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나폴리 공산당의 기관지 『프로메테우스』 1호를 메를리노의 기사를 중심으로 비평하면서, 우리는 이들이 스스로가 모든 것을 알고 있고 결코 틀리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기초적 이해가 부족한 것인지에 대해 서술했다. 그는 “문자 그대로 보면 이상해보일 수는 있겠지만, 개혁주의적 아나키스트라는 것도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프로메테우스』는 이것이 무슨 새로운 발견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아나키즘은 언제나 개혁주의적이었다. 물론 정치인들이 ‘개혁’이라는 아름다운 단어를 오남용하면서 그 신뢰도가 극적으로 떨어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말이다. 우리는 ‘개혁주의자’보다 ‘개혁가’라고 부르는 것을 선호한다. 조그마하고 일반적으로 허황된 발전을 추구하다 결국 체제를 더 공고하게 만들어내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단어나 현존 정치/사회 구조를 유지한 채 순수한 선의로 사회적 병폐를 철폐할 방법을 찾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단어와 혼동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역사적으로 혁명은 기존의 권력과 특권에 만선 폭력적 반란으로 이루어지는 급진적 사회구조개혁을 의미해왔다. 그리고 우리는 혁명가이자 반란꾼이다. 우리는 사회구조를 개선하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권력과 노동착취 구조 모두를 파괴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폭력으로 탄생한 제도는 폭력에 의해 유지되며, 충분한 폭력으로 맞설 때에만 무너트릴 수 있다고 확신하기에 가능한 한 빠르게 이를 실현하고자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혁명은 요구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저 사회를 조용히 지켜보면서, 올바른 순간이 도래하기를 기다려야 하는 것인가?
그리고 반란에 성공했다고 가정했을 때, 우리가 갑자기 모든 욕망을 실현하고 문득 기적이 일어나 정부와 자본주의의 지옥이 자유의지주의적 공산주의의 천국으로, 타인의 이해관계에 연대하는 개인의 완전한 자유로 전환될 수 있을까?
이러한 것들이야말로 권위주의의 토양 위에 자라난 환상이다. 권세가들은 인민 대중을 포고령과 군대, 경찰 등 강제력을 통해 원하는 모양으로 조작할 수 있는 원료 정도로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나키스트들은 이러한 환상에 빠지지 않는다. 우리는 인민들이 우리가 원하는 사회에 동의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선전과 ‘행동을 통한 선전’이 필요한 이유다. 우리는 인민들을 교육하고 그들의 환경을 바꾸어야 한다.
자연의 변화가 그러하듯, 역사적 변화도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 댐이 무너지는 것은 수압이 너무 높아져서 이 버틸 수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사회 내부에서 사회 변화를 원하는 세력의 압력이 어느 수준을 넘어설 때, 현존 정부는 무너질 것이고, 이 압력을 통해 보수주의는 순식간에 약해질 것이다.
우리는 성공적인 인민 봉기를 가져오는 데 필요한 가장 유리한 조건과 책임감 있고 깨어 있는 사람들을 최대한 많이 만들려고 노력한다는 점에서 오늘의 개혁가다. 우리는 반란이 승리하고 자유를 쟁취한 내일에도, 자유를 파괴하려는 자들에 대한 폭력적 저항을 포함해 선전하고, 모범을 보이고, 저항하고, 때로는 자유의 파괴에 폭력적으로 맞서면서 자유가 허용하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더 많은 인민이 우리의 사상을 받아들이도록 노력할 것이라는 점에서 내일의 개혁가가 될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현존 구조를 인정해서는 안된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개혁주의’가 무솔리니의 투표함으로 귀결하는 ‘혁명’과 다른 점이다. 우리는 군대가 적진을 점령하며 나아가듯 개혁을 해나가야 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모든 정부에 적대해야 한다. 오늘의 군주정이건, 공화정이건, 아니면 내일의 혁명이 가져올 볼셰비키 정부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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