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15장 : 스페인 혁명과 국제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 바딤 다미에


15장 : 스페인 혁명과 국제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1936년부터 1939년까지 국제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운동은 스페인 혁명에 대한 최대한의 실천적 연대냐, CNT 지도부에 대한 비판이냐의 사이에서 분열되었다. 1936년부터 IWA의 사무총장이었던 베스나르는 그 해 가을에만 혁명 스페인을 3차례 방문하였고, 그곳에서 CNT 지도부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의 원칙에서 멀어졌으며, 이것이 혁명의 퇴보를 가져오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베스나르는 CNT의 입각이나 정당과의 협업, 정규군화, 조합의 경제적 통제에 대한 저지, 스탈린의 소련에 대한 비판 거부, 자유의지주의적 공산주의 건설 과업 수행의 거부에 대하여 날카롭게 비판했다. 하지만 이러한 와중에도, 1936년과 1937년의 IWA 정기 총회와 1937년의 임시 총회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IWA는 CNT의 노선에 영향력을 행사할 실질적 힘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IWA 사무국부터가 분열되었다. 헬무트 뤼디거와 네메시오 갈베는 베스나르와 입장이 달랐고, CNT의 “강요된” 전술을 옹호했다.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의 노동자 조직(FORA와 FORU)는 스페인 CNT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이들은 CNT의 정책이 혁명적 조합주의적인 오류로부터의 논리적 귀결이라고 바라보았다. 프랑스의 CGT-SR도 CNT를 비난했다. 이 조직들은 스페인의 동지들이 스스로의 결정과 전술을 재점검하고, IWA의 원칙에 대하여 명확히 지지하고 있음을 확인할 것을 촉구했다.

러시아의 아나키스트 망명자였던 볼린이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던 “프랑코포니 아나키스트 연맹”(Fédération Anarchiste Francophone, FAF)은 CNT 지도부의 정부 참여와 협조주의노선에 맞서 투쟁하던 스페인 아나키스트/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의 소장파 세력과의 연대를 선언했다. FAF는 “줏대없는” “이데올로기적 배신”을 당한 스페인 아나키스트들을 참된 “CNT-FAI” 라 부르며, “CNT-FAI의 대오 내부에서뿐 아니라, 국제 아나키즘 운동 전반에서 분열이 필연적”이라 여긴다고 선언했다.

1937년의 IWA 임시 총회 전, CNT를 IWA에서 제명하는 것까지 논의되고 있었다.

하지만 CNT의 지도부는 이 비판의 물결을 “특수한 상황”을 빌어, 다른 나라에서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운동이 약하다는 것을 빌어, 다른 어떤 곳에도 혁명적 투쟁이 없었다는 점을 빌어 무력화시켰다.

CNT의 지도부는 베스나르를 IWA 사무총장에서 해임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나아가, CNT 지도부는 IWA의 원칙과 강령을 개정하여 “한물간” 지점들을 삭제하고, 혁명의 방어에 관한 규정을 신설하며, 각 가맹조직들에게 “광범위한 자율”을 부여하여, 각 조직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모든 전술노선을 택할 수 있게 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뤼디거가 이끌던 독일 망명자들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 모임은 이 방향으로 더 나아갔다. 이들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의 개념과 전술을 근본적으로 갈아 엎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의 원칙이 다른 반파시스트 세력과의 협력을 열어놓는 방향으로 재검토되어야 하며, 반제국주의적 입장과 혁명전쟁 지지의 방향으로 드러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뤼디거는 전술적 “탄력성”과 “명확한 개념”을 지지했다. 그리고 이것은 정치적 활동의 필요성, “혁명” 정부의 필요성, 국가주의자들 및 정당기구와의 협업의 필요성, 규율잡힌 “혁명군”과 압제수단 창설의 필요성, 부르주아지를 보호하고, 사유재산을 보호할 필요성을 포함하고 있었다. 하지만 CNT를 비판하는 대오에는 단결이랄 것이 없었다. 스웨덴의 SAC는 정부 참여를 비난하였지만, “반파시스트 협력”은 옹호했고, 전술적 자율성을 명문화하는 것도 옹호했다.

CGT-SR과 베스나르는 “민주주의적 자본주의에의 참여”를, 국가나 정당이나 군대와의 협력을,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의 기본 원칙 폐기를 날카롭게 비난했다. 하지만 이들은 명확한 대안을 내놓지 못했고, 일정부분의 “전술적 수정”에, 혁명적 전쟁과 반식민주의적 전쟁의 가능성에 대한 조항을 삽입하는 데에 동의했다.

FORA와 FORU는 다른 관점에서 IWA의 원칙과 전술을 바꾸는 데에 확고한 입장으로 반대했다. IWA의 원칙과 전술은 국가에 대한 투쟁과 직접행동에, 정치와 정치세력과의 연대에 대한 거부에 기반하고 있었따. 이들은 모든 전쟁에 반대함을 재확인할 것을 주장했다. 전쟁은 필연적으로 자본가들의 권력투쟁에 지나지 않기에, 혁명을 통하여 전쟁을 반대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라틴 아메리카의 아나키스트들은 그들이 파시즘과 계급에 기반하지 않은 반파시즘 사이에는 원칙적으로 차이가 없다고 명확히 밝혔다. 둘 모두 “프롤레타리아 해방의 적”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적 · 전술적 혼란은 IWA의 과업을 지연시켰고, 스페인 CNT의 지도부가 인터내셔널로부터 그들의 행동을 승인받을 수 있게 하였다. 1937년 12월의 임시총회에서 스페인이 요구한 “사회주의의 세 분파”(아나키스트, 공산당,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세 인터내셔널”이 회합하고 파시즘과 제국주의에 맞서기 위한 상설위원회를 두자는 제안이 부결되었지만, 총회는 CNT에게 “실험”을 “자기 책임 아래에서” 지속할 권리를 주자는 CGT-SR이 제안한 결의안을 채택했다. 파시스트 국가의 물건에 대한 국제적 불매운동을 조직하자는 제안을 담은 사회민주주의 인터내셔널(혹은 암스테르담 인터내셔널)에 보내는 성명서의 초안이 기획되었다. 하지만 암스테르담 인터내셔널의 지도부는 이 제안을 거부했다.

결국, 1938년의 6차 총회에서, 라틴 아메리카와 프랑스 CGT-SR의 대의원들이 불참한 가운데, 스페인, 스웨덴, 포르투갈의 대의원들은 네덜란드 대의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IWA의 헌장을 개정하는 데에 성공했다. 이 개정안은 다른 무엇보다, 각 가맹조직에 “광범위한 전술적 자율성”을 부여하고, 혁명시기 노동조합이 노동자의 민병대를 지도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CGT-SR의 행동은 공식적으로 규탄되었다. 서면으로 제출된 FORA와 FORU의 의견은 거의 고려되지 않았다.

CNT 지도부는 인터내셔널 내의 반대파에 맞서 승리했다. 하지만 이것은 어떠한 객관적 상황도 바꾸지 못했고, 스페인 내에서 그들의 입지를 강화하지도 못했다. 내전은 패배했다. 1939년 초, 스페인 공화국의 모든 영토는 반군 장성들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마침내 피로 물든 공포의 체계가 건설되었다. CNT는 숙청되었고 수십만이 국경을 넘어 탈출해야 했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의 개별적 무장 조직들은 1960년대 초까지 빨치산 투쟁을 지속했다.

스페인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운동은 망명기를 거치며, 내전 기간 중의 “정부 참여” 실험에 대한 자아비판적 평가를 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을 회복하였고, 올바른 교훈을 도출해낼 수 있었다.

스페인 자유의지주의 운동(CNT-FAI-FIJL)의 대륙간 총회가 1947년 4월 툴루즈에서 개최되었고, “정부와의 협업의 결과”는 “재앙”이었다고 여기며, 국가권력을 철폐하고 그것을 노동자의 자주경영으로 대체하는 전통적 아나키즘의 개념으로 돌아갈 것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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