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5장 : 혁명의 시기
1917년 러시아에서 시작한 혁명의 파랑은 서서히 전세계를 뒤덮었다. 아나키스트와 조합주의자들은 투쟁들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혁명적 행동의 최전선에 있었다.
노동자들의 일반적 열정과 대규모 자기조직은 자유의지주의적 노동운동의 새로운 추동력이 되었다.
1917년부터 1918년까지 러시아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신문 <골로스 트루다>와 <노비 골로스 트루다>를 중심으로 모였다. 그리고 1918년, 그들은 두 번의(8-9월과 11-12월) 전러시아 총회를 개최했다. 1920년, 러시아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 총연맹(Rossiyskaya Konfederatsiya Anarkho-Sindikalistov, RKAS)가 건설되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마흐노우슈치나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준 우크라이나 아나키스트 조직 총연맹 : 나밧의 건설에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이 참여하였다.
자유의지주의자들은 공장위원회와 독립적 노동조합들로부터 상당한 지지를 받았다. 1917년 말, 1918년 초에 자유의지주의자들은 돈바스강 유역 데발체베에서 25,000~30,000명의 광부들을 IWW의 강령에 기반하여 조직해내었다. 이들은 시베리아 체렘호보의 광부들을, 쿠반과 노보로시스크 지역의 항만노동자들과 시멘트 산업 노동자들을, 철도 노동자들을, 향수 산업 노동자들을 조직했다.
1918년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모스크바, 하르키우, 키예프의 제빵노동자들을 지원했다. 페트로그라드의 전신-우정 노동자들을 지원했다. 볼가 지역의 수운 노동자들을 지원했다. 이 조직들 중 일부는 백군에 의하여 분쇄되었고, 일부는 볼셰비키 정권에 의하여 병합되거나 활동가에 대한 직접적 탄압을 겪으며 무력화되었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1918년의 1차 범러시아 노동조합 총회에서 80,000 조합원들을 대변할 수 있었지만, 1919년의 2차 총회에서는 53,000명의 조합원들을, 1920년의 3차 총회에서는 최대 35,000명의 조합원들만을 대변할 수 있었다. 일부 조합주의자들을 볼셰비키 정부로부터 자주적인 노동총연맹을 조직하고자 하였으나, 이는 진압되었다. 1922년에는,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이 건설한 노동조합들은 해산되었고, 그들의 출판 조직은 폐쇄되었다. 1920년 11월부터 12월 사이에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운동의 지도적 활동가들이었으며, 마흐노우슈치나 운동에 참여하였던 브세폴로드 볼린, 아론 바론, 마르크 므라흐니 등이 체포되었다. 1921년 3월에는 그리고리 막시모프가 체포되었다. 타간스크 감옥에서 벌어진 10일간의 단식투쟁과, 적색노동조합 인터내셔널의 1차 총회에 참석하고자 왔던 외국 대표단의 항의에 힘입어, 볼린, 막시모프, 므라흐니와 그들의 동지들은 1922년 1월,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추방되었다. 또 다른 저명한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였던 알렉산드르 샤피로는 1922년 여름 베를린에서의 조합주의자 회의에서 돌아온 이후 볼셰비키 정권에 의하여 체포되었다. 해외에서의 여러 항의들에 힘입어, 그 역시 추방되었다.
독일에서 아나키스트들은 평의회운동에 참여했다. 저명한 아나키스트 구스타프 란다우어와 에리히 뮈삼은 바바리아 소비에트 공화국의 집행기구에 참여했다. FVdG는 1918년 11월 혁명 직후부터 활동을 재개했고, 기관지 데어 신디칼리스트를 펴내기 시작했다. FVdG는 “공식 정당들의 정치에 대한 환상에서 깨어나 급진적 조합주의자라고 스스로를 정의하는 노동자들의 유일한 조직적 대안이라고 자임했다.” 조합주의자들은 평의회 운동의 좌익을 자처하면서 평의회 운동이 정당운동처럼 되어서는 안되며, 경제적 기능의 운영을 스스로 확보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FVdG의 기관지는 “노동자 평의회는 기업의 모든 예결산에 대한 통제력을 가져야 하며, 주문을 받고 원자재를 주문하는 과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서 노동자 평의회는 노동자들의 이익을 위하여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를 위하여 행동하게 될 것이다. 지난 분석에서, 노동자들이 생산수단의 유일한 주인이 될 때, 비로소 그들의 인간성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독일 조합주의자들은 뮐하임의 튀센 공작기계 공장에서의 노동자 평의회에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뮌하임의 노동자-군인 평의회에서도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영향력을 바탕으로 그들은 함보른의 파업투쟁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맡았고, 뮌헨 소비에트에 참석할 수 있었다.
평의회 운동이 약화되어 바이마르 공화국의 체제에 편입된(기업 평의회에 관한 법률이 제정된 1920년 2월 4일)이래, FVdG는 평의회가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확산하고 발전할 가능성을 환상이라 여겼다.
조합주의자들의 영향력은 1919년 4월의 루르 총파업에 대한 폭력적 진압 직후 빠르게 상승했다. 1919년 12월에는, FVdG는 독일자유노동조합(Freie Arbeiter-Union Deutschlands, FAUD)로 형태를 변경했다. FAUD의 창립 총회 당시에는 약 112,000명의 노동자들이 가입되어 있었다.
FAUD는 반혁명을 다시 되돌리기 위한 총파업을 호소했지만, 큰 반응을 얻어내지 못했다.
1919년부터 1920년 사이 루르에서 발발한 급진적 파업의 과정에서, 조합주의자들의 직접행동이라는 방법론은 자주 사용되었다. 1920년 3월, 카프 폭동에 대항하는 총파업은 여러 지역에서 무장 봉기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폭동주의”를 경계했던 중앙 집행위원회의 조심스러운 태도에도 불구하고, FAUD의 지역지부들은 그 투쟁들을 지도했다. FAUD는 에센, 뮐하임, 오버하우젠, 뒤스부르크, 도르트문트의 노동자 평의회에 참여했다. 뮐하임과 함보른에서, 공장 평의회들은 FAUD의 조언에 따라 튀센 대공장의 통제력을 확보했다.(혹은, 공장을 “사회화”했다.) “루르의 붉은 군대”의 45%는 FAUD의 조합원이었다. 튀링겐의 산업도시 죄메르다에서 조합주의자들과 좌파 공산주의자들은 소비에트 공화국을 선포했다. 이 운동은 잔혹하게 진압되었지만, 이 혁명적 시기를 거치며 FAUD 조합원의 수는 계속 증가했다. 1921년, FAUD에는 150,000명의 조합원이 있었다.
1921년 3월, 베를린의 중앙 집행위원회의 부정적 태도와 달리, FAUD의 튀링겐 지역 조합원들은 좌파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무장봉기에 나섰다.
혁명의 물결은 썰물처럼 빠져나갔고, 정부의 탄압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는 FAUD 조합원의 수를 급격히 줄였다. 1922년 FAUD의 대의원대회당시에는, 단지 70,000명의 조합원 만이 대표되었다. 하지만 FAUD는 특히 지역 층위에서는(루르와 라인란트의 광업노동자들이나 금속노동자, 베를린의 건설노동자, 중부 독일 지역 등) 여전히 중요한 세력으로 남아있었다. 1923년, 대공황과 프랑스-벨기에 군에 의한 루르 강점이 불러온 혁명적 열기 속에서,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많은 파업을 조직했고, 실업자들의 시위를 조직했으며, 이를 통하여 총파업과 사회혁명을 부르짖었다. 하지만 경제 공황과 대규모 실업은 FAUD의 힘을 깎아내었고, 그 대오는 30,000명으로 줄어들었다.
이탈리아에서는 1919년 여름에는, 혁명적 조합주의자들의 노동조합인 USI가 탄압을 이겨내고 스페지아의 파업투쟁과 볼로냐의 48시간 총파업을 성사시켰다. USI는 노동자들이 공장을 장악할 것을 권고했다. 1919년 12월 파르마에서 열린 3차 회의에서, USI는 “국가의 안티테제로서” “자율적이고 자유로운” 평의회를 제안했다. 이 평의회들은 노동자들의 방위기구이자 다가올 사회의 행정기구가 될 것이라 인지되었다. USI는 노동자들이 주도적으로 공장평의회를 건설하는 것을 지지하였고, 이로서 노동자들의 개량주의적 “타락”에 빠지지 않을 것이라 주장했다. 1920년 2월, USI에 소속된 금속노동자들은 세스트리 포넨테와 인근 도시의의 공장들을 점거하고 이를 운영할 평의회를 두었다. 3월에는 노동자의 반란이 토리노까지 퍼져아갔고, 4월에는 피에몬트와 나폴리 전역에서 소요가 발생했다. 피옴비노에서 USI 노동자들은 일바(Ilva)가 저지른 1,500명의 집단해고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고, 도시를 점령했다. 조합주의자들은 농업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반군국주의적 시위를 조직하는 데에도 적극적이었다. 1920년 7월, USI는 사용자들의 교섭 해태와 직장폐쇄에 맞선 금속노동자들의 대규모 공장 점거를 주문했다. 8~9월에는 밀라노에서 노동자들이 스스로 무장하여 “적위대”를 건설하고, 300여개 기업을 점거했다. 이 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평의회는 공장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USI보다 수배 이상 더 다수의 조직이었던, 사회주의자들이 통제하고 있는 CGL은 최소한의 약속과 개선에 만족하고 혁명을 바라보지 않으며 운동에 제동을 걸었고, USI와 그 500,000 조합원들은 홀로 투쟁을 지속하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았다. 다음 해 3월, USI는 밀라노에서의 총파업을 조직하고, 수감된 조합원들을 응원하기 위해 “노동의 집”을 폐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탈리아에서 혁명의 파도는 사그라들었다.
1921년 겨울부터 봄 사이, 조합주의자들은 다른 좌파들과 마찬가지로 파시스트들의 무장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파시스트들은 전국적으로 “노동의 집”을 부수고, 좌파적 노동조합과 정당들의 행동을 방해했다. “파시스트 폭력배들의 공격에 맞서, USI는 반동의 물결에 대항하기 위한 다층위의 행동을 조직했다. 사회적 투쟁을 더 급진화하고, 스스로 무장했다. 정당이나 다른 노동조합들의 우유부단함과 대조적으로, USI는 직접행동을 선택했다. 반파시스트 투쟁과 계급투쟁의 수위가 높은 지역에대 한 파시스트들의 체계적이고 전략적인 공격에 맞서, USI는 ‘인민의 영웅들’이라는 자경단을 건설하고, ‘노동자의 집’을 요새화하여 파시스트 폭력배들의 공격을 견딜 수 있게 하였다.” 조합주의자들과 아나키스트들은 파시스트들의 공격에 프롤레타리아트적 계급행동, 즉 파업으로 맞섰다. 하지만 이들은 이탈리아의 우익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던 파시스트들을 척결하지는 못했다. “검은셔츠단”에 맞선 투쟁을 통해 이탈리아의 노동조합들은 “노동자의 동맹”을 건설했고, 1922년 7월에는 반파시스트 파업을 선포한 것은 사실이다. 파르마, 바리 등 소수의 도시에서, 이 파업은 무장봉기로 발전했따. 하지만 개량주의자들은 이 상황에서도 또 퇴각했다. “파시즘은 저항할 수 없는 세력이 되었고, 수세에 처해있던 전제적 국가의 지배계급의 지원을 받아 앞길의 모든 장애물들을 치워낼 수 있었다. 개량주의 좌파의 모호한 행동, 공산당의 분파주의, 혁명세력의 군사적/정치적 준비되지 않음은 노동운동의 패배를 앞당겼다.” 수 개월 뒤, 1922년 10월, 파시스트 지도자인 베니토 무솔리니가 정권을 장악했다. 새로운 체제가 수립된 이후, USI에 대한 노골적인 탄압은 USI의 모든 지역 조직들을 파괴했고, 조직의 가장 열정적인 조합원들에 대한 체포와 추방이 뒤를 이었다. USI의 활동은 지하활동으로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스페인에서 혁명적 노동운동은 빠르게 성장했다. CNT의 새로운 조직들이 모든 곳에서 등장했다.
1918년 7월 카탈루냐 지역 회의에서 내려진 결정에 따라, 이 조합들은 지역 차원에서 “통합”되어 기업별 노조에서 산별노조의 형태에 더 가깝게 변하였다. CNT는 1백만 이상의 조합원을 가지고 있었다. 1918년 11월 아나키스트들의 전국 총회에서는 모든 자유의지주의자들이 CNT에 가입할 것이 결의되었다. 1919년 2월, “라 카나디엔세” 사에서의 파업에 대한 연대로서, 아나키스트 노동조합들은 총파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 파업은 스페인 노동운동의 역사에서 가장 크고 가장 성공적인 투쟁 중 하나가 되었다. 이 투쟁은 지배계급들에게 두려움을 심었다. 계엄령마저도 사용자들을 구원할 수 없었다. 파업투쟁은 노동자들의 완전한 승리로 끝났다. 노동자 투쟁의 중심은 바르셀로나였다.
그 외에도, 1919년 말의 직장폐쇄에 맞선 투쟁이나 1920년 11월의 탄압에 맞선 총파업, 1923년 운수노동자들의 파업 등 대규모 사건들이 있었다. CNT는 다가올 사회 혁명 이후, 경제를 유지하기 위한 통계적 자료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에 지배계급은 다른 전술을 준비했다. 이들은 어용(“황색”)노조를 건설하고 “피스톨레로” 갱을 이용한 백색 테러를 통해 노동운동의 활동가들을 살해하기 시작했다.
1919년 12월, 혁명적 열정의 분위기 속에서 CNT는 마드리드에서 대회를 개최하여 그 목적을 국가의 해소와 자유의지주의적(아나키즘적) 공산주의의 건설이라고 천명하였다. 이를 통하여 CNT는 마침내 공식적으로 “중립적 조합주의”의 개념을 부정하고 제1인터내셔널에서의 바쿠닌 분파의 전통의 올바름을 선언했다. 정부는 CNT가 만들어낸 끊임없는 파업의 파도에 대항하여 체제적 탄압을 개시했다. 1921년 3월에 이루어진 총연맹 집행간부에 대한 체포를 포함하여, CNT의 지도적 활동가들에 대한 체포가 이어졌다. CNT는 지도력을 잃었고, 지하로 스며들 수밖에 없었다. 1923년 봄, 저명한 노동계급 지도자 살바도르 세기와 프란세스크 코마스가 살해당했다. 아나키스트들과 조합주의자들은 반혁명적 테러리즘에 파업과 무장행동으로 맞섰다. 이 대치상태는 1923년 9월 프리모 데 리베라의 독재가 수립되고 독립적 노동조합 활동이 금지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프르투갈에서 혁명적 조합주의자들은 UON을 장악했고, 건설노동자들과 연대한 리스본의 총파업을 성공적으로 조직했다. 이들은 경찰과 국방군에 맞선 무장항쟁을 요구했다. 1918년 11월, UON이 총파업을 계획하고 선포하자, 건설노동자들은 무장 봉기를 부르짖었따.
이 봉기는 패배하였지만, 이것이 노동자들을 주눅들게 하지는 못했다. 1919년, 물가 인상과 실업률 증가에 맞선 노동자들의 시위는 계속되었다. 경제의 몇몇 부문에서는, 일 8시간 노동을 쟁취해내기도 하였다. 1919년 9월의 총회에서, UON은 포르투갈 노동자 전체의 단결된 조직으로 전환할 것을 결의하였다. 노동총연맹(Confederação Geral do Trabalho, CGT)가 건설되었다. 그 규약에는 혁명적 조합주의의 원칙들이 담겼다.
총연맹 내의 경향들 모두는 순수조합주의가 불충분하다는 점에 합의했다. 1922년부터 포르투갈 CGT는 노동조합 뿐 아니라, 학생과 예술가를, 임차인 조직들을, 소비협동조합들을, “조합주의적 연대조직”들을 포괄하기 시작했다. 1919년에 120,000명에서 150,000명 수준을 달성했던CGT의 조합원 수는 1922년 다소 줄었지만, 여전히 포르투갈의 조직 노동자들 중 다수를 점하고 있었다. 그들의 행동은 상당부분 자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조직적으로 갑작스럽게 시위를 몰아치고, 강력한 조직을 건설하거나 노동자들 사이의 연대를 건설하기 전에 썰물처럼 흩어지곤 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파업들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1924년 2월, 10만 이상이 참여한 포르투갈 사상 최대의 노동자 시위를 포함한다.)
프랑스에서 혁명적 노동운동의 재건 역시 시작되었다. 프랑스 CGT의 개량주의적 지도부에 의한 파업운동의 약화는 노동조합 내 소장파가 피에르 모나트와 신문 <라 비 우브리에>를 중심으로 조직하도록 만들었다. 이 소장파는 1919년 9월 CGT 총회에서 더욱 강화되었고, 스스로의 협력체를 만들어 “혁명적 조합주의자 위원회”(Comités Syndicalistes Révolutionnaires, CSR)를 건설하고, 개별 노동조합과 “부르스 드 트라바일”에서의 영향력을 세우고자 하였다.
소장파들은 철도노동조합 내에서 그 입지를 공고히 할 수 있었다. 1920년 초, 철도 파업이 프랑스를 마비시켰다. 혁명적 조합주의자들은 5월 1일의 총파업을 조직했고, 여기에는 금속노동자, 건설노동자, 항만노동자, 광업노동자 등이 참여했다.
하지만 이러한 반란이 혁명으로 성장할 것이라는 희망은 실현되지 않았다. 1921년 9월, 리옹에서 열린 소장파의 회의에서는 CSR의 중앙위원회가 건설되었고, 그 대표자는 피에르 모나트가 맡았다. 1921년 12월, 파리에서 열린 총회에서 혁명적 조합주의자들은 CGT로부터의 분열을 선언했고, 1922년 7월에 생테티엔에서 열린 총회를 통해 “통합CGT" (Confédération générale du travail unitaire, CGTU)를 건설했다.
아나키스트들과 조합주의자들은 다른 유럽국가의 노동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스웨덴 SAC의 조합원의 수는 1920년에는 32,000명에 달했다. SAC는 주로 미장이, 건설노동자, 벌목노동자, 제지노동자, 금속노동자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사회민주주의적 노동조합 운동에 비해 수적으로는 적었지만, 전후 파업투쟁에 광범위하게 참여했다. 노르웨이와 덴마크의 조합주의자들의 조직은 SAC와 밀접하게 연관을 가지고 있었다. 네덜란드의 NAS는 징집과 물가 인상에 반대하는 운동에 열정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통해 전쟁 기간 중 입지를 강화했다. 그리고 NAS는 전후의 파업과 시위의 물결에 복무했다. 1918년, NAS의 조합원 수는 49,000명까지 성장하였지만, 여전히 사회민주주의자의 노동조합이나 사무직 중심의 합의주의적 노동조합보다 그 규모가 작았다. 1920년부터 1922년까지 이어진 파업투쟁의 실패는 NAS 조합원 수의 축소로 이어졌고,(1922년 가을에, NAS의 조합원은 26,000명으로 줄어들었다.) 내적 부동의를 강화했다.
불가리아에 강력한 아나키스트 운동이 존재했고, 영국, 체코슬로바키아, 벨기에 등지에 분명한 조합주의적 경향성이 존재하였지만,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는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에 기반한 노동조합 중앙을 건설해내지 못했다.
러시아에서 발발한 혁명의 파고와 전후 경제적 어려움은 아르헨티나의 노동자 계급 투쟁을 크게 확장시켜내었다. 이에는 FORA와 그 가맹노조들이 선도적 역할을 하였다. 이중 특기할만한 것은 1919년 1월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벌어진, 바리케이드에서의 전투와 잔혹한 탄압(“비극의 한 주”)를 동반한 총파업, 1920년 5월 수도에서 발발한 총파업, 정부군에 의해 잔인하게 진압된 1921년 파타고니아의 농업노동자들의 파업과 반란 등이 있었다. 우루과이의 FORU는 1917년부터 1921년까지의 기간 동안 지역과 전국을 가리지 않는 공고한 파업투쟁들을 연쇄적으로 조직하면서 우루과이의 파업 운동을 사실상 이끌었다. 전쟁 중 브라질의 아나키스트들은 군국주의와 이윤을 위한 식량 가격 인상에 대항한 운동의 중심에 있었다. 1917년, 상 파울루, 산투스, 리우 데 자네이루에서 거대한 총파업이 발발했다. 투쟁의 과정 속에서 노동자들은 상당한 양보를 받아내었고, 노동법이 제정되도록 하였다. 1918년 11월, 리우 데 자네이루의 아나키스트들은 반란을 일으켰고, 정부를 몰아낸 뒤 “공산주의 공화국”을 선포하고자 하였다. 반란은 진압되었고, 정부는 150,000명의 노동자가 가입되어 있던 친 아나키스트 노동조합 연맹을 부수어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나키스트들은 1920년 브라질 노동자 총연맹의 3차 총회 결과가 확인해주는 것처럼, 노동운동 내에서 입지를 유지할 수 있었다. 아나키스트 노동운동은 1924년의 군사반란 이후에야 겨우 무너트릴 수 있었다.
멕시코에서 아나키스트들은 노동계급 지도자들이 정권과 야합하는 것을, 1918년 멕시코 지역 노동조합 총연맹(The Confederación Regional Obrera Mexicana, CROM)을 창건한 루이스 모로네스를 필두로한 노동조합 활동가들의 친정부적 방침을 비판했다. 아나키스트와 조합주의자 조직들은 1921년 총회를 열고, 노동총연맹(Confederación General de Trabajadores, CGT)의 창립을 선포했다. CGT는 섬유노동자, 시내전차의 차장, 전화 교환수, 유전 노동자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920년대 동안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임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을 선도했다. 60,000명의 조합원을 가지고 있던 총연맹은 “자유의지주의적 공산주의”를 지지했다. 칠레에서 아나키스트와 조합주의자들은 1921년까지 칠레 노동조합 연맹의 극좌분파로 기능했다. 하지만 아나키스트들의 관심은 1918년부터 1919년 사이 결성된 세계산업노동자연맹 칠레분과로 쏠렸다. 칠레 IWW는 1920년에는 항만, 선원, 건설, 제화 등의 산업에서 25,000명 이상의 조합원을 조직하고 있었다. 칠레 IWW는 높은 물가와 식량공급의 부족에 대항한 행동들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칠레 IWW는 1927년 카를로스 이바녜즈의 군사 독재가 시작되기 전까지 학생운동을 지원하기도 했다.
라틴 아메리카의 다른 국가들에서도,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에 입각한 노동운동의 선두에 섰다. 파라과이 지역 노동조합 본부는 전기 노동자들의 파업과, 아순시온에서의 총파업을 비롯한 파업투쟁을 선도했다. 볼리비아에서 1918년에 창건된 라 파스 지역 노동 연맹과 조합주의적인 광업 노동조합은 절박한 파업투쟁을 개시했다. 페루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선원, 제빵, 섬유 노동자 등)은 일 8시간 노동의 개시와 물가 인상에 반대하는 공고한 투쟁을 지속했다. 1919년, 혁명적 성격을 가졌던 총파업의 파도 속에서, 페루 지역 노동자 연맹이 등장했다. 정부는 노동시간의 단축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이 운동은 1930년대 중반, 군부독재에 의하여 파괴되었고, 노동조합에 대한 영향력은 공산당원과 민족주의적 개량주의자들에게로 넘어갔다. 에콰도르에서는 아나키스트들의 영향력 아래, 지역적 노동조합 연맹이 1922년에 탄생했다. 같은 해 10월부터 11월까지, 이 연맹은 과야킬에서 에콰도르 사상 최대의 총파업을 조직했다. 이 과정에서 과야킬은 상당기간 노동자들의 통제 아래에 있었다. 파업에 대한 잔혹한 탄압은 운동에 큰 타격을 주었고, 에콰도르의 노동운동은 1920년대 후반이 되어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이 다수의 노동조합을 살려낸 후에야 겨우 회복할 수 있었다.
쿠바에서 아나키스트들과 조합주의자들은 1921년 창건된 아바나 노동조합 연맹과 1925년 창건된 쿠바 전국 노동조합 연맹의 지도부를 장악하였으나, 1925년부터 1927년까지, 헤라르도 마차도 이 모랄레스의 독재정권에게 분쇄되었다. 이는 쿠바에서 공산주의자들이 노동운동의 통제를 쥐게 만든 재앙이었다.
중앙아메리카 제국에서 아나키스트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상당기간 노동운동 조직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유지했다. 이를테면 코스타리카 노동총념앵(1913~1923), 파나마 노동조합연맹(1921~1923), 파나마 노동조합총연맹(1920년대 중반), 엘살바도르 지역노동조합 연맹, 과테말라 노동조합 활동위원회(1920년대 말) 등에서 그러했다. 1
일본의 노동운동은 1차대전 후 1918년 쌀소동과 1919년~1921년 사이 몰아치던 파업의 파도 속에서 빠르게 급진화되었다. 파업투쟁의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직접행동의 방법론을 광범위하게 사용하였다. 일본에서 가장 중요한 노동조합 본부였던 우애회(友愛會)에서, 아나키스트, 혁명적 조합주의자, 볼셰비즘의 지지자들은 영향력을 키워나갔다. 그들의 노력은 1920년 우애회의 총회에서 계급투쟁과 직접 행동의 방법론을 승인하도록 만들었고, 우애회는 1921년 일본노동조합총동맹으로 그 이름을 바꾸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은 1922년, 노동운동 세력의 이합집산이 이루어졌다. 노동조합 본부의 개량주의적 지도부와 공산주의자들은 노동조합운동을 부문에 기반하여 재편하고자 했다. 이들과 가까웠던 아나키스트와 조합주의자들은 연방주의적 원칙과 노동조합의 자율성을 고수했다. 자유의지주의자들은 총동맹을 떠났지만, 상당수의 인쇄노동자, 기계노동자, 금속노동자, 전기 노동자, 도쿄 지역본부 등 상당수의 노동조합들이 그들의 영향력 아래에 남았다.
아나키스트 노동조합들의 연맹은 1923년 9월의 “대지진”이후의 탄압을 지연시킬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운동의 지도자였던 오스기 사카에가 살해되었다. 1926년이 되어서야 아나키즘적 공산주의의 원칙을 승인한 노동조합 본부가 등장했다. 전국노동조합자유연합회(全国勞動組合自由連合会)가 그것이었다. 연합회는 1930년대 중반까지 존재하다가 정부의 탄압으로 해소되었다.
중국에서의 첫 번째 근대적 노동조합은 1910년대 광저우에서 아나키스트들이 조직했다. 그리고 아나키스트들은 최초의 파업 역시 조직했다. 1920년대 초, 광저우의 노동조합들은 아나키스트의 영향 아래(이 영향력은 항만 노동자와 서비스 노동자들 사이에서 특히 강하였다) 화공호조회(華工互助會)로 단결하였지만, 1923년부터 1924년 사이 분열하였다. 1920년 11월, 아나키스트들의 주도하에 호남노공회(湖南勞工會)를 건설하여 중공업과 경공업을 막론하고 노동자들을 조직했다. 하지만 1922년 1월, 호남노공회는 지방정부에 의하여 분쇄되었고, 지도부는 처형되었다. 1920년대, 아나키즘과 조합주의 운동의 중심은 상하이로 넘어갔다. 이곳에서 1924년 3월 아나키스트와 다른 비공산당계 노동조합들이 노동조합연맹을 건설했다. 이 노동조합은 파업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하지만 1927년 국민당이 연맹의 통제력을 탈취했다. 1926년, 아나키스트들과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민봉사(民蜂社)를 창립하고 IWA에 가맹했다. 이 조직은 국공내전 시기를 견뎌내며 1920년대 말까지 존속했다.
극동의 피식민국가 다수에서 사회적 투쟁의 중심은 민족국가의 독립을 획득하는 것이었기에, 아나키스트들의 반국가주의적 표어는 널리 퍼지지 못횄다. 인도에서 온 만다얌 파타사라티 티루말 아차르야가 이끄는 혁명적 이민자 집단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의 입장을 취했다. 이 조직은 인도의 노동조합 내에서 일하고자 작업을 취하고자 했으나, 이들의 선전은 대영제국의 식민정부에 의하여 탄압되었다. 조선과 대만의 아나키스트들은 일본의 동지들에게 강하게 영향을 받아, 1920년대 동안 다수의 노동조합과 지하조직을 건설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해산되었다. 말레이시아와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에서는 1920년대 동안 중국인 노동자들의 아나키즘적 노동조합들이 활동했다.
전후에는 조합주의 운동의 특이점이라 할 수 있는 IWW의 활동이 증대했다. IWW는 유럽의 조합주의자들처럼 노동조합이 혁명을 수행하고 스스로 주도권을 가진다는 사상에 동의했고, 직접행동의 전술을 채용하며 의회주의와 정당에 비판적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연방주의를 부정하고, 대신 모든 “원 빅 유니온”을 건설하여 산별 지부로 분할하고자 했다.
IWW에서 아나키스트들은 중요한 역할을 맡지 않았다. 오히려 다양한 좌익 맑스주의 정당의 활동가들이 더욱 많은 역할을 맡았다. 미국에서는 1917년부터 1920년 사이 IWW의 조합원들이 정부로부터 지대한 탄압을 당했다. 캐나다에서는 다른 산별노조주의적 노동조합 본부, 원 빅 유니온(One Big Union, OBU)이 건설되어 캐나다 서부에서 강력한 총파업을 선도했다. 북아메리카 IWW와 OBU는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의 노선을 따라 발전한 것이 아니었다.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IWW의 초기주체들이 기존 노동조합들 안에서 작업을 수행했고, 그들이 산별 기반으로 연합하고, IWW의 원칙을 수인하도록 추동했다. 이들은 1차 세계 대전 중 심각한 탄압을 당했고, 결과적으로 많은 지도적 활동가들이 공산당에 입당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산별노조주의자들이 IWW(1910~1914), 국제사회주의자동맹(1915~1921), 산업사회주의자동맹(1918~1921)을 중심으로 집결했다. 이들은 1921년부터 1922년까지 이어진 광산 파업을 포함한 대규모 파업을 조직했고 “백인”과 “흑인”과 인도인 노동자들의 활동적 노동조합 다수를 조직했다. 하지만 1921년 이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산별노조주의자 다수는 공산당에 입당했다.
콜롬비아와 베네수엘라에서는, 1920년대 중후반이 되어서야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경향이 유의미한 영향력을 가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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