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 몰락, 그리고 재생의 가능성
16장 : 2차 세계대전기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스페인의 패배 이후 수 개월 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이 전쟁은 IWA의 활동을 완전히 무력화시켰다. 1938 총회의 결정에 불편함을 느낀 FORA는 다음 총회가 이 결정을 재검토할 때까지 “일시적으로 IWA와의 관계를 중단할 것”을 결의했다.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의 아나키스트들은 혁명이 발생하는 순간 노동조합의 기능은 멈추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노동조합이 노동계급의 민병대를 지도한다는 개념을 거부했다.
이들은 “전술적 자율성”이라는 미명 아래에서 국가나 정당과 협동하는 것에 반대했다. 이들은 1938년 총회가 결정한 바, IWA 총회에의 각 조직 대표단 수를 조합원 수에 비례하여 정하는 것에 반대했다.(그 이전까지는 모든 조직이 동일한 대의원 수를 가졌다.) 이들은 청년 조합주의자들의 특별 국제조직을 건설하는 것에 반대했다.
2차 세계대전에 관하여, FORA와 FORU는 그들의 반전/반군국주의적 입장을 유지했다. 전쟁은 서로 다른 국가와 자본가들이 각자의 통치와 특권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벌이고 있는 것이었다. 전쟁이 자유와 정의를 향한 인민의 투쟁과 부합하거나, 그 희망이 될 방법은 없었다. 라틴 아메리카의 아나키스트들은 반파시즘이 단지 참전국 중 한 편의 자본의 이익에만 복무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렇기에 이들은 노동자들이 반파시즘의 기치와 맥락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전쟁을 지지하지 말 것을 촉구했다. 이들은 “파시즘도, 반파시즘도 필요없다”는 표어를 사용했다. 이들은 반전/반군국주의 활동의 심화를 부르짖으면서 “전쟁에 대한, 모든 전쟁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인민의 혁명적 단결이다.”
2차 세계대전기의 유럽에서는 아나키즘적 조합주의가 독자적 세력으로 개입하기에 너무나도 그 세력이 약했다. 1930년대 말, 6,000명의 조합원을 조직하고 있던 CGT-SR이 해산되었다. 폴란드, 네덜란드, 벨기에, 노르웨이, 덴마크의 조합주의적, 아나키즘적 조직들은 나치 점령 이후 불법화되었다. IWA 사무국은 스웨덴에 위치했고, 교전국의 자유의지주의자들과 연락할 수 없었다.
전쟁 초기, 자유의지주의 조직의 다수는 “국제주의적”이라 불리던 입장을 취했다. 이는 제국주의적 전쟁을 사회혁명으로 변혁한다는 혁명적 좌파들의 전통적 표어와 유사한 것이었다. IWA 사무국의 선언문은 “전쟁은 자본주의의 결과”이며, “원자재, 식민지, 시장을 놓고 벌이는 자본가 집단 사이의 잔혹한 경쟁이 표현된 것”이고, “제국주의 국가들은 그 영향력을 공고히 하고 세계와 그 부를 통제하고자, 자국의 이득을 위하여 싸울 뿐”임을 지적했다. IWA는 파시즘을 “자본주의의 가장 잔혹한 형태”이며, “인류 최대의 적”이라고 받아들였지만, 노동자들이 민주주의를 믿지 말 것을 권고했다. 민주주의는 “반동과 전쟁을 용인”하고, “평화를 담보하지 않”기 때문이다. IWA는 “인류가 자유로운 생활을 누리고, 끝없는 전쟁에서 스스로를 해방하기 위해서라도, 자본주의는 철폐되어야 한다”고 선언한다.
“민족국가간의 전쟁은 계급 간의 전쟁으로 바뀌어야 한다. 국제 노동계급은 그 모든 힘을 다하여 자본주의를 철폐해야 한다.” 프랑스, 스웨덴, 네덜란드, 벨기에의 아나키스트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조직들 역시 같은 정신을 담은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상당수의 아나키스트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입장을 버리고 “최악”이라 할 수 있는 파시즘에 대한 투쟁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망명중이었던 독일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스웨덴 조합주의자들을 매개로 서구 열강들의 정보부로 복무하였다. 폴란드에서 조합주의자들과 아나키스트들은 “조국방위”(그래도 “부르주아들과 함께”라고 말하지는 않았다.)를 부르짖었고, 자기들만의 유격분견대를 만들었다가 사회주의자들의 유격대였던 “폴란드 인민군”과 통합하여 1944년의 바르샤바 봉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탈리아와 불가리아에서 아나키스트들은 자신만의 빨치산 분견대를 구성하여 파시스트 체제의 무장세력과 전투를 벌였다. 이탈리아 아나키스트들은 지역과 작업장에서 지하조직건설에 참여하는 동시에 정당이나 정치조직들로부터 조직적 독립성을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이들은 레지스탕스에 참여했고, 파시스트와 독일 뿐에 대한 파업 뿐 아니라 이탈리아 자본가들을 향한 파업을 준비하고 집행하는 것 역시 조력하였다.
한 연구자는 “적극적 활동은 당시의 상황 전개(나치즘-파시즘과의 투쟁)에 적합한 전략을 집행하여 혁명적 상황으로 확장하려는 지속적 노력을 동반하였다”고 적는다. “노동자-활동가들과 좌파 정당의 평당원들에게 보낸 ‘노동자의 통일전선’에 대한 제안은 레지스탕스 지하조직을 아나키즘과 노동자 평의회의 정신 아래에서 반-권력의 요소로 여기는 사업의 일부였다. 아나키스트들이 공장위원회에 참여한 것도 이 관점으로 보아야 한다. 해방운동을 두 번째 리소르지멘토로 바라본 민주주의적 계획에 투항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아나키스트들이 최소한 한번 우크라이나에서의 무장투쟁을 조직해 내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마흐노우슈치나 운동의 참가자였던 오시프 체브리는 1942년 우크라이나에 밀입국하여 키예프 지역에서 빨치산 분견대를 조직했다. 그 선배들의 전통을 따라, 이 조직은 독일과 소련 모두에 대항하여 행동하던 중, 1943년 독일군에 의하여 패배하였다.
헝가리에서 아나키스트 청년학생들의 소규모 조직이 빨치산 투쟁에 참여했고, 1944년 말 부다페스트에서 사보타주를 조직했다. 네덜란드와 벨기에의 아나키스트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3번째 전선”을 자처하면서 연합국과 추축국 모두에 반대함을 선언했다. 이들은 정당으로부터 독립적인 시민불복종과 노동운동의 조직을 선동했다.
프랑코와의 전쟁을 패한 뒤의 스페인 아나키스트들은 단결하지 못한 채 반파시스트 세력과의 협력을 지지하는 세력과 모든 국가주의 세력과 동맹을 거부하는 전통적 아나키즘의 입장으로 회귀하자는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다. 전통주의자들은 2차 세계 대전이 순수한 자본가들간의 싸움이라고 바라보았고, “프랑스 레지스탕스와 독일군 사이의 싸움이 발발할 경우, 활동가들은 도시인민들 사이로 숨어들어야 할 것”이라 제안했다. 공화주의 세력과의 동맹을 지속하자고 제안한 이들은 스페인 아나키스트 망명자들이 프랑스 레지스탕스에 참여할 것을 촉구했다. 스페인의 자유의지주의자들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지하투쟁을 지속했고, 프랑코와 히틀러를 암살하고자 노력했다.
프랑스 아나키스트들은 국제주의적 입장을 취했다. 마르세유에서 브세폴로드 볼린과 앙드레 아루를 중심으로 하고 있던 그룹이 특히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 조직은 노동자들이 독일/이탈리아의 파시즘에 맞서 싸우는 것 뿐 아니라, 소련의 스탈린주의나 서구 민주주의적 자본주의에도 맞서고,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을 통합하려는 시도인 “민족해방”에도 맞서 싸워야 한다고 선전하는 유인물을 배포했다. “국제 혁명적 조합주의자 연맹”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마르세유 그룹은 사회혁명을 선동했고, 프랑스 전역의 아나키스트 조직들의 관심을 끌었다. 영국의 아나키스트들 역시 파시즘과 민주주의의 전쟁이라고 포장된, 제국주의적 전쟁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은 반전 선동을 계속했고, 파업투쟁을 지지했으며, 영국군 내에서 군인평의회를 조직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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