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14장 : “상황”에도 불구하고) - 바딤 다미에



14: “상황에도 불구하고

맑스주의적 경향성에 속한 많은 연구자들은 스페인 혁명의 패배의 책임을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운동으로 돌리기 위해 시도해왔다. 이들은 CNT-FAI와 정부의 야합은 노동자의 정권 확보를 거부하는 아나키스트 이데올로기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은 근거가 없다. 무엇보다, 아나키스트들은 단지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정권의 건설에 반대할 뿐 아니라, 구체제의 청산 역시(물론, CNT 지도부는 이 청산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강조한다. 어떠한 경우에도, CNT-FAI가 행동한 방식은 그들의 자유의지주의적 이론“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그 이론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행한 것이다.

무엇보다 스페인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적인 대중들이 그들의 “지도자”들의 명에 따라 혁명적 과업과 사회혁명을 멈추었다고 보는 것도 부적절하다. 그 전까지 노동자와 농민의 자주경영 조직을 건설하는데에 있어 큰 역할을 하고 있던 CNT-FAI의 수십만 평조합원들은 “그들이 정치적 놀음판의 말로 제약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들은 공장에서, 노동조합에서, 코뮌에서 명령이나 지침을 기다리지 않고 독립적 행동에 나섰다. 이러한 “아래로부터의” 자율적 건설은 “지도자”들에 의존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 지도부들에도 불구하고 존재했다. 이것이 아나키스트의 “실질적 추동력”의 힘을 증명하는 것이 아닌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가 농촌보다는 도시에 집중한 운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농촌지역에서의 혁명은 전체적으로 정부의 압력과 그에 대한 타협이 더 효과적이었던 도시에서의 혁명보다 더 나아갔다. 농촌에서는 생산의 영역에서뿐 아니라, 삶의 다른 영역들에서의 자주적 조직들도 건설되었다. 집단농장의 구성원들은 자발적으로 지주들로부터 수용한 토지와 자신의 토지를 합쳤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재정을 내어놓기도 했다. 각각의 가정은 자신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한 소규모 텃밭을 가지고 있었다. 집단농장이 아닌 개인의 토지를 경작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 요구는 일반적으로 수용되었다. 다만, 그 경작은 개별적으로 진행해야 하며, 임노동을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단서가 붙었다. 동료 마을주민들이 “개인”들에게 가하는 도덕적 압력을 배제하는 것은 어려웠지만, 그것이 직접적인 물리적 폭력으로 발전하는 경우는 스페인의 “집산화” 과정에서 알려진 바가 없다.

집단농장은 마을 전체의 거주민들, 혹은 최소한 압도적 다수의 거주민들을 포괄했다. 많은 집단농장은 “가족수당”을 도입했다.

화폐는 혁명위원회가 수용하여 은행에 보관하였다. 몇몇 지역들은 자체적인 화폐를 발행하기도 했다. 혁명위원회는 분배구조를 확보하였으며, 가격은 집단적으로 결정되었고, 집단적으로 통제되었다. 집단 창고와 집단 상점이, 주로 교회였던 건물에 만들어졌다.

사회변혁은 조정되지 않은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졌다. 가끔 이는 토지 소유구조의 특이성과 연결되어 있기도 했다. 아라곤에서 80%의 토지가 대지주의 소유였다면, 레반테(발렌시아)와 카탈루냐에서는 소농의 소유 비율이 우세했다. 이 소규모 경작자들 중 훌륭한 아나키스트들이 다수 있기는 했어 집단농장의 건설을 시작하기는 했지만, 레반테와 카탈루냐에서의 집산화의 길에는 장애물이 더 많았다. 이 지역들에서는, 대지주들의 토지만 수용되었다. 하지만 전쟁에서 비롯한 식량의 부족은 공동체 평의회가 사적 거래를 제한하고 사회화를 촉진하는 수단을 사용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이로서 완전한 집산화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는 아라곤에서만큼 지역 대중의 지지를 받지는 못했다. 몇몇 집단농장들은 규모가 크고 풍족했지만, 이들 중 다수는 여전히 화폐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라곤에는 400~500개의 집단농장이 구성되었고, 발렌시아에서는 900개, 카스티야에서 300개, 카탈루냐에서 40개, 에스트레마두라에서 30개가 구성되었다.

1936년 말부터 1937년 초까지, 약 30만에서 40만명이 연방에 속한 집단농장에서 거주했다.(이는 집단농장이 공화국군과 프랑코주의자들에 의하여 파괴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 집단농장들에서는 아나키즘적 사회구조가 최대한 발현되었다. 이곳에는 “소유자도, 지역 유지도, 성직자도, 착취자도 없었다.”

아라곤에서 집단농장은 지역 인민의 70% 가량을 포괄했고, 경작지의 60% 가량을 확보하고 있었다. 1937년 2월, 카스페에서 열린 집단농장들의 회의에서는, 집단농장에 가입하지 않고 개별적으로 농사를 짓고 싶은 자들은, 임노동을 사용하지 않으며 집단농장이 제공하는 서비스를 이용하지 않는다는 전제 아래 그렇게 할 권리가 있다고 공식적으로 확인했다. 이러한 개인은 스스로가 경작할 수 있는 만큼의 토지만을 가질 수 있었다.

아라곤에서 수공업 공장이나 다른 형태의 지역 산업, 상점이나 교육기관, 문화공간 등은 사회화되었다. 아라곤의 마을들에는 강하고, 오래된 공동체적 전통이 있었고, 이 전통은 인민들을 아나키즘적 공산주의 사회에 적합한 자유로운 지역적 · 경제적 공동체로 묶어내기 쉽게 만들었다.

집단농장 내부에는 위계질서가 없었고, 모든 구성원들은 평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보통 한 달에 한 번 열렸던 구성원들의 정기 총회가 주된 의사결정기구였다. 공동체적이고 경제적인 생활을 조직하기 위한 위원회가 선출되었고, 이는 보통 이전의 혁명위원회에 기반한 것이었다. 위원회는 일반적으로 다양한 부문의 대표자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특권을 가지고 있거나 특별한 보상을 받지 않았다. 사무국원과 회계담당자를 제외하면, 이들 모두는 자신의 업무를 지속해야 했다. 집단농장의 성인인 구성원 모두는, 임산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노동해야 했다. 노동은 자주경영에 기반하여 조직되었다. 5~10명으로 구성된 분반이 매일의 회의를 통해 노동과 관련된 기본적 문제에 대한 결정을 내렸다.

이 회의에서 선출된 대의원들이 다른 분반과의 협업 및 정보 교환의 역할을 수행했다. 많은 집단농장은 순환보직의 원칙을 집행했고, 노동자들은 즉각적 필요에 따라 한 부문에서 다른 부분으로 이동하였다. 산업공장은 공동체적 구조 안에 포괄되어 산업과 농업을 총화할 수 있게 하였다. 집단농장은 지역 연방을 통해 함께 모였다.

화폐는 서서히 청산되어갔다. 집단농장이 건설된 첫 주, 많은 집단농장들은 임노동을 철폐하고, 공동 창고에 있는 모든 재화에 대한 무제한적 무료 소비를 도입했다. 하지만 전쟁과 물자부족이라는 조건에서,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집단농장 바깥에서는 화폐가 여전히 유통되고 있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1936년 9월에는 다수의 코뮌들이 소위 “가족수당” 체계로 전환했다. 집단농장에 소속한 각 가정은 동일한 금액을 지급받았다.(집단농장의 규정에 따라, 한명에게는 7-10 페세타가, 부인이 있을 시 50%를 추가하여, 가족구성원 1명당 15%씩을 추가하여 지급되었다.) 이 수당체계는 식량과 소비재의 구입을 위한 것이었지, 저금을 장려하기 위한 의도가 없었다. 많은 코뮌들에서 국가 화폐를 대신하기 위한 쿠폰이 도입되거나 카드, 혹은 교환권이 도입되었다. 전쟁 상황에서, 특정한 종류의 식량은 배급되었지만, 다른 것들(와인, 버터 등)은 거의 무제한적으로 이용할 수 있었다. 화폐를 폐지한다는 최종 결정이 내려지는 순간까지 “아라곤에서 집산화를 채택한 510개의 마을 중 3분의 1에서 화폐가 철폐되었고, 집단농장의 창고에서 소비자 책자를 제시하고 모든 재화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3분의 2에서는 채권, 쿠폰, 교환권 등 발행한 코뮌 내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대안화폐가 사용되었다.

지역주의적 성격을 가지고 있던 개별 코뮌에 필요했던 첫 번째 활동은 집단농장간의 불평등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몇몇 집단농장은 더 풍족했고, 다른 곳은 가난했다. 상황의 목격자였던 독일 조합주의자 서치가 확인한 것처럼, 최초에 일부 집단농장은 “자급자족”이라는 표어 아래에서의 경제적 계획에 반대했다.

집단농장 사이의 완전한 독립성과 코뮌 내부 분배체계의 차이는 그들이 경제활동을 조정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사회혁명을 심화시키는 것을 지지하던 아나키스트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헌신했다. “집단농장”을 개인적으로 선전하던 두루티처럼 말이다. 1937년 2년, 카스페 총회에는 수백명의 대의원들이 참여하여 개최되었다. 참가자들은 “집산화”에 대한 선전을 가속하고, 실험적 농장과 기술학교를 건설하며, 집단농장들 간의 상호부조를 조직해 기계와 노동력을 공유하기로 합의했다. 마을 간의 경계는 없어질 것이고, 공동체 소유의 한계도 폐지될 것이었다. 집단농장의 연방이 바깥 세상과의 교환을 조정하고, 내부적 소모가 아닌 대외적 교환에 사용할 공동 재화들을 조성하며, 교환가능한 재화들에 관한 통계를 수집하기로 하였다. 마지막으로, 집단농장과 연방 내에서 모든 형태의 화폐 유통을 완전히 철폐하고, 공동의 소비자 책자(책자를 제시하면 소비재를 가져갈 수 있었다.)로 대체하기로 하였다. 이 책자들은 각개 거주민의 실질적 수요를 맞출 수 있도록, 그리하여 생산이 인민의 구체적 수요에 기반할 수 있도록, 그로서 아나키즘적 공산주의의 “아래로부터의 계획”이 실현될 수 있도록 설계된 것이었다.

아라곤 집단농장들의 활동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공식 통계만 보더라도, 1937년 아라곤 지역의 수확량은 20% 증가하여, 동시기 오히려 수확이 감소했던 스페인의 다른 지역들과 대조되었다. 아라곤에서는 길, 학교, 병원, 농장, 문화 기구가 건설되었고, 많은 마을에서 이러한 건설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노동의 기계화 역시 이루어졌다. 거주민들은 보건서비스를 제공받았고, 반권위주의적 교육을 무료로 제공받았다.(의사와 교사는 집단농장의 정규 구성원이었다.) 많은 집단농장은 세금을 내지 않았고, 오히려 전선에 직접적이고 자발적으로 물자를 보내는 것을 선호했다.

스페인의 도시에서 사회변혁은 보다 조정되지 않은 형태로 이루어졌다. 산업체 다수를 노동자가 점유하여 스스로의 통제 아래에 두고 있었지만, 그러면서도 노동조합과 노동자 조직에 의한 기업의 수용에서 산업의 완전한 사회화로의 이행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는 자산-화폐 관계가 아직 철폐되지 않았고, 화폐는 여전히 자본가와 국가의 손에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를 목격한 가스톤 레발에 따르면, “바르셀로나와 발렌시아의 노동자들은 공장을, 작업장을, 기계를 원자재를 확보하고 화폐 체계의 잔재와 평범한 자본주의적 상업관계를 이용하였다. 이들은 생산을 스스로 조직하고, 자기 노동으로 생산한 것을 팔아 그 이익을 가져갔다.”

아바드 데 산티얀은 CNT에서의 경제문제를 다루면서, 정부와 타협해야 한다는 압력이 노동자들이 “더 나아가지” 못하게 했다며, “그리고 이것이 모든 것을 시작부터 왜곡했다. 이것은 실질적 사회화가 아니라, 오히려 노동자의 신자본주의였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서 흔들리는 자주경영이었다. 만약 혁명이 조합의 지도 아래에서 완전히 수행되었다면 이러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계획을 위한 경제체를 조직하지 않았다. 우리는 공장주를 공장에서 내쫓고, 공장을 통제할 위원회를 건설하는 데에서 만족했다. 우리는 우리 사이의 연결고리를 만들려는 시도나 경제를 실천적으로 조정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우리는 계획이 없이,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고 행동했다”고 인정한다.

도시에서는 분배의 사회화 역시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 파급효과는 곧 나타났다. 바르셀로나에서 CCMA가 구성된 이후, 다양한 정치세력의 대표자들을 포괄하는 중앙식량공급위원회가 건설되었다. 이 위원회는 전선과 병원에 대한 물자의 공급을 조직했고, 상점을 열었으며, “인민식당”의 네트워크를 유지했다. 하지만 개인 상업의 체계는 유지되었고, 그 해가 끝날 때까지 바르셀로나에서 이 현상은 식량의 품귀, 물가의 투기적 인상 등의 해악으로 나타났다. 1936년 12월에는 분배 분과에 속한 CNT의 노동조합이 도소매상의 노동자들에게 투기에 대항하여 싸우라고 주문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도소매상의 노동자들이 상점주가 물건을 “잘못된 고객들에게” 팔고 있지는 않은지, 이들이 물가를 독단적으로 올리고 있지 않은지 감시할 것을 촉구했다.

노동자들은 여전히 임금을 받았다. 많은 경우(이를테면 바르셀로나에서) 소위 “가족수당”을 적용시켜 같은 가족 구성원의 수를 가진 노동자들은 같은 임금을 받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더 많은 경우, 노동자들이 할 수 있던 것은 임금 격차를 축소하고 저임금 노동자들에게 대규모의 임금인상율을 적용하는 정도로 제약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업의 여러 부문에서, ‘조합화’는 개별 기업의 층위를 넘어 전반적으로 확산되었다. 소위 기업의 “집단”이 단일 기업처럼 협력하여 작동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알코이의 모든 산업부문이, 카탈루냐의 가스, 수도, 전기 공급이, 바르셀로나의 대중교통이, 많은 지역에서의 운수와 공중보건산업이 이러한 방식으로 조직되었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노동조합들은 전시 상황과 “지도부”의 타협에도 불구하고 혁명적 변혁을 지속하고 심화시키고자 하였다. 목공 부문의 조합 하나는 아나키스트들이 처음부터 자기 의지, 즉 “7월 19일에 수명을 다한 체제를 더 인간적이고 평등한 것, 자유의지주의적 공산주의로 대체하는 것”을 실현할 수 있었다고 강조한다. 바르셀로나와 카탈루냐에서 “이러한 변혁은 시작했었다.”

하지만 “다른 조직들이 CNT-FAI의 구성원들의 열정을 이용”하여 “인민의 추세”를 새로운 패배의 방향으로 돌려놓았다. 결과적으로 “참된 수용을 진행하여 광범위한 인민의 열망을 충족하는 대신, 사업주들은 매주 임금을 지불해야 하게 되었고, 일당을 인상하는 대신 시급을 낮추게 되었다. 이것이 전쟁이 한창일 때 말이다!” 이미 수용된 기업들에서는 다수의 “기생충같은 관료들”과 통제위원회가 등장했다. 이들은 생산에 참여하지 않았다. 나아가 산업 내에서 성장한 집단들은 서로 평등하지 않은 상황을 마주하게 되었고, 이들은 협동조합을 모방하여 서로 경쟁하려 하였다. 이렇게 “두 개의 계급, 새로운 부자와 언제나처럼의 빈자”가 등장하게 되었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동산의 통제를 통해 경제적 활동을 전용하고자 했다. 이들은 “정부나 그와 비슷한 공식기구가 대변하고 있는 소부르주아지”, 관료, 공무원, “쓸모없는 요원과 중간관리자”들은 경제가 평범하게 작동하는 것을, 경제가 발전하는 것을 담보할 수 없다고 믿었다. 그렇기에 노동조합과 그 조직이 “전체 생산을 통제하고 경영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목공 부문의 노동조합이 설명하는 것처럼,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제네랄리타트의 집산화에 관련한 법령을 인지했지만, 실천에 있어서는 그것을 다른 방향으로 틀어놓고자 시도했다. “우리는 산업의 모든 부문에 대한 집산화에 동의했다. 하지만 단일한 재정기구를 통해 그것을 평등한 분배 체계로 전환하고자 했다. 우리는 노동자 집단들의 빈부격차에 동의한 바가 없다.”

CNT의 산하 노동조합과 연방들은 경제의 사회화 계획에 관하여 적극적으로 논의하였다. 수도, 가스, 전기 노동자들을 포괄하고 있는 연방은 전력 공극의 집산화에 관한 계획을 수립했다. CNT와 UGT의 섬유노동조합연맹의 대표단은 합동회의를 열고 “카탈루냐의 모든 섬유부문에 대한 완전한 집산화를 시행”하고, 그 산업에 자주경영의 체계를 승인하기로 결의했다. 바르셀로나 CNT의 지역총회 참가자들은 “산업분야의 사회화를 전국적 규모로 시행할” 필요성을 선포했다. 이들은 공장평의회, 부문협의회, 산별협의회, 나아가 총체적인 경제평의회까지, 모든 층위에서의 자주경영을 제안했다. 한 산업의 각 부문은 그 산업의 상황에 대하여 완전하고 구체적인 연구를 진행하고, 현재의 역량과 생산성에 대한, 노동자 수에 대한, 확보한 원자재에 대한, 판매 시장에 대한, 발전 가능성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를 포함한 사회화 계획을 경제 평의회에 제출하여야 할 것이었다. 1937년 1월 1일, 운수산업의 전국회의는 국유화냐 사회화냐의 문제를 논의하였다.

레반테 지역에서 농민들의 지역적 연방과 과일 수출 사업 노동자의 통합노동조합은 (외화를 확보할 수 있는 기초적 수단이었던)오렌지 등 과일들을 재배하는 농민들을 향한 성명을 발표했다. 각 마을과 조합이 개별적으로 수출에 뛰어들고, 그로부터 확보한 외화를 개별적으로 사용하던 당시의 상태는 경쟁을 낳았다. 그리고 통합노동조합은 이를 “불운한” 사태라 명명했다.

조합들은 생산물 재고와 상호부조 기금을 공동으로 관리할 “중앙기구”를 건설하여 이 기구를 농민들 스스로가 통제해야 한다고 부르짖었다. 레반테 농민 연방은 이에 호응하여 오랜지 생산량의 약 50%를 통합해내었고, 이 중 70%까지가 무열조직을 통해 유럽 시장으로 팔려나갔다.

1937년 2월, 카탈루냐 CNT의 총회는 산별조합을 재건하여 작물재배나 원자재의 채광으로부터 최종생산물의 분배까지 생산의 전체 과정을 포용하고 통제할 것을 승인했다. 카탈루냐에서 지역 조합과 연합에 관한 경제적 조사가 이루어졌다. 이로서 CNT는 정보를 수집하였고, “아래로부터 계획”되는 “혁명적 경제”의 건설을 준비할 수 있었다. 이 통계에는 지리적 입지와 기후, 사회혁명운동의 전통, 지역민의 경제적 상황과 경제적 연결망, 주거 상황, 미래의 가능성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1937년부터 발생한 혁명의 점차적 역행은 광범위한 사회화 계획이 적용되지 못화게 하였다. 전시 조건하에서 정부는 경제활동에 대하여 국가의 통제를 강화하거나 심지어 산업, 특히 군수산업에 대한 직접적으로 국유화하는 방향을 지향했다. 이에 따라 CNT 내에 조합주의적 운영 부문을 구성하여 협력과 계획의 자율적 구조를 만들고, 산별연맹과 경제 평의회를 총체적으로 지도하며, 스스로의 은행을 갖추게 하자는 개념이 일부 활동가들 사이에 확산되었다. 1938년 1월 발렌시아에서 열린 CNT 전국 경제 회의에서는 이 개념을 승인하였다. 스페인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노동자들의 사업이 유예되고 불완전했다 하더라도, 그들이 만들어낸 사회변혁의 중요성은 결코 과대평가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역사상 단 한 번도, 이러한 규모의 변혁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는 지금껏 “그 회의를 통해 구상되어 왔던 모든 것, 공장과 농장에 대한 노동자의 통제, 생산의 계획적 전개, 경제적 관계에서의 평등, 건설적인 결정 채택의 가능성”을 실현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공화국 정부의 틀 바깥에서 이루어졌다.”

아라곤에서는, 자유의지주의적 공산주의를 적용할 가능성이 원칙적으로 실현되었다.

CNT-FAI 지도부가 총체적 혁명의 이상에서 후퇴하고, 정부와 정당과 인민전선과 타협한 것은 평범한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의 맹렬한 저항운동과 직접적 불복종 운동을 촉발했다. 이러한 사건들에 대한 정보는 파편으로만 남아있고, CNT, FAI, 청년자유의지주의자(Juventudes Libertarias) 등이 집행한 반조직행위에 대한 체계적 조사는 지금까지 남아있지 않다. 그렇기에 이 반대세력의 실제 규모를 가늠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다. 파편화된 정보를 간략히 요약해보자면, 저항운동에는 세가지 기본 형태가 있었다. 우선, 경제적 · 사회적 생활에 대한 국유화의 정치에 맞서고, 노동자 자주경영의 영역에서의 성취를 지키려는 CNT 기층조직의 저항이 있었다. 공화국 정부와 노동조합/집단농장 사이의 충돌은 지속적으로 발생했다. 1937년 초, 카탈루냐 농업부 장관은 바르셀로나 CNT가 제안한 분배의 사회화 계획에 반대했다. 발렌시아 지역의 오렌지 농장에서 노동자-농민들의 조직의 경제활동의 통제를 확보하려는 정부의 시도는 날카로운 갈등을 촉발했다. 상업부 장관이자 CNT의 조합원이던 후안 로페스는, 1937년 초, 농업부 장관이자 공산주의자였던 유리베의 도움을 받아 집단농장에 대한 정부 통제를 확언하는 법령을 반포했다. 하지만 다수의 발렌시아 협동조합들은 그 법령을 따르는 것을 거부했다. 정부는 투유에라와 알파라라는 마을들을 전략적 거점으로 보고 포병과 전차부대가 포함된 군경부대를 보냈다. 하지만 엽총과 구식 대포 2정으로 무장하고 있던 농민들은 공고한 저항을 선보였다. 이들은 인근의 하티바, 카르카헨테, 간디아, 수에카 지역의 지지를 등에 업고 “간디아 전선”을 구성했다. 카타로하, 리리아, 몽카다, 파테르나, 부리아나 마을의 농민들은 “빌라네사 전선”을 구성했다. 집단농장들을 돕기 위해 자유의지주의적 “철의 분대” 2개 여단이 달려왔고, CNT도 타루엘-세고르베 전선을 포기하고 2개 여단을 파견했다. 쿠예라 지역에서의 전투는 4일간 지속되었고, 정부군은 측면 공략을 시도했다. CNT가 개입한 이후, 휴전과 상호 포로 교환에 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레반테 지역의 집단농장들은 오렌지의 생산과 수출에 대한 통제를 유지할 수 있었다. 1938년 초, (CNT-FAI 지도부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발발한 바르셀로나 연예 산업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한 정보도 존재한다. 이 파업은 그들의 산업에 대한 국가 통제 도입에 반대하여 일어났다. 정규군화에 대항하여 일어난 아나키스트 민병대원들의 저항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충돌의 결과로, CNT 카탈루냐 지역 위원회는 군대의 명령을 듣기를 원하지 않는 대원들은 전선에서 나가도 된다고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형태는, CNT-FAI의 “협조주의적”이고 “타협주의적”인 노선에 대하여 공개적이고 날카롭게 비판한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문건들이 있었다. 이 문건들은 “반파시스트 통일전선”이라는 명목으로 혁명을 정리하고 정부와 협력하는 것을 비난하였다. 이러한 저항행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것은, 1936년 12월 29일부터 출간되었던 신문 <신념>이었다. 이 신문은 CNT-FAI의 바자 료브레가트 지역조직에서 출판하였다. 그 편집장은 카탈루냐 CNT의 기관지 솔리다리다트 오브레라의 총편집자였으나, CNT-FAI 지도부의 친정부정책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해임된 리베르토 칼레자스가 맡았다. <신념>지는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운동의 혁명적 소장파의 관심을 끌어모았다.

<신념>지를 통해 맹렬한 비판을 쏟아내던 작가들은 조제 알베롤라, 펠리페 알라이스, 조제 페이라츠, 세베리노 캄포스, 플로레알 오카나, 프란시스코 카레노, 자이메 발리우스 등의 저명한 아나키스트들이었다. 레리다의 아나키스트 소장파들도 <아크라시아>(편집자 : 페이라츠)라는 이름의 출판물을 펴내었다. 토르토사 지역의 <시우다트 이 캄포>, 발렌시아의 <노소트로스>, 카탈루냐지역 청년자유의지주의자(FIJL)의 기관지 <루타>와 <에스푸에르사>, ‘두루티의 친구들’이 펴내던 신문들(<라 노체>, 그리고 1937년 5월 이후부터는 <엘 아미고 델 푸에블로>) 역시 이 저항에 함께했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운동의 평범한 활동가들은 이 모든 출판물들을 흥미롭게 읽고 이를 지지했다.

마지막으로, 소장파 그룹들 역시 존재했다. 발렌시아에서는 FAI의 일부 부문과 FIJL이 노소트로스 출판부에 모여 정부 참여에 대하여 강력한 입장을 내었다.

1936년 12월의 발렌시아에서는 이코노클라스타 그룹의 성명서들이 자주 나타났다. 이 성명서들은 CNT를 대표하는 정부인사들을 포함한 국가기구 전반에 대한 맹렬한 비판을 담고 있었다. CNT의 조합원들은 이 성명서에 찬동으로 응답했다. 그렇기에 CNT 전국위원회는 이 성명서들을 애써 무시하고, 이것이 “규율이 없고 무책임한” 비판이며 “그 누구도 대변하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FIJL의 핵심조직이었던 카탈루냐 FIJL은 정부 참여에 대한 반대 입장을 공개적으로 취했다. 이들은 이것이 아나키즘의 신념에서의 이탈이고, “상황”에 순응하는 것이며, “지도자”들과 협력하는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1937년 5월의 상황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후, FIJL은 공개적 반대파가 되어 CNT-FAI 지도부의 결정에 따라 반파시스트 정당의 청년조직과 합의서를 체결하는 것을 거부했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운동의 지도부는 FIJL의 “규율이 없는” 기관지 <루타>의 인가를 취소하겠다고 협박했다.

1937년 봄, CNT 전국위원회의 정책에 불만족한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 분파는 “두루티의 친구들”을 건설했다. 이 조직에는 4~5,000명의 회원이 있었다. 이들은 자유의지주의적 공산주의가 선언되지 않은 것을, 정부에의 참여를, 사회주의자 · 공산주의자 · 부르주아 공화주의자들과의 협력을 비난했다. 이 조직의 구성원들은 아나키즘의 “정통적” 방법론과 “개량주의적” 방법론 모두를 비판했다. 그러면서 아나키즘의 이론과 전술을 더욱 발전시켜, 다음과 같은 원칙에 기반하여 세워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유도시”(코뮌), 노동조합에 의한 경제의 운영, 혁명의 방어를 위한 혁명위원회의 건설, 지역 방어위원회들의 활동상의 협조의 원칙이 그것이었다.

하지만 다른 아나키스트 소장파 조직들은 두루티의 친구들에 크게 매력을 느끼지 않았다. 다른 조직들은 두루티의 친구들이 권위주의적 방법론에 집착한다고 비판했다. CNT-FAI에서 활동하고 있던 이 조직들(바자 료브레가트 지역의 <신념>과 <통제불능>, 바르셀로나의 <로스 키조테스 델 이데알>, 레리다의 <아크라리아> 등)은 조직을 정당으로 전환하거나 자유의지주의 운동을 통일하고 중앙화하려는 시도에 반대하면서,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의 전통적인 원칙과 이상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1937년 말, 저명한 아나키스트인 산타나 칼레로, 세베리노 캄포스, 페이라츠는 “자유의지주의 운동의 의식화된 일원 중 주된 소장파 세력”을 대변하는 유인물을 펴내었다. 이 유인물은 “지도부”가 “상황적 요구”라는 미명 아래 “아나키즘의 이데올로기적 원칙”을 배신하고, “아나키즘의 정수”를 침해하고 있으며, “악취를 풍기는, 혐오스러운 정책을 통해 CNT-FAI의 폐와 뇌를 중독시키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들은 “국유화와 중앙화에 묶인 상태”로부터 벗어날 것을 부르짖었다.

두루티의 친구들처럼, 정통 아나키즘적 조합주의로의 회귀를 지지하던 자들은 자유의지주의적 대중조직(CNT-FAI)를 제외한 다른 행동의 분야를 구상하지 않았다. 이들은 평범한 활동가들 사이에서, 총회와 회의에서의 연설을 통해 운동의 공식 노선을 변경시키고자 노력했다. 1938년 10월 개최된 CNT, FAI, FIJL 지역 협의회의 전국 총회에서, “협력”의 반대자들은 정부에 들어가는 정책에 대한 최후의 전투를 치르고자 했다. 카탈루냐 FIJL의 대의원은 “국가를 파괴하기 위해 국가에 들어간다는 것은, 그러니까, 매춘을 없애기 위해 당신의 부인과 누이동생을 사창가에 보낸다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카탈루냐 FAI의 대의원 셰나는 연방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언급된 것에 대한 시위로서 총회장에서 퇴장하였다. 하지만, 소장파는 그들이 원하는 변화를 얻어내는 데에 실패했다. 이들은 분열되어 있었고, 조직적으로 미숙했다. 언제나처럼 활동가들은 “우리 조직”에 대한 신념에 사로잡혀 있었고, 그 틀 바깥에서 대중들이 어떻게 말하건, 그것은 수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스페인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는 체계적이고 협조적인 정파투쟁의 경험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렇기에 소장파들은 CNT-FAI의 지도부를 제거해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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