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오늘, 러시아에서 노동자 혁명이 승리했고 그 결과는 여러 세대에 걸쳐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혁명은 1917년 11월 7일에 발발했지만, 당시 러시아의 짜르가 부정확한 율리우스력에서 보다 정확한 그레고리력으로의 전환을 반대하는 반동적인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러시아에서는 10월 25일이었다. 그날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러시아어로 '평의회'라는 뜻) 혁명 군사 위원회의 지휘를 받는 노동자와 군인들은 러시아 수도 페트로그라드의 모든 주요 공공 건물을 장악하고 알렉산더 케렌스키 임시 정부를 축출했다. 그날 밤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가 열렸고 소비에트가 권력을 장악했음을 선포했다.
10월로 가는 길
10월 혁명으로 가는 길은 길고 우여곡절로 점철되어 있었다. 러시아는 거대한 국가였지만 매우 후진적이기도 하였고,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면서 전쟁 수행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국가 기구가 엉망이 되었음을 여실히 드러냈다. 한계 상황까지 몰린 러시아는 1917년 3월(율리우스력 기준으로는 2월)에 붕괴했고, 차르를 대신할 임시정부가 구성되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노동자와 병사의 대표로 구성된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도 이 때 탄생했다는 점이다.
임시 정부는 위기를 해결할 수 없었다. 농민들은 半봉건적 환경에서 절망적인 빈곤에 시달렸고, 노동자들은 물가 폭등으로 굶주려야 했으며, 전방의 군인들은 무기와 탄약에 군화까지 부족했고, 원자재 부족으로 산업은 멈춰 서고 있었다. 전쟁을 멈추지 않고서는 러시아의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었지만, 임시정부 요인들 중 누구도 전쟁 철수를 고려하지 않았다. 그 결과 상황은 계속 악화되었다. 정부에 참여했던 정당들은 신뢰와 지지를 잃었다. 해가 갈수록 더 많은 소비에트가 결성되어 더 강해지고 대표성이 커졌다.
2월 혁명 당시 러시아의 아나키스트 운동은 매우 미약했다. 운동의 영향력은 해가 갈수록 커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소비에트 내에서의 영향력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소비에트의 주요 정파는 멘셰비키, 사회혁명당, 볼세비키였다.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이 다수당을 유지하는 동안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임시정부를 전복하려 하기 보다는 임시정부에 대한 압력 단체로 활동했다.
위기가 고조되면서 가장 큰 이득을 본 정파는 볼셰비키였지만, 상황이 달라졌을 수도 있었다. 오랫동안 볼세비키는 "노동자와 농민의 민주적 독재"를 지향한다는 입장을 견지해 왔다. 2월 혁명 이후 이는 임시 정부에 대한 좌익 압력 단체가 되어 자본주의 의회가 러시아를 통치하는 가운데 좌익 야당이 되고자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되었다. 레닌은 임시정부 전복과 소비에트 집권을 요구하는 강령을 채택하고 유지하기 위해 볼셰비키당 내부에서 여러 차례 내부 투쟁을 벌여야 했다. 이러한 강령이 없었다면 볼셰비키는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SR)의 길을 답습하여 임시정부를 따라 세력을 키웠다가 임시정부가 위기에 직면하여 휘청거릴 때마다 세력이 위축되었을 것이다. 전쟁은 러시아를 산산조각 내고 있었다. 유일한 해결책은 러시아가 전쟁에서 철수하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서는 임시정부를 전복해야 했다.
경제 위기가 고조되면서 공장위원회가 성장했고, 평직원들은 이 위원회를 통해 일상적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초기부터 볼셰비키가 위원회의 다수를 점하고 있었지만, 전쟁을 지지하는 보수적인 노동자들도 사장의 무능에 대항하기 위해 위원회를 활용하고자 했다. 공장 위원회는 고용과 해고를 통제하고, 임금을 둘러싼 갈등을 해결하고, 인사 문제를 다루고, 폭력적인 관리자를 고발하고, 점점 더 많은 공급 문제를 해결했다. 사장들이 경영난에 빠져 공장을 포기한 경우에도 노동자들은 공장 위원회를 통해 공장을 계속 가동했다. 초기 공장위원회의 결성과 성장의 원동력은 이념보다는 실리였지만, 공장위원회를 통한 노동자 통제권 확립의 경험은 자본주의를 타도하고 사회주의 하에서 자주 경영을 확립하는 데 대한 노동계급의 지지를 확대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노동자들은 사장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해 나갔고, 이를 통해 강력한 교훈을 얻었다.
율리우스력 7월 초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들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을 외치고 있었다. 임시정부의 전면 공세 명령에 대한 반대가 대규모 시위를 촉발했다. 그러나 소비에트 권력에 대한 지지는 전국적 관점에서 초기 수준이었으며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과반수는 여전히 온건파가 차지하고 있었다. 정부는 평화 시위를 폭력적으로 진압하여 700명을 살해하고 볼셰비키 지도자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레닌은 일시적으로 핀란드로 피신했다.
율리우스력 8월 말, 임시 정부는 질서를 회복하고 급진파를 진압하기 위해 코르닐로프 장군에게 페트로그라드로 진군할 것을 요청했다. 코르닐로프는 이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수도로 진군했다. 임시정부 지도자 케렌스키는 코르닐로프가 자신을 진압해야 할 급진주의자 중 한 명으로 여긴다는 사실을 깨닫고 당황하여 소비에트에 구원을 요청했다. 철도 노동자들은 소비에트와 협력하여 수송을 거부했고, 반체제 인사들은 사보타주를 조장했으며, 군인들은 집단 탈영을 감행했다. 코르닐로프의 군대는 페트로그라드에 도착하지 못했다. 체포되어 압송된 코르닐로프와 그의 보좌관들을 제외하면 말이다. 이 사건으로 임시정부와 짜르 우파의 신뢰도는 모두 타격을 입었다. 볼셰비키는 즉시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와 모스크바 소비에트에서 과반수를 차지했고 다른 도시에서도 계속 과반수를 확보해 나갔다.
10월
코르닐로프 사건의 결과로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수도 안팎의 병력 배치를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소비에트는 이 새로운 힘을 관리하기 위해 레온 트로츠키의 지도 아래 혁명군사위원회를 구성했습니다. 볼셰비키와 주류 멘셰비키 모두로부터 독립된 소규모 파벌에 속해 있던 트로츠키는 율리우스력 8월 초에 자신의 그룹을 이끌고 볼셰비키에 합류했다. 레닌은 마침내 반란을 조직해야 한다고 볼셰비키 중앙위원회를 설득할 수 있었고, 혁명군사위원회는 10월 혁명의 군사적 측면을 계획하는 공론의 장이 되었다.
율리우스력 10월 25일, 그레고리우스력 11월 7일,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 대표단이 페트로그라드에 모였다. 이때 볼셰비키가 처음으로 과반수를 확보했다. 혁명군사위원회는 행동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7월과 다르게 소비에트는 권력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실제 반란은 오히려 절정이랄 것이 없었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가 군사 배치를 통제하고 있었기에 임시정부는 정권 탈취에 저항할 수 있는 능력이 전무했다. 분대가 관공서를 점거하고, 병력 편성권이 혁명군에게 넘어갔으며, 정부 통신은 단절되었고, 충성파 군대는 혁명군에 의하여 압도당하거나 케렌스키의 위치를 파악할 수 없었다. 겨울 궁전을 습격하는 과정에서 총 한 발만 (그것도 천장에) 발사되었을 뿐, 혁명은 유혈 사태 없이 끝났다. 밤 11시에 소비에트 대회가 열렸다. 혁명군사위원회는 임시정부가 축출되고 소비에트가 권력을 장악했다고 선언했다. 역사의 한 장이 끝나고 곧바로 새로운 장이 시작되었다.
여파
케렌스키는 반란 나흘 후 짜르의 장군처럼 백마와 교회 종을 앞세워 페트로그라드에 입성하려다 8명을 살해하고 후퇴하면서 남은 신뢰를 날려버렸다. 모스크바에서 벌어진 사건은 더 끔찍했다. 소비에트군이 케렌스키의 군대를 물리치기까지 일주일의 전투가 이어졌다. 그 후 소비에트의 권력에 대한 저항은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최소한 당분간은.
작게 시작했던 아나키스트의 영향력은 1917년부터 점차 확대되었고 1918년까지 계속 성장했다. 아나키스트들은 임시정부 전복을 지지했고 일부는 겨울 궁전 습격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아나키스트들은 1918년 1월 소비에트가 국가 두마를 해산하는 데에도 참여했습니다. 제헌의회는 자본주의 의회였고 자본주의 국가를 만들었을 뿐이었다.
아나키스트와 볼셰비키는 10월 혁명 이전까지는 협력하지는 않더라도 대체로 같은 방향으로 행동했지만, 그 이후에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돌이켜 보면 소비에트는 두 가지 중요한 오류를 범했고, 이것이 이후의 모든 오류를 예고한 것이었다. 첫째, 전러시아 대회는 마르크스가 파리 코뮌에 관한 팸플릿에서 제시했던 통찰을 무시했다.
"코뮌은 입법기관이 아니라 행정과 입법을 동시에 수행하는 실무 기관이 되고자 했다."
즉, 코뮌은 집행권을 갖고 자체 결정을 이행했다. 하지만 소비에트 대회는 인민위원들을 선출하여 소비에트 내각의 행정을 위임했다. 소비에트 대회는 입법부로 전락하였고, 더 이상 코뮌과 같은 집행 기관이 아니게 되었다.
둘째,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는 지방 소비에트 및 지구 소비에트를 통제하는 중앙 권력기관이 되었다. 러시아는 정치으로 균등하게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직 지역 소비에트가 수립되지 않은 지역을 관리할 권력이 필요했고, 지방 소비에트도 아직 지구 소비에트가 수립되지 않은 지역에 대한 권력이 필요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중앙 소비에트가 다른 소비에트를 통제하는 중앙 권력을 가지게 되면서 전러시아 대회는 위로부터 부과된 외부 권력으로 인식되었고, 자의적이고 종종 잘못된 정보를 바탕으로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전러시아 의회의 결정은 짜르나 임시 정부의 결정보다 훨씬 더 정의롭고 대중적인 결정이기는 했지만, 그 결정을 이행할 사람들이 자유롭게 내린 결정은 아니었다.
이 두 가지 오류의 결과로 러시아는 새로운 국가가 되었다. 볼셰비키는 노동자와 농민의 희생을 바탕으로 권력을 구축해 나갔다.
그 후의 사건들은 초기에 내린 잘못된 구조적 결정이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신정부는 곧 공장 위원회를 통제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1인 경영"을 고집했고, 종종 전 소유주가 고액 연봉을 받는 "전문가"로 고용되기도 했다. 아나키스트에 대한 탄압은 백군으로 조직된 반혁명 세력과의 첫 충돌이 있기 한 달 전인 1918년 4월에 시작되었다. 반혁명 세력과 싸우는 과정에서 진행된 '적색 테러'는 오히려 점점 더 많은 노동자와 농민을 반대 세력으로 내몰았다. 야당들은 하나 둘씩 무너졌다. 구 러시아 제국 영토에서 일어난 독립 혁명은 무너졌다. 조지아의 멘셰비키 공화국이나 우크라이나의 농민 기반 아나키스트인 마흐노우슈치나가 그 예다. 혁명 전쟁 과정에서 혁명에 대한 충실성을 입증했던 마흐노우슈치나에 대한 탄압은 더욱 끔찍한 것이었다. 남부에서 침공해온 백군에 맞서 싸운 전투의 대부분을 이들이 수행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볼셰비키(현 공산당)는 크론슈타트 반란을 진압하고 다른 모든 정당을 탄압했으며 1921년 남북전쟁에서 승리한 후 스스로를 제외한 모든 정파를 금지시켰다.
1921년, 러시아 혁명은 끝났다. 모든 반혁명 세력은 패배했지만 노동자 계급도 패배했다. 소위 "공산당"은 소비에트 권력을 찬탈하여 강력한 독재 체제를 구축했다. 레닌이 병으로 쓰러진 후 사망하자 스탈린이 권력을 장악하고 대대적인 정책 변화를 단행했다. 이는 사상적으로 우스꽝스럽고 정치적으로는 범죄적인 개념인 '일국 사회주의'를 포함한 것이었다. 그는 당을 불량배들로 가득 채우고 반대파를 숙청했으며, 당에 대한 공포 통치를 체계적으로 자행했습니다. 공산주의라는 이름은 오명을 뒤집어썼고, 그 후유증은 현재 우리가 감내하고 있다.
교훈
10월 혁명의 가장 분명한 교훈은 노동자가 권력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1917년 10월에 해냈고 다시 해낼 수 있다. 근본적으로 10월 혁명은 노동자 민주주의의 대중 기관인 소비에트가 권력을 장악했기 때문에 성공한 것이다. 10월 혁명은 단순한 볼셰비키 쿠데타가 아니었다. 앞으로 일어날 혁명에서 노동자 민주주의의 대중 기관이 무엇이 될지는 알 수 없다. 그것은 노동자 평의회일 수도 있고, 작업장 위원회일 수도 있고,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노동조합일 수도 있고, 무엇이든지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러시아에서 소비에트가 그랬던 것처럼 노동계급 대중의 참여를 전제로 하고, 위임과 소환이 가능한 대의원을 통해 직접 민주주의로 운영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다음 교훈은 러시아의 상황이 잘못되기 시작한 것은 1924년이 아니라 10월 혁명 직후라는 점이다. 볼셰비키가 건설한 '노동자 국가'는 위로부터의 권위만을 강요하는 모순적이고 억압적인 장치였다. 그것은 노동자의 자유와 노동자 통제의 정반대 개념이었다.
상황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가 각료회의 성격의 최고인민위원회를 설치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소비에트 간의 관계 설정이 일관된 연방주의에 기초했다면, 소비에트는 강압이나 위계 없이 노동자들이 직접 함께 의사를 결정하고 이를 집행하는 실무기구가 되었을 것이다. 공장 위원회는 노동자 자주 관리의 기본 기구로서 작업장 내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세 번째 교훈은 정당을 신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정당과 온건 노동자 정당은 10월 이전부터 스스로 신뢰를 잃었고, 결국 볼셰비키에 의해 몰락했다. 볼셰비키는 2월 혁명과 10월 혁명 사이의 시기에는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10월 혁명 이후에는 권력을 소비에트로부터 자신에게로 전용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했다. 볼셰비키는 자신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위이며, 노동자 대중보다 더 우수하고 신뢰할 수 있는 혁명 의식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노동자들의 판단을 자신들의 판단으로 대체할 기회가 생기면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적백내전은 큰 압박을 초래했다. 그 과정에서 소비에트를 무력화할 수 있는 많은 결정들이 내려진 것도 맞다. 하지만 권위주의는 내전 전부터 시작하여 내전 이후에도 존속한 것이다.
마지막이자 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놀라운 교훈은 러시아 혁명에서 당의 문제에 대해 레닌이 틀렸고 아나키즘적 공산주의자가 옳다는 것이 증명되었다는 것이다. 2월 혁명은 세계 여성의 날 시위가 전투적으로 변하면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물론 이 시위를 조직하고 전투적인 전술을 구사한 것은 볼셰비키 여성 섬유 노동자들이라는 지적도 간혹 있다. 그러나 이 여성들이 스스로 주도적으로 행동했다는 사실은 거의 기억되지 않는다. 그들은 조직된 혁명가로서 서로 토론하고 논의했지만 볼셰비키 중앙위원회의 지시에 따라 행동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볼셰비키는 불법 조직이었고 중앙위원회 위원들은 지하로 숨어 들어가 있거나 망명 중이었기에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지역 지부와 공장 세포조직에 많은 재량권이 주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은 1917년까지 더 큰 규모로 진행됐다. 10월 혁명 이전 볼셰비키 당은 매우 분권화된 방식으로 활동했고 당 규율도 훨씬 느슨했다. 사회적 혼란과 당의 급격한 성장으로 인해 철저한 중앙집권이 확립되지 못한 것이다. 볼셰비키가 레닌이 1903년부터 추구해온 방식으로 통일된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10월 이후부터였다. 10월 이전에는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 같은 우익 볼셰비키들조차 공개적으로 당 노선에 반대하는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들은 심지어 중앙위원회가 반란을 일으킨 후 소비에트가 권력을 장악하는 것에 공개적으로 반대하기도 했다. 레닌이 망명지에서 돌아온 4월, 핀란드 역에서 행한 유명한 연설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임시정부를 전복하고 소비에트가 정권을 잡아야 한다는 레닌의 주장은 당 방침을 위배하는 것이었다! 레닌은 이 연설 이후 볼셰비키가 자신의 입장을 채택하도록 하기 위해 사력을 다해 싸워야 했다. 만약 그가 당 규율을 지켰다면 그는 당내 논쟁에서 결코 승리하지 못했을 것이고 러시아 혁명은 완전히 다른 길을 걸었을지도 모른다. 중앙집권화는 정당을 포함한 조직을 보수화하며, 대중 의식의 급진적 변화를 차단하는 효과가 있다.
아나키즘적 공산주의자의 입장에서 이야기하자면, 우리에게 1917년보다 더 나은 조직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혁명적 노동계급 활동가들은 노동계급 대중조직의 일원이 될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혁명 조직을 필요로 한다. 우리가 레닌주의자들과 다른 점은 구체적인 혁명 조직의 역할과 구조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혁명 조직의 역할이 노동자를 대신하여 권력을 잡는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이 스스로 권력을 잡도록 추동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 활동가들은 지도자가 아니라 모범적인 투사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노동자들이 혁명적인 지도자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행동하도록 영감을 주어야 한다. IWW의 옛 격언처럼, 당신을 천국으로 인도할 수 있는 사람은 당신을 지옥으로 인도할 수도 있는 것이다. 아나키스트들은 레닌주의자들을 포함한 모든 정당이 반대하는 메시지를 발화하여야 한다. 노동대중의 조직이 혁명의 주체가 되어야 하며, 의회, 제헌의회, 인민위원회 등 어느 누구에게도 권력을 양도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가 그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아나키스트 조직이 특히 혁명적 시기에 해야 할 대체불가능한 역할이 될 것이다.
아나키즘적 공산주의 조직의 구조는 그 기능을 반영해야 한다. 우리는 노동자의 권력이 연방적 일관성에 기초하여 운영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 연방적 구조에서 권력은 하층에 있으며 상위 기관은 강압 없이 조정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두 개 이상의 구성 그룹을 가질 수 있을 만큼 규모가 큰 아나키즘적 공산주의 정치 조직도 이러한 방식으로 조직되어야 한다. 우리는 노동 대중의 조직이 소환 가능하며 임기가 제한된 대의원 제도를 통해 운영되어야 한다고 믿기에 아나키즘적 공산주의 정치 조직도 그렇게 운영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우리는 노동자들이 주어진 주제에 대한 모든 주장을 들을 수 있어야만 진정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믿기에, 아나키스트들의 단일조직이 노동계급에게 단일한 의견을 제시하려고 시도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아나키스트와 국가 사회주의자 사이의 의견 차이뿐 아니라 아나키스트 운동 내부의 불가피한 의견 차이는 비공개로 인위적으로 해결할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에게 제시하여 판단을 받아야 한다. 어느 한 조직, 심지어 아나키스트 조직이라도 대중 노동자 조직에서 지속적인 다수를 차지하게 된다면 권력을 찬탈할 위험이 발생할 것이다. 아나키스트들은 아나키즘적 공산주의 조직이 다원주의를 유지하도록 함으로써 이를 방지해야 한다. 정치적 차이를 덮어씌우는 인위적인 단결을 거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론
러시아의 10월 혁명은 중대한 사건이었으며 MACG 그 100주년을 경축한다. 소비에트와 공장 위원회는 노동자 계급의 위대한 업적이었으며 노동 계급이 권력을 잡은 것은 훨씬 더 큰 업적이었다. 우리는 혁명을 배신한 레닌과 혁명을 완전히 타락시킨 스탈린에 분노하지만 환멸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러시아 혁명에서 교훈을 얻었다. 우리는 러시아 혁명에서 자본주의가 우리를 완전히 파멸시키지 않는다면 또 다른 혁명이 일어날 것이며, 그 혁명은 전 세계적으로 일어날 것이라는 자신감을 얻었다. 그리고 다가올 혁명에서 노동자들은 지난 번과는 달리 노동자 국가에 대한 동화를 들려주는 지도자들의 달콤한 유혹에 현혹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다시는 속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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