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 1차 세계대전 중의 혁명적 조합주의
1차 세계대전은 조합주의자들의 국제주의적, 반군국주의적 입장에 대한 중대한 시험이었다. 일부(알렉산더 버크만, 안토니오 베르나르두, V. 가르시아, A. 샤피로, 빌 샤토프)는 에리코 말라테스타와 엠마 골드만과 함께 전쟁에 반대하는 성명에 연명하여 전쟁이 양측 모두의 공격성에 의한 것이라 격하했다.
이들은 그들의 목적이 “반란을 촉발시키고 혁명을 조직”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다른 일부는(이를테면 크리스티안 코르넬리센과 같은) 표트르 크로포트킨, 장 그라브, 샤를 말라토, 그리고 다른 유명한 아나키스트 수명과 함께, 독일의 제국주의가 “더 큰 악”이라고 바라보면서 협상국을 지지했다.
프랑스에서 혁명적 조합주의의 약화는 전쟁 전부터도 목격되었다. 산업화의 진보는 생활 조건의 일시적 안정과 다소간의 임금 인상을 가져왔다. 파업은 더욱 평화로운 성격으로 이루어졌으며, 노동자와 노동조합들 중에는 협상을 통해 문제를 풀고자 하는 경향이 등장했다. CGT의 지도부(사무총장이었던 레옹 주오, 피에르 모나트 등)는 점점 더 산업적 발전의 현실을 고려하도록 내몰렸다. “1910년 이후 혁명적 조합주의자들의 이데올로기적 가식과 CGT 조합원들의 실질적 행동은 점점 더 벌어지기 시작했다. 미래를 향했던 아미엥의 합의는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전쟁은 프랑스 혁명적 조합주의의 재앙을 더욱 심화시켰다. CGT의 연방국은 전쟁에 반대하는 총파업을 조직하기는커녕 “조국의 수호”를 부르짖었다. 전쟁 기간 동안, CGT의 대표자들은 다양한 국립 “혼성 위원회”에 협조했다. 그러는 와중, 알퐁스 메하임과 피에르 모나트가 이끄는 반전파가 표면화되었고, 라 비 우브리에(La Vie Ouvriere)라는 신문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그 다음 해, 좌파 혁명적 조합주의자들은 조합주의 방어 위원회(Comité de Défense Syndicaliste, CDS)를 결성하여 “아미엥 헌장”에 명시된 바 극단적인 반전주의적 입장을 취하였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전쟁에 반대하였던 좌파 사회주의자들로부터 독립성을 상당히 유지할 수 있었다. 1917년, CDS는 노동자들의 파업 행동을 지지했으며, 노동의 집약화와 생활 조건의 악화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이탈리아에서 전쟁에 대한 입장의 문제는 USI의 분열을 낳았다. 사무총장 A. 데 암브리스가 이끄는 그룹은 참전을 지지했다. 이들은 참전이 이탈리아의 “혁명화”를 촉발할 것이라 보았다.(이 입장은 “혁명적 개입주의”라 지칭되었다.) 하지만 USI의 다수 구성원들과 조직들은 이 입장을 지지하지 않았다. 새로운 사무총장으로 아르만도 보르기가 선출되었다.
1915년, USI는 전쟁에 반대하는 총파업을 의결했다. 하지만 그것을 집행할 수는 없었다. “개입주의”의 후예들은 다수 노동조합들에서 제명되었다.
IWW의 미국인 조합주의자들은 참전에 반대하는 적극적인 투쟁을 시작했고, 정부와 민족주의자들로부터 잔혹한 처벌을 받았다.
1915년, IWW의 유명한 활동가인 조 힐이 사형당했다. 1916년에는 민족주의적 광풍 속에서 5명의 조합원이 경찰에 의한 총격을 당했다. 1917년에는 애리조나의 광산 파업과 관련하여, 1,200명의 IWW 조합원들이 뉴 멕시코 사막으로 추방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IWW는 1915년 캘리포니아 휘틀랜드나, 1916년 미네소타 메사비 레인지에서의 대규모 파업에 조력할 수 있었다.
1917년 봄에는, IWW는 사업장 내의 행동과 사보타주를 조직하여, 목공과 구리광산 산업(전쟁에 필수적인 산업)에 손상을 입혀내었다. 1916년부터 1917년까지 IWW의 조합원 수는 40,000명에서 75,000명으로 늘어났고, 1917년 여름이 끝날 즈음에는 125,000명에서 250,000명 사이로 늘어났다.
독일에서의 조합주의 운동은 전쟁의 시작과 함께 마비되었고, FVdG와 그 기관지는 금지되었다. 영국에서 역시 특별하게 활동적인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전쟁이 지속될수록, 노동자의 삶은 더욱 끔찍해졌다. 많은 나라들에서 파업이 타올랐고, 단식 투쟁 역시 이어졌다. 아나키스트들과 조합주의자들은 이러한 투쟁들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18년 5월, 프랑스에서 혁명적 조합주의자들의 회의에서 전쟁에 반대하는 혁명적 총파업을 결의했다. 이 시위에서 특히 적극적인 역할을 한 것은 루아르와 파리 지역의 금속노동자들이었고, 이들의 투쟁은 군수산업에 지대한 피애를 입혔다. 이 운동은 탄압되었고, 활동가들은 전선으로 내몰렸다. 그리고 조합주의 방어 위원회의 지도자 레이몽 페리카는 국가반역죄로 고발되었다.
1916년, (중립국이었지만, 경제적으로 전쟁에 휘말렸던)스페인에서 전국의 노동자들은 생활 물가 인상에 반대하는 시위에 나섰다. 스페인은 마비되었다. CNT는 사회주의자들의 일반노동조합(Unión General de Trabajadores, UGT)와 “혁명적 동맹”을 체결했다. 1917년 5, 6월 스페인은 혁명의 문어귀에 섰다. 8월에는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규모의 총파업이 무장투쟁을 동반하여 발발했다. 수일간의 전투 끝에 이 투쟁은 진압되었다.
포르투갈에서 발발한 물가 인상과 실업률의 증가에 저항하는 시위는 자발적인 성격을 가진 저항행동으로 발전해나갔다. 1914년 9월, 리스본에서 소요가 불타올랐고, 최초의 사망자가 나왔다. 1915년 봄, 실업자들이 농업부를 포위하고 파괴했다. 노동조합은 폭동과 아수라장을 파업으로 조직했다. 1917년에는 혁명적 조합주의자들이 UON에서 사회주의자들을 완전히 압도하면서 주도권을 잡았다.
첫 번째 충격 이후 평정을 되찾는 과정에서, 아나키스트들과 혁명적 조합주의자들은 일상적인 국제 연대를 재건하고자 노력했다. 1915년, 국제 반군국주의 회의가 스페인의 갈리시아 지역에서 조직되었다. 이 회의에는 스페인 노동계급 아나키스트의 이름난 분자들(이를테면 앙헬 페스타냐, M.안드레우, 프란시스코 미란다 콘차, 호세 로페스 보우사, 에우제비오 카르브, 엘류테리오 퀸타니야 등)뿐 아니라, 포르투갈, 프랑스, 잉글랜드, 이탈리아, 브라질, 아르헨티나, 쿠바 등지의 대표단들도 함께 하고 있었다. 이 회의에서 국제적 총파업의 의제가 다루어졌다. 회의는 스페인 CNT의 재생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916년 12월, 중립국이던 네덜란드의 NAS는 전 세계의 노동자 조직을 소환하여 혁명적 조합주의의 국제 회의를 개최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는 종전까지 집행되지 못하였다.
노동자 조직이 1차 세계대전을 막아내지 못했다는 사실은, “중립적” 조합주의의 무능은, 노동대중 사이에서 증대하고 있던 혁명적 감정은 조합주의 운동의 변화가 시급하게 필요하도록 만들었다. 알렉산드르 샤피로는 이후 “세계대전은 중립적 조합주의를 청산했다”고 기록한다. 많은 활동가들이 조합주의는 그 자체로 충족적이지 않으며, 스스로 조직된 노동자의 운동을 명확한 혁명적 이상으로 추동되는 직접행동과 결합할 필요를 느끼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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