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파업사회혁명 - 에리코 말라테스타



지난 수년간 벌어진 파업들이 사회 조직에 만들어낸 어마어마한 소동은 파업에 대한 일반적 생각을 바꾸었다. 파업은 단순히 사장의 강제력을 방어하고 일시적이고 허구적인 이득을 확보하는 수단이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일수도 있다고 말이다. 최소한 영국이나 미국과 같은 산업화된 국가에서, 파업은 사회혁명의 시발점이 될 수 있다. 그렇지 않더라도 최소한 사회주의자들과 아나키스트들이 꿈꿔온 혁명의 가능한 시작점 중 가장 훌륭한 것은 될 것이다.

혁명이 어떻게 올지에 대한 질문은 오랫동안 이어져왔다. 군대와 경찰과 같은 부르주아지 이익방어기구를 어떻게 파괴할 것인가? 승리를 위해 필요한 힘과 단결을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

정부를 전복하고 부르주아지의 자산을 몰수할 거대한 자발적 반란을 기다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대중의 정신 상태와 지배계급의 강력한 압제의 도구들을 본다면, 오히려 불가능한 것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모략과 음모는 소수의 운동에 불과하고, 승리를 위해 필요한 다수 대중의 운동이 될 수 없다. 일부 영역에서 자발적 운동이 벌어질 수는 있다. 하지만 이 운동은 곧 고립되고, 영향을 건설하기도 전에 압사당하곤 한다.

사회혁명을 시작할 수 있는 다른 기회는 전쟁이 될 것이다. 정복당한 국가는 좋은 시작점이 될 것이고, 부르주아지 일부에서 정치적 소요가 발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전쟁은 언제나 애국심에 가득찬 증오를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패전과 승전국의 만행을 통해 민족적 자긍심에 상처를 입은 인민들은 복수를 위해 스스로의 고통을 뒷전에 둔 채 부르주아지와 동맹하곤 한다. 그리고 부르주아지 내부의 정치적 소요는 혁명의 기회보다는 오히려 인민들이 사회적 문제에서 등을 돌리고 정권 획득에 몰두하게 할 여지가 크다. 이 경우 혁명의 주체가 되어야 할 인민들은 프롤레타리아트에 선의를 보여주는 부르주아지들과 동맹하게 된다.

더구나 부르주아지들은 전쟁과 정치적 소요가 큰 이익을 가져다주지 않는 데다, 내부에서 사회 혁명에 대한 공포가 점점 커지면서 전쟁이나 정치적 소요를 멀리하기 시작하고 있다. 우리와 사회주의자들의 선전이 오히려 전쟁이나 정치적 소요라는 기회를 불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제공될 수 있는 모든 기회를 이용하고 우리의 원칙과 목적에 부합하는 모든 수단을 사용할 준비를 하는 동시에, 부르주아 세계를 휩쓸 위대한 운동을 대중 사이에서 시작할 수 있는 수단을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한다. 그리고 오늘이 가리키고 있는 수단은 바로 총파업이다.

광업이나 철도와 같은 거대 산업에서 광범위하게 파업이 일어나면 종속 산업이 중단되면서 엄청난 인민 대중이 투쟁에 참여하게 되고, 비교적 쉽게 혁명으로 전환될 수 있다.

정부는 여론을 살피지 않고 즉각적으로 강력한 군사적 탄압을 진행할 수도 없다. 파업이 장기화되면 인민들은 서서히 운동의 요구를 접하게 될 것이고, 급진적 변화의 필요성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파업이 가지는 가장 큰 장점은, 문제의 시작이 경제에 있기에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사회의 기반을 변화시키는 것이라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파업이 그러한 결과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사전교육과 선전을 통해 파업대오가 스스로의 목표를 의식하고, 운동의 전체적 의미를 이해하며, 스스로를 사사로운 이익이 아니라 전체 프롤레타리아트의 이익을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로 여기게 만들어야 한다.

혁명으로 나아가기 전의 대규모 파업은 다수 인민들에게 고통을 초래한다. 그리고 이 고통받는 인민들은 파업 투쟁이 가져올 전체적 이익은 바라보지 않고, 파업대오의 이익을 위해 희생할 필요가 없다고 느끼게 마련이다. 나아가 이 세상에는 굶주린 사람이 너무도 많다. 이들은 파업 대오의 대체인력이 되며, 이 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트 투사들과 룸펜 프롤레타리아트들 사이에 갈등이 조성된다. 혁명이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이 룸펜들인데 말이다. 파업대오는 이를 이해하고 이 도시빈민들을 포함한 전체 인민들을 끌어들이려 노력해야 한다.

윌리엄 토마스 스티드의 저서 『오늘의 시카고 : 미국에서의 노동전쟁』에서는 현재 미국의 파업을 특징짓는 몇몇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다.

1894년 4월 역청탄 산업에서 파업이 발생하여 16개 주로 확산되었다. 파업 대오는 철로를 막고 한동안 전체 석탄 무역을 통제할 정도로 활기차게 활동했다. 대중이 이들을 지지하거나 적대시하는 것은 그들이 이 권력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졌다. 그들은 자신들의 특수한 이익만을 고려했다.

파업대오는 디모인에 석탄을 공급하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디모인시의 상수도 공급이 중단되었다.

1,100명을 수용하고 있던 칸카키 카운티의 정신병원도 석탄을 공급받지 못했다. 병원은 극심한 추위에 괴로워하던 환자들을 구하기 위해 파업대오에게 접촉했다. 파업대오는 처음에는 석탄을 약간 공급하겠다고 말했지만 8일만에 생각을 바꾸었다. 이들은 파업지침이 인간적 고려보다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결정을 철회했다. 그 와중에 파업을 주도하던 미국노동연맹(A.F.of.L)의 위원장 존 맥브라이드는 자신의 양조장에서 5,000 달러어치의 맥주를 지키기 위한 석탄의 공급을 허가받았다.

최근에 있었던 풀먼팰리스카회사에서의 파업과 불매운동 과정에서 파업대오는 철도 교통을 마비시켰고, 이에 따라 1주일간 시카고에 식량공급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화물차량 안에서는 과일과 야채가 썩어갔고, 농업인들은 파업기간 중 하루에 6,000파운드 가량의 손실을 보았다. 고기와 생선 역시 부패했고 얼음은 녹아 없어졌다.

그리고 시카고는 고기와 야채, 석탄의 고갈을 경험했다. 얼음의 가격은 톤당 12달러에서 40달러로 올랐다. 운이 좋게도 옥수수의 재고는 잔뜩 가지고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시카고가 보내야 했던 수일간은 파리 포위와도 같았다. 시카고 시민들은 이제 상수도 공급이 중단되지 않을까 걱정해야 했다.

파업대오는 수일간 여성과 아이들이 타고 있는 차량의 통행을 막았다. 수백명의 승객이 물도 음식도 없이 한여름 태양 아래 방치된 경우도 있었다. 파업대오는 승객의 생명을 인질로 잡고 30시간 이상 생필품을 제공하지 않았다.

또한 파업대오는 대체인력에게 끔찍한 폭력을 행사했다. 그들 역시 가난의 희생자인데 말이다. 한 대체인부가 언론에 말한 내용을 보자.

"저는 철도원으로 일한 지 8년이 되었습니다. 지난 겨울에 사업이 부진해지면서 해고를 당했고 새해 벽두부터 5주 동안 일을 하지 못했습니다. 아내와 세 자녀가 저를 의지하고 있고 6개월 동안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고 있습니다. 저를 고용한 중개인이 시카고에 가겠냐고 물었을 때 저는 아내와 먼저 얘기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집에 갔을 때 아내는 음울한 표정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어요. 제 자식들은 먹을 것이 절실했고 시카고에 오기로 결심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저도 노동조합을 사랑하는 사람이지만 아내와 아이들이 굶주릴 위험에 처해 있다면 제가 죽더라도 가족을 위해 일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어요."

대체 왜 파업대오는 가난한 형제들에게 그토록 무자비했던 것일까? 철도 파업의 경우에도, 풀만의 경우에도 조금만 다르게 그들을 대했다면 동지가 될 수도 있었을텐데 말이다. 

전선이 이렇게 구성된 이상 이러한 파업들이 혁명으로 변모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실제로 시카고에서는 반동이 발생하고 있었고, 군대가 그들을 진압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시카고 대중들이 파업을 진압했을 것이다.

상황을 통제하고자 한다면 그 책임도 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승리할 수 없다.

시카고에 식량을 공급하는 것은 파업 노동자들이있기에, 그들이 책임을 져야 했다. 파업대오는 최소한 자본가와 상인이 아니라 대중들을 위해 식량을 제공하려는 시도를 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그 시도가 실패했을지라도 사회혁명으로 가는 올바른 길을 향한 발걸음은 되었으리라.

1889년 런던 항만파업 당시 얼음을 가득 채운 배가 도착했다. 파업대오는 이 얼음이 병원에 필요한 것이라는 소문을 들었고, 임금을 요구하지 않고 얼음을 하역했다. 이들은 아파서 병원에 간 사람들이 파업으로 고통받아서는 안된다고 밝혔다.

이것은 분명 작은 예시에 불과하다. 하지만 분명하게 노동운동 안에서 인간적 연대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고, 노동조합운동이 진정으로 사회주의적이고 혁명적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노동조합과 파업투쟁 안에서 아나키스트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역할은 운동의 노선을 이 방향으로 지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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