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장 : 정부에서의 CNT - 결과와 교훈
CNT는 1937년 5월까지 정부에 남아있었다. 이 “권력에의 편입”의 결과는 스페인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에 재앙이 되었다. CNT 출신의 장관들은 군사적 상황을 개선하지도 못했고, 혁명적 투쟁에 대한 곡역을 막아내지도 못했다. 몬세니는 정부에의 참여가 실패라고 공공연히 인정했으며, 로페즈는 경제 부처가 공산주의자와 우익 사회주의자들의 손에 있는 상황에서는 어떠한 성과도 낼 수 없음을 강조했다. 조합주의자들은 노동조합이 “해외 무역의 독점”을 통제하게 하지도 못했고, 산업의 집산화와 공동농장에의 재정적 지원을 담은 법령을 통과시키지도 못했다. 1937년 2월 22일의 정부 법안은 산업의 국유화와 국가주도의 가능성을 열었다.
나아가, 자유의지주의자들이 정부 내의 CNT-FAI의 조합원들을 이르던 바, “동지-장관”들의 활동은 아나키즘 운동의 근본 원칙과 전통으로부터 결별한 것이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아나키스트들에게 곤경을 초래했다. 가르시아 올리베르의 사법 개혁은 양성평등과 1936년 7월 19일 전 범죄에 대한 사면을 확보하는 동시에 범죄자들에 대한 “노동교화소”와 같은 “자유의지주의적” 프로젝트 역시 폐기했다. 그가 제출한 법령들(이를테면, 무기와 폭발물을 숨기는 것에 최대 20년 형을 내리도록 한 것)은 1937년 5월 이후 아나키스트들을 공격했다.
CNT-FAI와의 “공동책임”이라는 포장 아래, 노동조합이 정부 내에서 지위를 가지고 있던 기간 동안, 스페인 공화국과 카탈루냐 공화국의 정부는 인민 민병대의 청산과 정규군의 창설(1937년 1월), 혁명위원회 및 지방 평의회의 해산과 임명 지자체로의 대체(1934년 1월 4일), 카탈루냐의 질서를 유지해온 노동자 분견대의 철폐(1937년 3월)와 같은 반혁명적 행위를 집행할 수 있었다. 이 시기 정부의 기본 계획은, 노동자들의 무장을 해제하는 것이었다. 전선에서 통제력을 가진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에 입각한 노동자의 조직을 해산하려는 시도는, 1937년 4월 카탈루냐와 프랑스의 국경지대에서 치열한 전투를 낳았다. 경제의 집산화에 대한 공산주의자, 우파 사회주의자, 공화주의자들의 공격은 매우 잦아졌다. 스페인 농업부와 CNT와 UGT가 만든 노동자 집단농장 사이에서는 발렌시아의 오렌지 농장을 둘러싼 폭력적 충돌이 벌어졌다. 카탈루냐 식량배급부와 분배를 사회화하려던 바르셀로나 CNT 사이에서도 충돌이 일어났다.
마침내, 1937년 5월, 재앙이 일어났다. 바르셀로나에서 경찰은 노동자 자주통제 상태에 있던 전화교환소를 공격했고, 이는 바르셀로나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노동자들의 대규모 봉기를 촉발했다. 1936년 7월에 그러했던 것처럼, 노동자의 자주적 조직의 기본단위가 지구 방어 위원회로 전환했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에 입각한 대중은 바르셀로나의 많은 지역을 점령했고, 사회혁명이 더 심화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하지만 CNT-FAI의 지도부는 “반파시스트 통일전선”의 붕괴를 두려워하여 노동자들이 바리케이드를 포기하도록 설득했다. 이후 “반혁명적 공화주의자”들은 역공에 나섰다. 합의의 지지자였던 라르고 카바예로는 총리에서 해임되었다. CNT-FAI의 대표자들은 중앙정부와 카탈루냐 지방정부의 직책에서 해임되었다. 아라곤 방어 평의회는 1937년 8월의 법렬에 의하여 해소되었고, 공산당원 엔리케 리스테르가 이끄는 공화국군은 아라곤 지역의 농촌 코뮌 다수를 파괴했다. 1938년, 후안 네그린 정부는 다수의 법령을 발표했다. 이를 통해 미등록 집단농장은 해산되었고, 그 토지는 국가의 통제 아래에 놓였으며, (전시 필요라는 명목으로) 노동자 자주경영을 점차 줄여나가 산업 대부분이 국유화되거나 군부의 통제 아래에 놓였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 수천명이 “통제불가능한 요소”로 여겨져 체포되었다. CNT-FAI의 지도부는 이 노동운동 탄압에 어떠한 저항도 하지않고, “무엇보다, 우리는 파시즘과의 전쟁을 이겨야 한다”는 주장만을 반복했다. 하지만 CNT-FAI의 지도력에는 금이 가고 있었다. FAI 반도 위원회의 지도적 존재들의 다수는 그들이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의 전통에서 한 걸음도 물러선 적이 없으며, 전쟁이 승리하면 그 전통을 적용하기 시작할 것이라 계속 재확인했다. 동시에, CNT 중앙위원회를 구성하는 자들, 특히 사무총장이었던 바스케즈와 흑막이었던 프리에토는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의 근본적 원칙들을 사회민주주의적 “노동자 민주주의”와 “혼합경제”의 관점으로 대체하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이들은 FAI를 CNT를 통제하는 정당으로 만들고자 했다. 정치적 권위에 대한 양보의 규모와 정도에 대한 내적 갈등에도 불구하고, CNT-FAI의 지도부는, 내전이 끝날 때까지 “반파시스트 통일전선”과 “차악”의 개념에 사로잡혀있었다. 1938년 4월, CNT는 다시금 정부의 교육부, 공중보건부 장관직을 확보했다.
부르주아-공화주의자 진영과 파시스트 진영 사이의 내전의 승리를 위해 사회혁명을 “연기”하거나 “억제”하는 전술은 전쟁의 결과에도 그다지 좋은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역사가 증명하고 있는 것은, 정규군과 군사국가를 통해, 군사 전문가의 지배를 따르는 것으로는, 어떠한 전쟁에서도, 일반적 전쟁이건 “반파시스트” 전쟁이건, 승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프랑코를 이겨낼 수 있던 것은, 희망에 가득하던, 두루티가 말한 것처럼 혁명적 투쟁을 방어하며 “가슴속 새 세상”을 즐기던, 1936년 7월의 노동자들 뿐이었다. 내전의 패배 이후 아바드 데 산티얀은 “우리는 전쟁에 승리하지 않고서는 우리의 혁명이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기에 우리는 혁명을 희생했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이 희생이 전쟁의 승리를 가로막았다는 것이었다.” 대중은 혁명적 열정을 잃었고, 싸울 의미를 잃었다. 1939년 초 공화국군의 탈영병이 어마어마한 수준으로 늘어났고, 프랑코군과의 내통도 늘어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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