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적으로, 스페인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이 권력의 문제에 대하여 취할 입장은 1936년 7월이 되기 한참 전에 결정되어 있었다. 스페인의 아나키스트(자유의지주의) 운동은 1870년대에 운동이 시작될 때부터 사회혁명을 통해 국가와 자본을 대한 동시다발적으로 타도하고, 국가없는 체계, 즉 자유 코뮌과 자유 노동조합의 자유로운 연방으로 이행할 것을 설파해왔다. 사회 혁명의 상황에서 어떠한 행동을 취할지에 대한 계획은 1933년 말, 이제 막 집권한 우익 정부에 맞선 봉기를 계획하면서 그 윤곽을 그려냈다. 새로운 사회의 건설에 대한 가이드라인은 1936년의 사라고사 계획에 명시되었다.
스페인 아나키즘적 조합주의는 혁명의 순간에 무엇을 해야할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지만, 역설적으로 사회 혁명을 위한 사회의 “성숙도”를 결정하는 기준을 명확히 밝히지 못했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지금이 새로운 사회 건설의 청사진을 적용할 때인지는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의 문제말이다. 1936년 7월의 CNT는 이 문제에 대하여 합의할 수 있는 답을 찾아내지 못했다. “자유의지주의적 공산주의에 관한 총연맹의 관점”은 당대의 혁명적 성격을 총체적으로 다루었지만, 혁명의 순간 그 자체에 대해서는 모호하게 다루었다. CNT는 오랜 세월, CNT가 스페인 전체 노동자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거나, CNT의 조직구조가 전체 경제를 탈환할 준비가 되어있을 때에만 진정한 사회혁명이 가능할 것이라 믿어왔다. CNT 내부의 급진적 아나키스트들(노소트로스 등)은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혁명을 향한 대중의 준비는 그 무엇보다도 심리적인 문제이고, 이 준비도는 혁명적 정세의 진행에 따라 발전해 나갈 것이라고 보았다. 이들도 그 질적 변화의 순간을 설명하고 이론화하기 위한 노력을 그다지 기울이지는 않았다. 나아가, CNT는 스페인의 상황은 파시즘이냐 자유의지주의적 공산주의냐의 이지선다라고 주장해왔다. 파시스트 반동에 대한 답은 오직 사회혁명뿐이었던 것이다. CNT는 다른 거대 총연맹인 사회당이 통제하던 UGT와의 관계도 명확하게 정의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그들이 UGT와 “동맹”을 맺을 수 있기를 열망했다. 하지만, 사라고사 총회에서 그들은 이러한 조약은 UGT가 사회당을 청산하고 사회혁명의 입장을 수용하는 조건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승인했다.
이 모든 것들이 불명확함을 낳았다. 이것이 바르셀로나에서, 카탈루냐 전체에서, 나아가 스페인 전역에서 사건들이, 그 사건들을 수십년간 꿈꿔오고, 그를 위해 투쟁해오던 아나키스트들에게 “선물”처럼 주어졌을 때, 아나키스트들은 이 “선물”을 사용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CNT가 언제나 개량주의적 경향성을 포용해왔고, 개량주의자들이 간헐적으로 조직의 지도부를 통제해왔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렇기에, CNT를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 초까지 대표해온 페스타냐와 페이로는 공화주의적 정치조직들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고, 1931년부터 32년까지, 개량주의 그룹인 “트레인티스타”의 지도자가 된 것도 놀랍지 않다. 이 분파의 다수는 CNT를 탈퇴하였고, 1936년에 재가입하였다.
하지만, CNT 안에는 “트레인티스타” 말고도, “순수” 조합주의자들이 상당수 남아있었고, 실용주의적으로 경도된 이들도 많았다. 이것이 스페인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의 모순적 조직관의 결과였다. 스페인 아나키즘적 조합주의는 아나키스트의 목적과 사회적 이상을 혁명적 조합주의의 신념과 무관하게 “모든 노동자에게” 열려있는 노동조합의 원칙과 섞어내려고 했다.
CNT의 조합원들은 의식화된 아나키스트들로 구성되어 있을 수가 없었다. 특히 공화국 시기(1931년부터)에 가입한 이들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했다. 이 실용주의적 접근의 신봉자들은 위험하고 “극단주의적인” 결정을 회피하고자 했던 CNT의 집행기구와 그 활동가들과 죽이 맞았다고 할 수 있다.
1936년 7월 20일, 제네랄리타트의 수반 콤파니스는 CNT의 카탈루냐 지역 위원회와 만났고, 군대의 “파시스트적 반란”을 진압한 이후에 발발하고 있는 상황에 대하여 논의하고자 위원회의 대표자들을 회의에 초대했다. CNT 산하조직들, 산하 위원회들, FAI의 조직들은 총회를 열어 이 제안을 검토했다. 참가자들의 의견은 시작부터 달랐다. 노소트로스의 가르시아 올리베르는 자유의지주의적 공산주의를 선포할 것을 주장했고, 아바드 데 산티얀은 반파시스트 통일전선을 지지했다. 마누엘 에스코르사 등의 중도적 입장은 콤파니스 정부에 더 이상 신경쓰지 말자고 제안했다. 이 입장은 콤파니스 정부와 어떤 합의도 하지 말고, 경제의 산업화에 전념하여 콤파니스에게서 모든 실권을 빼앗자는 것이었다. 에스코르사는 실권은 CNT의 손에 있으며, 정치권력은 무시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바자 료브레가트나 조제 셰나 등 노동계급구역에서 온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정부와의 협력에 강력히 반대했지만, 그렇다고 가르시아 올리베르를 지지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이들은 에스코르사의 관점을 지지하였다. 격론이 이어졌고, 때로는 싸움도 벌어졌다. 최종적으로 내려진 결론은 무장 대표단을 보내어 콤파니스와 회동하고, 서로 정보를 교환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본질적으로 임시적이었다.
콤파니스는 CNT와 FAI의 대표단을 맞이하면서, 아나키스트들의 승리를 축하하고, 사임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그러면서 그는 대표단에게 그들이 전통적인 정치세력 없이는 해나가기 어려울 것이라는 설득을 시도했다. 그는 자유의지주의자들에게 파시즘에 승리하기에는 아직 한참 남았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이 “민병대 위원회”를 구성하여 참여하는 동맹기구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했다. 이 기구는 파시스트 반란의 최종적인 패배를 이룩할 것이었다. 아나키스트 대표단은 그들이 합의할 권한이 없다고 밝히면서, 그 제안을 조직에 전달하겠다고 말했다. 콤파니스는 CNT와의 합의를 기다리지 않고, 인민 민병대의 창립과 그에 따른 지휘기구를 구성한다고 선포했다. 이 지휘기구는 그의 측근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CNT 지역위원회는 가르시아 올리베르와 두루티의 보고를 들은 뒤, 콤파니스에게 CNT가 기구의 건설을 임시로 도울 수 있고, 최종적인 참여여부는 카탈루냐 지역 총투표를 통해 결정될 것임을 알리기로 결의했다.
1936년 7월 21일 열린 카탈루냐 CNT의 지역 총회(지역 조직들의 총투표)에서, 바자 료브레가트의 대표단은 새롭게 건설된 반파시스트 민병대 중앙위원회(Comitè Central de Milícies Antifeixistes de Catalunya, CCMA)에서 탈퇴하고, CNT의 결의안, 원칙, 이데올로기적 목적이 규정하는 대로 자유의지주의적 공산주의를 선포하자고 제안했다.
노소트로스의 회원인 가르시아 올리베르는 자신의 조직을 대표하여 바자 료브레가트의 요구를 지지했다. 그는 이미 저질러진 오류를 바로잡고, 사회혁명을 끝까지 수행하자고 부르짖었다. CCMA는 해소되어야 하며, 스페인 전역에 자유의지주의적 공산주의를 건설해야 할 것이었다. 유명한 FAI의 활동가 페데리카 몬세니, 아바드 데 산티얀, 그리고 카탈루냐 CNT의 사무국장 마리아노 바스케스는 이 제안에 반대했다. 몬세니는 아나키스트 독재를 만들어 아나키즘의 요체에 모순되는 행동을 하지 않으려면, 사건의 진행을 강제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타협을 제안했다. 우선 CCMA에 가입하고, 군사 반란을 완전히 패배시킨 후, 그 기구에서 탈퇴하여 아나키스트 사회를 만드는 과업을 지속하자는 것이었다. 아바드 데 산티얀은 “민병대 위원회”에의 참석을 지지하면서, 국제 자본주의는 스페인의 자유의지주의적 공산주의를 허용하지 않을 것이고, 군사적 개입으로 맞설 것임을 강조했다. 그는 양면전선을 경계하면서, 자유의지주의적 공산주의를 이후로 “미룰것”을 요구했다.
바스케스는 총회의 2차 회기에서, 혁명을 “끝까지 짊어지지 않더라도” CNT는 그 실질적 힘을 바탕으로 거리를 통치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렇기에 그는 CCMA에 남아 독재와 투쟁하는 것이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이에 뒤따른 논의의 과정에서, 바자 료브레가트의 대표단은 그들의 제안을 공고하게 유지했다. 가르시아 올리베르는 반대파의 제안에 논박을 시도했다. 그는 “노동조합주의적”이거나 “아나키스트적” 독재를 원한다는 비판을 부정하면서, 1917년 러시아에서 일어났던 일처럼, 혁명의 적들이 이용할 수 있는 공백의 시기를 남겨두지 않기 위해서라도 빠르게 결정할 것을 촉구했다. 그는 “나는 스페인과 전 세계에서 조합주의가 그 가치를 인류와 역사에 그 가치를 선언할 때를 마주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우리가 자유의지주의적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미래는 이전처럼, 프랑스 혁명에서 튀어나온 정치처럼, 정당들로 시작하여 그 중 하나로 끝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가르시아 올리베르는 그가 “공포를 심고자”하는 시도를 비판하면서, 혁명은 군사반란과 국제적 개입 모두에 맞설 수 있다고 강조했다. 가르시아 올리베르는 자유의지주의적 공산주의를 선포하고 “끝까지 밀어붙이자”는 자신의 주장을 반복했다.
모두가 자신의 의견을 말한 후, 아바드 데 산티얀은 표결안을 공식적으로 정리했다. CCMA에 가입하거나, 자유의지주의적 공산주의를 선언하거나였다. 이 문제는 투표에 붙여지도록 되었다. 오직 바자 료베르가트의 대표단만이 자유의지주의적 공산주의에 표를 던졌고, 나머지 대표단들은 “반파시스트적 협력”에 찬성했다. 승인된 결의안은 혁명은 “반파시스트적 단계”를 지나고 있을 때, 자유의지주의적 공산주의는 적합하지 않으며, 현시점에서는 “거리에서 벌어지고 있는 반파시스트 전선”을 공고히할 필요가 있다는 견해를 보여주었다.
단 2달 전에 결정한 행동강령이, CNT의 일부에서 180도 변모하게 만든 요인은 무엇이었는가?
자유의지주의적 공산주의를 선포하지 않고 다른 반파시스트 세력(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공화주의자)과 협력하겠다는 카탈루냐 CNT의 결정은 다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이 이후에 알아차렸듯이, 복잡한 정세애 대한 성급한 평가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카탈루냐에서만 승리한 자유의지주의자들은 스페인의 다른 지역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1937년 IWA 총회에 CNT가 보고한 바에 따르면, “우리는 협력을 결의했다. 레반테 지역(발렌시아)는 무방비하고 무력하다. 그 병영은 군사반란 가담자들로 가득하다. 마드리드에서 우리는 소수세력이다. 안달루시아는 노동자들이 겨우 사냥용 엽총으로만 무장하여 산에서 투쟁을 이어나가고 있는 혼란스러운 상태다. 북부의 상황도 확실하지 않다. 스페인의 나머지 지역은 파시스트들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카탈루냐의 문턱인 아라곤에서 적들이 등장했다. 우리의 국내외적 적들의 실질적 상황은 알려져 있지 않다.” CNT의 활동가들은 독립적인 혁명을 지속하여 파시스트, 정부, 국제개입의 3면 전선에 맞서는 것을 회피하고자 했다. 다르게 말하자면, 활동가 다수는 전국적으로 사회혁명을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이르고, 카탈루냐의 독자적 자유의지주의적 공산주의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믿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여전히 1932~1933년 반란의 패배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카탈루냐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이 보는 것과는 달리, 실제 상황은 전혀 희망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당시의 반란과는 달리, 이번에는 고립된 지역적 분출이 아니었다. 사회혁명운동은 카탈루냐와 발렌시아로 퍼져나갔고, 안달루시아로 가는 길은 열려있었다. 다르게 말하자면, 이베리아 반도의 경제적 · 산업적 · 농업적 중심지가 혁명의 손아귀에 떨어진 것이었다. 이러한 정세를 보았을 때, “끝까지 가는 것”을 감수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했다. 현대 스페인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 아벨 파즈는 “당시의 상황에서, 우리는 권력의 문제가 너무 성급하게 결정되었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 성급함은, CNT의 보고서가 명확하게 보여주는 바와 같이 ‘혁명의 중요성 전반’을 고려하지 못하게 하였다. 만약 가르시아 올리베르의 제안이 받아들여졌다면, 혁명의 문제는 풀뿌리 층위에서부터 의심할 여지 없이 정리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서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소중한 시간을 잃었고, 적들에게 주도권을 넘겨주었다.
마지막으로, 가르시아 올리베르가 그의 회고록에 적어둔 하나의 요인에 대하여 이야기해보자. 대의원들은 급하게 소집되었고, 무엇을 논의할지에 대하여 사전에 통지받지 못했다. 다르게 말하자면, 대의원단은 스스로 대변하고 있는 조합과 조직의 지침이 없이 총회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것이야말로 CNT의 연방주의적 절차에 대한 중대한 침해였다. 그리고 이 침해는 이후 만연하게 되었다. 파즈는 “첫 번째 오류는 7월 19일과 20일, 일부 활동가들이 조합원의 의지를 스스로의 의지로 대체하여 결정을 내렸을 때 이미 범해졌다. 이 순간부터 기층과 상층의 차이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기층은 혁명의 확산을 원했고, 상층은 혁명을 통제하고 제약하고자 했다.”
노소트로스의 다른 구성원들은 총회에서 발언하지 않았다. 저명한 노소트르소 회원이었던 리카르도 산스는 후일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우리는 조직적으로 (논의의 결과에) 압력을 가하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 조직이 독재에 반대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의 입장이 받아들여진다 해도 그러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특정 방향으로의 결정을 강제하려 하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더 급하게 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콤파니스는 두루티가 민병대를 이끄는 것에 합의했다. 이 민병대는 적들의 손에 떨어진 사라고사를 확보해야 할 것이었다.“ CNT의 총회가 끝난 그 저녁, 노소트로스와 그 지지자들(마르코스 알콘, 가르시아 비방코스, 도밍고, 조아킨 아스카스코 등)의 회합이 개최되었다. 그 회합에서는 정당과의 동맹을 넘어 인민자치를 위한 새로운 기구를 혁명위원회와 CNT 가맹조직들에 기반하여 건설할 필요성에 대하여 합의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러한 행동에 돌입할 시기에 대한 의견차이가 있었다. 가르시아 올리베르는 노소트로스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의 민병대를 활용해 바르셀로나의 정부 청사와 핵심 시설을 확보함으로써 ”7월 18일에 시작한 과업을 끝낼 것“을 주장했다. 두루티는 이 계획이 ”멋진 것“이지만, CNT 활동가들의 분위기를 고려할 때, 시기가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두루티는 자유의지주의적 민병대가 아라곤의 수도 사라고사를 확보하여 카탈루냐가 경제적 · 정치적 봉쇄를 피할 수 있을 때까지, 열흘을 기다리자고 제안했다. 가르시아 올리베르는 반대했다. 그는 사라고사의 확보는 이후에도 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그 주장은 지지를 얻어내지 못했다.
CCMA의 첫 회의에서,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CCMA를 군사적, 기술적 과업의 수행으로 제약하려는 콤파니스의 계획을 거부했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CCMA가 카탈루냐의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 행정의 기구가 되어 제네랄리타트의 수장으로서의 콤파니스의 역할은 단지 명목상으로만 남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CCMA는 준정부, 준인민 기구가 되었다. CCMA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던 아나키스트들 외에도, UGT의 대표도, 좌익 민족주의자들도, 공산주의자들(코민테른의 지도를 받아 7월에 카탈루냐 통합사회당을 건설해 스페인공산당과 밀접하게 관계를 맺었다)도, 통합맑스주의노동자당(POUM)도 있었다. CCMA는 사회적-정치적인 근본적 문제에 대한 결정을 내렸지만, 순수한 정부라고 볼 수는 없었다. CCMA의 구성원들은 그들을 대표로 임명한 각자 조직의 최고위원회에 가장 우선의 책임을 져야 했기 때문이다. 결국 결정을 내리는 것은 이 조직들이었으며, CCMA는 이를 수인할 뿐이었다. 이를테면 1936년 8월 10일까지, CCMA의 공문서는 FAI의 카탈루냐 지역위원회의 소인이 찍혀있어야 유효했다.
카탈루냐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은 CCMA에 소속된 각 조직과 운동세력들이 조직한 민병대가 주도하는 순찰대였다. 이 중 가장 강력한 것은 CNT의 민병대였다. CNT, FAI, FIJL의 구성원들은 내전의 전개 과정에서 전선의 반란군들과 함께 싸운 자원군의 기반을 구성하기도 했다. 1936년 7월 24일, 두루티가 이끄는 2,000명의 대오가 아라곤으로 출병했다. 내전 초기, 군사반란군에 대항하여 싸워 승리할 수 있던 다른 정파의 무장세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아라곤의 상당 부분을 해방한 두루티의 열列(Durruti‘s Column)은 자유의지주의적 원칙에 따라 조직되었다. 지휘관은 선출되었고, 병사들과 같은 조건으로 생활했다. 군법은 없었고, 모두는 자율적 자기규율을 보였다. 아라곤에서 싸웠던 CNT의 민병대는 16,000명 정도로 강력했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8월 초 공화정부 중앙이 발효한 예비군 동원령을 거부했다. 하지만 1936년 8월 6일, CNT는 제네랄리타트와 CCMA에 일부 참여하기로 타협했고, 이는 그들의 근본적 원칙에서의 이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의 민병대는 여전히 자발적 인민군의 원칙에 기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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