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17장 : 2차 세계대전 후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 바딤 다미에



17: 2차 세계대전 후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아나키스트들의 희망에도 불구하고, 2차 세계대전은 사회혁명으로 발전하지 않았다. 오히려, 세계대전은 민족국가를 강화하고, 서구 지역에서 “민주적 코포라티즘”이라는 틀 안에서의 사회적 동반자성(정부, 기업, 노동조합의 협력)이 건설되는 계기가 되었다. 동구권에는 공산당의 독재가 군림하기 시작했다.

동유럽 정부들은 자유의지주의 운동을 되살리려는 모든 시도를 탄압했다. 불가리아에서는 아나키즘적 공산주의 연방과 전국노동총연맹이 각각 1944년과 1946년 재건되었다. 1947년에는 불가리아 전역에 11,000명의 아나키스트와 1,000명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이 확인되었다. 하지만 얼마지나지 않아 자유의지주의 조직들은 금지되고 해산되었으며, 그 선도적 활동가들은 체포되었다.

1948년부터 1949년 사이 동독에서는 수백명의 아나키즘 · 자유의지주의적 사회주의 조직 구성원들이 체포되었다. 그리고 이 운동의 지도자였던 빌리 옐리네크는 1952년 3월, 감옥에서 살해되었다. 전쟁 기간 중 등장했던 폴란드의 조합주의 조직들은 1944년 이후 기능하지 못했다. 헝가리에서 아나키스트들은 일정 부분 그들의 영향력 아래에서 조직되었던 “체펠” 노동자들의 파업 이후 완전히 분쇄되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여전히 지하투쟁을 계속하고 있었다. CNT는 불법 노동조합들을 재건하려고 시도했고, 일부 활동가들은 프랑코 체제와의 무장투쟁을 진행했다. CNT의 재건 시도는 강력한 탄압을 마주해야 했고, 시도는 실패하고, 또 실패했다. 1946년 이후 CNT가 분열하면서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다. CNT의 일부는 혁명 기간 중 발생해왔던 실수들을 다시 반복하지 않고자 했고, 다른 일부는 반프랑코 세력의 통일전선을 고집했다. 결과적으로 CNT는 깊은 위기에 빠졌다. 1960년이 되어서야 다시금 단결을 재건할 수 있었다. 이러한 조건에서 1940년대 CNT의 조합원으로만 30,000명 이상이 있던 프랑스의 아나키스트 망명가 집단이 수행해야 했던 주된 과업은, 신문과 잡지를 발행하는 일이었다.

살라자르 독재 아래에서, 포르투갈 CGT의 활동력은 서서히 죽어갔다. 지하 노동조합 활동과 불법 출판물의 발행은 1960년대 말에는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았다.

남아메리카의 아나키스트들과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국가권력의 엄중한 탄압을 마주해야 했다.

1946년, 아르헨티나의 FORA는 메이데이 집회에 3,000명의 대오로 나설 수 있었다. 이들은 후안 페론의 체제에 맞서 공고하게 저항했다. 1946년부터 1948년까지의 시기 동안 이들은 각종 규제와 금지를 뚫고 제빵노동자와 항만노동자의 파업을 조직했고, 노동쟁의에 대한 국가의 개입에 만서 투쟁했다. 하지만 그 이후 독립 노동조합의 불법화와 자유의지주의적 출판물의 금지가 운동을 강타했다. 새로운 조합원들의 유입은 사실상 멈추었고, 새로운 세대의 사회활동가들과의 접촉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노병은 사라졌지만, 대체할 이들은 들어오지 않았다. 이웃한 우루과이의 FORU는 작은 그룹으로 줄어들었다. 1950년대 초, 칠레 CGT와 볼리비아의 라 파스 지역 노동연맹은 해소되었다. 이들에게는 전국의 유일 노동조합연맹에 가입할 것이 강요되었다.

서유럽 국가 다수에서 전후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합법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나키즘과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운동의 대규모 부활은 일어나지 않았다. 프랑스에서만 짧은 시간 동안 무언가가 일어났다. 전국노동총연맹(Confédération Nationale du Travail, CNT-F)는 파리, 보르도, 마르세유, 툴루즈 등지에서 수만명의 노동자들을 조직했다. 하지만 CNT-F는 얼마 지나지 않아 물질적 부족과 견실한 활동가의 경험을 겪기 시작했다. CNT-F에 가입하였던 노동자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더 온건한 노동조합으로 떠나갔다. 프랑스 아나키스트들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를 노동운동을 분열시키는 요인이라고 바라보았다. CNT-F는 소규모 노동조합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이탈리아의 아나키스트 운동도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의 노동조합이 아닌 아나키스트의 노동조합적 단결을 지향했다. 1950년, 한때 강력했던 USI의 재조직이 선포되었지만,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조직으로 남았다. 스웨덴 SAC의 대오는 상대적으로 잘 유지되었지만, 1945년 22,000명의 조합원에서 1957년에는 16,000명으로 줄어들었다.

사학자 마르셀 반 데르 린덴과 웨인 소프는 “대중운동으로써의 조합주의가 사라진 이유는, 정부의 탄압과 같은 일시적 요인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의 변화에 있다고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한 설명일 것”이라고 적고 있다. 우리는 다른 무엇보다 루돌프 로커가 경고한 바, 자본주의적 생산의 합리화에 관한 노동계급적 급진주의의 부정적 영향을 숙고할 필요가 있다. 연구자들이 이야기한 것처럼, 1920년대에 시작한 자동생산과정은 2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크게 발전했다. 컨베이어 벨트의 도입으로 상징되는 자동생산은 노동에 있어 극도의 특화와 분업을 낳았다. “특화된 노동자 다수”로 분류할 수 있는 새로운 사회적 형태는 생산 전반에 대한 감수성을 가지지 못했고, 그렇기에 생산을 온전히 통제하고자 하는 요구를 밀어붙이지 못했다. 사회적 모순의 축은 노동의 내용과 생산자의 자주성의 문제를 다루던 생산의 영역에서 잉여생산물과 소비에 대한 분배의 영역으로 이행했다. 이는 산업자본주의의 대안으로 성장하여 생산의 노동자 통제를 위한 투쟁을 지향하던 급진적 노동운동의 하강을 낳았다.

이러한 발전의 이면에는 경제와 사회 영역에 대한 국가개입 경향성이 성장하고 있었다. 이 경향성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사회적 국가”나 “복지국가” 모델의 형성을 낳았다. 구매력의 증대를 이야기하는 케인즈주의적 정책은 자본주의 선진국 노동자의 부를 증대시켰고, 전체 체계를 유지하는 것이 노동자들에게 이익이 되도록 만들었으며, “사회적 동반자” 모델을 통해 필요를 충족하는 것이 가능한 것으로 보이게 했다. 연구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조합주의 조직들은 새로운 현실에 대하여 “세 가지 가능성만을 가지고 있었고, 이 세 가지 모두가 재앙과 같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다.

“조합주의 운동은 (1)이전의 원칙을 계속 유지하거나(이 경우, 조합주의 운동은 필연적으로 주변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2)새로운 조건에 발맞추어 전술을 완전히 바꾸거나(이 경우, 조합주의 운동의 원칙을 포기하는 것이 될 것이었다.), (3)자진해산하여 비조합주의적 노동조합에 가입하거나의 가능성만을 남기고 있었다.”

IWA는 첫 번째 길을 택했다. 이들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운동이 시대에 부합하게 될 때를, 그 이상이 다시금 사회와 공명할 때를 기다리기로 결정했다. IWA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다시금 그 업무를 수행하기 시작했고, 스페인의 망명 혁명가들에게, 소규모 노동조합들에게, 유럽과 라틴아메리카의 활동가 조직들에게 기댈 곳을 제공했다. 스페인 CNT가 국가주의 정치세력과의 협력을 거부하고 사회혁명을 지향하기로 결정한 이후, CNT는 1951년 열린 IWA 7차 총회에서 1938년 그들이 제안하였던 바 “전술적 자율성”에 관한 수정조항을 폐기하자고 제안했다. 길고 활발한 논쟁과, 이에 뒤따른 IWA의 분열까지 경험한 후에야, 1956년 열린 9차 총회에서 이 폐기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그리고 FORA는 다시금 IWA에 돌아왔다. 10차 총회에서 참가자들은 FORA의 대의원들이 주축이 되어  “오직 자유의지주의적(아나키즘적) 공산주의와 연방주의를 목표로 하는 조직만이 IWA에 속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스웨덴의 SAC와 네덜란드 조합주의자들은 이 이데올로기적 논쟁과 관계되어 1958년 IWA를 탈퇴했다.

SAC는 여전히 스스로가 “자유의지주의적 조합주의자”의 노동조합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들의 실천은 두 번째 길을 따라갔다. 이들은 “근대화”라는 명목으로 아나키즘의 원칙들을 수정하였다.

“수정주의자”들의 이데올로기적 관점에 강한 영향을 준 것은 1930년대 말 스웨덴에 정착하였던, 독일의 조합주의자이자 망명자였던 뤼디거였다.

뤼디거는 스페인 혁명 당시부터 이미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의 전통적 원칙들에 대한 수정을 주장해왔다. 그의 주장의 핵심은, 아나키즘적 공산주의 사회 건설을 위한 투쟁을 포기하고, “이행기” 개념을 인정하자는 데에 있었다.

그리고 뤼디거는 아나키즘의 “정통성”을 버리고, 국가를 철폐하는 대신에 그 개혁을 시도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프루동, 바쿠닌, 크로포트킨, 맑스, 란다우어의 시대 이후로 국가가 만들어낸 변화의 결과로, 우리는 국가의 파괴는 단지 압제기구의 파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중요한 사회적 기능의 총체가 파괴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인민들에게 그러한 행동을 선동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오늘의 사회적 관계라는 조건 아래, 우리는 국가가 수행하고 있는 사회적 기능을, 진정한 사회적 기능으로 변혁해야 하는 문제를 마주하고 있다. 이 투쟁에서, 우리는 개량의 길에 의지해야할 때가 있다.” 뤼디거는 우리가 “사회혁명”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현존하는 국가와 경제구조 안에서 대의(민주)제의 체계를 갱신하기 위해 행동”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러한 목적을 가지고 다른 정치세력과 동맹을 맺고, 지방선거에 참여하기도 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SAC의 “수정주의자”들은 복지국가 기능의 수행에 참여하는 동시에 노동조합의 인기를 끌어올리는 실용적 방법론에 따라 실업보험공단에 참여하는 것을 지지했다. 이 공단의 재정은 기업과 국가, 그리고 노동조합 조합원들의 기여금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공단의 운영은 노동조합에 위임되었다. 조합주의자들은 노동문제에 대한 국가의 개입에 맞서 싸워왔고, 국가의 지원을 받는 사회적 대화 기구 참여를 거부해왔다. 하지만 이제 SAC의 “수정주의” 세력은 노동조합이 사회보험체계의 개혁을 위해 이러한 기구에 참여할 것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1952년 SAC의 조합원들은 내부 회의를 개최하여 조합주의 노동조합이 운영하는 실업급여공단을 건설하자는 강령 수정안을 투표에 발의했다. SAC는 1952년, 조합주의의 목적은 “산업민주주의”를 적용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급진적 직접행동(폭력적 저항과 생산에 대한 사보타주)는 구시대의 것이라 여겨졌다. SAC는 노동자 집단에게 기업의 행정을 맡길 것을 제안했고, “민간 · 지자체 · 국영기업에 노동자 통제를 적용”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표현했다. SAC의 기관지 <아르베타렌>의 편집장 에베르트 아르비손이 설명한 것처럼 그들은 “혁명이라는 ‘요술지팡이’를 완전히 포기”했다. 스웨덴 조합주의자들은 부분적 개혁이 “사회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게 하기 위한 실용적 수단”이라고 바라보았다. “SAC는 경제의 진보적 민주화가 그 주된 과업이라 여긴다. 기본적으로, 이 개념은 경제적 권력을 주주에서 소비자들에게로 점차 이전하는 것을 포함한다.” 이와 관련하여, SAC는 사기업의 경영진에 노동자 이사제를 도입할 것을 추구했다. 동시에 스웨덴 조합주의는 산업자본주의에 대한 대안 제시를 거부했고, 복지국가 체계의 좌익 소장파의 위치를 점하겠다고 선언했다.

“스웨덴식 복지국가 모델”의 한 요소로서 SAC가 건설한 실업보험공단은 노동자들이 조합주의 세력에 참여하게끔 만들었고, 스웨덴 조합주의의 몰락을 지연시켰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SAC의 방향전환은 노동조합과 국제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운동과의 관계를 무너트렸고, 스웨덴 조합주의자들은 개량주의와 협조주의에 대한 날선 비판에 시달리게 되었다.

IWA의 영향력은 1960년대에 저점을 찍었다. 이 시기 동안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현대 사회의 전개, 자본주의와 국가의 진화, 소위 “현실 사회주의” 국가(IWA가 정의한 바, ‘국가 자본주의’ 국가)의 상황에 대한 분석 등 이론적 작업을 할 정도의 세력만을, 개발도상국에서 협동에 기반한 운동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농업의 문제에 대해 제안을 던지거나 전쟁의 위협에 반대하는 행동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세력만을 가지고 있었다. 1968년부터 69년 사이의 국제적 학생 · 노동자 운동의 파도와 프랑코 체제의 청산 이후, 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에 대한 흥미가 자라났다. 스페인에서 CNT가 재창립되었고, 이탈리아에서는 USI가 재건되었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조직들은 여러 나라에서 일정부분 부활하였다.

이 시기 IWA는 국제적 문제와 새로운 사회 운동을 분석하느라 바빴다. 이들은 이러한 문제들을 사회혁명적 관점으로 판단하고자 시도했다. 1980년대에 접어들어 벌어진 경제의 세계화, 신자유주의로의 이행, “복지국가” 모델의 붕괴는 국가주의 좌파정당(사회민주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에, 그리고 그 영향 아래에 있던 노동조합들에게 재앙으로 다가왔다.

소련과 동유럽 국가에서 공산당 체제가 무너졌고, 사회민주당들은 신자유주의적 원칙 일부를 수용했다. 노동조합들은 실질임금의 삭감과 지난 수십년간 임노동자들의 투쟁으로 얻어온 사회적 성과들이 축소되는 것을 바라보아야만 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불안정노동화” 과정이 전개되었다. 불안정하고, 합법적 노사관계에 보호받지 못하며, 비정규적 고용과 나빠져가는 노동조건이 도입되었다. 노동시간의 “유연화” 모델 역시 도입되어 노동자보다는 기업의 이익에 맞춘 노동시간의 재배치가 가능하게 하였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는 이 세기말적 사화변화가 “전통적 좌파”가 대응할 수 없는 “시대적 도전”이라고 바라보았다. 이들이 보기에 소련의 붕괴, 공산당 체제의 붕괴, “신자유주의적 전체주의”로 현현한 자유시장 모델 등은 모두 “혁명적 사회주의자들과 좌파 사민주의자들의 정치 기반이었던 국가 통제라는 개념이 패배하였다는 것을 의미”하였고, 제1인터내셔널 당시 그러했던 것처럼, 자유의지주의적 사회주의자들과 권위주의적 사회주의자들간의 논쟁을 재개하여 “근본적인 사고의 재정립을 할 필요가 있”는 것이었다. “사회주의적 재평가의 요지는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이 되는 것이어야 한다. 자본주의는 개혁할 수 없다. 자본주의는 철폐되어야 한다. 우리가 20세기의 역사로부터 배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다음과 같다. ”어떠한 국가도 노동자의 자유를 보장할 수 없다. 이에 반대한다면, 그저 닥쳐라.“

1990년대에, 국제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운동은 부활했다. 러시아, 동유럽, 아메리카 대륙 IWA의 새로운 가맹조직들과 지지조직들이 등장했다. 2001년의 아르헨티나 혁명이 시작한 후, FORA가 재탄생하였다. 스페인, 이탈리아, 프랑스의 가맹조직들은 여전히 그 규모는 작았지만, 적극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노동운동 전체를 포괄하려 시도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은 자주경영적이고 스스로 조직한, 개량주의적 노동조합이나 정당들과 독립적인, 노동자 조직을 건설하고 이를 급진화하는 데에 활동의 방점을 찍었다. 이 조직들에서 모든 결정은 총회를 통해 이루어졌고, 직접행동의 방법론이 도입되었다.

20세기 말부터 21세기 초까지, 여러 국가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사회적 투쟁과 노사분규의 현장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였다. 스페인의 CNT는 10,000명의 조합원들과 함께 이 부문을 선도했다. 스페인에서 벌어진 가장 거친 파업투쟁들은 CNT의 작품이었다.

1985년부터 1986년까지 CNT 조합원들의 주도 하에 이루어진 푸에르토 레알 조선소 폐쇄에 맞선 투쟁은 광범위한 사회적 시위로 자라났고, 노동자들에 의한 직장 점거와 도시 거주민들의 대규모 집회가 뒤를 이었다. 노동조합 중앙위원회나 대의기구 따위가 이 투쟁을 지도하지 않았다. 모든 기본적인 결정들은 노동자들이, 총회를 통해 직접적으로 내렸다. 이 총회들은 노동조합의 관료들의 인가 없이 이루어졌다. CNT의 제안은 언제나 승인되었고, 다른 노동조합들의 결의안은 승인되지 못했다. 이렇게 매주 목요일 노동자들이 조선소를 점거하고 총회를 개최하는 것이 결정되었다.

파업 기간 중, 지역 거주민들의 총회 역시 매주 열렸다. 투쟁의 진행상황에 관심있는 모두는, 조선소 근무를 하는지 여부와 무관하게 이 총회에 참석하고, 투표하며, 그들이 관심을 가진 문제에 대한 결정을 내리는 절차에 참여할 수 있었다. 총회에서는 투쟁의 구체적 방법론과 형태에 대한 결정뿐 아니라 사보타주와 직접행동을 수행하는 것에 대한 결정들도 내려졌다.

푸에르토 레알에서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특공대가 투입되었다. 전국에서 1,000명 이상의 경찰이 차출되어 푸에르토 레알의 반란을 막기 위해 보내졌다. 인민들은 경찰의 진입을 막기 위해 도시 외곽에 바리케이드를 쌓아올리기 시작했다. 인민들은 진압차량에 돌을 던졌고, 옥상에서 가구와 쓰레기를 던졌다. 이들은 경찰들과의 시가전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철도에, 고속도로에, 다리 위에 바리케이드가 설치되었고, 전화선을 잘랐다. 노동자와 도시 거주민들의 투쟁은 승리로 끝났다.

스페인에서 다시금 활발해진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에 입각한 파업운동은 21세기 초까지 계속되었다. CNT는 안달루시아주 토마레스에서 환경미화원들의 134일간의 파업투쟁을, 세비야에서 철도 청소 노동자와 크레인 기술자들의 “무기한” 파업을, 아드라 지자체 노동자들의 투쟁을, 바르셀로나 인근의 “메르카도나” 백화점에서 180일간의 파업을, 정부의 사회경제적 정책에 맞선 수천 규모의 행진을 조직했다. USI로 모인 이탈리아 조합주의자들은 “대안적” 노동조합들이 조직한 총파업에 참여했다.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에서는 또 다시 분열이 일어났다. 이 국가들에서 일부 집단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원칙의 일부(정당의 거부, 생산에 있어 사회적 대화 기구에의 불참 등)를 포기하면서 대중기반을 확보하고자 탈퇴를 결정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IWA는 산업자본주의에 대한 총체적 대안이라는 스스로의 전통적 역할을 지켜나갔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노동자의 자주적 조직 건설의 촉매제로써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인민들이 자기 권리와 매일의 요구를 위해 일어나는 과정에서 사회적 자주경영의 기술과 구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희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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