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 1920년대와 1930년대의 국제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운동
국제노동자협의회는 국제적 혁명의 파도가 잠잠해지기 시작했을 때에야 재건되었다. IWA의 많은 가맹조직들은 잔혹한 탄압을 마주해야 했고, 이내 분쇄되었다. 이탈리아에서 무솔리니가 권력을 잡은 이후인 1924년 4월, USI 지역지부들의 활동은 이미 무력화되었다.
USI는 지하로 들어가 재조직했고, 중요한 파업들(발다르노와 엘바에서의 광산 파업, 카라라에서의 석조노동자 파업, 금속노동자들의 파업)을 이끌었다.
하지만 1927년, USI는 마침내 파괴되었고, 그 활동가들은 체포되거나 추방되었다.
포르투갈에서 군부독재가 수립되자, 1927년 2월 CGT는 총파업을 조직하고자 했다. 파업은 진압되었고, 1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살해되고, 많은 활동가들은 체포되었으며, CGT는 불법화되었다. CGT는 지하에서 그 세력을 재조직해내었으며 많은 노동조합과 지부들을 재건했다. 1929년부터 1930년까지, CGT는 32개의 가맹노조와 15,000~20,000명의 조합원을 가지고 있었고, 1934년에는 7개의 가맹연맹으로 재편할 수 있었다. 포르투갈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실업과 물가 인상에 맞선, 일 8시간 노동을 위한, 노조 할 권리를 위한 가열찬 투쟁을 지속했다. 1934년 1월 살라자르 정부는 노동조합을 파시스트적 기업으로 대체하는 법령을 내어놓았고, CGT는 이에 대하여 “혁명적 총파업”과 봉기로 응답했다. 반란은 패배했다. 포르투갈 노동자들의 영웅적 저항도, CGT의 파괴를 막지는 못했다.
1920년대 말, 아르헨티나의 FORA는 최소 4만에서 최대 10만 사이의 조합원을 조직하고 있었고, 총파업과 지역파업을 성사시켜 일 6시간 노동을 쟁취하였다. 하지만 1930년의 군사쿠데타와 뒤따른 탄압이 조직을 강타했고, FORA는 이로부터 재기하지 못했다.
1923년 혁명운동의 하강 이후, FAUD의 조합원 수는 급감했다. 1929년, FAUD에는 9,500명의 조합원을 가지고 있었지만, 끔찍한 대규모 실업을 겪으며 조합원의 수는 1931년의 6,600명, 1932년의 4,300명으로 줄어들었다. 소수노조가 되어버린 FAUD는 독자적으로 파업을 집행할 수가 없었다.
FAUD는 적극적인 문화사업과 선거거부 캠페인을 집행했고, 개량주의적 노동조합이 조직한 파업에 참여하여 그 파업을 더 급진적으로 만들고자 했다. FAUD는 직접행동과 연대파업이라는 수단을 통하여 나치즘의 맹공에 맞서고자 했다. 히틀러가 집권한 이후, FAUD는 1930년대 후반까지 그 지하투쟁을 지속했다.
나치는 베를린에 있던 IWA 본부를 침탈했고, IWA 사무국의 구성원들은 겨우 독일을 탈출했다.
페루, 브라질(1930년 이후), 콜롬비아, 일본(1930년대 중반), 쿠바(1925~1927 이후), 불가리아(1930년대 초에 등장한 노동조합연맹은 30년대 말에 무너졌다.), 중앙아메리카 제국에서 발생한 대규모 정부의 탄압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에 입각한 노동조합들을 파괴했다. 파라과이와 볼리비아에서는, 차코전쟁 기간 동안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적인 노동자 조직 활동가들을 추방했으며, 이 조직들은 이전까지의 수준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프랑스에서 역시 대중성을 확보할 수 없었다. 1929년부터 1933년까지의 기간 동안의 대공황은 다수의 국가들에서 민족주의적이고 국가주의적인 감정을 키웠고, 결과적으로 운동을 크게 약화시켰다.
멕시코에서, CGT 지도부는 민족주의-개량주의 정부와 야합하였고, 국가주도의 조정전치주의 원칙을 승인했다. CGT는 IWA를 탈퇴했다. 1930년대 말, 합법적인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노동조합이 남아있던 곳은 오직 칠레(노동총연맹, 1931), 볼리비아(라 파스 지역 노동 연맹), 우루과이(FORU) 뿐이었다. FORA는 지하조직으로 활동했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의 주요 요새는 스페인에 있었다. 1931년의 왕정 붕괴 이후 CNT의 영향력과 힘은 크게 증대했다. 1934년 6월 IWA 사무국이 CNT에 보낸 서신은 “독일, 폴란드, 프랑스 등 모든 곳으로부터, 우리 IWA 사무국은 현재 상태에 대한 보고를 받습니다. 그리고 그 상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습니다. ‘국제 파시즘은 우리의 혁명운동을 파괴하였습니다.’ 우리가 그것(파시스트적 반동)을 이겨내고 사회혁명의 희망을 둘 수 있는 유일한 곳은, 스페인입니다.”라고 적고 있다.
1931년 개최된 CNT의 첫 합법 총회에는 50만 이상의 조합원이 대표되었고, 수년 뒤 그 수는 1백만을 초과했다.
공화국 역사의 첫 1년 반 동안, 총파업 30회와 지역파업 3,600회가 조직되었다. 이 파업들은 대부분 CNT가 조직했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이 조직한 농민들은 토지를 점거하고, 대규모로 토지의 사회화를 요구했다. 1932년부터 1933년까지 지역 수준의 혁명적 봉기의 파도가 스페인 전역을 휩쓸었다. CNT의 조합원들은 도시 중심부를 점유하고 자유의지주의적 공산주의를 천명했다. 정권은 이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써야 했다. 수천이 사살되거나 체포되었지만, 스페인에서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의 영향력은 지속적으로 커져갔다.
반동의 공격에 맞서,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전술적 문제들을 다루어야 했다. 우선, 인스부르크에서의 IWA 총투표는 창립총회에서 프랑스 조합주의자들에 의하여 제시된 결의안을 거부한 볼셰비키들의 행동을 규탄하며 공산당과의 통일전선에 대한 가능성을 부인했다. IWA의 2차 총회(1925)에서는 자유가 아닌 권력투쟁의 도구로 전락한 정당에 대한 부정적 태도를 확인했다. 앞으로 정당들과의 장기적 동맹은 IWA의 목적과 모순되는 것으로써, 불가능하게 될 것이었다. 총회에 참가한 이들은 파시즘과 볼셰비즘을 노골적인 폭력과 대규모 탄압에 의지하는 “새로운 형태의 반동”이라 받아들였다. 총회는 노동자들이 시민적 자유와 결사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하여 투쟁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선언하면서도, 이 투쟁은 자본주의와 함께 철거되어야 할 민주적 체제의 일부로서 이루어져서는 안된다고 천명했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독자적으로 행동할 것이며, 심지어 파시스트와 군부독재에 대하여 투쟁할 때에조차 공식적인 동맹은 체결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다른 정치세력과의 길이 겹칠 때도 있을 것”이었다.
볼셰비즘과의 투쟁에서, 다른 세력과의 협업은 용인될 수 없을 것이었다.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들은, 스스로의 지배에 대한 위협과 마주했을 때, 언제라도 독재자들에게 권력을 이양할 준비가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독재에 맞선 투쟁은 통치의 체제로서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집행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총회에서 결의한 바에 따르면, 독재에 맞선 최선의 투쟁은 노동자들의 계급투쟁이다. 1931년의 4차 총회에서도, 비슷한 느낌의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무엇보다 IWA는 우사한 관점을 가진 다른 조직들(아나키스트 연합과 조직들, 반군국주의 조직들 등)과의 협업에 근거한 것이지만, 구체적인 목표를 쟁취하기 위해 다른 노동조합들과의 협업, 파업에 대한 지지, 연대 등은 허용되었다. IWA는 사회민주주의 인터내셔널이나 공산주의적 노동조합에 자주 접근하였고, 피시스트/독재 국가에서 생산된 물건에 대한 동시다발적 불매운동을 조직하거나, 파업으로 부족한 물자를 대체하기 위한 물품 수입을 저지하기 위한 파업을 조직하곤 했다. 1930년대 초,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파시스트 반동에 대한 투쟁이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한 문제라고 여겼다. 하지만 이들은 이 투쟁의 문제를 스스로의 사회혁명노선에 따라 접근하고자 했다. IWA가 1932년 5월 1일에 발표한 성명에 따르면, “많은 국가에서, 가까운 시일 내에, 혁명이냐, 파시즘이냐의 문제가 도출될 것”이었다. 1933년, IWA는 나치 독일에 대한 전세계적 불매를 호소했다.
스페인과 스웨덴의 IWA 가맹조직들은 독일의 물건과 선박을 바탕으로 한 업무를 거부하면서, 동시에 불매운동을 조직했다. 네덜란드에서도 이 운동을 지지했다.
하지만 프랑스에서는 반대를 표했다. 이들은 이러한 행동이 히틀러의 프로파간다로 악용될 수 있음을 걱정했다. 1933년 말, CNT에 가해진 파업은 이러한 투쟁을 끝냈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국제적 반동에 대항하기 위하여 사민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을 믿지 않고 그들의 “반파시스트”, “반군국주의” 회의들을 거부했다. 공산주의자들이 “통일전선” 건설을 제안한 이후, IWA 사무국은 이 안건을 각 가맹조직들에게 발의했지만, 결국 그 안건을 날카롭게 비판하며 부결했다.(이미 독일에서 추방당한 상태였던 FAUD만이 “반파시스트 통일전선”을 지지했다.) 1934년 5월, 사무국은 “통일전선” 조직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선언문을 다시 한 번 발표했다. 이에 호응하여 파리에서 열린 IWA 5차 총회(1935)에서는 프랑스의 CGT-SR이 제출한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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