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3장 : 혁명적 조합주의와 아나키즘) - 바딤 다미에



3: 혁명적 조합주의와 아나키즘

20세기 초의 혁명적 조합주의는 이론가의 머리속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었다. 혁명적 조합주의는 노동자들이 찾아낸 자신만의 독트린, 즉 직접행동의 원칙을 가진 노동자 운동의 실천이었다. 프랑스 CGT의 주된 활동가 중 하나였던 에밀 푸제는 이 말을 노동계급은 현대 사회에서 지속적인 투쟁을 맞이하게 되며, “그들 자신을 제외한 어느 누구도, 어떠한 정부도, 어떠한 힘도 그들을 위할 것이라 기대하지 않게 되었다. 노동계급은 자신의 투쟁을 건설하고, 스스로의 역량을 행동의 수단으로 사용한다. CGT의 지도자중 하나였던 조르주 이베토는 ”직접 행동은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드러날 수 있다. 노동자들은 각자의 업무에 따라, 각자의 상상력에 따라, 각자의 주도성에 따라 새로운 방법론을 만들어낼 것이다. 원칙적으로 직접행동은 합법성에 대하여 신경쓰지 않는다. 직접행동은 사용자가 두려움이나 스스로의 이익을 위하여 양보하도록 강제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방법론은 생산에 있어 노동자와 정반대에 있는 자들, 즉 기업가나 자본가들에게 직접적으로 향하는 경제투쟁의 방법론(불매운동, 개별적/집단적 사보타주, 파업)을, 혁명적 조합주의적인 선전행동과 반군국주의적 활동을 포함하고 있었다. 정치투쟁이 조직노동자들의 과업이라는 개념은 거부되었다. 현존하는 체제의 틀 안에서 노동자들이 스스로의 권리를 확보하고 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투쟁은 국가와 자본에 대한 전위가 될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자본주의는 철폐될 것이고, 임노동은 철폐될 것이며,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노동자들이 생산의 통제를 확보할 것이다. 그렇기에 혁명적 조합주의자들에게 파업은 특별한 것이었다. 그들은 파업을 최종 목표가 아닌 “혁명적 훈련”이자 임박한 혁명에 대한 노동자들의 준비라고 바라보았다.

혁명적 조합주의 운동은 그에 맞는 이데올로기적 독트린을 구성하지 못했다. 이론층위에서 혁명적 조합주의는 다양한 원천을 가진 사상의 복잡한 총합일 뿐이었다. 이 복잡성에는 여러 경향들이 기여했다. 혁명적 조합주의 운동을 처음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사람 중 하나인 네덜란드의 조합주의자 크리스티안 코르넬리센은 혁명적 조합주의 활동가들을 다음과 같은 세 그룹으로 나누었다. 노동조합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겨 이데롤로기로부터 거리를 둔, 계급투쟁의 실천에 기반하여 급진적 위치를 확보한 노동조합주의자들, 노동조합운동에서 단순소요에서 행동으로 이행할 여지를 바라본 아나키스트들, 사회주의를 의회주의의 교착상태에서 떼어내고 싶어했던 사회주의 정당과 그룹의 구성원들이 그것이었다.

노동조합에서 일하며 노동조합을 자유의지주의적 입장으로 끌어가고 싶어했던 아나키스트들은 노동조합이 단지 자기 노동조건의 개선을 위한 투쟁의 기구인 것이 아니라, 총파업이라는 수단을 통해 사회혁명을 이행하고, 경제의 통제력을 확보하며,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해 생산과 소비를 계획할 수 있는 기구로 바라보았다. 1909년, 유명한 프랑스 혁명적 조합주의자였던 에밀 파토와 에밀 푸제는 “어떻게 혁명을 건설할 것인가”라는 계획서를 펴냈다. 이들은 노동조합이 혁명적 파업의 과정에서 자본주의적 소유구조를 철폐하고, 스스로를 생산자 조직으로 변형시킬 것이라 보았다. 각각의 노동조합은 각각의 사업장을 점유하고, 생산과 분배를 재조직할 것이었다. 노동조합들은 지역적 · 산업적 연방을 통해 새로운 사회의 기구가 될 것이고, 경제적/사회적 삶의 영역에서 결정을 하고 그 결정을 집행할 것이었다. 통계를 수집하고 그것을 공유하며, 이 통계에 기반하여 생산과 분배를 조직할 것이었다. 그리고 행정이 아래에서 위로 이루어지는 사회적 절차를 담보할 것이었다. 이때 지역에 기반하여 그 거주민들을 통치하는 자들은 단지 지역 층위의 생활 조직에서 보조적 역할만을 담당하게 될 것이었다.

혁명적 조합주의자들의 미래상을 통해 우리는 산업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아나키스트적(자유의지주의적)이고 자주적인 대안의 기본 요소들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아나키즘과 혁명적 조합주의의 원칙에는 차이들이 있다. 우선, 혁명적 조합주의는 아나키즘적 공산주의의 독트린보다 더 많이 산업적 진보와 조직의 산업적 구성을 선호했다. 아나키즘은 자본주의, 사적소유, 국가에만 반대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 생활의 중앙집중화 및 노동의 분화와 특화에도 반대했다. 아나키스트 이론가들은 직업적 조직이나 공통된 이해관계에 기반한 조직들에 반대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여전히 미래의 자유로운 사회는 자주적이고, 자율적이며, 지역적인 코뮌의 연방에 기반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산업적 중심화는 직업위계와 특화를, 공장에서의 전제주의와 노동의 분화를, 생산과 생산성에 대한 광신을 전제한다. 아나키스트들은 산업주의의 논리에 대항했다. 그들은 산업의 탈중심화를, 산업을 소규모 단위로 쪼갤 것을 주장했다. 그들은 산업을 지역적 필요에 따라 재정돈하기를 원했다. 그들은 산업적, 농업적, 지적, 육체적 노동의 온전성을 회복하고자 했다. 그들은 코뮌과 지역이 최대한 자급자족하기를 바랐다. 반면, 다수의 조합주의자들은 대규모 중앙집중적 산업 체제를 청산하기보다는 현존하는 체제 내에서 노동 과정에 영향을 주고자 했다.

그렇기에 코르넬리센은 분업이 임노동자들에게 “커다란 발전”이며, 그들의 해방에 기여할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는 제2인터내셔널의 산업적 맑스주의의 정신에 입각하여, 생산수단의 자본주의적 소유관계의 청산은 노동자들이 그 운영에 모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선언한다. 코르넬리센은 노동조합의 채용관료를 옹호하기도 한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노동조합에서 일하던 일부 아나키스트들은 조합주의가 새로운 산업시대의 아나키즘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에밀 푸제는 “나는 아나키스트이지만, 아나키는 나에게 중요하지 않다.”

혁명적 조합주의 운동의 일부 아나키스트들은 아나키스트적 사회 원칙과 노동조합이 주도하는 위계적이고 중앙집중화된 생산 체계 사이의 차이를 인지했다. 그들은 이러한 “조합주의 체제”가 아직 국가를 철거하지는 못할지라도, 그 필연적인 발전태는 “경제 관계에 있어 공산주의 원칙을 완전히 적용”하고 “결과적으로 (국가의) 무쓸모성”을 불러와 국가의 “완전한 소멸”을 낳을 것이었다. 즉, 조합주의는 우리를 아나키로 이끌 것이었다.

아나키즘적 공산주의의 이론은 사적 소유와 국가를 끝장낼 사회혁명 직후에 사회는 “역량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하는” 공산주의적 생산과 분배의 체제로 변할 것이라는 것이다.

파토와 푸제의 책은 이행기적이고 “집산주의적인” 대안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 대안은 당대의 맑스주의자들의 그것과 유사했다. 즉, 생필품은 공산주의적으로 분배하되, 나머지 재화들은 “노동에 따라” 분배하는 것이다.(이를테면, ‘노동전표’ 같은 것을 통해서 말이다.) 그리고 코르넬리센은 사회민주주의자들과 같이 현대 산업사회에서 세계경제의 상호의존성은 점점 증대하기에, 자급자족은 불가능할 것이며, 가격과 노동의 대가는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최소한 그 풍족의 상태가 유지되는 동안은 화폐의 형태로 유지될 것이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상당수 맑스주의자들은 의회주의적 사회주의와 개혁주의라는 “노망”에서 깨어났고, 혁명적 조합주의가 사회주의에 생명을 부여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 보았다. 조합주의적 “신맑스주의” 이론가들(프랑스의 조르주 소렐, 에두아르드 베르트, 위베르 라가르델, 이탈리아의 아르투로 라브리올라와 엔리코 레온 등)은 국가와 공장의 규율을 비판하고 그 청산을 요구하는 맑스주의적 입장으로 돌아가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그들의 폭력의 동원에 대한 생각, “다수의 민주주의”에 대비되는 의미에서의 전위-엘리트 “혁명적 소수”의 강조, 그리고 온전히 실현할 수 없더라도 믿어야 하는 신화가 있다는 생각(소렐은 이에 대한 예시로 조합주의자들이 이야기하는 바 총파업이나 맑스주의자들이 이야기하는 바 “결정적 혁명”을 든다.)은 자유의지주의적 관점에 반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글은 매우 널리 읽혔고, 많은 국가에서 혁명적 조합주의 운동과 연관되어 그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아나키즘적 공산주의의 이론가들(표트르 알렉세예비치 크로포트킨, 에리코 말라테스타 등)은 여전히 사회진보의 뿌리는 인류의 윤리적 진보에 있다고 보았다. 자본주의는 상호부조에 기반한 인류의 사회적 본성을 막기에 퇴보적 체제다. 인류를 서로 투쟁하는 계급들로 분할하는 것은 인간 본성의 실현을 막는 반동이다. 아나키즘적 공산주의자들은 이로부터 계급사회의 청산이라는 요구를 도출한다. 그리고 이로 나아가는 길은 억압된 사회적 층위의 저항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가 바라는 아나키즘적 혁명은 특정한 계급의 이익에 국한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혁명의 목적은 현재 경제적, 정치적, 윤리적으로 억압되고 있는 전체 인류의 해방에 있다.”고 강조한다. 반면, 혁명적 조합주의는 맑스주의적인 경제 우위와 사회발전에 있어 계급투쟁의 진보성 개념을 도입하였다. 혁명적 조합주의는 산업 자본주의의 발전이 자유 사회를 향한 경제적/사회적 기반을 만들어낸다는, 자신의 계급이익을 위한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은 필연적으로 자본주의의 철폐를 가져올 것이라는 전제를 상정했다. 이러한 전제는 혁명적 조합주의자들이 스스로의 조직적/강령적 관점을 체현해낸 “아미엥 헌장”(1906년 프랑스 CGT의 총회에서 승인된 문건)에 잘 드러난다. 물론 “헌장”은 프랑스 노동조합 총연맹 내의 서로 다른 경향들의 합의를 거쳐 만들어진 것이지만, 이 문서는 여러 나라의 노동운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혁명적 조합주의의 원칙들을 선언한 것이다.

이 문서에 따르면, CGT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계급에 기반하여 모든 “임노동과 경영활동을 제거하기 위한 투쟁”의 필요성을 인지한 모든 노동자들을 “정치적 경향에 무관하게” 포용할 것이었다. “헌장”은 “모든 형태의 착취와 억압에 맞선” 경제적 영역에서의 계급투쟁의 원칙을 천명했다. “헌장”은 조합주의가 이중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우선, 노동계급의 노동조건의 즉각적 개선을 위한 투쟁을 지도하는 것이고, 나아가 총파업을 통한 “자본의 수용”을 통한 “완전한 해방”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노동조합(생디칼)은 미래에 “사회적 재조직의 기반이 될 생산과 재분배를 담당할 집단”으로 변모할 것이었다. 노동조합의 조합원들에게는 정당과 이데올로기, 종교 등을 조합 내로 끌어들여 계급적 단결을 해하지 않을 것이 권고되었다. 하지만, 노동자가 조합 바깥에서 자기 이상을 위해 투쟁할 권리는 인정되었다.

그렇기에, 아나키즘적 공산주의와 비교할 때, 혁명적 조합주의는 부분적이고 비일관적이며 모순적인 산업자본주의 체제와의 투쟁만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아나키스트들이 이 새로운 운동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잦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도 아니다. 크로포트킨은 노동조합 내부에서 일할 것을 처음으로 요구한 사람 중 하나였다. 또한 크로포트킨은 파토와 푸제의 책에 노동자의 자기 조직과 자주경영이라는 측면에서 혁명적 조합주의가 얼마나 아나키즘과 유사한지 서문을 써 주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아나키스트들이 혁명적 조합주의에 공감한 것은 아니었다. 아나키즘과 조합주의 사이의 논란은 1907년 8월의 (놀랍지 않게도, 네덜란드의 조합주의자 코르넬리센이 조직한)암스테르담 총회에서 불붙었다. 프랑스의 대표였던 CGT의 활동가 피에르 모나트는 조합주의가 “1906년의 아미엥 총회에서 정의된 바와 같이” 자기완결적이라면서, 아나키즘과 조합주의의 공통된 입장과, 두 입장이 상호간에 영향을 주고 있음을 강조했다. 그는 조합주의가 아나키스트의 입장의 갱신이자 “아나키즘 운동과 혁명을 만들어낼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총회의 다른 참가자들은 조합주의의 “자기완결성”에 대하여 비판하였다. 보헤미아의 아나키스트였던 카렐 보흐리체크는 조합주의는 아나키즘적 선전의 수단이자 도구여야지 그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코르넬리센은 아나키스트들이 지지하여야 할 것은 모든 형태의 조합주의나 모든 형태의 직접행동이 아니라, “목적적으로 혁명적인” 조합주의나 직접행동이라고 주장했다. 모나트의 입장에 대하여 가장 활발히 비판한 것은 이탈리아의 아나키스트인 에리코 말라테스타였다. 그는 노동조합에서 일하는 아나키스트들을 지지하였지만, 노동조합과 노동운동이 혁명적 투쟁의 수단 중 하나일 뿐이라고 말했다. 말라테스타는 미래의 노동조합이 “스스로 생산의 운영을 가져올 역량이 있는 조직”이 될 것이라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노동조합의 핵심은 현존 사회의 틀 안에서 집단적인 물질적 이득을 수호하는 도구가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노동자들의 연대가 공통된 경제적 계급이득에서 비롯할 것이라는 것을 부정했다. 특정 집단이 타인의 희생으로 자신의 요구를 이루는 것이 온전히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는 공통된 이상에 기반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윤리적 연대”의 가능성을 보았다. 말라테스타는 총파업이 사회혁명을 대체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노동의 중단은 혁명을 촉발할 수는 있겠지만, 반란과 수용을 대체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아나키스트들이 아나키스트적 이상에 따라 노동조합을 “각성시켜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특별하고 온전히 혁명적인 노동조합의 상을 거부하고, “완전히 중립적인” 단일한 노동조합을 지지했다. 하지만 이미 암스테르담 총회에서 아메디 뒤노아가 “노동자 아나키즘”이라는, 훗날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와 매우 밀접하게 연관된 개념을 도출했다. 그리고 이 개념은 추상적이고 단지 문학적일 뿐이었던 “순정 아나키즘”을 대체했다. 총회는 아나키스트 인터내셔널 내에 조합주의자들(러시아의 알렉산드르 샤피로와 영국의 존 터너) 일부와 조합주의에 공감하고 있던 독일의 아나키스트 루돌프 로커를 포함하는 부서를 만들기로 결의했다. 이 부서는 1911년 말에는 그 업무를 중단했다.

아나키스트들이 혁명적 조합주의를 비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새로운 조류는 아나키스트 노동운동 내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특히 제1인터내셔널 당시부터 아나키스트 노동운동이 존재하여 왔던 스페인이나, 이후에라도 아나키스트 노동운동이 발흥하였던 라틴아메리카 등지에서 그러하였다.

스페인의 경우, 거대한 아나키스트 노동조합의 전통은 1870년대의 제1인터내셔널 스페인 지역 연맹(Federación Regional Española de la Asociación Internacional de Trabajadores), 그리고 1880년대의 스페인 지역 노동자 연맹(Federación de Trabajadores de la Región Española)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후자의 조직을 재건하려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잔학한 탄압 아래에서 노동조합들은 독자적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1907년, 바르셀로나의 자율적 노동자 모임들은 아나키스트들의 영향 아래에서 “노동자의 연대”(Solidaridad Obrera)라는 연맹을 건설했다. 이 연맹의 목적은 자본주의 체제를 “노동자의 조직으로, 그리고 그 조직이 변모한 노동의 사회적 체제로” 대체하고자 하였다. 연맹의 활동은 곧 스페인에서 가장 산업적으로 발전한 지역이었던 카탈루냐 전체로 퍼져나갔다. 1909년, “노동자의 연대”는 모로코에서의 식민전쟁에 반대하는 바르셀로나 총파업을 조직하였지만, 이는 군대에 의하여 잔혹하게 진압되었다.(“비극의 한 주”, la Setmana Tràgica) 다른 지역에서도 유사한 형태의 조직들이 자라났다. 혁명적 조합주의 운동의 추동력은 프랑스 CGT가 보여준 예시였다. 1910년 10월부터 11월까지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총회에서, 스페인 노동자들의 전국조직이 건설되었다. 전국노동총연맹(Confederación Nacional del Trabajo, CNT)가 그것이었다. CNT의 조직구조는 CGT의 그것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노동자 협회들은 노동조합(“생디칼”)들로 그 형태를 전환했다. CNT의 건설과정에서 채택한 결의안들과 결정문들은 아나키즘과 혁명적 조합주의의 결합을 만들고자하는 시도를 반영했다. 조합주의적 입장에 가까웠던 지점들(부분적 개선을 위한 투쟁의 필요성, 일 8시간 노동, 최저임금의 도입, 직접행동이라는 방법론의 적용, 혁명적 총파업)과 더불어, CNT 총회에서 의결한 결의안들은 정치와 정당을 거부하는 등 아나키즘 운동의 전통을 이어가는 것을 포함하고 있었다. 스페인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다시 한 번, 제1인터내셔널의 표어, “노동자의 해방은 노동자 스스로의 과업이다”를 채택했다.

CNT는 조합주의가 그 자체로 목적인 것이 아니라 혁명적 총파업을 조직하고, “부르주아지에 대한 혁명적 수용을 통해 노동자의 완전한 해방”을 확보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 선포했다. 이들은 조합주의가 새로운 “강력한 사상”, 새로운 급진적 사회 재건 계획, 즉 아나키즘을 선전하는 필수적 방법이라고 선언했다. 1911년, CNT는 30,000명의 조합원을 조직하고 있었다. CNT는 마드리드, 빌바오, 세비야, 헤레스 데 라 프론테라. 말라가, 타라사 일대에서 대규모 파업을. 사라고사에서의 총파업을, 모로코 전쟁에 반대하는 혁명적 총파업(1911년 가을)을, 10만 섬유 노동자의 파업을, 발렌시아 총파업(1914년 3월)을 조직할 수 있었다. 1911년, CNT는 금지되었고, 1914년까지 지하조직으로 남아야 했다.

멕시코, 쿠바, 브라질 등의 라틴아메리카 국가에서의 아나키스트들은 노동조합 운동 내부에서 활동했다. 1870년대부터 제1인터내셔널의 후계자들이 활동하고 있었던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에서, 아나키즘은 노동운동 내부에서 최고로 발전했다. 에토레 마테이, 에리코 말라테스타, 그리고 다른 유명한 아나키스트들이 아르헨티나의 첫 번째 노동자 조직의 건설에 참여했다. 1901년, 아르헨티나의 전국단위 노동자 연맹이 등장했다.(그리고 1904년부터, 이 연맹은 아르헨티나 지역 노동자 연맹(Federación Obrera Regional Argentina, FORA)이라고 알려졌다.) 연맹 창건 1년 뒤,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연맹에서 철수했고, 1905년의 총회에서 FORA는 “아나키즘적 공산주의의 경제적, 철학적 원칙”을 선전할 것을 조합원들에게 권고하였다. 동시에 FORA는 조합주의의 “자기완결성”과 “중립적” 노동조합의 상(프랑스 혁명적 조합주의자와 말라테스타 모두가 가지고 있던 상)을 모두 거부하였다.

FORA는 많은 지역적 파업과 총파업들을 조직했고, 노동일수의 절감과 노동조건의 개선을 쟁취했다. 이를테면, 설탕산업 노동자들에 연대한 총파업(1901년 로사리오)이나 판매노동자들과 연대한 총파업(1902년에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1904년에는 전국적으로)이 있겠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제빵 노동자들의 파업(1902년)이나 항만노동자들의 파업(1902년, 1903~1904년) 역시 있었다. 1907년, 1909년, 1910년에는 수십만 노동자들이 탄압에 저항하여 전국적 연대 총파업에 참여했다. 1907년에는 아나키스트들의 주도하에 임차인들의 총파업을 조직하기도 했다.

이러한 행동과 시위는 종종 경찰과의 폭력적인 충돌과 시가전으로 이어졌고, 이는 잔학한 탄압으로 이어졌으며, 이 탄압은 시위성 파업으로 응답되었다. 1907년, 유럽의 한 아나키스트 신문의 기자는 “이곳의 아나키즘 운동은 세계의 어느 곳과도 다르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이곳에서 모든 노동자는 아나키스트다.” 1916년, “중립적” 조합주의의 지지자들은 FORA에서 분열했다. 이 분열해나간 온건파는 “9차 총회의 FORA"라고 알려졌다.

FORA의 영향 아래에서 1905년에는 우루과이 지역 노동자 연맹(Federación Obrera Regional Uruguay, FORU)가 구성되었다. FORU는 더 조용히, 많은 조직적 등락을 경험하며 발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루과이의 노동자 아나키스트들은 시내전차의 차장들, 제빵사들, 가죽세공노동자들, 건설노동자들, 운수 노동자들, 인쇄 노동자들, 금속노동자들, 통조림 공장 노동자들 등의 중요한 파업들과, 몇몇 총파업을 조직할 수 있었다. FORU는 정부가 일 8시간 노동을 도입하도록 강제하기도 하였다. 아르헨티나의 FORA는 1916년 창립된 파라과이의 지역노동자 센터(Centro Obrero Regional del Paraguay, CORP)의 모델이 되기도 하였다.

멕시코, 쿠바, 브라질 등지에서는 노동운동의 시작부터 아나키스트들이 본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멕시코의 아나키스트들은 멕시코 최초의 노동조합, 멕시코 노동자의 위대한 모임(El Gran Círculo de Obreros de México, GCOM)의 건설에 개입했다. 20세기 초에 아나키스트들은 포르피리오 디아스의 독재에 항거하는 강고한 투쟁을 집행했다. 하지만 1910년부터 1917년까지의 혁명적 시기 동안 아나키스트들의 세력은 분열했다. 리카르도 플로레스 마혼이 이끄는 활동가 분파는 반란운동을 조직했고, 마침내 독재를 몰아내는 데에 성공했다.

하지만 이 분파는 사회혁명의 목표, “땅과 자유”를 얻기 위하여 새로운 체제에 맞서 행동을 계속했다.

다른 분파는 조합주의적 노동조합 본부, 세계 노동자의 집(Casa del Obrero Mundial, COM)을 건설하는 데 참여했다. 멕시코 조합주의자들은 혁명의 자유주의-헌법주의 세력과 동맹을 체결했고, 그로서 일터에서의 자유를 확보할 가능성을 얻으려 하였으며, 이들이 판초 비야가 이끄는 북방의 혁명군, 그리고 에밀리아노 사파타가 이끄는 남방의 농민반란을 진압하는 것을 돕고자 했다. 하지만 1916년, 정부는 조합주의자들을 파괴했다.

1898년까지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쿠바에서는 아나키스트 운동이 대도시 아나키스트들의 영향 아래에서 발전했다. 20세기 초의 쿠바 노동조합주의자들은 아나키스트들의 영향 아래에 있었다.

브라질에서 아나키스트들은 사회주의자들을 이겨내고 다수 지역의 노동조합 연맹들을 장악했다. 그리고 1906년, 아나키스트들이 주도한 전국 노동조합 본부, 브라질 노동자 총연맹(Confederação Operária Brasileira, COB)이 건설되었다. 적극적인 파업투쟁이 전국적으로 펼쳐졌다.

라틴아메리카의 다른 지역에서도 아나키스트 노동운동이 퍼져나갔다. 칠레에서 아나키스트들은 다양한 숙련공의 저항 조직에, 그리고 “만코뮤날레”(그리고 “만코뮤날레”는 노동조합이, 상호부조사회가, 지역 노동자 연합이 되었다.) 에 함께했다. 그리고 이들은 다수의 강력한 파업들을 조직했다. 하지만 1907년 이들의 운동은 큰 타격을 받았다. 정부는 아나키스트들이 조직한 30,000 질소비료노동자들의 파업을 폭력적으로 진압했고, 이 과정에서 최대 4,000명의 인민들이 살해당했다.

페루에서는 노동자 아나키스트들이 제빵, 섬유, 항만, 선원, 단순노무직 노동조합을 대표했다.

이들은 강력한 파업투쟁을 주도했고(이를테면, 일 8시간 노동이 여러 직종들에 도입된 후 발생한 1913년 카야오의 총파업이 있겠다.) 토착 공동체주의자들과의 공동작업도 진행했다. 다수의 행동적 노동조합들이 볼리비아, 에콰도르, 파나마 등지에서 아나키스트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혁명적 조합주의와 아나키스트 노동운동이 세계로 빠르게 퍼져나가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조직간의 교류들이 생겨났고, 급진적 노동조합의 국제연합을 만들고자 하는 시도가 생겨났다. 1907년 9월, 암스테르담에서 아나키스트 총회가 열리고 있던 당시, 조합주의자들의 회의가 따로 열렸다. 독일자유노동조합(Freie Vereinigung deutscher Gewerkschaften. FVdG)에 따르면, 이 회의에서는 “조합주의 운동 국제 회보”를 4개국어로 펴내어 각국의 조합주의 조직간 연락망의 강화를 꾀하는 것이 결의되었다. 회보는 코르넬리센의 편집으로 파리에서 출판되었다. 이 출판은 네덜란드, 독일, 보헤미아, 스웨덴, 프랑스의 조합주의자들이 재정적으로 후원하였으며, 미국의 IWW도 분기별로 지원하였다.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의 혁명적 조합주의 조직의 일반적 활동가들은 프랑스 CGT가 개량주의자들 뿐 아니라 혁명적 노동조합들도 참여하는 국제 노동조합 총회를 개최할 것을 요청하곤 했다. 몇몇 프랑스 혁명적 조합주의자들은 다른 혁명적 노동조합들과의 관계를 강화하는 것을 지지하거나 심지어 더 높은 우선순위를 두기도 했다. 하지만 CGT의 지도부는 노동운동의 단결을 위하여 이를 거부했다. CGT는 사회민주주의자들과 개량주의자들의 방패 아래에 있는 국제 조직, 국제 노동조합 전국본부 사무국(International Secretariat of National Trade Union Centres, ISNTUC))에 가맹했다. 1905년과 1907년 CGT는 사무국이 조직한 회의의 참석을 거부했다. 독일의 노동조합들이 총파업과 반군국주의 의제를 담은 결의안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CGT는 1909년부터 회의에 참석하였지만, 전권을 가진 대의원회의 형태로 전환을 실패하였다. 혁명적 조합주의 세력의 결집은 CGT 없이 진행되었다.

국제적 연대를 위한 새로운 제안은 IWW의 6차 회의에서 이탈리아, 독일, 네덜란드의 조합주의적 노동조합들에 의하여 제기되었다. 그리고 국제 회의를 주관하는 책임은, 영국의 산업조합주의교육동맹(Industrial Syndicalist Education League, ISEL)이 맡았다. 회의의 참가자들은 “자주적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혁명적 노동자”로 제한되었고, 정당의 “활동가들”이나 “관료들”은 거부되었다. 런던에서의 국제 조합주의 총회를 위한 준비 위원회는 1913년 9-10월 사이에 소집되었다.

총회의 회기들은 런던의 홀보른 마을회관에서 열렸다. 독일의 FVdG, 아르헨티나의 아나키스트 노동조합 FORA와 조합주의적 노동조합 “아르헨티나 지역 노동자 총연맹”(Confederación Obrera Regional Argentina, CORA), 브라질의 COB, 벨기에, 쿠바, 프랑스, 스페인, 네덜란드의 노동조합들, 이탈리아의 조합주의적 노동조합과 지역단위 노동조합들, 스웨덴의 SAC(이들은 노르웨이와 덴마크의 조합주의자들을 대변하기도 하였다.)의 대표자들이 참석했다. IWW의 대표단은 참관하고 있었다. 이 총회의 서기로는 코르넬리센이 선출되었고, 러시아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 알렉산드르 샤피로가 통역을 맡았다. 이 회의에서는 국제 협력의 문제가, 이론과 전술의 문제가, 반군국주의와 반전운동의 문제가, 이주노동의 문제가 논의되었다.

회의 중에는 이탈리아의 대의원 알세스테 데 암브리스와 같이 제시된 결의안의 반국가주의/반자본주의적 편향을 완화함으로서 “노동계급의 분열”을 회피하기 위한 새로운 노동조합의 인터내셔널을 건설하고자 하는 이들과, 더 공고하게 혁명적 노선을 가진 이들 사이의 차이가 표면화되었다. 회의가 종료될 때, 혁명적 조합주의의 기본적 입장을 담은 원칙의 선언이 채택되었다. “자본주의적 예속과 국가의 억압”이 부정되었다. “계급투쟁”이 사적 소유와 노동자의 연대의 불가피한 결과물이라 선언되었다. 이 문건은 자유 연합에 기반한 독립적 산별노조의 건설을 통해 매일의 필요를 위한 투쟁과 자본주의/국가의 철폐를 위한 투쟁 모두를 지향해야 한다는 선언을 포함하고 있었다. 노동자의 조직이 “정치적/종교적 차이가 만들어낸 분할책동을 극복해야 한다는 원칙은 유지되었다.

이 선언은 노동조합이 자산의 사회화를 이루어내고, 생산을 사회 전체를 위해 운영하는 기구가 되어야 한다는 관점을 드러내었다. 직접행동이 투쟁의 수단이라 인지되었다. 무엇보다, 이 총회는 새로운 조합주의 인터내셔널의 건설을 향한 결정적인 일보가 되었다. 총회는 국제적 연대를 부르짖었으며, 국제 조합주의 정보국을 건설하여 상호간의 소통과 협력을 보조하고 다음 회의의 준비를 담당하기로 하였다. 정보국의 본부는 그 본부를 파리에 두려는(그렇게 하여 CGT의 통제 아래에 두려는) 데 암브리스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의 전국노동사무국(Nationaal Arbeids-Secretariaat, NAS)가 제공하기로 하였다. 정보국은 게릿 반 에르켈을 회장으로 하여, 서기인 토마스 마르크만, 재정담당자 A.J.후스, M.A. 반 데르 하그, 그리고 F. 드류스로 구성되어 1914년 1월부터 공식적인 업무에 들어갔다.

노동자 아나키스트와 혁명적 조합주의자들의 더 큰 단결은 수개월 뒤 발발한 1차 세계대전에 의하여 방해되었다. 1차 세계대전은 혁명가들의 모순과 비일관성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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