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장 : CNT의 정부 참여
그러는 와중에도, “상황”의 논리는 CNT 지도부가 다음과 같은 행동을 하게 만들었다. CNT 지도부는 군사-정치 행동의 지도에 참여할 방법을 찾아 헤맸다. 그들은 이것이 혁명적 투쟁을 공고히 하는 것을 도울 것이라 믿었다. 1936년 9월 15일, CNT 지역 연맹들의 회의에서, 전국위원회는 “군사적 계획의 집행기구이자 정치경제적 계획의 조정기구로서의 전국 방어 평의회”의 필요성에 관한 결의안을 채택하도록 만들었다. 라르고 카바예로가 이끌고 있던 이 평의회는 3가지 주요 정파(아나키즘적 조합주의, 맑스주의, 공화주의)의 “대표단”들을 모두 포함할 것이었고, 군대와 경찰은 인민 민병대로 대체될 것이었다. 평의회의 경제계획은 은행, 교회자산, 부동산, 대기업, 상업의 사회화를 포함할 것이었다. 사회화된 생산수단은 노동조합이 경영할 것이고, 혁명적인 경제실험을 집행할 자유도 주어질 것이었다.
유사한 평의회들이 지역적 층위에서 구성되었다. 이 구성의 초안을 UGT에 동맹 제안과 함께 보내는 것이 총투표를 통하여 결의되었다. 페이라츠가 알맞게 표현한 것처럼, 방어위원회는 다른 이름을 가진 정부였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나키스트들은 이 기구의 “비정부적” 형태를 중요하게 여겼다. 라르고 카바예로는 이 제안이 담고 있는 모순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이 평의회가 헌법적 원칙을 침해한다며 거절했다. 하지만, 이 당시의 사건들에 관한 구체적 연구를 수행한 파즈에 따르면, 라르고 카바예로와 (새로운 사무총장이자 개량주의 노선을 지지하던 오라시오 마르티네스 프리에토가 이끌던) CNT 중앙위원회 양측 모두는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고, 이 순간부터 다양한 압박전술을 통한 끝없는 거래의 과정에 돌입했다. 총리가 가지고 있던 패는 전선의 아나키스트 민병대에게 자금과 무기를 보내주는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민병대는 사라고사와 우에스카를 탈환한다면, CNT 중앙위원회가 타협을 멈추고 자유의지주의적 공산주의를 선언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전선의 민병대에게는 무기와 탄약이 부족했고, 점점 약화되어 갔다. 상황은 심각해졌고, 두루티와 아바드 데 산티얀은 아나키스트 부대가 마드리드의 국립은행을 공격하여 그 재정을 수용하고, 그것으로 무기를 구매하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전국위원회는 이 계획에 반대했다. 카탈루냐에서는 CNT 지역위원회가 “이중권력”을 그만두라는 라르고 카바예로 정부의 지속적 압력에 굴복하여 CCMA의 해산에 동의했다. 그 대신, CNT의 대표단들이 제네랄리타트에 합류했다. 이렇게, 처음으로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이 공개적으로 정부기구에 합류했다. 카탈루냐 CNT의 저명한 활동가들이던 가르시아 올리베르, 아우렐리오 페르난데스, 셰나, 마르코스 알콘 등은 이를 갈면서도 이 결정을 받아들였다.
카탈루냐 CNT 지도부의 지속적 타협에 대한 평조합원 활동가들의 반응은 달랐다. CNT의 주요한 인물 중 하나였고, 바르셀로나에서 유명하였던 마르코스 알콘은 CCMA를 해소하고 CNT가 카탈루냐 정부에 합류한 이후, 바르셀로나의 방어위원회 대표단(다니엘 상에스, 안젤 카르발레라, 트라포타 등)을 마주한 것을 회상한다. 이들은 알콘에게 방어위원회가 그들이 CNT와 FAI의 본부로 가 “혁명을 방해하고 있는” 그 지역위원회를 해산할 것을 결의했다고 알렸다. 대표단들은 마르코스 알콘이 CNT 카탈루냐 지역위원회의 새 사무국장이 되어줄 것을 제안했다. 알콘은 이 활동가들의 상황 분석과 타협에 대한 분석에 동의하면서도, 그들이 제안한 방법을 따르는 것은 조직에 무책임하고 “해로운” 것이라 반대했다. 그는 방어위원회가 행동에 옮기는 것을 어렵게 막아냈고, 그 대신 그들이 “노동조합 안에서 세력을 키”우, 노동조합에 근거하여 CNT 위원회가 조합원들의 의지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하라고 요구했다.
이렇게 카탈루냐에서 사회혁명을 계속 키워낼 마지막 기회가 저물었다.
중대한 분기점이 된 것은, 9월 28일 개최되었던 지역연맹 총회였다. 이 총회에서, 전국방어평의회 건설 제안에 대한 다른 노동조합 및 정치조직들의 부정적 반응에 대한 후회감이 표출되었다.
CNT는 조직의 대표단이 투쟁의 지도부에서 제외된 것은 지도부의 권위를 해치는 일이라 주장하며, UGT와의 “혁명적 동맹”을 재차 부르짖으며 그 동맹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모든 결과에 대한 책임은 UGT에게 있을 것이라 위협했다.
무기의 부족에 관한 문제는 1936년 10월 1일 마드리드에서 IWA 사무총장이었던 피에르 베스나르가 두루티와 함께 스페인의 총리 카바예로를 회동하면서 일정부분 진전한 것으로 보였다. 두루티는 만약 정부가 CNT-FAI에게 무기를 구매하기에 충분한 재정적 지원을 하지 않는다면, 전선의 병사들이 마드리드로 향할 것이라 경고했다. 이 회동 이후 스페인 정부는 160만 페세타 어치의 무기를 구매하고, 그 3분의 1의 물량을 카탈루냐와 아라곤에 배정하는 것에 동의했다. 하지만 수일이 지난 후, 소련이 개입하여 공화국 정부에게 원조를 제의하면서 무기회사와의 거래는 취소되었다. 소련의 원조는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의 적이자, 스페인에서의 사회혁명을 반대했던 공산주의자들의 영향력을 크게 키웠다.
마드리드와 카탈루냐의 CNT 지도부의 회유적 태도와는 달리, 전선과 아라곤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독자적 중앙을 수립했다. 이들은 자신의 조직에 공개적으로 도전했고, 스페인 혁명의 “반환점” 노선에 따르는 무언가를 만들고자 했다. 두루티가 마드리드에서 아라곤 전선으로 돌아온 이후인 1936년 10월 6일, 농민들과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의 지역 총회가 부하랄로스에서 열렸다. 이 총회에서 오직 아나키스트들만으로 구성된 아라곤 방어 평의회가 건설되었다. 이 평의회는 군사, 경제, 사회적 영역의 모든 활동을 조정할 권한을 받았다. 평의회는 다양한 활동 영역으로 나뉘어진 분과로 구성된, 정부와 유사한 기구였다. 하지만 이 기구를 만들어낸 이들은 평의회와 풀뿌리 총회 사이에 수직적 위계가 아닌 연방주의적 상호관계를 선호했다. “각 분과는 조직의 대표단이 제시한 계획을 발전시키고, 그 대표단의 승인을 필요로 할 것이다. 하지만 일단 승인된 이후, 계획은 일반의무가 될 것이고, 전체적으로 집행될 것이다.” 아벨 파스는 이 문건을 인용하면서 “역사상 처음으로, 지역 전체가 정당으로부터 독립적인 혁명적 행동을 주도했다. 이들은 주권이라 선포된 총회에 전적으로 기반하였다. 실제로 일어난 것에 대하여 이야기하자면, 아라곤에서의 사회 조직은 자유의지주의적 공산주의에 최대한 가까운 것이었다.”
중앙정부와 카탈루냐 정부는 아라곤 평의회를 인정하지 않았다. 두루티와 그 부대의 도움을 받아, 자주경영되는 집단농장이 건설되기 시작하였고, 1937년 2월 카스페 총회에서 최종적으로 건설이 완료되었다.
아라곤에서는 혁명의 열기가 상승하고 있었지만, 공화국의 다른 지역에서 혁명은 둔화하고 있었다. 국가 권력은 혁명적 자발성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고, CNT 지도부는 이를 막으려 하지 않았다.
10월 9일, 카탈루냐 정부는 1936년 7월 20일 이후 건설된 모든 지역위원회와 행정, 문화, 기타기구를 해소할 것을 명령했다. 그 자리에는 제네랄리타트가 새로운 공동체적 위원회를 구성할 것이었다. 그 구성원은 선출되는 것이 아니라 지역정부에 참여하고 있는 각 운동세력과 정당들의 대표단들로 구성될 것이었다. 이 법령을 위반하는 것은 반역죄로 취급될 것이었다. 하지만 많은 혁명 위원회들은 법령을 묵살했고, 새로운 조직에 권력을 이양하려 하지 않았다. “이중 권력”의 체계는 혁명적 기구들이, 자기 조합원들에게 정부의 명령을 이행할 것을 촉구하는 CNT의 지속적 압력에 굴복하여 마침내 포기할 때까지 수개월간 지속되었다.
라르고 카바예로의 중앙정부는 군율과 지휘체계, 군법을 복구하고, 민병대를 정규군으로 편입하는 법령을 반포했다. 9월 30일에는 중앙 전선의 민병대 10개 분견대를 10월 10일까지 정규군으로 전환하는 법령이 반포되었다. 나머지 전선에서의 전환은 10월 20일까지 이루어질 것이었다. 10월 21일, 정부는 정규군 창설에 관한 법령을 반포했다. 정부의 결정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민병대 사이에 폭풍같은 분노를 일으켰다. 아나키스트의 “아스카소” 분대의 병사는 “이 전쟁에서 혁명적인 성격을, 사회 변혁의 이상을 빼고 나면, 이 전쟁은 스페인 독립전쟁으로 남을 뿐이다. 이는 더 이상 새로운 사회를 위한 혁명전쟁이 아니”라고 선언했다.
중부스페인의 CNT 민병대는 정부가 프롤레타리아트를 “새로운 쇠사슬”로 옥되려 한다고 비난하면서, 군대의 재건이 “흔한 권위주의적 전술”이고, 군국주의의 침투가 “파시즘에 필수적인 것”이라 묘사했다. 이들은 군대의 재건이 “과거로의 회귀”라면서, 노동계급은 자신의 피로 지켜낸 것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 위협했다. 두루티는 인터뷰를 통해 의식적 규율을 잡고, (통합에 반대하는 공산주의자들의 부대를 지칭하면서)통합 사령부를 구성하는 것에는 반대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하지만 동시에 두루티는 군대와 같은 계급도, 경례도, 훈련도, 처벌도 보고싶지는 않다고 밝혔다. 그는 혁명전쟁은 싸우는 목적을 이해한 인민들의 자발적 부대야말로 효과적이라는 주장을 지속했다. 1936년 9~10월의 기간 동안, 아나키스트의 “콜룸나 데 이에로”(Columna de Hierro, 철의 분대)는 발렌시아에서 어마어마한 사건을 일으켰다. 이들은 전선에서 철수하여 후방으로 향했다. 이들은 국가 예비군을 해산하고 무장해재한 후, 그 구성원들을 전선으로 보내라고 요구했다. CNT의 지도부는 민병대 원칙을 확인했다. 하지만 동시에 CNT의 전사들이 정부의 결정에 순응하도록 설득했다.
공화국 정부는 산업과 농업 경제에서의 자주경영에 압박의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라르고 카바예로 정부는 군수 산업의 국유화를 명령했고, 군수산업을 국가관료의 통제 아래에 두었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 후안 파브레가스는 제네랄리타트의 경제부 장관이 되었고, 10월 2일에는 노동자들이 기업에 대한 수용을 멈출 것을 요청했다. 최소한 처음에는, 누구도 그의 요청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하지만 10월 24일, 카탈루냐는 산업의 집산화를 합법화하는 한편 중소기업들은 예외로 두는 법령을 반포했다. 이 법령은 노동자 위원회가 선출한 관리자라는 위치를 만들었고, 자주경영기업(특히 대기업)을 국가가 통제하도록 하였다. CNT의 지도부가 국가와 타협한 것은, 그들이 “혁명을 합법화”하는 정책을 위해 정부에 직접 참여한 것의 영향이었다. 농업 경제의 경우, 라르고 카바예로 정부의 농업부 장관이었던 공산주의자 유리베가 서명한 1936년 10월 7일의 법령은 반란분자라 선포된 지주의 토지를 수용하는 것만이 합법이라고 명시하고 있었다. 이렇게 대농장들을 확보했던 집단농장들이 불법적 집단이 되었다.
1936년 10월, CNT의 사무총장 오라시오 마르티네스 프리에토는 공화국 정부에 CNT가 들어가는 것에 대한 협상을 시작했다. 그는 CNT가 장관직 6개를 가져갈 것을 요구했지만, 라르고 카바예로는 4개의 직위만을 허용하고자 했다. 1936년 10월 25일, 이 합의의 전조가 보였다. CNT의 카탈루냐 지역 조직들과 UGT 사이에, FAI와 카탈루냐 통합 사회당 사이에 협약이 체결되었다. 이 협약은 경제의 집산화가 제네랄리타트에 의하여 지도되고 조정되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협약은 주거의 시유화(市有化), 통합 군사령부, 민병대의 (이들을 “인민군”으로 바꾸려는 의도를 가진) 강제동원, 노동자 자주경영의 도입, 은행의 국유화, 금융에 대한 국가의 통제 등도 담고 있었다. 아래로부터 독립적으로 주도된 “규율되지 않은 자들”에 대한 투쟁의 필요성은 특별히 강조되었다.
CNT의 지도부는 라르고 카바예로 정부를 압박하기 위해 협박에 의존했다.
1936년 10월 23일, 중부 스페인, 발렌시아, 아라곤, 카탈루냐, 안달루시아 지역의 CNT 연맹 총회는 “대 파시스트 투쟁의 지도부에, 혁명의 정치-경제적 생활의 구조에 CNT가 들어가는 것에 관한” 대정부투쟁에 관한 전국위원회의 보고를 논의했다.
이 총회에서 채택한 결의안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활동가들의 비일관성과 무력함을 드러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권력 확보에 드는 “비용”이 아니었다.(아마도, 오라시오 마르티네스 프리에토를 포함한 다수 “지도부”에게는 이것이 중요했겠지만 말이다.) 오히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역관계를 CNT에게 유리하게 변경하는 것이었다. 이 결의안은 본질적으로 공화국 정부를 향한 최후통첩이었다.
총회는 발렌시아, 중부 스페인, 카탈루냐의 지역 조직들이 대표단을 구성하여 공화국 대통령 마누엘 아사냐 디아스와 면담하기로 결정했다. “재앙으로 달려가고 있는 정부에 CNT의 가입 필요성을 설명하기 위하여 (...) 이 조건 아래 9월 15일의 지역 조직들의 총회에서 승인함.” 면담 대표단은 48시간 동안 응답을 기다리기로 되어 있었다. 만약 그 응답이 부정적일 경우, “군사적 성격의 방법을 동원하여 마드리드, 발렌시아, 아라곤, 안달루시아, 카탈루냐 간의 통신을 확보하고, 인민들의 통행과 마드리드로 향하는 물자의 운송을 통제”할 것이라 협박했다. 이 결의안을 이행하기 위하여, 전국위원회는 카탈루냐, 아라곤, 레반테, 안달루시아 지역의 전선을 통합하기 위한 전국 전시 평의회를 임명하고자 했다. CNT는 지역위원회들과 함께, 100,000 조합원을 동원할 것을 제안했다. 총연맹은 “우리의 모든 지역 세력을 하나의 행동으로 조직하는 것을 통해 경제를 통제하고 물자를 조정할 수 있”게 되리라 의도했다. 동시에, 러시아의 외교단과 상담하는 것이 총회에서 채택한 결의안을 이행하는 데에 필수적일 것“임을 결정했다.
CNT의 위협은 허세였고, 라르고 카바예로는 이를 완벽하게 이해했다. 라르고 카바예로를 지지하고 있던 소련도 마찬가지였다. 아바드 데 산티얀이 이후에 알아차린 것처럼, 이 시기 라르고 카바예로는, 티에라 이 리베르타드지에 쓴 기사에서도 보이듯, 파시즘에 맞서 싸우기 위한 “질서정연한 군대”와 “이행기 국가”에 대하여 확고히 주장하고 있었다.
최종적으로, CNT는 그 후보자를 스스로 지명한다는 조건으로 정부에 4개의 직위를 받았다. 그리고 이 선택은 오라시오 마르티네스 프리에토가 직권으로 결정했다. 프리에토는 이 결정을 전국위원회에 통지할 수고조차 들이지 않았다. CNT 중도 분파의 대표격이었던 후안 로페스와 후안 페이로는 프리에토의 전화를 받았고, 그들이 무역부 장관과 산업부 장관에 임명되었음을 공손하게 통지받았다. FAI의 구성원이었던 몬세니와 가르시아 올리베르는 더 설득할 필요가 있었고, 이 설득을 위해 프리에토는 바르셀로나로 향했다. 몬세니는 장관직을 거부했지만, 피리에토와 카탈루냐 CNT의 사무국장 마리아노 바스케스는 계속 권고했다.
그녀는 24시간 동안 더 고민해보겠다고 말했고, 그녀의 아버지에게 조언을 구했다. 몬세니의 아버지이자 오랜 아나키스트였던 페데리코 우랄레스는 그녀에게 이것이 “아나키즘과 CNT의 멸망”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만약 조직이 요구한다면, 상황을 고려하여, 동의할 필요가 있다고도 말하였다.
대화가 다시 시작되었을 때, 프리에토는 몬세니에게 조직적 책임을 상기 시켰다. 몬세니는 너무나도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그녀의 삶 전체로부터 멀어지는 것” 같은 감정을 느끼면서도.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가르시아 올리베르 역시 정부에 함께 하는 것에 즉각 동의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올리베르는 급진주의자로 여겨져왔다. 그는 전술적 고려에 의해 더 동요했다. 그는 그가 전쟁을 조직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던 공간인 바르셀로나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정부에 들어가는 것에 동의했다. 그리고 이 결정의 책임은 CNT 전국위원회임을 주장했다. 가르시아 올리베르는 그저 조직의 결정에 따른 것 뿐이라는 입장을 유지하였지만, 현실을 바라보면, 이 순간부터 그는 정당과 각종 정파들과 열렬하게 야합하는 협조주의자가 되었다.
프리에토는 마드리드로 돌아와 라르고 카바예로와 세부사항을 조율했다. 1936년 11월 4일, CNT와 FAI의 평조합원들은 신문지상에서, 라르고 카바예로의 내각에 자신들의 조직에서 4명이 들어갔다는 놀라운 사실을 처음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법무부 장관 가르시아 올리베르, 산업부 장관 후안 페이로, 무역부 장관 로페스 산체스, 공중보건부 장관 몬세니가 그들이었다. CNT 지도부는 조합원들에게 이 장관들은 개인적인 관점이 아니라 조직의 입장을, “총회를 통해 사전 결의된, 단결한 노동대중 다수의 집단적 의지”를 대변할 것이라고 못박았다.
이 주장의 노선은 국가를 폭압과 계급적 지배의 도구로 바라보는 아나키즘의 반국가주의적 이상과 완전히 모순되어 있었다. 어떠한 기사는 “상황에 따라 정부와 스페인 국가의 본질이 변화하였다”면서 “현재 상황에서의 정부는 국가 지배의 주요 수단이자 노동계급을 압제하는 힘이 될 수 없다. 더 이상 국가는 사회를 계급적으로 분할하는 기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CNT가 정부와 국가에 들어간 이상, 이들은 여전히 인민을 압제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마지막 문장은, 국가를 인민 스스로의 대변자들로 채움으로서 “전체 인민에 복무하도록 하는 것”이 “그저” 필수적이라는 국가 사회주의의 지지자들의 테제와 완전히 동일하다. 이 기사는 “CNT가 중앙정부에 들어가는 것은 우리 나라의 정치적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면서, “국가의 기능은 노동자 조직의 동의에 따라, 국가의 정치적 사회적 생활의 방향을 지도하는 것에 그칠 것이다. 그리고 정부는 단지 전쟁을 올바르게 수행하고, 공통 계획에 따라 혁명적 과업을 조정하는 과업만을 가질 것”이라고 말한다. CNT 중앙위원회는 성명을 통해 정부에 함께하는 합의는 “우리 군사 전선의 섬세한 상황”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라고 설명한다. 총연맹은 “이베리아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승리”를 추구하고 있으며, “그 핵심 주장을 포기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포기하지 않아” 꾸준히 비정치적으로 남을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CNT는 중대한 상황을 바라보면서, “정부 내에서의 책임과 지위를 요구”할 수밖에 없었다. 중부지역 CNT의 성명서도 비슷한 주장을 계속한다. “CNT는 결코 자체적 강령과 원칙을 포기하지 않는다. CNT가 정부에 들어간 것은 오직 전쟁을 이기기 위해서다.”
CNT의 입각이 선포된 날, 두루티는 라디오를 통해 성명을 발표했다. 그 언명은 보존되지 않았고,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심각한 검열과 왜곡이 있었기에 언론으로 출판되지도 못했다. 마르코스 알콘은 두루티가 “CNT와 FAI의 책임자들이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두루티는 그들이 그 빌어먹을 반파시즘의 기치 아래 혁명을 가로막았다고 극도로 날카롭게 발화하였다”고 되뇌인다. 이것은 급진적 아나키스트의 지도자의 마지막 연설이 되었다. 마드리드는 파시스트 군대에 의하여 위기에 처해있었고, 11월 6일 공화국 정부는 공황에 빠져 도시를 포기했다. 그들은 두루티 부대에 사정했고, 두루티 부대는 마드리드 포위전을 도우러 왔다. 맹렬한 전투 끝에 마드리드는 무너지지 않았다. 하지만 두루티는 불가사의하게도 1936년 11월 19일, 죽었다. 정부와의 타협과 공존에 대한 반대파는 가장 뛰어나고, 상징적이며, 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존재를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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