부였다. 이들은 혁명 이후에도 중앙화된 공장 운영구조와 경제조직의 구성은 유지될 것이며, 그 소유가 개인이나 국가가 아닌 유관 노동조합에게로 이양될 것이라 바라보았다. 이들의 강점은 경제적 문제에 관한 해결책을 자유의지주의적 계획의 원칙에 맞추어 제시하는 데에 있었다. 공동체주의자 중 가장 유명한 이론가는 작가이자 출판업자인 페데리코 우랄레스(라 레비스타 블랑카의 편집자), 그리고 외과의사인 이삭 푸엔테였다. 우랄레스는 크로포트킨의 추정을 스페인의 마을 코뮌 전통과 연계시키며, 이것이 연대라는 집단적 원칙을 실현하기에 적합한 기반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혁명은 자본주의적 공황 이후에 발발할 것이며, 그 결과는 자유부락에 내재한 공동체 전통을 되살리는 것이 될거라는 주장을 계속했다. 또한 우랄레스와 그 지지자들은 혁명적 자발성에 의존하고 있었다.
다른 아나키스트들은 노동자 반란의 실험을 위한 이정표가 될 수 있는 자유 사회에 대한 사상을 만들어내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여겼다.(1932년부터 1933년까지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반란들의 뒤에 있었던 정파 노소트로스의 관점이 이러했다.) 이러한 사상은 봉기의 지도자들 중 하나였던 푸엔테와 그의 책 <CNT의 목적 : 자유의지주의적 공산주의>에 의하여 대중적이 되었다. 이 책에는 스페인에서 자유의지주의적 공산주의 체계를 건설하기 위한 계획과 그 실행을 옹호하는 주장들이 담겨있었다. 우랄레스와 비슷하게, 푸엔테는 인간의 사회적 경향에 대한 크로포트킨의 이해를 따랐다. 그는 혁명적 엘리트나 혁명 이후 이행기에 대한 개념을 거부했다.
그는 공동체주의 운동이 인류의 사회적 본성에 부합한다고 믿었다. 푸엔테는 스페인에서 자유의지주의적 공산주의가 건설될 수 있으며, 그 이후 자본주의의 세계를 견뎌낼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는 코뮌이 대중조직(모든 거주민의 총회)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마을과 소도시에서일 뿐이며, 많은 인구가 살아가는 곳에서, 그 기능은 노동조합의 조직(생산자의 조직)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아나키즘적 공산주의의 전통에 입각하여 자발적 본성과 코뮌의 사회경제적 자급자족을 강조했다. 그는 “새로운 사회의 설계자들”이 운영을 계획하고 산업적 발전을 만드는 것에 회의적이었다. 사회적 부, 생산수단, 그 수단을 통해 생산된 생산물은 모두의 것이어야 한다. 사회의 각 구성원들은 자기 역량에 따라 일할 의무가 있고, 그 노동에 대하여 자기 필요를 충족할 만큼을 받게 될 것이다. 모든 형태의 화폐는 불필요해질 것이다. 부는 “그 요구에 따라” 분배될 것이다. 무엇보다, 거시경제는 “다양한 지역의 협업의 결과”일 것이고, 총투표, 총회, 산별연맹 등을 통하여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협업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이다. 푸엔테의 책은 아나키스트 조직들 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책은 전제되었고, 광범위하게 논의되었다. 산업주의자들 중 주요한 이론가는 디에고 아바드 데 산티얀이었다. 그는 아르헨티나에서 스페인으로 왔고, FORA의 견해를 포기했다. 그의 책 <혁명의 경제적 기구>는 현대 산업을 포용하면서 계획과 경제적 협력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크로포트킨의 경제적 지역주의를 비판하였으며, 자유 코뮌은 시대착오적이고 “반동적 유토피아”라고 선언했다. 아바드 데 산티얀은 미래 사회의 형태는 다양할 수 있기에, 자유로운 실험이 중요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원칙적으로 그는 베스나르가 그러했던 것처럼 상대적으로 경직된 조합주의적 구조로 사회 전체를 재편하기를 원했다. 나아가, 다른 산업주의자들처럼, 그는 자유의지주의적 공산주의가 완전한 아나키즘(공산주의)로 향하는 길에서 일종의 이행기이기에, 공산주의적인 분배의 원칙(“필요에 따른 분배”)로부터 벗어나는 것도 가능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 이론적 · 전술적 차이는 분열을 낳았다. 가장 중요했던 분열은 1931년 개량주의적이고 실용주의적인 조합주의의 지지자들(후안 페이로, 앙헬 페스타냐 등)이 탈퇴하여 “30인의 선언”(Manifesto de los Treinta)을 작성한 것이라 하겠다. 1930년대 중반에 이르면, 스페인이 사회혁명의 문턱에 와있다는 것이 명확해졌다. 그리고 CNT는 아나키스트 “계획”의 일반적 을 자유 공산주의에 기반한 사회의 변혁으로 향하는 실질적 계획으로 만들어야 할 시급한 문제를 마주했다.
1936년 사라고사에서 열린 CNT의 총회는 역사상 최초로 사회혁명을 향한 구체적 방법을 제시하는 아나키스트의 계획을 담은 문건, <자유의지주의적 공산주의에 대한 총연맹의 구상>을 승인했다. 이 문건은 두 조류(공동체주의와 산업주의)의 이상과 접근법 모두를 포함했지만, 푸엔테의 방법론에 아주 많이 입각해있었다. 자유의지주의적 공산주의(능력에 따라 일하고 경제적 가능성의 틀 안에서 필요에 따라 분배하는 원칙)는 어떠한 형태의 “이행기” 없이, 사회혁명 이후 즉시 건설되어야 한다. 다가올 자유로운 사회의 기저는 이중적 조직 위에 놓여야 한다. 지역적 조직(자유코뮌과 그 연방)과 산업적 조직(생산자의 조직이자 코뮌의 경제적 기구로서의 노동조합)이 그것이다.
이 계획은 통계적으로 결정된 필요와 생산력의 가능성에 기반한 아래로부터의 탈중앙적 계획을 지지했다. 화폐는 철폐될 것이고, 생산자/소비자를 위한 카드로 대체될 것이다. 이 카드의 유일한 기능은 그 소유자가 실제로 노동하고 있음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 될 것이다. “혁명의 폭력적 시기가 지나면, 사적소유, 국가, 권위, 그리고 계급은 철폐될 것이다. ... 부는 사회화될 것이고,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조직은 생산과 소비를 스스로의 손으로 직접 운영할 것이다. 각개 지역에는 자유 코뮌이 설치될 것이고, 이를 통하여 새로운 사회적 메커니즘을 촉발할 것이다. 노동조합으로 단결한 각 산업과 업종의 생산자들은 자기 사업장에서의 조직의 형태를 자유롭게 결정할 것이다.” 경제적, 사회적 생활의 조정, 방어의 문제 등은 코뮌에, 조합에, 그들의 연방에 위임할 것이 제안되었다. 계획은 공산주의적인 분배의 원칙을, 성별간 관계에서의 변혁을, 교육을, 예술과 과학의 자유로운 발전을 강조했다. 국가와 상비군은 철폐될 것이었고, 이는 코뮌의 연방과 노동자의 자경단으로 대체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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