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철폐 : 아나키즘적 · 마르크스주의적 관점 (1장 : 국가를 고대박물관으로 보내자.) - 웨인 프라이스

1부 : 국가를 대신하여

1장. 국가를 고대박물관으로 보내자.

아나키스트들은 통치의 기본 구조인 국가를 철폐하고, 이를 국가없는 사회로 대체하는 것을 지지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현존하는 자본주의적 국가를 철폐하고, 이를 곧 “사라져” 국가 없는 사회가 될 임시적 노동자 국가로 대체하는 것을 지지한다. 두 조류 모두는 마르크스의 동료 사상가였던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서 언명한 바, “생산자들의 자유롭고 평등한 결합에 기초하여 생산을 새로이 조직하는 사회에서는 전체 국가기구를 그것이 마땅히 가야 할 곳으로, 즉 고대박물관으로 보내 물레나 청동도끼와 나란히 진열할 것이다.”라는 말에 모두 동의할 것이다.

아나키스트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국가에만 반대하지 않는다. 이들은 엥겔스의 언명이 함축하고 있는 바, 국가의 종말은 자본주의 경제의 · 노동계급에 대한 착취 · 계급사회의 종말과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에 동의한다. 이들은 자본주의 경제를 협력적 노동으로 이루어지는 집산화된 경제로 대체하고자 한다. 이것이 “생산자들의 자유롭고 평등한 결합”이고, 이것이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라 불리는 것이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사회주의”라는 단어는 국유화의 체제(보다 정확하게는, “국가 사회주의”의 계획)을 뜻하고 있지만, 아나키즘 운동의 주류는 언제나 스스로가 사회주의 운동의 좌익이라 말해왔다.

이는 현대 노동계급을 자본주의 철폐의 중심으로 바라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사회가 살아남기 위해 필수적인 재화와 용역의 생산과정을 통해,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기능의 중심이 되기에 그러하다. 이는 노동자들이 전략적으로 사회를 멈출 때, 새로운 사회를 시작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을 착취하며, 이것이 노동자들이 착취를 끝장내는 것으로, 계급을 온전히 끝장내는 것으로 이익을 볼 수 있도록 한다. 모든 아나키스트들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 관점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허버트 마르쿠제나 마오쩌둥과 같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을 제외하면, 아나키즘적 공산주의자들이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마르크스나 엥겔스와 이 관점을 공유하고 있다.

아나키스트들은 국가와 자본주의에 반대할 뿐 아니라, 모든 형태의 지배와 압제에 반대해왔다.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 아프리카계 아메리카인에 대한 유럽계 아메리카인의 지배, 라틴 민족에 대한 앵글로색슨의 지배, 피억압민족에 대한 제국주의자들의 지배, LGBT에 대한 이성애자들의 지배, 정치적/종교적 소수자에 대한 주류의 지배 등 말이다. 이에 대하여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보다 복잡한 관점을 가지고 있지만, 이들도 대부분의 압제의 형태에 반대해왔다. 오늘날의 아나키스트들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노동계급이 자본주의 전복의 중심임에 동의하면서도, 이 다른 형태의 억압 역시 실질적인 것이며, 자본주의적 착취를 은폐하고 그 착취와 상호작용한다는 것에도 동의하고 있다. 이러한 비계급적 억압의 형태와의 투쟁은 “자유롭고 평등한 결합”을 위한 투쟁에서 필요불가결한 측면이라 할 수 있다.

(내가 말하는 현대 노동계급, 혹은 “프롤레타리아트”는 생산수단의 소유자인 자본가들이 제공하는 금전을 위하여 그 노동력을 판매하는 이들을 의미한다. 임금을 위하여 일하는 자들, 재화와 용역을 생산하는 자들, 다른 사람을 고용하고 있지 않은 자들이 곧 노동자, 혹은 “프롤레타리아트”라 할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고대 로마에서 하류 계급을 일컫는 단어에서 왔다. 이 단어는 “재생산(만)을 하는 자”를 의미했다. 마르크스는 이 단어를 사용하여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노동계급을 규정하였다. 이 개념어에 주부나 아동처럼 다른 노동자들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자들이나, 은퇴자들과 실업자들을 포함한다면, 이것이 전체 노동계급이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부르주아지”와 “자본계급”은 상호교환이 가능한 용어다. “부르주아”와 “자본가”가 부유한 기업 경영인들의 “공동체”를 일컫기 때문이다. 자본가들에 복무하는 중간관리계층도 존재한다. 이들의 하층은 화이트칼라 노동자와 같은 노동계급의 상층과 결합한다. 이렇게 형성된 사회 중간 계층은 때때로 “중간계급”이라 불린다. 그렇다고 이들이 독립적 계급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하지만, 아나키스트들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자본주의나 다른 형태의 억압에 반대하면서도, 국가에 대한 입장이 둘 사이의 문제가 된다. 국가에 관한 문제에서 어떠한 입장을 취하는지가, 아나키스트인지 마르크스주의자인지를 결정한다. 어떠한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는 다음과 같이 쓴다. “참된 마르크스주의자와 거짓 마르크스주의자를 구분하게 해주는 것은 국가이론에 있어서이다.”(시드니 훅, 2002, 270p) 그리고 아나키스트들 역시 비슷하게 이야기한다.

현존국가를 수인하고, 그것을 더 민주적으로 만들어 자본주의의 극단성을 통제하기 위해(사슬의 날카로운 모서리를 연마하기 위해) 사용하고자 하는 자들이 있다. 이들은 자유주의자liberal이다. 기업을 국유화하고, 국가가 경제에 개입함으로서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점진적 변화하기 위하여 국가를 사용할 수 있다고 바라보는 자들도 있다. 이들은 개혁적 사회주의자, 혹은 사회민주주의자(혹은, 그들이 자칭하는 바, “민주사회주의자”)들이다. 자유주의자와 사회민주주의자의 영역은 겹친다.

그리고 스스로 혁명적 사회주의자, 혹은 공산주의자라고 자칭하는 자들이 있다. 이들은 현존 국가의 전복을 목표로 한다. 이들은 개혁적 투쟁을 지지하거나, 현존 국가에 요구하곤 한다. 이들을 개혁주의자들과 구분하는 것은,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전략적 목표는 국가의 파괴라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현존 국가를 새로운 국가(“노동자 국가”, 혹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대체하고자 한다.(이 개념이 생각보다 더욱 모호하다는 것에 대하여, 최소한 후기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아닌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관점에서는 그러하다는 것에 대하여 후술할 것이다.) 피억압민족이나 피억압인종의 민족주의자들 역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한다는 유사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국가 사회주의의 변종들로부터 영향을 받기도 한다. 반면, 아나키스트들은 국가없는 사회를 즉각적으로 이행할 것을 계획한다.

다르게 말해보자. 사회주의자들은 현존하는 것이건, 새롭게 건설할 것이건, 국가를 이용하여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자들과 새로운 사회는 모든 국가에 반하여 건설되어야 한다고 믿는 자들로 나뉜다. 이는 결국 사회주의자는 국가 사회주의자이거나 자유의지주의적 사회주의자(대부분 아나키스트) 둘 중 하나임을 알 수 있다. (“자유의지주의적 사회주의”는 오래된 유럽의 용어이다. 그리고 이것은 미국에서 흔하게 사용하는 바, 중앙화되고 관료적인 국가를 중앙화되고 관료적인 기업으로 대체하는 것을 지지하는 우익 · 친자본주의적 “자유지상주의”와는 무관하다.)

아나키즘이 부활하면서 국가의 철폐라는 개념에 대한 관심 역시 높아졌다. 좌파 진영을 마르크스주의가 지배하고 있을 때, 국가의 철폐에 관한 문제는 사라졌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건설한 국가는 해소되기는커녕 구조적으로 파시즘과 유사한, 무시무시한 전체주의 국가가 되었다. 서유럽과 미국에서, 공산당들은 대부분 실질적으로 개혁주의의 방법론을 따랐고, 현존국가 내에서의 활동을 지향했다. 언젠가 다가올 국가없는 사회에 대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사상은, 추상적인 것이, 환상이, 마치 주류 기독교회에서 죽은 자의 부활을 기다리는 것처럼 되었다. 국가없는 사회에 대한 사상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실질적 계획이나 행동과 관계성을 상실했다.

1970년대, 마르크스와 바쿠닌의 분열 이후부터 아나키스트들은 마르크스주의 운동보다 더욱 좌측에 있었다. 하지만 1917년의 러시아 혁명 이후, 레닌주의자들이 아나키스트들을 밀어내고 극좌의 자리를 차지했다. 레닌주의자들(공산주의자들)은 마르크스주의가 혁명을 성사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 했다. 혁명가들은 레닌주의 대오로 모여들었다. 1936년의 스페인 혁명은 서유럽에서 아나키스트들이 만들어낸 마지막으로 질러낸 환호성이었고, 또한 아나키즘의 끔찍한 실패이기도 했다.(그리고 이 실패의 원인은, 부분적으로는 그들 스스로의 오류에 기인했다.) 아나키스트들은 세계의 모든 노동운동에서 하찮은 규모가 되었다.(러시아 혁명과 스페인 혁명에 관해서는, 이후의 장에서 논의하도록 하겠다.)

이 상황은 변했다. 1989년, 동독의 인민들은 베를린 장벽을 무너트렸다. 소련은 붕괴했다. 소련의 국가 자본주의를 대체한 것은 다원적, 금융시장적, 전통적 자본주의였다. 중국의 경우, 공산당은 여전히 국가권력을 쥐고 있지만, 그들의 국가자본주의 체계를 시장경제로 전환했다. 유럽 각국의 공산당들은 평범한 개량주의 정당으로 변모하여 새로운 사회에 대한 요구를 버렸다. 한때 유럽 마르크스주의의 다른 분파를 자임했던 사회민주당들은 자본주의 이후 사회를 추구한다는 목적을 버린지 오래 되었고, 더 이상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임하지 않는다.

이러한 과정의 당연한 결과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신뢰도는 크게 낮아졌다. 그렇다고 자본주의가 매력을 더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본주의는 점점 더 잦은 공황을 경험하고, 점점 하강하여 갔다.(정확하게는, 러시아와 중국의 국가자본주의의 붕괴 역시 국제 자본주의 체계의 붕괴의 일부기도 했다.) 대규모 불만족은 지속되었다. 마르크스주의(또는 다른 형태의 국가 사회주의)를 바라보았던 사람들 중 다수는, 해방을 위한 다른 이정표를 찾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대초원에서는 서구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투쟁이 반동적 이슬람 권력(모든 이슬람이 필연적으로 반동적이라는 것은 아니다.)의 지도 아래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과거에 해당 지역의 반제국주의 운동은 급진적 사회주의-민족주의자들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끌었다.

마르크스주의의 쇠락은 사회주의의 또 다른 전통적 분파, 특히 아나키즘에 대한 관심의 증대를 가져왔다. 아나키즘은 더 이상 하찮은 규모가 아니다. 아나키즘은 사회주의와 압제에 대항하는 모든 운동의 주류 중 하나가 되었다. 아나키즘의 부흥과 함께, 마르크스주의의 자유의지주의적 민주주의, 인본주의, 반국가주의적 측면을 강조하는 자유의지주의적(혹은 자율주의적) 마르크스주의 역시 성장하였다.

국가의 철폐 문제는 아나키즘이나 자유의지주의적 마르크스주의의 성장과 함께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다. 국가를 끝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떻게 이것을 실현할 수 있는가? 국가가 전복된다면, 무엇으로 국가를 대체하는가? 국가의 철폐 이후에도 수행되어야 하는 국가의 기능이 있는가? 부르주아 국가와 국가없는 사회 사이에 이행기적 기구가 필요한가? 실제 혁명의 경험과 이 목표를 연관시킬 방법은 있는가?

국가의 철폐를 둘러싼 이러한 질문들이 이 책의 주요 주제다. 다른 주제가 있다면, 이 질문들에 아나키스트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각각 어떻게 답할 것인가에 관한 것이 될 것이다. 우리는 이 주제들을 1871년의 파리 코뮌, 1917년의 러시아 혁명, 1936년의 스페인 혁명, 1930년대 초 독일에서의 반나치투쟁 등 혁명적 투쟁들을 참고하여 논의할 것이다.

두 번째 주제인 아나키즘과 마르크스주의의 비교는 어려운 일이다. 마르크스주의는 한 천재의 작업을 바탕으로 만들어졌고, 그렇기에 그 천재의 이름을 따 만들어졌다. 그의 지지자들은 그의 책들을 반드시 읽는다. 레닌, 트로츠키, 마오쩌둥 등의 다른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저작 역시 마찬가지다. 반면, 아나키즘은 그 창립자들이나 그들의 저작들과 훨씬 느슨한 관계를 가진 운동이다. 어떠한 아나키스트도 스스로를 프루동주의자나 바쿠닌주의자라고 부르지 않는다. 이들의 책은 거의 읽히지 않는다. 아나키즘은 몇몇 기본적 주제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운동이지, 마르크스주의와 같은 명제들의 집합인 것이 아니다. 아나키즘은 필연적으로 방법론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자들 역시 아나키스트들 못지않게 광범위하고, 서로와 동의하지 않는다. 우리가 앞으로 볼 것처럼, 자유의지주의적 마르크스주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나 이행기 국가라는 관념에 대하여 아나키즘과 유사한 견해를 보인다.

나는 폴 굿먼이나 드와이트 맥도날드에 영향을 받은 평화주의적 아나키스트였다. 마르크스주의의 분파인 트로츠키주의자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제 나는 내가 계급투쟁적, 조직지향적(“강령주의적”) 경향을 가진 사회주의적 아나키스트라고 바라본다. 나는 아나키즘적 공산주의의 혁명적 전통에 입각하여 스스로를 정체한다. 나는 이러한 자기 정체화의 과정 속에서 항상 자유의지주의적 사회주의자이자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의 신봉자였다. 마르크스주의를 학습한 아나키스트로서, 나는 마르크스주의의 이론과 실천에 아나키스트들이 배워야 할 가치가 상당히 많이 포함되어 있다고 본다. 다니엘 게랭을 인용하여 말하자면, “나는 투사적이고 혁명적인 아나키즘의 신봉자이”지만, “마르크스주의와 아나키즘의 사상에서 좋은 것들을 혼합하는” 것을 지지한다.(애브리치, 1995, p.468) 하지만 나는 마르크스주의가 일부 기초적 방법론에서 오류라고 바라보며, 이에 대하여는 후술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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