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쉽게 진실에 도달하거나, 최소한 각자의 지적/사회적 수준에 맞는 상대적 진실에 도달할 수 없다. 수천번이고 지적되었듯이, 인간의 시각은 양극단을 순식간에 오가며, 이에 따라 다양한 종류의 오류들을 범하곤 하기 때문이다.
나는 현대 사회생활 총체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러한 현상을 진단하고자 한다.
수년 전만 해도 모든 사람은 "유물론자" 였다. 이들은 너무도 불완전한 실증적 지식에서 도출된 일반 원리인 "과학"을 활용하여 인간의 심리 전체와 인류 역사의 모든 사건을 기본적인 물질적 필요의 관점에서만 설명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었다. "유물론자"에게 "경제적 요인"은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설명하는 것이었다. 모든 사상과 감정의 표현, 변덕스러운 인생, 사랑과 증오, 선함과 악함 양쪽 모두의 열정, 여성의 지위, 야망, 질투, 인종적 자부심, 사람과 사람들 사이의 각종 관계, 전쟁과 평화, 대중의 복종과 저항, 가족과 사회의 여러 형태, 정치 체제, 종교, 도덕, 문학, 예술, 과학... 이 모든 것은 각 시대에 만연했던 부의 생산과 분배 방식, 그리고 생산수단의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인간 본성과 역사를 보다 광범위하고 덜 단순한 개념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보수적이든 진보적이든 모두 "과학"에 뒤처진 후진적인 존재로 여겨졌다.
당연히 이러한 관점은 각 정파의 실천적 행동에 영향을 미쳤고, 사소하고 하찮은 경제적 이익을 위해 모든 고귀한 이상을 희생하는 경향을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양상이 바뀌었다. 요즘은 모두가 "이상주의자"다. 모두가 "배채우기"를 비웃고, 인간이 마치 순수한 영혼인 양 취급하며, 먹고, 입고, 생리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문제이자 도덕적으로 타락한 사람이나 주의를 기울일 사안이라고 여긴다.
나는 "이상주의"를 위선과 기만의 무기로 변질시키는 사악한 속임수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으려 한다. 노동자들에게 사명감과 희생정신을 강조하면서 임금을 슬그머니 삭감하고 자신의 이익을 늘리는 자본가, 애국과 민족정신을 내세워 자신의 조국을 집어삼키고, 기회가 주어지면 타인의 조국까지 삼키는 "애국자", 국기의 영광과 명예를 위해 피정복자들을 착취하고 억압하며 거칠게 군림하는 군인 같은 것들 말이다.
나는 정직한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특히 노동자 조직의 모든 혁명적 잠재력이 소진될 때까지 경제적 개선을 위해 투쟁하다가 결국 프롤레타리아트가 스스로의 자유를 포기하고, 성실히 근로하며, 고용보장과 임금인상이라는 헛된 희망에 빠져 모든 경제적 모순과 투쟁을 혐오하게 되는 것을 보면서 우리의 활동을 교육과 진정한 혁명운동으로 제약하게 되어버린 동지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 한다.
이들은 인간에게 있어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자유이며, 자유는 고된 투쟁과 가혹한 희생을 통해서만 쟁취하고 지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기에 이들은 혁명가들이 경제적 개선과 관련된 사소한 문제에 신경 쓰는 것을 멈추고, 대중 사이에 만연한 이기주의를 배격하며, 희생 정신을 전파하고, 일확천금을 약속하는 대신 고귀한 대의를 위해 고통받는다는 신성한 자부심을 대중에게 심어줘야 한다고 주장한다.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너무 도취되지는 말자.
자유는, 충만하고 완전한 자유는, 참으로 필수적인 것이다. 자유야말로 인간 존엄성의 상징이며 사회의 문제들에 모두를 위한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유롭게 자신의 활동을 수행할 수 있는 역량이 수반되지 않는 자유는 공허한 단어일 뿐이다.
“부자는 가난한 자를 다스린다”는 잠언(잠언 22:7)은 여전히 사실이다. 또한 “노예인 자는 가난하거나 가난해진다. 그로서 그들은 인간의 좋은 성질을 잃는다”는 격언도 사실이다.
물질적 욕구, 즉 생리적 욕구의 충족은 사실 덜 중요하고 심지어 경멸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더 높은 도덕적, 지적 존재를 위한 기본 전제 조건이기도 하다. 인간의 행동은 매우 다양한 종류의 요인들에 의해 촉발되고 이러한 요인들이 역사의 흐름을 결정하는 것이지만, 인간은 먹어야 한다. "먼저 먹고, 그 다음에 사유한다."
캔버스와 기름, 색깔이 있는 흙은 라파엘로의 그림에 비해 천박하다. 하지만 이러한 천박한 물질이 없다면 라파엘로는 그 꿈과 같은 아름다움을 그려내지 못했을 것이다.
“이상주의자”들은 아마도 매일 밥을 먹을 수 있고, 그러면서 내일더 밥을 먹을 수 있으리라고 합리적으로 기대하는 자들일 것이다. 당연하다. 사고하기 위해서는, 더 고고한 것을 열망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물질적 평안이 갖추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희생과 고통을 감내하고, 굶주림과 고문을 감수하면서도 영웅적으로 대의를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어왔다. 하지만 이들은 상대적으로 훌륭한 환경에서 자라나면서 여분의 활력을 모아두었다가 필요할 때 꺼내쓸 수 있는 사람들이다. 최소한 이것이 일반칙이라 하겠다.
지난 수년간 노동자 조직, 혁명 그룹, 교육 조직 등과 함께 활동하면서 만나온 훌륭한 활동가와 동조자들은 일반적으로 전혀 어렵지 않은 환경에서 살아가는 자들이자 자기 필요를 챙기기보다는 이상에 따라 일반선에 기여하는 것을 명예로 여기는 사람들이었다. 사회변혁이 가장 개인적인 문제일 수 있는 가장 고통받는 이들은 오히려 운동에 참여하지 않거나, 참여하더라도 소극적인 역할만을 맡았다. 30-40년 전 이탈리아 일부 지역에서 참으로 열악한 환경에 처해 있던 농장 노동자들과 도시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했던 우리의 선전 활동이 얼마나 힘들고 결실이 없었는지 분명히 기억한다. 지금은 과거의 일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싶지만,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두려움이 근거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기근으로 인한 대중의 소요가 단순히 '급식소' 몇 개를 열고 약간의 현금을 나눠주는 것으로 단숨에 진정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 모든 것을 바탕으로 나는 다음과 같이 추론한다. 자존심은 이상을 통해 의지가 활성화되어야 얻을 수 있지만, 그 이상을 실현하고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특정한 조건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결국 도덕적, 정치적, 경제적 해방은 서로 분리될 수 없으며, 대중이 이상적인 욕구를 실현할 수 있는 물질적 조건을 갖춰야 한다는 기존의 주장이 확인된 셈이다.
총체적인 해방을 위해 투쟁하고, 그것이 실현될 날을 기다리고 준비하면서 우리는 투쟁의 조건을 향상하고 의식화 된 투사의 수를 늘릴 수 있는 모든 정치적, 경제적 개선을 정부와 자본가로부터 쟁취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기존의 제도를 인정하지 않고 미래로 나아가는 길을 여는 방식으로 투쟁해야 한다.
우리는 사명감과 희생정신을 확산하되, 본보기가 되는 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선전의 형태라는 것을, 우리 자신이 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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