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 혁명적 조합주의 운동의 탄생
노동운동에서의 사회민주주의와 그와 관련된 것들(의회주의, 개량주의, 당과 노조관료의 지배)에 대한 도전은 프랑스에서 처음 등장했다. 프랑스에서 노동자들은 아랠로부터 혁명적 조합주의의 전술론을 채택하였다. 이 노선은 부르스 드 트라바일(bourses de travail)에서 즉각적으로 확산되었다. 첫 번째 부르스 드 트라바일은 1886년 파리에서 건설되었다. 최초이 이곳은 직업소개소로 지어졌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노동자들의 집합소이자 문화적 교육의 중심으로 기능하기 시작했다. 부르스는 직업간 조직의 지역적 형태에서 계급투쟁을 위한 노동조합의 본부로 변화하였다. 1892년에는 전국적 연맹이 건설되었다. 부르스 드 트라바일은 노동자들이 지역적 층위에서 정당이나 다른 노동조합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적극적인 일들을 해내었다. 부르스는 주체적 조직과 상호부조의 독특한 형태의 본부가 되었다. 부르스는 실업자들이 일자리를 찾는 것을 도왔다. 이들은 산업재해의 희생자들을 돕기도 했다. 이들은 도서관을, 사회적 박물관을 건설했고, 전문가와 제너럴리스트들을 길러냈다. 그리고 부르스는 노동조합의 건설을 위한 선전작업을 해내었다. 부르스는 이를 위하여 파업을 조직하기 위한 체계적 방법을 세웠고, 투쟁기금을 모금하였으며, 전체 투쟁에 함께하였다. 부르스 드 트라바일의 약점은 그들이 재정을 지방정부에 의존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정부 관료와 노동운동의 활동가들 사이에 지속적인 갈등의 요인이 되었다.
프랑스의 사회주의자(“게데주의자”)들은 부르스 드 트라바일 운동에 어떠한 영향력도 행사하지 않았다. 부르스에 참여한 사람들은 1880년대와 1890년대에 이루어진 사회/노동 법안의 허점들에 의하여 눈을 뜬 평조합원 활동가들이었다. 쥘 게데의 사회당에 반대했던 사회주의자 집단의 구성원들(특히 “알레망주의자”들)과 파리, 루앙, 툴루즈, 알제리 등지의 노동조합에서 활동하던 아나키스트들 역시 참여했다. 아나키스트들은 혁명의 시기에 지역 부르스들과 노동조합들이 “생산자의 조직”이 되어 자주적으로 통제되고, 자유의지적이며, 국가가 없는 사회의 맹아가 될 것을, (만약 노동대중들이 아나키스트적 의식을 갖추기 전에 혁명이 일어난다면) “온전한” 아나키즘으로 향하는 이행기가 될 것을, 국가나 화폐가 없는 사회인 자유의지주의적 공주의의 도입단계가 될 것을 기대했다. 아나키스트인 페르낭 펠루티에가 부르스 드 트라바일 연맹의 서기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혁명적 조합주의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프랑스의 부르스 드 트라바일 운동에서 혁명적 조합주의의 가장 중요한 원칙들 몇몇이 도출되었다. 그리고 이 원칙들은 제1인터내셔널에서 반권위주의 세력(“바쿠닌주의자”)들이 제안한 원칙과 유사했다. 노동조합의 정당으로부터의 독립, 정치투쟁에의 비참여, “직접 행동”(사람들이 자신의 이익에 근거하여 직접 일어나는 것을 의미했다.), 노자간의 직접 교섭을 통한 임노동자의 노동조건 개선, 사회혁명의 수단으로서의 총파업에 대한 준비 등이 그것이었다. 이 유사성은 부르스에 참여중이던 아나키스트들로부터의 영향 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당대 프랑스 노동자들의 실질적 경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1902년, 부르스 드 트라바일 연맹은 다른 노동조합 중앙조직이었던 노동총연맹(Confédération Générale du Travail, CGT)와 함께 통합CGT를 건설했다. CGT는 1912년, 프랑스의 조직노동자 100만명 중 60만명을 조직하여 가장 큰 노동자 조직이 되었다. CGT의 지도부는 혁명적 조합주의를 충실히 계승했다. 이 이데올로기적 입장은 여러 노동조합들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부두노동자, 금속노동자, 연필, 보석, 성냥, 모자 등을 제조하는 노동자, 인쇄노동자, 건설노동자, 제지노동자, 식품노동자, 운수노동자, 지방공무노동자 등이 혁명적 조합주의를 지지했다.
하지만 CGT는 개량주의자들이 주도하는 노동조합들 역시 포괄하고 있었다. 철도노동자, 제책노동자, 섬유노동자, 기계관리노동자, 군수산업 노동자, 음악가, 도예노동자, 시설관리노동자, 담배제조노동자, 트럭운전노동자 등이 그러했다. 역관계는 매우 불안정했고, 언제건 변화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적극적 투쟁의 시기동안 심지어 개량주의적 노동조합에 속한 노동자들마저 혁명적 조합주의를 지지했다.
CGT의 급진화는 파업을 선도하는 것에서만 드러나지 않았다. CGT는 군국주의와 식민주의에 대한, 일 8시간 노동에 대한 캠페인을 조직했다. 1905년 5월 1일부터 프랑스의 노동조합 중앙은 다음 해부터 일 8시간 노동을 도입하기 위한 대규모 투쟁에 돌입했다. 전국적으로 표어들과 유인물들이 배포되었고, 현수막이 게시되었으며, 회의들이 열렸다. 이 사안에 대한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노동계급 안에 구원론적 분위기가 자리잡았고, 이는 현실을 사로잡은 조합주의자들을 억제했다.(많은 공장에서 ‘70일 더, 그러면 우리는 자유로워지리라’나 ‘67일 더, 우리의 해방은 시작된다’와 같은 현수막을 읽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와 동시에 부르주아지는 집단광기에 사로잡혔다. 대공포가 등장했다.” 정부는 CGT의 지도부를 체포하고, 도시에 병력을 투입했다. 1906년 5월 1일이 되기 한주일 전, 여러 사업장에서 일 8시간 노동을 요구하는 파업이 터져나왔고, 5월 1일에는 총파업이 발발했다. 파리 단독으로만 20만명의 노동자가 이 파업에 참여했다.
거리에서는 바리케이드가 세워지고 전투가 벌어졌다. 많은 산업부문에서 경제적 생활은 온전히 확보되었다. 수개월간 몰아친 후위의 파업은 정부로부터 많은 양보를 얻어냈다. 개별 기업에서는 노동시간이 줄어들고 임금이 인상되었다. 주휴일과 토요 단축근무가 법제화되었다. 건설 노동에서의 노동강도가 줄어들었다.
다음 수년간, CGT에 대한 탄압은 더욱 강해졌다.
정부는 파업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투입했고, 군인들은 노동자들에게 총격을 가했다. 시가전이 발발했다. 노동조합은 그 자원의 고갈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었다. 1908년 CGT의 지도부는 개량주의자들의 손에 넘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14년에는 총연맹의 행동들에서 강력한 혁명적 순간들이 포착되었다. CGT는 반군국주의/반전 캠헤인을 적극적으로 지속했다. 노동자들의 요구에 맞지 않았던 연금 입법안과 인플레이션에 대한 투쟁도 진행했다.
프랑스의 혁명적 조합주의는 다른 유럽 국가들로 전파되었다. 1903년의 총파업 이후, 1893년에 만들어진 네덜란드의 전국노동사무국은 개량주의적 사회민주주의와 결별하고 혁명적 조합주의를 도입했다.
이탈리아에는 1891년부터 프랑스의 부르스 드 트라비일과 유사한 “노동의 집”들이 세워졌다. 1904년의 총파업, 남부에서 1905년에 일어난 총파업과 충동들, 1906년 토리노에서 발발한 총파업 등은 노동자이 단결의 필요성을 느끼게끔 하였다. 1906년, 이탈리아 노동총연맹(CGdL)이 건설되었다. 그 지도부는 사회주의자들이었고, 혁명적 조합주의자들이 주된 반대파였다. CGdL의 개량주의적 사회주의 지도부에 대하여 노동자들은 만족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 불만은 지도부가 1907년 밀란 철도노동자들의 파업과 1908년 파르마의 지역파업에 대한 지지를 거부하면서 더욱 커졌다. 반면 혁명적 조합주의자들은 1908년부터 1911년까지의 기간 동안 아풀리아 농업노동자들의, 토리노와 제네바의 금속노동자들의 대규모 행동을 지도하고, 이탈리아의 아프리카 침동에 반대하는 파업을 조직하고, 피옴비노와 엘바 섬의 주조 노동자들의 파업을 지도하고, 카라라 건설노동자의 파업을 선도했다. 이렇게 혁명적 조합주의 운동의 통합적 구조가 점차적으로 건설되었다. 마침내, 1912년에는 이탈리아 조합주의자 동맹(USI)가 연방적, 자주적 구조를 가지고 건설되었다. 그리고 1914년, 이 조합에는 124,000명의 조합원이 가입했다. 혁명적 조합주의자들은 이탈리아 노동자들의 가장 큰 규모의 행동들을 조직했다. 이를테면 대리석 채석 노동자들의 총파업, 밀란 금속노동자들의 총파업, 건설노동자, 선원, 농업노동자 철도노동자들의 활동, 1913년 가구 제조 노동자들과의 연대총파업, 1914년 카라라 건설노동자들의 파업 등이었다. 1913년 6월에는 마르셰(안코나)와 에밀리아 로마냐에서 반군국주의 시위가 반란이 되었다.(“붉은 주간”) USI는 이 모든 행동들을 방해했던 CGdL의 지도부와 달리,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아나키스트들이 1890년대 초반부터 노동자의 조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포르투갈에서는, 프랑스 혁명적 조합주의의 예시를 통해 다수 노동자들이 사회주의 정당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났다. 직접행동의 방법론을 실천하는 적극적 파업운동이 성장했다. 1907년에는 몇몇 노동조합이 개량주의자들의 통제를 벗어나 노동총연맹을 창립했다. 1909년에는 아나키스트들과 혁명적 조합주의자들이 리스본에서 사회주의자들을 치워내고 노동조합과 협동조합들의 총회를 개최했다. 이 총회의 참가자들은 일 8시간 노동에 대한 논의를 진행했고, “필수재의 생산에 대한 영향력의 증대”를 목표로 하는 노동자의 조직을 건설하기로 합의하였다. 1911년, 포르투갈 북부의 포르투에서는 자율적 노동총연맹이 사회당의 영향령 바깥에서 건설되었다. 그 해에 개최된 제2회 조합주의자 총회는 그들이 혁명적 조합주의적 지향을 굳히게끔 하였다. 1910년부터 1912년까지, 포르투갈은 급진적이고 반란적인 파업투쟁의 파도 속에 놓였다. 이 투쟁들은 군경과의 충돌, 그리고 사보타주를 포함하고 있었다. 1912년에는 에보라 지역의 20,000 농업노동자 파업에 연대하여 조합주의자들을 총파업을 선포했다. 노동자들은 무장했고, 리스본은 말 그대로 노동대중의 손에 떨어졌다. 개량주의적 노동조합의 정치는 반란을 진압하는 것을 도왔다. 이에 뒤따른 탄압은 조합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뭉치도록 만들었다. 1914년 토마르에서 열린 전국 노동자 대회에는 두 경향의 대표자들이 출석했다.
그 결과 전국노동조합(Uniao Operaria Nacional, UON)이 건설되었고, 그 아래에서 각각의 이데올로기들은 온전히 독립적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혁명적 조합주의의 이상과 실천은 그 영향력을 키워갔고, 1917년의 회의에서 혁명적 조합주의가 공인되었다.
독일과 스칸디나비아에서 아나키즘과 혁명적 조합주의 운동은 사회민주주의 진영의 좌파 활동가들과 노동조합내 소수파들이 건설하였다. 1897년 (관료적 노동조합 중앙 조직의 건설에 반대하던) “지역주의자”들이 자유노동조합연맹(Freie Vereinigung deutscher Gewerkschaften, FVdG)을 건설했다. FVdG는 1900년대에는 총파업의 개념과 직접행동의 방법론을 도입했다. 1912년에는 프랑스 CGT의 영향을 받은 강령을 채택했다. 이에 대응하여 1908년 독일 사회민주당은 당원들이 FVdG에 가입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스웨덴의 “청년 사회주의자”들은 1908년에 이루어진 노동조합과 관련한 토론을 거쳐 CGT의 투쟁적 · 전술적 방법론에 대한 지지를 결정했다. 다음 해 총파업의 패배는 사회민주주의적 노동조합 지도부에 대한 환상을 더욱 철저히 부수었다. 그리고 1910년에는, 다수 노조의 대의원들이 “스웨덴 노동자 중앙조직(Sveriges Arbetares Centralorganisation, SAC)"의 건립을 선포했다. 노르웨이와 덴마크의 노동조합 운동 안에도 조합주의적 비주류파 조직이 건설되었다.
1911년 여름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에서는 직장폐쇄가 연쇄적으로 일어났고, 이러한 조건에서 만들어진 합의들이 스칸디나비아에서 혁명적 조합주의 운동의 확산을 도왔다.
앵글로-색슨 국가들에서 혁명적 조합주의는 “산별노조주의”의 실현이라는 방향으로 등장했다. 이는 노동자들을 사업장이 아니라 산업에 따라 조직하는 것을 의미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조합주의적 노동조합들과는 다르게, “산별노조주의”는 조직적 기반을 가장 낮은 생산단위에 두었다. 그리고 그 상급조직으로서의 산별 연맹과, 나아가 모든 노동자를 사업장을 넘어 조직하는 “원 빅 유니온”의 건설을 이야기했다.
1905년 미국에서는 세계산업노동자연맹(the Industrial Workers of the World, IWW)가 급진적 노동조합들의 주도로 건설되었다. IWW는 점점 더 혁명적 조합주의적인 성격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IWW는 노동자들의 노동조건 개선을 위한 투쟁을 사회혁명과 노동조합에 의한 생산통제를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사회를 향한 투쟁과 묶어내어 직접행동으로 만들어내고자 했다. 관료적 노동조합들과는 다르게, IWW는 비숙련공, 이민자, 여성의 조합가입을 인정했다. 1906년부터 1916년까지 IWW는 미국의 역사에서 가장 급진적이고 가장 쓰라렸던 파업들에 참여했다. 이를테면, 네바다주 골드필드에서 발발했던 노동자들의 반란이나, 오레곤주 포틀랜드에서 발발했던 벌목노동자들의 파업, 수천의 섬유노동자들이 벌여낸 메인주 스코우히건, 매사추세츠주 로렌스에서의 파업투쟁, 펜실베니아주 맥키스 록에서 일어난 금속노동자들의 파업투쟁 등이 그것이었다. 그리고 이에 따라, 당연하게도 IWW의 활동가들은 탄압당했다.
호주에서 IWW의 조직은 조정전치주의 도입 시도 및 파업 파괴 시도에 대한 대응으로 이루어졌다. 영국, 남아프리카공화국, 1917년 러시아, 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에서도 IWW의 강령에 기반한 노동자 조직들이 건설되었다.
영국의 혁명적 조합주의 운동은 IWW의 선동에 따른 영향력과, 노동자이자 활동가인 톰 만과 가이 보우만이 펴낸 신문 <더 신디칼리스트>의 영향력 아래에서 일어났다. 1910년에는 산업적 조합주의자 교육 동맹(Industrial Syndicalist Education League, ISEL)이 구성되었다. 영국의 조합주의자들은 자체적인 노동조합을 건설하기보다는 기존의 노동조합을 장악하려하였다. 이들은 광업과 철도 노동조합을 장악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전전기 영국에서는 조합주의가 빠르게 성장했다. 제1인터내셔널의 창립을 불러온 1911년 선원들의 총파업이나 1912년 봄에 있었던 백만 광업노동자들의 총파업 등 조합주의자들이 조직한 대중행동은 이전까지의 계급투쟁에서 보여준 크기를 아득히 초월하는 것이었다. 벨기에, 네덜란드, 미국의 선원들이, 하역노동자들이, 영국의 운수 노동자들이 영국선원들의 행동을 지지했다. 광업 노동자들의 파업 결정은 노동자들의 총투표를 통하여 결정되었고, 사용자와의 교섭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교섭단에게 명확하고 구속력 있는 지침을 주었으며, 연방주의 정신에 따라 개별 광산과 지역에 대한 자율성을 부여했다. 남웨일즈 광업노동자 연방은 혁명적 조합주의의 원칙(현장의 자율성이 의사결정의 최고 조건이어야 한다는 것, 채용된 노동조합 지도부를 거부하는 것, 노동자들의 산업 통제를 그 목적으로 하는 것)에 따라 조직을 재건설하는 계획을 수립했다.
20세기 초, 혁명적 조합주의의 경향성은 여러 나라로 퍼져나갔다. 벨기에에서는 1910년에 리에주 지역 노동조합 연맹이, 1913년에는 벨기에 노동조합 총연맹이 건설되었다. 스위스, 러시아(일부에서는 러시아에서 “아나키즘적 조합주의”라는 단어가 조어되었다고 말한다.), 오스트리아-헝가리, 발칸 제국, 캐나다 등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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