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 : 시대의 압박 아래
그렇기에 CNT는 “총체적 혁명”을 원칙적으로 포기하고 군부, 팔랑헤, 왕정복고주의자들에 대한 승리를 확보할 때까지 자유의지주의적 공산주의를 미뤄두는 원칙적 결정(그리고 이후에 확실해진 것처럼, 이것이 그들의 운명을 결정지었다.)을 내렸다. 당시 국가 권력에 대한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의 공식적 입장은 “CNT-FAI 선전물 정보 회람”과 카탈루냐 CNT의 기관지 <솔리다리다트 오브레라>에 실린 “정부의 무용성”이라는 기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입장은 사회적, 경제적 영역에서 혁명을 지속하되, 국가에는 신경을 쓰지 말고, “아래로부터의” 반파시스트 인민전선을 유지할 것으로 스스로의 역할을 축소하는 것이었다. 이 기사에서는 공화국 중앙정부와 카탈루냐 공화정부가 군사반란을 진압하거나 예방하려는 어떠한 수단도 취하지 않았기에, 그 존재는 반파시스트 투쟁에 불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전국적인 “사회적 투쟁”이 계속되고 있다고 믿었다.
이들은 “인민전선 세력의 협력과 자발적 집산화를 통한 식량 공급의 조직은 우리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것은 국가의 통제 아래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CNT와 UGT 등의 노동조합들에 기반한, 탈중앙적이고 비군사화된 방식으로 이루어져 왔다”고 적고 있다. 현 정부는 “기본적으로 국제 금융자본의 소유권을 보장하려 하는 취약한 현상유지자일 뿐”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는 인민전선에 불필요하거나 해롭기까지 할 것이다. 정부는 타협의 수단이 되거나, 정치적 이합집산과 내부투쟁으로 의사결정구조를 마비시키거나, “노동자 국가” 따위의 새로운 독재를 구축하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CNT와 FAI의 지도부는 반파시스트 정당 및 운동과 타협했고, 그들에게 양보했으며, 이를 “상황의 전개”를, 내전에서의 승리 필요성을 운운하며 정당화했다. 이들은 (국제적 개입을 회피하기 위해)외국 자본에 대한 수용을 중단하고, 단지 노동자 자주경영만을 도입하기로 합의했다.
혁명위원회, 반파시스트 민병대 위원회 등 새로운 기구들은 총회를 개최하기보다는 CCMA에서 그러한 것처럼, CNT, UGT, 그 외의 조직들간의 합의로 운영되었다. 지역층위에서 혁명적 기구들과 혁명 이전의 구조가 공존하는 경우는 잦았고, 이는 상호간의 충돌을 낳았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적인 대중들은 첫 한 달간은, “상층부가” 합의한 타협에 대하여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이들은 사회혁명을 스스로, “아래로부터”, 스스로의 자유의지주의적 “주요사상”에 입각하여 집행하였다. 해당시기 스페인 혁명 과정에서 보여준 노동자 자주경영의 규모는 역사에 비할 바가 없었다. 바르셀로나의 기업 70%는 소유주로부터 확보되어 CNT와 UGT의 통제 아래에 놓였다. 발렌시아의 기업 50%도 마찬가지였다. 농촌에서의 집산화 역시 널리 집행되었다. CNT 산하 카탈루냐 농민 조합은 1936년 9월 5일부터 7일 사이에 이루어진 지역 총투표를 통해 대농장과 임노동으로 운영되는 모든 토지를 집산화할 것을 결의했다. 수용된 토지는 조합의 통제와 운영 아래로 들어갔고, 그 구성원들, 혹은 “모든 노동자”의 직접적 이익으로 돌아갔다. 결과적으로 카탈루냐, 발렌시아 등지에서 농민들이 자주경영적 집단농장을 구성하는 과정은 넓게 퍼져갔다. 이 현상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의 민병대가 해방하였던 아라곤 지역에서 더욱 널리 퍼졌다. 농민들의 조직은 지역 토지의 60%를 통제했고, 스스로를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정신에 따르는 자유롭고 자주경영적인 코뮌으로 변모시켰다.
하지만 이 풀뿌리 자치의 앞에 정치적 타협이 장애물로 등장했다. 자유의지적 공산주의가 선포되지 않은 이상, 화폐의 철폐와 필요에 따른 분배의 집행 역시 부정되었다. 도시에서 화폐의 순환은 완전히 회복되었다. 최대의 성취는 소위 “가족수당”의 도입이었다. 이로서 각각의 노동자들은 가족구성원의 수에 따라 동일한 임금을 받을 수 있었다. 저임금 노동자들에 대한 임금의 대폭 인상도 있었고, 이를 통해 노동자 집단 내에 존재하던 임금격차를 줄일 수 있었다. 농촌에서는 제약 없는 소비, 식량배급, 지역화폐의 도입, “가족수당”제도 등의 실험들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 모든 방법론들은 상호 협력이 없이 이루어졌다. 지역의 혁명적 기구들의 활동 사이에는 어떠한 협력도 이루어지지 않았따.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의 “계획”과 달리, 이 기구들은 연방적으로 단결하지 않고 지역층위에서 독자적으로 작동했다.
노동자 집단에 의한 경영이라는 이행기로서의 “집산화”를 넘어 경제를 온전히 사회화 하기 위하여,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1936년 8월 11일 카탈루냐 경제 평의회의 건설을 주도했다. 이 평의회는 총체적인 협력을 주도하고, 경제를 계획하며, 가격정책을 세울 것이었다. 하지만 이 기구 역시 그 구성(CNT, UGT, 정당을 포괄하였다)과 그 과업에 있어 타협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평의회는 소비 수요에 따른 생산의 규제, 해외무역의 독점, 산업 · 상업 · 농업 · 운수업의 집산화 가속, 농민과 소비자들의 협동 장려, 실업자들에게 직업 제공, 세금 체계 개혁 등의 다양한 수단들을 그 목적으로 두고 있었다.
경제 평의회에서 주요한 역할을 맡았던 아바드 데 산티얀은 평의회가 새로운 경제 체제의 건설을 가져올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반면,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의 급진적 분파(두루티 등)은 혁명적 성취의 “합법화”는 단지 제네랄리타트의 권력을 강화하여 “국가자본주의”나 “국가사회주의”를 가져올 뿐이 될 것이라 두려워했다.
세력간의 불안정한 균형은 오래가지 못했다. 아나키스트들이 청산하지 않은 국가권력과 정당과 그들을 지지하던 사회적 계층은 주어진 숨쉴 틈을 사용하여 혁명에 대한 공세를 가했다. 철폐되지 아니한 국가의 손에는 화폐와 재정적 자원이라는 강력한 지렛대가 남아있었다. 집산화된 산업에는 원자재가 충분히 주어지지 않았다. 1937년의 IWA 총회에 CNT가 제출한 보고서는 “맑스주의자들과 공화주의자들은 동맹을 구성하고,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자금과 무기를 활용하여 그 지지자들을 향한 이익배당의 정치를 행하고 있다. 그들은 자기 지지자들에게 식량과 무기와 행정부의 일자리와 통신수단과 운송수단을 제공하고 있다.” “카탈루냐는 스스로 해외 무역을 조직하고, 스페인의 다른 지역과 해외에서 경쟁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카탈루냐는 시민들을 먹이지도, 아라곤 전선의 필요를 충족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정부는 반파시스트적 단결을 해하고, 외국과의 공식적 관계를 해하지 않으려는 우리의 노력을 이용했다. 정부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독점적 외교 상황을 이용했다. 그리고 이로서 우리가 모든 영역에서 해온 활동들을 잔혹하게도 파괴했다.”
마드리드와 카탈루냐의 정부는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에 대한 3방향의 압력을 동시에 가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무장이 충분하지 않던 민병대에게 무기와 탄약의 보급을 지연시켰다. 이들은 산업과 농업의 집산화의 범위와 과정을 제약하려 했다. 이들은 민병대를 정규군으로 대체하려 했다. 1936년 9월, “통제불가능한” 아나키스트들을 향한 카탈루냐 언론의 맹공이 시작되었다. 언론에 따르면, 아나키스트들은 전선으로 무기를 보내지 않고 스스로 보관하면서, 경제적으로 “유토피아적 실험”을 하고 있었다.
CNT의 지도부는 권력 체계에 자리잡고 스스로를 변화시켰다. CNT는 당시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조직을 재구성했다. 이로써 실질적인 경제적, 사회적 생활의 조정이라는 명복으로 급격히 성장한 관료계층이 정당화되었다. CNT와 FAI의 활동적 평조합들이 전선에서 싸우고 있거나 지역에서의 노동자 자주경영 과업에 짓눌려 있다는 사실을 이용하여, 많은 노동조합 관료들(전국, 지역, 지구 위원회의 구성원들, 다양한 노동조합 위원회, 민병대 위원회, 경제 평의회 등)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적 대중의 요구와 열망을 점점 덜 신경쓰기 시작했다. 평조합원 활동가들은 연속되는 총회, 총투표, 회의를 따라가지 못했고, 의제를 섬세히 검토하지 못했다.
CNT 역사를 기록해온 조제 페이라츠가 적었듯, 조직의 연방적 구조는 본질적으로 무너져 내렸다. 전국위원회는 개별 노동조합에 “지침을 하달하는 기계”가 되었고, 총투표는 위로부터의 공지사항을 전파하는 수단으로 전락했으며, 각 위원회의 주요한 결정은 호선되어 총회에서 추인된 선별된 활동가들의 회의에서 승인되었다. 이는 조직에서의 주도권은 “위에서 아래로” 행사되는 것이 아니라 “아래에서 위로” 행사되어야 한다는, 각개 위원회가 근본적 문제에 관한 중요한 결정을 승인하는 것이 아니라, 총회에서 “평조합원”들이 내린 결정을 집행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의 원칙에 모순되는 행동이었다.
다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CNT의 초기 관료화와 국가와 정당에 점점 더 많이 양보하는 정책에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두루티는 이 지점에 대한 걱정을 자주 드러내었다. 급진주의 분파는 1936년 8월 초 열린 카탈루냐 CNT의 지역 총회에서 진행되는 상황의 방향을 돌려놓으려 시도했다. 가르시아 올리베르와 두루티는 혁명의 성과와 힘을 잃게 하고 있는 정치세력과의 협력을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다수는 “반파시스트진영” 내부의 내전을 두려워했다. 7월 20일부터 계속되온 방향성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채로 남아있었다.
UGT와의 “혁명적 동맹”과 정치적-군사적 지도를 위한 전국 방어 위원회의 건설의 필요성에 관한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역사가 파즈는 급진적 소수파가 대세에 따라 조직적 규율을 지켰다고 적는다. “이 교착상태를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활동가의 책임감’을 내던지고 조직을 고려하지 않은 채 거리로 나아가 혁명적 과업을 수행하는 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떠한 활동가도 이를 행하지 못했다.” 8월 중순에는 CNT가 UGT와의 동맹을 실천하려 시도했고, 그 지도자였던 사회주의자 라르고 카바예로와의 교섭에 들어갔다. 두 노동조합이 함께 공화국 중앙정부를 전복하고 혁명의 방어를 위한 혁명적 훈타를 건설할 가능성이 논의되었다. 마지막 순간에 라르고 카바예로는 공화국 정부의 정당성을 파괴할 수 없다며 이 계획을 거부했다. 1936년 9월 4일, 라르고 카바예로는 스페인 공화국의 총리로 임명되었다.
아나키즘적 공화주의자와 반파시스트 전선 사이의 갈등은 계속해서 자라났다. 아나키스트들이 “무기를 숨기고 있다”는 비판에 반응하여, 바르셀로나의 “방어위원회”는 “혁명이 정치 권력의 문제를 해결할 때까지, 마드리드 중앙정부의 명령을 따르는 무장세력이 존재하는 한” 무기를 보관하고자 하였다고 선포했다. 그들은 무기야말로 “우리의 혁명적 투쟁을 담보할 수단”이라고 여겼다. <솔리다리다트 오브레라>는 공장과 농장의 집단을 옹호하면서, 독자들에게 전쟁의 “혁명적 성격”을 상기시켰다. 전선에서 이루어진 라디오 방송에서, 두루티는 “파시즘과 자본주의는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두루티 열”에 속한 공장위원회와 군사위원회는 바르셀로나의 공산주의자 병영에 봉인되어 있는 무기들을 지금 즉시 전선으로 보내지 않으면, 바르셀로나로 진군할 것이라 위협했다. 사바델랴의 공산당 사무실에서 발견된 8정의 기관총은 전선의 병사들에게 보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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