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1장 : 제1인터내셔널부터 혁명적 조합주의까지) - 바딤 다미에



1: 혁명적 조합주의

1장 : 제1인터내셔널부터 혁명적 조합주의까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의 역사는 제1인터내셔널의 반권위주의세력에 기원한다. 바쿠닌주의자와 연방주의자가 그들이다. 제1인터내셔널은 1864년 창립되어 다양한 사회주의 경향을 포괄하고 있었다. 이 국제 노동계급의 조직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사회 해방의 도구로서의 노동조합에 대한 개념이, 총파업의 역할에 대한 개념이, 국가기구를 생산의 조직으로 대체한다는 개념이, 사회의 자주경영에 대한 개념이, “직접행동”에 대한 개념이, 노동자들이 스스로의 이해관계에 따라 직접행동하여야 하고, 그 과업을 정당이나 지도자들에게 넘겨주어서는 안된다는 개념이 형성되었다. 1872년의 인터내셔널 분열 이후, 이 관점은 반권위주의적 아나키스트들의 관점이 되었다. 그들과 대치하였던 맑스주의자들은 사회민주주의적이거나 사회주의적인 정당의 건설을 통해 정권을 확보하고 “국가를 쟁취”하고자 하였다.

비동시적으로, 서로 다른 방향으로 발전해온 아나키즘과 맑스주의라는 두 경향 사이의 경쟁관계는 노동 운동을 지배했다. 하지만 20세기 초에는 국가 사회주의자(사회민주주의자)들이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들의 맞수였던 반권위주의적 사회주의자(아나키스트)들은 다수 국가의 노동운동 진영에서 축출되었다. 반면, 19세기 말의 아나키스트들은 상징적인 폭력행동을 통해, 노동대중의 공고하고 장기적인 조직이 없어도 혁명을 가져올 수 있다는 잘못된 전술을 통해, 반면교사로서 노동운동의 발전에 기여했다. 한편, 1880년대의 급격한 경제 성장은 노동대중이 산업자본주의 체계의 틀 안에서 평화롭게 노동조건을 개선시켜나갈 가능성에 대한 환상을 강화했다.

사회민주주의는 인류의 역사가 선형적으로 진보한다는 개념에 기원한다. 그 이론가들은 자본주의의 발전이 미래에 다가올 사회주의의 기반을 닦을 것이라고 상정했다. 두 사회주의 대오의 근본적인 차이는 정권의 획득에 대한 관점의 차이에서 비롯한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정권의 획득을 통해 자본가들로부터 권력을 찬탈하여 노동자들에게로 이양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고, 이로서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산업 기계가 모두에게 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결국 생산에 있어 공장 시스템이 사회 전체로 확장되는 것을 의미했다. 노동계급의 해방과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와 산업화 논리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법칙에 따른 자연스러운 귀결로 여겨지게 되었다.

20세기 초, 유럽의 다수 노동조합들이 사회민주당들의 통제 아래에 놓였다.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자유노조,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포르투갈의 노동조합들, 스페인의 일반노조(UGT), 스칸디나비아, 스위스의 노동조합 연맹들이 그러했다. 영국에서는 노동조합의 다수 세력이 의회주의적 사회주의를 받아들였고, 노동당의 창당을 지지했다.

노동조합운동에서 사회민주주의자들의 특징적 전술은 노동자들의 대규모 대중운동을 당의 노선에 귀속시키고, 노조 관료들의 힘과 영향력을 강화하며, 노동조합 재정의 통제를 확보하고, 정치적/사회적 문제를 당에 맡겨둔 채 노동조합이 순수하게 경제적 투쟁에 몰두하게끔 하는 것이었다.

아나키스트들과 다른 반권위주의적 사회주의자들은 스페인과 라틴아메리카에서만, 프랑스와 포르투갈, 이탈리아의 일부에서만 노동운동 내의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20세기 초, 사회민주주의의 헤게모니는 흔들렸다. 노동자 계급정당들의 의회전술에 대한 불만족은 당내의 좌익 반대파들을 만들어내었을 뿐 아니라, 노동조합들의 저항 역시 만들어내었다. 혁명적 조합주의라는 새로운 급진적 조류가 등장했다. 이 조류는 “노동대중의 경제적/사회적 조건의 변혁을 위해 ‘혁명적인 직접 행동’의 전술을 채택하는 노동조합운동”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노동자들의 태도와 행동이 이렇게 급진화된 것에 대한 이유들 몇 가지를 이야기해보자. 먼저, 산업생산 구조 내에서 노동자의 위치에 변화가 있었다. 1890년대부터 1900년대 초반까지 산업생산의 조직이론은 완전히 분할된 노동이 가능하게 할 만큼의 전문화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

산업체의 노동자들은, 아직까지는 그들이 자치와 독립성의 정신을 물려받은 공인들과 유사한 온전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생산에 관한, 그들이 전문가인 영역에 관한, 노동을 조직하는 영역에 관한, 노동시간의 분배에 관한 복잡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노동자들이 전체 생산과정을, 사회를 노동자의 자주적 통제 아래에 둘 수 있다고 상상할 수 있게끔 하였다.

세기가 바뀌면서 발발한 생산체계의 혁명(새로운 에너지원의 발견과 전기와 내연기관 사용의 증대)은 산업의 다양한 영역에서의 관계적 변화를 가져왔고,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내었다. 기술적 진보의 광범위한 적용은 생산과정의 진보를, 노동자의 노동조건과 생활조건의 변화를 가져왔다. 노동계급은 점점 더 도시로 집중했다. 그리고 도시의 단일한 생활조건은 계급의식을 키우고 임노동자간의 연대감을 촉발했다. 거의 모든 영역에서 기업의 급격한 이익 상승에도 불구하고 실질임금은 정체하거나 심지어 감소했다. 생산의 기술적, 조직적 변화는 노동자들의 전문적인 기술력을 손상시켰다. 기계의 작동에 기계적/전기적 구성 요소를 추가하면서 노동과정은 분절되었고, 노동자의 기술은 노동 프로세스 전체를 파악할 수 있을 정도의 총체성을 상실하였고, 노동의 자주적 통제에 대한 가능성 역시 상실되었다. 노동의 조직 및 경영에 대한 새로운 방법론(모든 노동자에 대한 직접 고용, 분절적 노동, 성과급, 인센티브 모델, 공장 내 위계질서의 구축)은 기업과 경영진이 생산을 보다 엄격하게 통제하고 강화할 수 있게 하였으며, 작업 부하와 작업 시간을 모두 늘릴 수 있게 하였다. 이는 우선 제조업, 광업, 철도운송 등의 부문에서 노동자들의 불만을 불러일으켰다.

동시에 건설, 하역, 농업, 석유 산업에서는 비숙련 임시직의 수가 늘어나고 있었다. 그들의 상황은 불안정하였지만, 그 산업은 노동의 특화와 특정 사용자들에게 의존적이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이들은 스스로의 권리와 이익을 지키기 위해 빠르게 행동할 수 있었다.

연구자들은 당시 노동자들 사이의 연대감이 빠르게 성장했다고 기록한다. 이는 1911년부터 1912년 사이에 있었던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운수노동자들의 대규모 파업이 국제적 성격을 보여주었다는 데에 근거한다. 선원, 항만노동자, 육상수송 노동자들의 상호 지지는 임노동자들에게 승리를 가져다주었다. 다른 나라의 노동자들 역시 파업 중의 식사와 보육등을 조직하면서 상호부조라는 비슷한 방법론을 채택하였다. 파업운동은 거의 모든 곳에서 성장하고 있었다.

많은 나라들에서 총파업, 혹은 “정치”파업이 발발했다. 노동자들은 사회민주주의적 노동자 계급정당과 노동조합들의 전통적 정치에 만족하지 않았다. 사회민주주의는 총파업의 방법론이 “완전한 헛소리”라 거부했다. 쾰른에서 열린 독일 자유노조 총회(1905)에서, “경제적 투쟁의 영역에서 경험이 부족한 아나키스트와 같은 이들이 주장하는 총파업이라는 생각은 논의할 가치조차 없”음이 다시금 확인되었다. 물론 부분적 요구를 위한 경제적 투쟁의 경우에도, 사회민주주의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노동조합들은 점점 개량주의로 기울었고, 정부나 기업과 타협을 택하여 왔다. 파업은 오직 극단적인 상황에나 채택할 수 있는 전술이 되었다. 그들은 개량주의적 노동조합이 중앙집중적 계획에 근거하여 작동하도록 조직을 구성했다.(이를테면, 독일의 파업은 산별노조 중앙의 간부에 의하여 규정되어야 했다.) 이러한 노동조합들 안에서 편협하고 전제주의적인 관료제가 형성되었다. 의사결정에 다층적 구조를 가진 거대 조직 모델과 특정분야에 특화한 전업활동가에게 업무를 맡기는 것은, 노동조합의 조합원들의 힘과 자원에 제약을 두어야 한다는 가정에서 비롯한 것이다. 노동조합의 전업 관료들은 점점 더 불확실한 투쟁에 참여하는 것보다는 조직의 구조를 유지강화하는 데에 힘을 쏟았다. 노동조합의 지도부는 노동조합의 투쟁사업비를 축적하기 위하여 파업을 회피하고자 했다. 1911년 12월의 베를린 금속노동자 투쟁의 경우처럼 노동조합의 지도부가 강제로 파업을 멈춘 적도 있었다. 이에 더하여 1920년대 초반에 금속, 도예, 담배, 제화, 섬유 산업에서 독일 임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이 패배하면서, 유럽의 활동가들은 독일적인 중앙집권적 노동조합 모델이 한계에 도달했다고 결론을 내렸다. 개량주의적 노동조합 지도부는 직접적인 파업투쟁 대신에 기업집단과 노동조합 사이의 중앙집권적 “산별 임금협약”을 선호했다. 업종과 지역에 따라 맺어진 이 협약은 일정 기간 동안 양측을 구속했다. 노동자들은 이러한 행동들에 분노했다. 이러한 협약이 불합리한 노동조건과 빼앗긴 권리에 그들을 구속하여버리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1911년 영국 광업노동자 연맹이 펴낸 소책자에 따르면, “일반적이고 가장 중요한 질문에 대해 답하자면, 노동조합 중앙조직은 최고의 권위를 누리고 있다”면서 “이 지도부는 ‘젠트리’이자 국회의원이 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권력을 이용하여 그들은 놀라운 사회적 지위를 확보한다. 이러한 지도부가 보여주고 있는 화해의 정치야말로 비난받아 마땅하다.” 독일의 노동조합 활동가 카를 로쉬에 따르면 “모든 계급적 모순을 청산하고자 투쟁하는 노동조합 내부에서, 두 계급이 형성되었다.” 전능한 “채용 간부”와 그들을 승인하고 그들에게 투표하는 “평범한 자들”이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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