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6장 : 혁명적 조합주의에서 아나키즘적 조합주의로) - 바딤 다미에



6: 혁명적 조합주의에서 아나키즘적 조합주의로

러시아 혁명은, 노동운동이 사회개량주의에 대한 혁명적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당 관료들이 일하는 국가 기구가 아닌, 비정당적 자주적 조직이자 생산을 자주경영하는 노동자의 기구이며, 지역적 삶의 조직기구인)소비에트라는 개념은 많은 아나키스트들과 조합주의자들이 추구하는 체제를 구상하는 데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다수의 자유의지주의자들은 러시아 혁명에 매료되었다. 이들은 러시아 혁명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보다는, 일어났으면 하고 바라는 일에 더 집중하였다. 말라테스타의 말에 따르면, 자유의지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정부 체제로 해석하지 않고, “노동자가 토지와 생산수단을 수용하기 위한 혁명적 행동이라고, 계급도, 착취도, 억압도 없는 사회와 삶을 조직하는 시도라고 바라보고 있습니다. (...)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모두의 독재가 될 것이고, 결과적으로 독재가 아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두에 의한 정부는 더 이상 역사적으로 권위주의적이고, 실질적 의미에서의 정부가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부 자유의지주의자들의 분파(“아나키즘적 볼셰비즘”)는 볼셰비키의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사회의 아나키즘적 조직을 향해 가는 중간 단계라고 바라보았다. 이로부터 수년이 지나서야 아나키스트와 조합주의자들이 “소비에트의 권력” 뒤에 숨어있는 당-국가 독재를 눈치챌 수 있었다.

혁명적 조합주의자들은 아나키즘과 볼셰비즘 중 하나를 선택할 필요가 있었다. 혁명적 조합주의 운동의 지향과 목적의 문제가 국제적 운동 통합 과정의 핵심이었다. 1918년 말, 네덜란드와 독일의 조합주의자들은 다시 한 번 국제 회의를 개최하고자 하였지만, 1912년 2월 코펜하겐에서 열린 회의에는 스칸디나비아 지역의 대의원들만이 참여할 수 있었다. 1919년부터 1920년까지 네덜란드와 스웨덴에서 총회를 개최하고자 했지만, 이는 실패로 돌아갔다. 이러한 와중, 볼셰비키들은 공산당과 유럽 각국의 조직들과 함께 코민테른의 창설을 선포했다. 많은 아나키스트들과 혁명적 조합주의자들은 이 국제연대체가 사회민주주의 좌익뿐 아니라, 자유의지주의자들에게도 충분히 매력적인 것이라고, 혁명적 원칙에 대한 맑스와 바쿠닌의 역사적 합의와 같은 것이라고 보았다. 루이 레이몽 페리카가 이끌고 있던 프랑스의  조합주의 방어 위원회(Comité de Défense Syndicaliste, CDS)는 코민테른 가입을 선언했다. 이탈리아의 USI도 1919년 7월에 코민테른 가입을 선언했으며, 이는 12월에 총회를 통해 의결되었다. 심지어 스페인의 CNT도(“진정한 노동자의 인터내셔널”을 조직하기 위한 총회를 준비하면서 “임시적으로”) 그러했다. 미국 IWW의 빌 헤이우드나 영국 혁명적 조합주의의 전위였던 톰 만 등 앵글로색슨 조합주의의 저명한 지도자들도 공산당에 입당했다.

물론 일찌감치 볼셰비키와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하여 날카롭게 비판했던 아나키스트들도 있었다.

이를테면 이탈리아의 루이지 파브리나 독일의 루돌프 로커가 그러했다. 1919년에는 스웨덴의 혁명적 조합주의자들(SAC)이볼셰비키의 사회민주주의적 중앙화에 대한 회의주의가 도출되었다. 하지만 볼셰비즘의 영향력에 대한 저항의 중심은 독일의 혁명적 노동조합 FAUD였다.

1918년 12월, FAUD는 혁명적 사회주의자들과의 협력을 부르짖었다. FAUD에는 공산당을 지지하거나, 심지어 당원인 사람들도 있었다.

1919년 봄, FAUD 대오에 만연하던 관점은 비정당적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의회주의가 아닌 평의회의 형태로 이루어내는 것이었다. 물론 이들은 여전히 생산수단의 사회화는 혁명적 노동조합에 의하여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FVdG를 FAUD로 변경하였던 1919년 12월의 12차 총회에서, 소비에트 러시아와의 연대가 표출되었다. 하지만 바로 그 총회에서 루돌프 로커는 조합주의의 원칙에 관한 보고서를 바탕으로 토론에 참여했다. 그의 연설과 뒤이은 “조합주의 원칙에 관한 선언”은 아나키즘과 혁명적 조합주의의 통합으로서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운동의 이데올로기적 기반을 선포했다. 표트르 크로포트킨의 아나키즘적 공산주의의 지지자였던 로커는 아나키즘의 전통적 목표(국가, 사유재산, 분업의 철폐, 자유코뮌의 연방의 건설, 인민의 실질적 수요를 만족하기 위한 경제적 다변화)를 독일의 아나키스트 구스타프 란다우어의 ‘사회의 총체적 반란을 기다리지 않고 새로운 문화와 다가올 자유로운 사회의 요소들을 건설해 나가는 것’이라는 개념과 융합시켰다. 로커는 사회혁명은 즉발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현존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틀 안에서 준비되어야 하고, 이 준비가 잘 될수록, 혁명의 수행은 덜 어려운 과업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로커는 혁명적 조합주의자들과 같이 노동조합이 혁명을 준비하는 기구라고 믿었다. 로커가 보기에 노동조합은 당장의 개선만이 아니라, 혁명을 위해서도 투쟁할 것이었다. 노동조합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이행기적 산물이 아니라, 미래의 사회주의적 경제조직의 세포가 될 것”이었다.

로커는 사적소유를 “소유의 독점”이라고 부정하고, 정부를 “의사결정의 독점”이라고 비판하면서, 조합주의자들이 “토지, 작업도구, 원자재, 사회적 부의 집산화를 위해, 자유의지주의적이고 국가가 없는 공산주의에 기반하여 경제적 삶을 재조직하기 위해, ‘역량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하는’ 원칙을 위해” 투쟁하여야 한다고 말했다. 로커는 부르주아 국가, 국경, 의회주의, 정당 뿐 아니라, 볼셰비즘(정당 공산주의) 역시 비판했다. 중앙화, 국가권력의 유지, 경제의 국유화(정부에 의한 소유)는 “사회주의가 아니라 착취의 최악의 형태인 국가 자본주의”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조합주의자들은 정치권력을 확보하기 위해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권력을 타도하기 위하여 행동해야 한다. 사회주의는 위로부터의 결정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사회주의는 생산자의, 노동자의 자주적인 조직이 정신노동과 육체노동 모두를 할 때에 이루어진다. 이는 “생산의 조직 · 기업 · 부문이 전체적인 경제적 유기체의 자율적 구성원이 되어, 상호적이고 자유로운 합의에 따라 공동의 이익을 위한 생산과 분배를 집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 로커는 통계와 자발적 합의가 “아래로부터의 계획”의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기업과 작업장의 조직을 경제적 평의회가 운영하고, 전반적인 생산의 조직을 산업/농업 조직이 운영하고, 소비의 조직을 노동교환소(이를테면, 지역적 층위에서의 노동자 산별 조직)를 통하여 운영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독일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총파업은 승리하기 위하여 사유재산에 대한, 기업에 대한, 식료품에 대한, 부동산에 대한 수용을 집행할 필요가 있다. 기업의 경영은 노동자 평의회에게로 이관되어야 한다. 주거의 경영은 입주자 평의회에게로 이관되어야 한다. 지역과 기업의 대표자들이 코뮌을 구성할 것이다.

화폐와 상품경제 체제는 철폐되어야 한다. 소비의 조정(최초에는 고정된 수준에서, 차차 요구에 따른 소비로 이행)은 “노동교환소”와 입주자 평의회가 진행할 것이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와 혁명적 조합주의의 근본적 차이는,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직접행동이 아나키즘적 공산주의를 확보하는 “자기충족적” 수단이라고 바라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인터내셔널의 사무총장 알렉산드르 샤피로가 이후 밝힌 것처럼, “아나키즘적 조합주의는 지유의지주의적 공산주의에 기반한 사회혁명을 수행할 조직력으로 존재한다. 하나키즘적 공산주의자들이 혁명을 조직하고자 한다면,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다. 노동조합에 가입할 수 있는 모든 아나키스트들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에 입각한 노동총연맹에 가입하여야 한다.”

독일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그들의 새로운 원칙이 공개적으로 반볼셰비키를 지향한 것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공산당원들과의 제한적 협력을 허용했다.그렇기에 1921년 1월, FAUD의 집행위원회는 독일통합공산당 중앙위원회에 보낸 편지에서, 사전에 요구(이를테면 일 6시간 노동이나 하도급의 철폐, 혹은 무기 생산의 거부)를 조율하고, 전술을 합의하며, 참가자들에게 평등한 의결권을 부여한다는 조건하에, 조합주의자들이 공동투쟁에 나설 것이라 밝혔다. 하지만 국가공산주의자들에게 이러한 조건은 수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1921년, FAUD는 정당의 당원들은 조합주의 조직에 함께할 수 없음을 선포했다.

하지만 1920년까지는, 실천에 있어 협력의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있었다. 1920년 여름, 각국의 혁명적 노동조합들은 소비에트 러시아의 초대에 응하여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2차 회의에 대표단을 파견했다. FAUD 역시 “러시아의 소비에트 경제 체계를 학습하여, 우리가 러시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한 명확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하고, 우리가 독일에 있는 러시아 동지들의 경험을 평가할 수 있도록” 오스트레일리아의 폴 프리먼과 독일의 어거스틴 서치를 파견하였다. 프리먼은 이후 볼셰비즘을 옹호하였지만, 서치는 볼셰비즘을 맹렬히 공격했다. 서치는 그가 러시아 혁명으로부터 받은 인상에 대하여 시기적절한 책을 펴내었다.

서치는 정치권력의 확보, 중앙화, 독재적 국가사회주의라는 볼셰비키적 방법론을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권했다. “우리 나라에서 혁명을 하고자 한다면 볼셰비키적 방법론을 따라서는 안된다.”

코민테른의 2차 회의에는 여러 국가에서 조합주의자들의 대표단과 옵저버들이 참석했다. 스페인의 앙헬 페스타냐, 프랑스의 마르셀 버지와 베르토 렙티, 영국 노동조합 대표단을 대표한 존 태너, 그리고 IWW의 대표단 등이었다. 회의가 시작된 직후, 이탈리아 USI의 선도적 활동가였던 아르망도 보르기가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회의가 시작하기 전, 볼셰비키들은 각국의 노동조합들이 코민테른에 가맹한 공산당의 지도 아래에 있을 수 있도록, 노동조합들의 혁명적 인터내셔널을 건설하자고 제안하였다. 이 프로젝트는, 프롤레타리아의 독제를 수인하는 것 역시 포함하고 있었다. 앙헬 페스타냐, 어거스틴 서치, 존 태너는 개량주의적 노동조합에서의 활동이나 프롤레타리아 독재, 정치권력의 쟁취, 그리고 공산당에 종속된 조직으로서의 노동조합이라는 볼셰비키적 개념을 거부했다. CNT는 코민테른에 가입할 것을 결정하였기에, 스페인의 대표단은 이 계획에 서명하는 데에 동의했다. 다만, 스페인 대표단은, 볼셰비키들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나 정권의 확보에 대한 모든 언급을 삭제할 것을 약속받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페스타냐는 속았다. 합의서는 원래의 문구 그대로 출판되었고, 페스타냐의 서명이 적혀있었다.

회의 중에도 동일한 불일치지점들이 드러났다.

혁명적 노동조합들은 새롭게 건설된 “적색노동조합 인터내셔널”(프로핀테른)에 가입할 것인지에 대한 결정을 내려야 했다. 영국의 노조위원장단과 프랑스의 혁명적 조합주의자들(1920년 9월의 오를레앙 회의에서, 이들은 아미엔 헌장을 재확인하는 의미로 이러한 결정을 내린 바 있다.)은 프로핀테른에의 가입을 결정했다. 1920년 12월, 베른린에서 오랫동안 기다려온 국제 조합주의 회의가 개최되었다. FAUD(독일과 체코슬로바키아를 대표), FORA(아르헨티나를 대표)., IWW(미국), CRS(프랑스), NAS(네덜란드), 영국의 노동조합 위원장단과 노동위원회, 그리고 스웨덴의 SAC가 참석했다. 노르웨이와 덴마크의 조합주의자들과 포르투갈의 CGT는 이 회의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다. 러시아 노동조합의 대표자들 역시 대표단을 파견했고,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프로핀테른(이들은 프로핀테른이 코민테른과 무관하다고 주장했다.)을 옹호할 것을 주장했다. 스웨덴과 독일의 대표단들은 모스크바의 입장에 대하여 비판하고, 러시아의 아나키스트들에 대한 처형을 비판했다. 프랑스의 대표단은 볼셰비키를 공고하게 지지했다. 네덜란드의 대표단은 분열했다. 다른 대표단들은 혁명적 노동조합들의 국제적 연맹의 형태에 대한 구체적인 요구를 부르짖었다. 이 요구들은 러시아와 프랑스를 제외한 모든 대표단들에게 승인되었고, “베를린 선언”이라 알려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프로핀테른은 계급투쟁에 기반하고, 자본주의적 체제의 지배를 청산하며 자유공산주의 사회의 건설을 그 목적으로 두어야하게 되었다. 또한 노동계급의 해방은 반드시 경제적 투쟁을 통하여 이루어질 것이며, 생산과 분배의 조율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경제적 조직의 과업이 되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할 것을 요구받았다. 노동조합 인터내셔널이 정당이나 정치조직과 협업할 수는 있겠지만, 모든 정당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성을 보장받아야 함 역시 강조되었다.

모든 혁명적 조합주의 조직이 모스크바의 프로핀테른 회의에 참석할 것을 요구받았다. 국제 조합주의 정보국이 암스테르담에 건설되었다.(네덜란드의 베르타르드 란싱크가 사무장을 맡았고, 독일의 루돌프 로커나 영국의 존 태너 역시 이에 참여했다.)

볼셰비키와 서유럽의 공산당들, 그리고 모스크바의 조직위원회는 혁명적 조합주의자들이 공산주의자들의 방패 아래에 있는 새로운 국제 노동조합 협회에 참여하도록 설득했다. 독일의 FAUD는 이에 대한 반대의견의 중심에 있었다. 그렇기에 독일 공산당의 노동조합 부문은 지역당협과 FAUD 내부 당협 들에게 FAUD와 “투쟁하여 굴복시킬 것”을 명하는 지침을 하달했다.

공산주의자들은 수단을 가리지 않고 FAUD에서 탈퇴할 것을 종용했다. 독일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모스크바 회의에 대표단을 파견하지 않았다. 프랑스에서는, CGT의 내부 반대파가 존재했다. 공산주의자들은 CGT 내에 “ (1)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 (2) 아1906년 아미엥 강령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구세대 조합주의자들, (3) 공산주의적 조합주의자들의 세가지 경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모스크바는 세번째 경향성이 모스크바를 지지하여 첫 번째 경향성을 무력화할 것을 기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CRS 중앙위원회의 사무장이던 피에르 베스나르는 볼셰비즘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스페인 CNT의 새 지도부(호아킨 마우린, 안드레스 닌 등)은 모스크바에 합류하고자 했다. 이들은 이전 총연맹 집행위원회의 구성원들이 체포된 이후인 1921년 4월,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총회에서 수뇌부가 되었다. 이들은 모스크바에 “우리 총연맹의 일부 분파는 적색노동조합 인터내셔널에 참여하는 것을 반대한다. 하지만 CNT가 프로핀테른에 가맹하는 것은 우리의 공고한 희망”이라고 밝히는 편지를 쓰기도 했다.

1921년 7월, 프로핀테른의 회의에서,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에게 유리하였던 대의제 체제에 힘입어 과반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1920년 베를린 회의에 참가했던 혁명적 조합주의 조직들은 FAUD를 제외하고는 모두 대표단을 보냈다. 하지만 알베르 르모앙이 제안한 바, 프로핀테른이 코민테른에 종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안건은, 프랑스 조합주의자들과 FORA, IWW, NAS, SAC, 독일 좌파공산주의 노동조합들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부결되었다. CNT, USI, NAS, IWW, FORA, 프랑스와 캐나다의 조합주의자들, FORU, 독일 노동조합들이 제안한 개량주의적 노동조합과의 협업 반대 안건 역시 부결되었다.

이러한 상황 이후 조합주의 반대파는 모스크바에서 모여, “세계 혁명적 조합주의자들의 선언”을 채택하고, “전세계 혁명적 조합주의자들의 조직”을 건설할 것에 동의했다. 이 조직은 CNT, USI, CSR, IWW, SAC, NAS, FORA, 독일의 노동조합들, 덴마크, 노르웨이, 캐나다, 우루과이의 노동조합들을 포괄하여 280만명에 근접하는 조합원을 확보할 것이었다. 새로운 조직의 본부는 파리에 둘 것이 제안되었지만, 이것이 조직의 건설로 바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볼셰비키들은 조합주의 반대파의 통일전선을 찢어내는 데에 성공했다. 프로핀테른의 지도부는 스페인 CNT의 대표단과 야합했다. 이들은 공산주의자들이 사회주의적 노동조합인 UGT를 설득하여 CNT에 흡수되도록 중재하겠다고 약속했다. 프랑스 대표단은 프로핀테른의 대표단과 회의를 가지고 “아미엥 헌장”이 준수된다는 조건 하에, 즉 노동조합이 정당으로부터 독립성을 유지한다는 조건 하에 프로핀테른에 가입하는데에 합의했다. 사실상 모든 조합주의 조직이 특정한 조건이 준수되는 한 프로핀테른에 가입하는 것에 찬성했다. FORA만이 모스크바에서 대표단을 철수시켰다.

상황이 모스크바에 불리하게 바뀐 것은, 볼셰비키들이 자행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아나키스트,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에 대한 탄압과,(해외 조합주의자들의 대표단이 모스크바에서 이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노동조합을 코민테른에 종속시키려는 볼셰비키의 지속적인 시도와 연관되어 있었다.

1921년 10월, 독일, 네덜란드, 스웨덴, 체코슬로바키아, IWW에서 활동하는 조합주의자들의 국제회의가 FAUD의 13차 대의원대회에 맞추어 뒤셀도르프에서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서, 무산되었던 노동조합 인터내셔널의 건설에 관한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회의이ㅡ 참가자들은 베를린 선언에 따라, 독일에서 새로운 국제총회를 개최할 것을 주장했다. 이 회의의 계획은 혁명적 조합주의자들의 국제 정보국에 위임되어 회의에 관한 적합한 국제 공람을 발행하기로 하였다. 이탈리아의 USI는 이에 응했다. 1922년 3월 USI의 4차 총회에서는, 니콜로 베키가 주장한 바 프로핀테른 가입안이 노동조합과 코민테른의 상호관계의 문제가 소비에트 영토 바깥에서 엄밀히 검토될 때까지 보류되었다. 스웨덴의 SAC의 조합원들은 코민테른에 가입하고, 공산당과 관계를 만들 수 있던 규약의 개정선언을 총투표를 통해 부결시켰다. CNT는 1921년 8월의 총회를 통해 정당으로부터의 독립성, 그리고 사회혁명과 자유의지주의적 공산주의 조직에 관한 원칙을 재확인했다. 새로 선출된 CNT 전국위원들은 아나키스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1922년 6월 사라고사에서 열린 총회에서, CNT는 원칙의 문제로 코민테른에서 탈퇴하고, 조합주의자 회의에 대표단을 파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기본적으로, 프로핀테른에 대한 조합주의자들의 요구는 다음과 같이 축약할 수 있었다.

“(1) 코민테른과 프로핀테른의 상호 대표를 취소하여 혁명적 노동조합 운동의 독립성을 담보할 것. (2) 프로핀테른의 2차 회의는 소비에트 영역 바깥에서, 러시아의 해로운 영향력 바깥에서 열려야 한다는 것. (3) 조지아, 아르메니아, 우크라이나처럼 러시아가 실효지배중인 국가에서 독자적 대표단을 보내지 못하게 할 것. (4) 프로핀테른 집행위원회의 거소를 소련 바깥에 둘 것. (5) 공산당을 포함한 모든 정당으로부터 노동조합 운동의 독자성을 보장할 것. (6) 개량주의적 노동조합에 가입되어 있는 혁명적 소수의 대표성을 거부할 것. 이를테면, 암스테르담 인터내셔널 내부의 공산주의적 소장파의 대표성을 거부할 것. (7) 프로핀테른에서의 투표는, 그 조합원 수와 무관하게 1국 1대표성의 원칙을 유지할 것. (8) 각국에서의 실천과 전술에 대한 프로핀테른의 개입과 지도를 중단할 것”

프로핀테른과 조합주의 사이의 공통된 토양을 찾고자 하는 노력은, 프랑스의 통합CGT가 주도했다. 통합CGT는 1922년 CGT에서 탈퇴한 좌파들에 의하여 건설되었다. 1922년 3월 8일 통합 CGT의 조합주의적 지도부는 프로핀테른의 집행위원회에 편지를 써 각국의 노동조합들이 공산당과 코민테른에서 완전한 독립성을 누릴 수 있도록 엄격히 감시할 것을 요구하면서, 이 조건에서만 프로핀테른에 가입하겠다고 전하였다. 이러한 연결망 속에서 통합CGT는 “모든 혁명적 세력의 동맹”이라는 틀 안에서 공산주의자들과 협업하기 위하여 “협업특별위원회”를 건설하였다. 스페인의 공산주의자 힐라리 아를란디스는 이 제안을 수용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는 조합주의 인터내셔널 안에서. 일부 공산주의 서클 안에서, 특히 프로핀테른이 “극도로 취약하고” 러시아 아나키스트들에 의한 반볼셰비키 소요가 활발하던 라틴 아메리카에서 인기있던 이 제안을 수용함으로서 “자유의지주의자들을 최대한 빨리 무장해제 시킬 것”을 주장했다. 그는 “만약 프로핀테른의 완전한 독립성을 보장함으로서 이 반대 운동을 한번에, 완전히 끝장내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문제를 결코 끝낼 수 없을 것이다. 오늘의 조합주의 반대파의 타협불가능한 요구는 조직적 독립성이지만, 내일 자유의지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한 문제를 제기할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프로핀테른의 지도부는 3월 10일자로 통합CGT가 모스크바에 두 명의 대표단을 보내 “공통된 이해관계에 이득이 될 모든 경향의 2차 총회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한 교섭을 진행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조합주의자들은 모스크바와의 교섭이 더욱 큰 규모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었다. 1922년 3월, 이탈리아 USI의 총회는 통합CGT의 제안을 수인하고, 국제 회의를 개최하여 합의 조건을 논의하기로 결정했다.

이 국제 회의는 6월 16일부터 18일까지 파리에서 열리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이를 위하여 통합CGT의 행정위원회는 4월 28일의 회의를 통해 프로핀테른의 초대를 거절했따.

통합CGT는 적색노동조합인터내셔널의 서기장 로조프스키에게 파리에서 조합주의자들이 프로핀테른에 가입하는 것을 방해하는 “차이를 없애기 위한” “사전회의”를 진행하겠다는 결정을 통지했다. 통합CGT는 회의를 준비하고 있던 USI와 협의하여 회의의 장소를 베를린으로 바꾸었고, 이를 통하여 러시아 노동조합의 대표단이 더욱 쉽게 참여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1922년 5월 19일, USI의 지도부였던 아르만도 보르기와 알리브란도 지오반네티는 “러시아 노동조합의 서기”에게 6월 16일부터 18일까지 베를린에서 “국제 조합주의자 회의를 개최하여 국제 혁명적 조합주의 운동과 적색노동조합 인터내셔널 사이의 관점 차이를 학습할 것이며, 만약 이 차이가 해소되지 않는다면 혁명적 노동조합 인터내셔널을 구성할 것”을 통지했다. USI는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스페인, 포르투갈의 노동조합들에게, 그리고 각국의 “조합주의적 소수파”들에게 초대장을 보냈다. 국제 조합주의자 회의에 참석한 프로핀테른의 대표자들에게 보낸 안내장에는, 세 가지 핵심적인 문제, 즉 정당으로부터 노동조합의 독립성, 개량주의적 노동조합에 공산주의적 분파가 있는 것을 금지할 것, 개별 조직의 내적 행동에 개입하지 말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문제에 대해 논쟁도, 양보도 가능하다고 적시되어 있었다. “우리는 이 세가지 가장 중요한 문제에 대하여 우리의 입장을 고수할 것이고, 이 조건 아래에서 우리는 공개적인 분열까지 감행할 준비가 되어 있다.”

1922년 6월 베를린에서 열린 국제 조합주의자 회의에는 프랑스, 독일, 노르웨이, 스페인, 러시아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 그리고 프로핀테른을 대변하는 공식적인 러시아 노동조합이 참여했다. USI의 공산주의 분파와 FAUD에서 분열한 노동조합들은 투표권이 없었다. 소련의 대표자들은 이에 불복하여 회의를 거부했다. 다수의 대표자들은 소련에서 벌어지고 있는 아나키스트 탄압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그리고 이것이 조합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의 최종적인 분열이 되었다. 프랑스의 대표단은 내부적 의견차이로 인하여 투표에서 기권하였지만, 나머지 대표단들은 프로핀테른에서 분열하고 혁명적 노동조합들의 국제 회의를 건설할 것을 결의했다. 이를 준비하기 위하여 루돌프 로커, 아르만도 보르기, 앙헬 페스타냐, 알베르 젠슨, 알렉산드르 샤피로가 참여한 사무국이 베를린에 세워졌다. FAUD의 선언에 기반하여 원칙의 선언이 채택되었다.

이 원칙은 정당, 의회주의, 군국주의, 민족주의, 중앙집권주의를 거부했다. 이 원칙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노동하는 노동자의 경제조직이 완전안 자치를 누려야 함을, 총파업을 포함한 직접행동이 그 최대의 외부적 표출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사회 혁명의 준비단계” 원칙을 천명했다. 혁명의 목표는 경제적, 사회적 생활의 재건이나, 사회적 삶에서 국가기능의 청산이고, 자유의지주의적 공산주의의 체계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볼셰비키적 방법론은 결정적으로 거부되었다. 연구자 웨인 소프의 말에 따르면, 이 선언은 “조합주의 사상에서 중대한 진보를 보여주었다. 이 선언은 1차 세계 대전 전의 유럽 조합주의에서는 은연중에 드러나던 것을, 명확하게 드러내어 확인하였다. 선언은 ‘아미엥 헌장’과 달리, 단지 정치적 중립성만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 그동안 그저 질적으로 다르면서 적대적인 조직으로만 여겨졌던 정당들이 필연적으로 노동조합에서 영향력과 통제력을 확보하려 할 것임을 밝히며, 모든 정당에 반대함을 드러내었다. 정치적 국가에 대한 타격 역시 선언하였음은 물론이다. 짧게 말하자면, 베를린에서 채택된 이 문건은, 조합주의의 원칙을 격상시켰다.”

최소한 일부의 혁명적 조합주의자들이라도 회유하기 위하여, 코민테른과 프로핀테른의 지도부들은 두 “적색” 인터내셔널 모두에서의 상호 대표성을 철회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이 노동조합에서 “지도부”가 되어야 한다는 고집은 놓지 않았다. 통합CGT의 지도부는 이 양보가 충분하다고 보았고, 프로핀테른에 가입할 것을 선언했다. 통합CGT의 자유의지주의적 소수파는 “조합주의 방어 위원회”(Committee of Syndicalist Defense, CDS)를 구성했다. 네덜란드의 NAS 지도부의 다수는 모스크바의 양보에 만족하여 새로 구성될 조합주의 인터내셔널에 참여하는 것을 반대했다. 다른 혁명적 조합주의 노동조합들은 스스로와 볼셰비키 사이의 조직적 구분을 지지했다. 1922년 10월 포르투갈 CGT의 총회에서, 55명의 지역 대표자들은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건설을 지지했고, 오직 22명만이 프로핀테른 가입을 지지했다.

이 과정에서 일부 혁명적 노동조합에서는 초기 유럽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와 구세대 조합주의, 볼셰비즘 사이의 분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보았다. 아르헨티나의 FORA는 다가올 조합주의 인터내셔널 창립총회에 “제안서”를 보내어, 제안된 조직 체계와 투쟁의 방법론을 완전히 지지하며, 새로운 국제 조직의 사회적 목표인 자유의지주의적 공산주의를 옹호했다.

하지만 FORA는 자본주의 아래에서, 자본주의적 조건에 대응하기 위해 자라나, 국가와 자본에 대한 노동자의 저항 수단으로 그 의무를 다한 노동조합이 혁명의 과정에서 새로운 사회의 기반이자 지도적인 기구가 될 것이라는 상을 거부했다. “자본주의적 생산 체계와 국가에 의한 지배를 청산한 이후, 조합주의적 경제기구는 착취와 폭압의 체계에 대항하는 투쟁의 핵심무기로서 그 역사적 역할을 마치게 될 것이다. 노동조합은 자유로운 생산자와 소비자들의 자유로운 연방과 자유로운 조직에 그 자리를 내어주어야 한다.” 또한 FORA는 노동조합의 산별 조직에 반대했다. 그들은 산별에 따른 조직형태가 자본주의를 모방한 것이라 여겼다. 마지막으로 FORA는 공산주의자들의 노동조합과의 “통일전선”에 반대하였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인터내셔널(혹은 “베를린 노동조합 인터내셔널”)의 최종적인 구성은 1922년 12월 25일부터 1923년 1월 2일까지 베를린에서 불법적으로 열린 창립총회에서 이루어졌다. 이 총회는 경찰의 진압과 체포로 마무리되었다.

이 회의에는 아르헨티나의 FORA, 이탈리아의 USI, 독일의 FAUD, IWW 칠레 분회, 스웨덴의 SAC, 노르웨이 조합주의자 연맹 (Norsk Syndikalistisk Forbund), 덴마크의 조합주의 선전 동맹, 네덜란드의 NAS, 멕시코의 CGT에서 참여했다. 스페인 CNT의 대표단은 베를린에 도착하기 전에 체포되었다. 포르투갈 CGT는 서면으로 지지를 표했다. 숙의 투표에 참여한 대표단에는 독일의 좌파 공산주의자들이었던 통합 독일 노동자 총연합(Allgemeine Arbeiter-Union - Einheitsorganisation, AAUD-E), 독일의 청년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 프랑스의 CDS, 프랑스 건설노동자연맹, 센느청년연맹, 재외 러시아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 그룹, 체코슬로바키아자유노동조합, 1920년과 1922년 네덜란드와 독일에 세워졌던 국제 조합주의 정보국의 대표자들이 있었다.

이 조직들의 구성원 수를 합치면 대략 200만 정도가 되었다. 미국 IWW는 14차 연간 대의원대회를 통해, 프로핀테른에도 조합주의 인터내셔널에도 가맹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들은 두 조직 모두가 적합하지 않다고 보았다.

네덜란드 NAS의 대표자들을 제외한 모든 대의원들은 볼셰비키의 “양보”에도, 프로핀테른에의 참여도 거부하였다. 새로운,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인터내셔널의 건설이 선포되었다. 이탈리아의 알리브란도 지오바네티의 제안에 따라, 새로운 조직의 이름은 1차 인터내셔널의 그 역사적인 이름, ‘국제노동자협의회’를 지속하기로 결정되었다. IWA의 원칙적 선언문(“혁명적 조합주의의 원칙”)은 본질적으로 1922년 6월의 베를린 선언의 반복이었다. IWA의 서기장으로 선출된 것은 루돌프 로커, 아우구스틴 서치, 알렉산드르 샤피로였다.

회의의 기록은 자본주의와 사민주의적 개량주의에 대한 분노 뿐 아니라, 볼셰비키적 “국가 사회주의”에 대한 분노도 담고 있었다. 대표단들은 볼셰비키가 러시아에서 혁명을 탄압하고 있으며, 새로운 국가자본주의 체계를 만들어 소련의 노동자들이 임노동자로 착취당하게 만들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들은 “모든 국가와 민족의 노동대중에게”라는 글을 통해 “대중을 새롭게 만들어진 정치위원-지배자 계급에 예속하기 위하여 소비에트나 협동조합처럼 인민이 자주적으로 세워낸 모든 기구를 억지로 파괴하는 볼셰비즘은 대중의 창조적인 활동을 마비시켰고, 새로운 전제정을 탄생시켰으며, 자유사상을 부수고 러시아의 정신적 생활을 지긋지긋한 정당의 잔재에 귀속시켰다”고 선언했다. 소위 “볼셰비키의 변명거리인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새로운 상류계급이 광범위한 인민대중을 지배하는 것을 확정지었고, 모든 경향의 혁명을 죽여버렸다. 그러면서도 이는 러시아의 경제적/사회적 생활을 새로운 길로 이끌거나 사회주의의 영혼을 가진 건설적 과업을 해내지 못하였다.”

루돌프 로커가 이후에 설명한 것처럼,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에게 볼셰비키는 “사회주의의 절대주의적 경향”의 후계자였으며, 사회적 혁명보다는 정치적 혁명에 더 관심을 가졌다는 점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라기보다는 부르주아 혁명이었다는 점에서, “사회주의적 자코뱅”에 그치는 것이었다.

볼셰비즘에 대한 날선 비판에도 불구하고, 일부 조합주의자들은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통일전선”으로서 프로핀테른과의 동맹의 가능성에 대해 믿고 있었다. 프랑스 대표단은 베를린 총회에서 이와 관련한 결의안 초안을 제출했다.

회의 참가자 다수가 이에 대하여 크게 열정을 보이지 않았지만, 프랑스 동지들의 상황을 복잡하게 하고 싶지 않았기에 이에 동조해 주었다. FORA는 이러한 타협에 반대했고, 결의안에 대한 투표를 기권했다.

IWA의 창립은 각 분구별 총회, 혹은 총투표를 통하여 수인되었다. 유럽에서는 FAUD, USI, SAC, CNT가 IWA의 가맹을 빠르게 결의하였다. 노르웨이에서는 인터내셔널의 건설이 총투표를 걸쳐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다. 1924년 10월, 포르투갈에서는 104개의 조합이 IWA에 가맹하고, 6개만이 프로핀테른에 가입했다. 네덜란드에서, 노동조합의 총투표에서 공산주의자들과 프로핀테른의 지지자들이 약간 과반수를 차지했다. 이에 IWA의 구성원들은 새로운 노동조합, 네덜란드 조합주의적 노동조합연맹(Nederlands Syndicalistisch Vakverbond, NSV)을 조직했다. 프랑스 통합CGT에서 마침내 분열한 혁명적 조합주의자의 CGT(Confédération Générale du Travail-Syndicaliste Révolutionnaire, CGT-SR) 역시 IWA에 가맹했다.

1920년대와 30년대에는, 오스트리아, 덴마크, 벨기에, 스위스, 불가리아, 폴란드, 루마니아 등처에서 IWA의 유관 조직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아메리카 대룩에서, 멕시코의 CGT는 총회를 통해 IWA 가맹을 승인했다. 1923년 12월, FORA는 베를린에서 채택한 “혁명적 단결”에 대한 결의안에 극도의 불만을 표하고, 인터내셔널에의 가입을 조건부로 돌리고, 총투표를 미루기로 결의했다. 하지만, 이 논쟁적 결의안은 폐기되었고, IWA가입에 대한 반대도 사라졌다. 우루과이, 브라질, 파라과이, 볼리비아, 콜롬비아, 페루, 과테말라, 에콰도르, 쿠바, 코스타리카, 엘 살바도르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도 IWA에 가입했다.(1929년, 아메리카 대륙 노동자 연합이 IWA에 건설되었다.) 일본과 중국에서도 가맹조직이 나타났다. 미국에서는 IWW 산하 해양운수산별노조가 IWA에 가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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